인생과 욕망의 음화(陰畫) - 로맨스의 고전:
에밀리 브론테(1818-1848), <폭풍의 언덕>(1847)
에밀리 브론테의 유일한 소설인 <폭풍의 언덕>의 인기가 오늘날도 사그라질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유를 소설 시학의 관점에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총 34장짜리 소설에 두 명의 화자가 등장하는데, 먼저 록우드는 외지에서 온 관찰자이자 기록자이다. ‘유령’이 출몰하는 워더링 하이츠(폭풍의 언덕)의 음산한 분위기에 이끌린 그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자는 또 다른 화자인 넬리(엘렌: 딘 부인)이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쭉 언쇼 집안(워더링 하이츠)과 린튼 집안(트러시크로스 그레인지)의 충직한 하녀로 살아온 만큼 두 집안의 역사를 속속들이 알뿐더러 그들에 대한 애정도 갖고 있다. 두 화자 모두 성격과 개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살아있는 인물이라기보다 이 소설에 사실성과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에 가까워 보인다. 과연 어떤 이야기이기에 ‘증인’이 둘씩이나 필요했을까. 익히 알려졌듯,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비극적인 사랑은 그 연원이 깊다. 워더링 하이츠의 지주가 외지에서 데려온 까무잡잡한 소년은 주인나리의 사랑에 더하여 주인집 딸의 사랑까지 얻어낸다. 하지만 캐서린은 고민 끝에 에드거 린튼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히스클리피는 족적을 감춘다. 3년쯤 뒤에 귀향한 그는 캐서린의 출산과 사망을 계기로 오랜 세월 축적한 원한을 설욕하기 시작하는데, 자신에게 반한 에드거의 여동생 이사벨라와 야반도주하여 결혼하는 것이 그 시발점이다. 인연의 고리는 자연스럽게 히스클리프와 이사벨라의 아들(린튼 히스클리프), 힌들리의 아들(헤어튼 언쇼), 캐서린과 에드거의 딸(캐시 린튼), 즉 다음 세대로 넘겨진다.
대체로 <폭풍의 언덕>은 작품의 길이와 시간대에 비해 등장인물도 단출하고 사건의 규모 역시 소박하다. 인물들은 극도로 폐쇄된 공간에 유폐되어 있고 그들 모두를 엮어놓은 연애와 결혼의 사슬은 근친상간의 흔적기관처럼 보인다. 한배의 쌍둥이 같은 느낌을 주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사랑을 이루지지 못했음에도 세계문학의 어느 연인보다도 더 강렬한 정염의 화신이다. 나아가, 캐서린과 이사벨라는 시누이와 올케 사이임에도 한 남자를 공유하는 형국이다. 소설의 후반부, 캐시와 린튼은 엄연한 사촌(고종사촌-외사촌)임에도 결혼한다. 린튼이 죽은 이후에 결혼하는 캐시와 헤어튼도 마찬가지로 사촌지간이다. 이들의 의사(擬似) 근친상간은 18세기 앤 래드클리프와 그 아류의 고딕소설은 물론이거니와 그 이전, 친인척의 위계질서가 정립되지 않았고 사실상 ‘근친’임에도 ‘상간’하였던 신화시대를 연상시킨다. 가뜩이나 얼마 되지 않는 인물들이 엄밀한 동기화 없이 수시로 요절하는 것도 놀라울 따름이다. 요컨대 <폭풍의 언덕>은 건전한 중산층(신사-지주)의 생활과 모럴의 사실적인 기록을 지향한 19세기 중엽의 규범적인 소설에 거의 부합하지 않는 작품이다. 때문에 “천재” 작가가 쓴 “놀라운 작품”임은 분명하지만 영국문학사의 “위대한 전통”의 맥락에서 보자면 “일종의 변종”이라는 평(리비스, <위대한 전통>)이 지배적인 듯하다. 달리 말하자면 일탈적인 측면이 곧 매력인데, 그 핵심이 워더링 하이츠의 육화인 히스클리프(그리고 캐서린)이다.
그는 이름도, 나이도, 출신도 분명치 않을뿐더러 검은 얼굴과 음산한 분위기 때문에 항상 ‘악마’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고 실제로 모든 재앙의 원흉이 된다. 에드거의 청혼을 받고 천국에 가는 꿈을 꾼 캐서린이 넬리에게 하는 말을 보자.
“천국은 내가 갈 곳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려 했을 뿐이야. 나는 지상으로 돌아오려고 가슴이 터질 만큼 울었어. 그러자 천사들이 몹시 화를 내며 나를 워더링 하이츠의 꼭대기에 있는 벌판 한복판에 내던졌어. 거기서 나는 기뻐서 울다가 잠이 깼지. 이것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내 비밀을 설명해줄 거야. 나는 천국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에드거 린튼과 꼭 결혼할 필요도 없는 거지. (…) 그러나 지금 히스클리프와 결혼한다면 격이 떨어지지. 그래서 내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그에게 알릴 수가 없어. 히스클리프가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넬리, 그가 나보다도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133)
자상한 미남인데다가 많은 재산의 상속자인 에드거 린튼은 ‘천국’인 반면 히스클리프는 (캐서린 자신과 마찬가지로!) ‘지옥’이다. 여기서 갈등구도는 신분과 계급 중심, 즉 무척 단순하다. 그리고 히스클리프의 악마성은 이런 계급적 토양과 무관하지 않다. 캐서린의 말대로 그는 “세련된 데라고는 없고 교양도 없는 야만인”, “메마른 들판과 같은 인간”, 간단히, ‘문화-문명’에 대비되는 ‘자연-야만’의 상징이다. 그런 그가 자본의 생리와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아이러니인가. 우선 그는 아내가 죽은 다음 서서히 술과 노름에 빠져든 힌들리의 재산을 교묘하게 빼돌리고(그리고 죽도록 방치하거나 심지어 직접 죽이고) 이사벨라와의 결혼을 통해 그녀의 재산을 가로채고, 끝으로, 자신의 병약한 아들을 캐시와 결혼시켜 두 집안의 영지를 모두 손에 넣는다. 이런 세속적인 승승장구, 즉 완료된 복수극은 캐서린을 향한 그의 열정이 거의 광기에 가까웠음을 상기한다면(그녀의 무덤을 맴돌며 관 뚜껑까지 여는 것은 고딕소설의 시간(屍姦)의 변용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자신의 말마따나 “초라한 종말”처럼 여겨진다. “두 집을 부숴버리려고 지렛대며 곡괭이를 장만해 놓고 헤라클레스와 같이 괴력을 낼 수 있도록 나 자신을 훈련했건만, 막상 만반의 준비가 되고 내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자 어느 쪽 집에서도 기와 한 장 들어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으니!”(538)
록우드의 평가대로 이토록 “지루하고 음산한 얘기”의 작가가 이십대의 처녀였다는 점이 새삼스럽다. 에밀리 브론테는 다른 자매들, 남동생과 함께 요크셔 지방을 거의 떠나지 않고 살았는데, 그녀의 소설은 그 못지않게 유명한 언니의 소설과는 사뭇 다르다.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는 외삼촌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던 불쌍한 고아 소녀가 간난신고 끝에 손필드 저택의 어엿한 안주인이 된다는 내용의 ‘행복한’ 소설이다. 왜소한 체구와 비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당차고 야무진 제인 에어는 샬럿의 분신이며 이십대 처녀의 사랑과 흠모를 받는 사십대 홀아비 로체스터는 샬럿의 이상형이었을 법하다. 반면,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들은 에드거와 넬리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 상식과는 거리가 먼, 폭풍우 치는 언덕과 히스 꽃 같은 존재이다. 그것의 육화인 히스클리프(캐서린)는 작가이기보다는 여자로 살아야 했던 19세기 여성 작가의 정신세계를 반영한 페르소나일 것이다.
사춘기 시절이나 중년의 문턱에 들어선 지금이나 <폭풍의 언덕>은 환상적인 소설이다. 즉,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음에도 여전히 아리송한 우리의 욕망과 인생의 깊은 속살, 그것을 결코 길들여질 수 없는 이십대 여성 특유의 거칠고 날선 야성의 문체로 포착한 음화(陰畫)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폭풍우와 히스 꽃, 연인들의 포옹과 키스, 심지어 브론테 집안을 점령한 요절의 유전자(어머니도 단명했다)와 성화(聖畫) 같은 분위기의 초상화까지 합세하여 이 소설은 우리 청춘의 영원한 노스탤지어로 남을 것이다.
2015년 ??월 <책앤>
--
오래 전에 본 줄리에트 비노쉬와 랄프 파인즈가 나온 영화. 그 무렵 비노쉬를 정말 좋아했지만, 이 영화에서의 그녀는 그녀를 좋아했던 만큼이나 정말 별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랄프 파인즈 역시, 인상은 강렬했지만, 뭔가 잘 맞지 않는. 그런데 이 배우는 영국배우임에도 영국인 아닌 역할이 더 잘 어울리는 건 또 뭔지. 왠지 열정, 악, 광기, 파멸 등은 (정말 편견이지만!!!) 영국과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녕 이럴 때 우리는 셰익스피어가 영국인임을 망각한다^^;;
브론테 자매는 평범한 외모의 소유자였던 듯한데, 영화에서는 오히려 평범한 배우를 찾기 힘드니(^^;;) 제각기 미모가 돋는다. 이자벨 아자니가 에밀리, 그녀와 동갑인 이자벨 위페르가 앤(막내)의 역할을 맡았다. (샬럿을 맡은 배우를 잘 모르겠다.) 미모로는 누구도 따를 자 없었던 이자벨 아자니, 있는 듯 없는 듯('레이스 뜨는 여자 뽐므'!) 매력적인 이자벨 위페르를 보는 재미로 본 것 같다. (자막이 없었다오..ㅠ.ㅠ)
- 나에게 요크셔는 '요크셔테리어'의 고향이 아니라 이 소설의 고향이다. 이제는 사라지고 없지만(다시 볼 수 있을까?) 그가 성장기를 보낸 곳이기도 해서, 한 번 뒤져봤다. 지금 읽으면 조금 더 감상에 젖을 수도 있을 법하지만, 대략 정신이 차려지는 것을 보니 워더링하이츠의 산들바람이었나 보다.^^;; 이와 맞물려 거의 모든 리비도가 아이에게로, 즉 아이의 띨빵함에 집중되어, 차라리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바람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것도 곧 정신 차려지겠지. 아이가 유치원에서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해 나도 겸사겸사 시작했는데, 마흔 셋에 처음 배우는 남의 말, 정말 정신을 번쩍 차리게 만든다. 최고로 어렵다 -_-;;
- "아빠, 왜 똥강아지는 있는데 쉬강아지는 없어?"
얼마 전 아이가 엄청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아빠에게 던진 질문이다. 아이의 발달 지연이 얼마나 심각한지 여전히 오락가락하지만(만 6세가, 즉 검사의 그 날이 멀지 않고나 ㅠ.ㅠ) 저럴 때는 정말 멀쩡해 보인다. "혹시 엄마가 아이에게 너무 많은 성취를 바라는 건 아니에요?"라는, 애 둘을 다 키워놓은 후배의 말이 계속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