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을 맞이하여 






12월을 맞이하여 아이는 

매일매일 아픔의 기록을 갱신하고, 

그리하여 걷는 법을 잃고 말하는 법을 잊고, 

아이가 숨 쉬는 법마저 놓을까 봐 두려운 나는 

무한히 지적이고 한심하게도, 시간의 수사법을 연구합니다.


청년은 유년의 아이러니

심지어 낭만적 아이러니 romantische Ironie

중년은 청년의 패러디

심지어 성스러운 패러디 parodia sacra 

노년은 중년의 알레고리, 

아니, 유아기의 캐리커처, 그럼 

그로테스크와 상징과 풍자와 은유는 어디에 있나요? 


나날이 더 조용해지는 아이를 보며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은 바로,

인지적 겸손함이다. 진리여, 운명이여, 내 너를 어찌 알까, 마는 

확실히 하나는 알겠노라고 나직이 읊조리는 것 역시

허울 좋은 자기 기만이던가.


오늘의 바깥은 이토록 어둡기에 

내일은 더 컴컴한 악몽이 나의 꿈을 방문하리라, 그러므로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혹하지 말 것이며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질곡을 감내할 것이며

그저 하루하루를 온전히 체험할 것, 그리하여


하얀 눈이 시어처럼 내리는 오늘 밤,

허무의 짝꿍은 자살이 아니라 성실이기에 

내 사랑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고

나의 기다림과 그리움에 신이 난 당나귀는 

응앙응앙 노래하며 덩실덩실 춤을 출 것이다. 





허준이 서울대 졸업식 연설: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김영민 칼럼: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공감하라→분석·종합하라→경우의 수를 상상하라 | 중앙일보 (joongang.co.kr) 인지적 겸손함... 

김영민 칼럼: ‘현대판 신선’ 감별법[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donga.com)

백석 /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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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지월동






아침 바람 찬 바람이 훅!

거침없는 外侵처럼 교과서에서 집안으로 쳐들어오고 

잿빛 하늘에 흙빛 토기의 빗살무늬처럼 삐치는 것은 

비도 눈도 아닌 진눈깨비, 지하인의 역사였군요.

 

아, 이렇게 추워질 줄이야, 엊그제만 해도 멀쩡하던 

우리 학교 개망초의 운명이야 뻔하죠, 뭐.

개망초야, 네가 필멸의 존재임을 명심하고, 그리고

아빠도 그러셔야 할 거예요. 아빠를 사랑하지만,

아빠랑 얘기하면 두족류의 촉수처럼 화가 뻗쳐요.

아빠는 노동불능과 대화불능의 탈을 쓴 얼어 죽을 개망초예요.


실은 이럴 줄 알고서 간밤에 주문해둔 생굴을 끓는 물에 풍덩!

굴 국과 갓 쪄낸 조갯살을 듬뿍 먹은 아이는 또 하루살이 준비를 합니다.  

오늘의 음식이 내일의 나

매일매일 배불리 먹기에 우리는 오늘의 영하가 두렵지 않습니다.


드라세나 산데리아나 빅토리아는 모두 거실로 들어가고

홀로 이슬 맞고 겨울 나는 남천 나무의 인즉,

눈발이 날린다 살아야겠다, 햇빛과 물은 조금만 주셔도 

됩니다, 저는 겨울눈도 없거든요. 

(2022. 12. 03.)



  

Dracaena Sanderiana Victoria 


초5-2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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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알라, 너는 말이야  





행여 다음 생이 있다면 말이야,

너처럼 엉덩이가 통통한 잿빛 코알라로 태어났으면 좋겠어


유칼립투스 나뭇가지 사이에 턱 걸터앉아 단잠을 자고

눈을 뜨면 잎사귀를 오물오물 뜯어먹고 교미도 금방하고 

똥을 먹여 키운 새끼는 주머니나 등에 붙이고 산책도 다니지 

서너 시간만 깨어 있으면 되니 얼마나 좋아, 코알라, 너는 말이야 


캥거루가 뛰어노는 푸른 목장에서 들장미 소녀 제니도 만나고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내 사랑 캔디도 달래 주고
모두 함께 장미 주위를 돌며 조곤조곤 신나게 놀지 
웜뱃도, 에뮤도, 키위도, 쿼카도 모두모두 모여라 

어느덧 새끼도 자라 나뭇가지 틈새로 서커스광대 보다 오묘한 곡예를 선보이네
먹이도 한 종류 밖에 없으니 결정 장애도 없어, 스무 시간이 넘도록 새근새근,

7, 8월 겨울이 와도 아무 데도 가지 않아도 돼, 그냥 여기가 이승이자 저승이니

세상 너무 좋겠다, 남반구 대륙의 터줏대감 코알라, 너는 말이야  




- 진은영, 심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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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상티망의 푸른 참나무 







매일 아침 9시 전후, 매일 저녁 9시 전후 

중년 여자가 뒷산의 애먼 참나무 도토리나무를 툭툭 치는데,

그 몸놀림에는 가사와 음률과 율동이, 로고스와 파토스와 에토스가 있다


"Everyone has a plan until they get punched in the mouth!" 

"누구나 계획 하나쯤은 있지, 아가리를 한 대 처 맞기 전까지는!"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도 아닌, 적절한 아침과 적절한 저녁 

등산길에서 참나무를 상대로 마이크 타이슨 코스프레스를 하는 와중에도  

네 이웃을 사랑하는 여유까지 있다. 


"701호도 애먼 애 잡지 말고 여기서 나무나 때려요, 화 다 풀려. 인생 별 거 있어?"  


to hope against hope

가망 없이 희망하고, 희망에 반해 희망하고, 없는 희망에도 희망하고

그렇게 복수에게 복수하고 원한의 원한을 갚는다, 거짓말 못해요 참나무,

너하고 나하고 살구나무, 바람 솔솔 소나무, 사랑한다, 인생! 



____     



// 김영하(유시민?)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요약. 니체, 르상티망 / . 셔윈 눌랜드, <우리는 어떻게 죽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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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체의 운동 








1. 아흔 살 할머니의 속도 


꼬부랑 할머니가 지팡이 짚고 영차영차 유리문을 밀고 들어온다


저어기 장미가 뭐가 예쁠까? 큼직하면 좋겠는데, 얼굴이 다들 작네 

그나마, 이거 빨간 장미 한송이만 줘, 경찰 줄 건데, 

아가씨 경찰이니까 흰 장미는 거시기 하고, 빨간 장미로 

내 자동차 문제도 척척 해결해주고 얼마나 착하고 예쁜지 몰라, 

이거 빨간 장미 얼마나 피지? 활짝 피면 좋겠는데, 아, 

우리 강아지? 아이구, 그 녀석 지금은 송아지 됐어! 

얼마나 크고 힘이 센지, 맞아, 맞아, 그때도 힘이 장사였는데

지금은 아주 송아지니까 데리고 다닐 수가 있어야지, 원. 

에구, 그냥 빨간 장미만 싸 줘, 그 이상한 초록 풀 섞지 말고, 

그래, 옳지, 참 예쁘다! 젊고 예쁜 경찰 아가씨한테 줄 거야, 

꽃은 사랑이니까, 5천이면 되지? 걸어가야지, 그럼! 

경찰서 그거 얼마나 멀다고, 걷다가 힘들면 경찰 부르면 돼

차에 태워서 집까지도 데려다 준다니까, 저어기 아가씨, 

그런데, 나 여기 문 좀 열어 줘 - 그려, 또 올 게.


 

2. 못된 사과의 기여 


"자전거는 1초 동안 2미터를 이동했습니다."


여기서 자전거는 물체, 1초는 걸린 시간, 1미터는 이동한 거리 

물체는 빠르게 이동하기도 하고 느리게 이동하기도 하고,

빠르기가 달라지기도 하고 빠르기가 일정하기도 합니다. 

일정한 시간 동안 물체의 위치가 변하는 것을 물체의 운동이라고 합니다. 

앗, 잠깐만요, 선생님, 그럼 동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저 나무의 없는 이동처럼 정지입니까? 

저 신호등의 없는 생명처럼 무생물, 무생명, 설마 죽음입니까?


자, 정답! 하고서 불량 학생의 정수리 위로 톡 떨어진 것은

아, 사과랍니다! 가을에는 모름지기 사과를 먹어야지, 아삭아삭 

씹으며 아담과 이브를, 아이작 뉴턴을, 빌헬름 텔을 쪽쪽 음미한다

인류의 역사는 요 못된 사과, 썩은 사과, 예쁜 사과 덕분에  

운동을 거듭해온 것이로구나, 아이러니 듬뿍 담아 Oh, bad apple!


사과는 다 좋아, 초록 사과도, 노란 사과도, 꼬마 사과도, 상처 난 사과도 좋아

상처야말로 운동의 대가인 것을, 살아 있음을 증거인 것을! 

절로 운동하는 사과의 위대함이여, 중력과 만유인력과 

관성과 작용 반작용과 가속도의 법칙이여!

아참, 중력가속도는 4.8m/s였죠?     



3. 물상과 사과 


자연과학의 수학적 원리를 알 길 없지만 

사과의 맛은 알 수 있다, 라고 중학교 때 물상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라는 건 지금 나의 헛소리고, 자그맣고 예쁘장한 아줌마의 고언은 대략 이랬다.  


"저는 여러분에게 과학을, 특히 물상을 가르치는 선생이지만, 나의 사랑하는 가족이, 또 내가 이대로 그냥 죽어 없어진다면 너무 허전해서 꼭 저 세상이 있으면, 그래서 죽은 뒤에도 다른 생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사물의 형상 물상, 사물의 이치 물리는 언제나 너무나 오묘한 것 


한 손에는 빨간 장미를, 또 한 손에는 은색 지팡이를 든 할머니는 1초 동안 0.5미터를 걸었고, 

그 시각 집에서는 어느덧 송아지로 변신한 진돗개가 늙은 인간 암컷을 정지 상태로 기다렸고, 

열과 성을 당해 위치를 이동하는 인간 물체의 속도는 0.5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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