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곳이 영화의 한 장면 속에 찍혀 있으니  일곱살 아이처럼 신기해서(^^;;) 가져와 본다.

 

*

 

나도 저기 가 봤는데.

 

 

나도 저기 앉아 봤는데.

 

 

나도 저 책 탑 봤는데.

나도 저 책 더미 사이에 앉아 보고 싶었는데.

 

물론 저 공간의 실제 주인은 저런 재킷을 걸치고 계시지는 않을 듯^^;; 

 

 

 

 

 

 

 

 

 

 

 

 

 

 

 

 

*

 

일부러 아이의 화법을 써봤다. "나도 저거 있는데." "나도 한 번 해보고 싶다!" "나도 먹고 싶다!" 모방과 학습. 이 단계 없이 소위 새로운 것의 창조가 있을 수 없다. 조만간 초등학교에 입학할 아이를 둔 엄마로서 교육, 특히 시스템으로서의 교육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크다. 자꾸 창의적 인재 어쩌고 하는데, 학습 없이 그건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어느 분야든 이른바 천재란 어차피 시스템 밖의(후대에는 '- 위의') 존재, 스스로가 시스템을 만들고 스스로가 곧 시스템인 존재다. 시스템으로서의 교육은 이런 천재가 아니라 범인(수재도 어디까지나 범인이다!)을 우선적인 대상으로 한다.

 

*  

 

저 곳에는 두 번 갔다. 작년초 겨울. 너무 추워서 죄다 너무 불쌍했다. 두번째는 작년 가을. 날씨가 맑고 따뜻해서 죄다 너무 행복했다. 

 

*

 

홍상수의 <그후>는 이 소설과 많은 연관이 있으려나. それから.(맞나?)

 

 

 

 

 

 

 

 

 

 

 

 

 

 

 

 

*

 

낮과 저녁 사이, 마광수 별세 소식이 뜬다. 그의 책은 읽지 않았으나 그의 필화는 익히 알았던 세대로서, 시간의 한 토막이 툭 떨어져 나갔음을 느낀다. '센치'해지기 딱 좋은 스산한 날씨다. 몸 편하자고 배우기 시작한 운전 때문에 몸이 나가 사흘을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 겨울이 벌써부터 무섭다! 그래도 야밤에 보채는 아이를 등에 업고 동네 한 바퀴, 두 바퀴 돌던 시절에 비하랴.  

 

 

등에 업힌 아이가 두 살인지, 세 살인지도 모르겠지만, 저 시절이 묘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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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미디어셀러'라는 말을 처음 알았다. 우연찮게 한 후배가 아이유 얘기를 하기에 웃고 넘겼다. 아이유, 라니 '키작녀'들이 사랑하는, 특히 피터팬 칼라의 에이라인 미니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패피, 셀럽. 얼마 전 장기하와 사귀다가 헤어졌다, 정도가 그녀에 대한 나의 지식이다.  그녀가 요즘 이 책을 읽는 모양이다.(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TV를 보지 않았고, 대학 이후 방/집에 TV를 두어 본 적이 없다.)

 

 

 

 

 

 

 

 

 

 

 

 

 

 

 

*

 

"아, 먹고살 길이 막막하다."

"걱정 마, 아이유가 열심히 읽고 있어."

"어? 아! 걔는 아직도 다 못 읽었냐?"

"야, 보통 사람들은 책 그렇게 빨리 다 못 읽어."

"그럼 언제까지 (다) 읽는데?"

"효리네 민박 끝날 때까지."

 

*

 

이건 어제 서방님과 나눈 대화이다. 그러고 찾아보니 정말로 아이유가 책에 밑줄을 좍좍 그어가며 정독하고 있더라. 도무지 책이란, 독서란 무엇이냐. 저 미디어셀러, 라는 말이 또한 보여주는 듯하다. 아이유의 패션만큼이나 자극적인 것이 바로 책이다. 지적 허영심이라 불러도 좋다. 속물성, 스노비즘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본질, 심지어 본능이다, 굳이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의 허영과 속물스러움은 여러 다양한 것을 겨냥할 수 있는데, 그 중 책이 차지하는 위치는 여전히 독보적인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문화 자본' 중 책은 여전히, 향유하기에 제일 싼 것이다. 가령, 콘서트 티켓 값을 생각해보라. 많이들 읽자.

 

*

 

작가이기 이전에 독자로서, 그냥 책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적잖은 책을 읽어왔다. 그게 '업'이 된 지 오래,  책 많이 읽는다는 게 전혀 자랑도 뭣도 아니다.(곁들어, 직업에 귀천없다, 라는 말을 요즘 다른 식으로 긍정한다. 내 직업만 대단하다는 식, 혹은 힘들다는 식, 별로다.) 오히려 어떤 책을, 어떻게 읽는지가 중요하고, 그 성과는 오로지 내 글을, 내 책을 씀으로써만 증명될 수 있다. 거의 20년쯤 전인 1999년, "종말에 대한 생각"이라는 제목으로  글 한 편을 휘갈겨 놓았다. 65.8매. 그것을 발라내 20.1매로 만들었다.(나는 보기 좋은데 여러분은 별로? -_-;;)  속을 들여다 보니 이런 책이 보였다.

 

 

 

 

 

 

 

 

 

 

 

 

 

 

 

 

*

 

공부하다, 소설쓰다, 울쩍하여 몇 자 적었다. 이 울쩍함을 부채질하는 것이, 익히 예상했으나, 놀라울 정도로 형편없는 나의 운전(?) 실력. 어지간하면 5시간 교육에 시험을 보는 기능교육부터 절절 매고 있다. 어제까지 총 8시간, 도무지 안 되겠어서 2시간 더 등록. 하지만 10시간을  채워도 시험 볼 용기는 안 생길 것 같다, 에효.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순 없다! 아이유가 천천히 <카라마조프>를 읽는(그리하여 나의 초과 수업료를 해결해주는^^;;) 동안, 천천히 운전을 배워야겠다. 새로운 소설을 구상하면서. 설마 아이 입학할 때까지는 따겠지.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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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3) - 푸르디 푸른

 

 

    

 

1. 낙조(落照)

 

물 위의 도시, 백야의 절정이 저문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땅거미가 진다. 대양과 맞닿은 푸른 만, 쌀쌀한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 입을 맞추는 귀여운 연인들, 예쁜 계집애를 목마 태운 젊은 아빠, 한 곁에 차를 세워두고 담배를 피우는 후줄근한 중년 남자, 왁자지껄 즐거운 금발 미녀들, 장바구니를 들고 터벅터벅 해변을 걷는 뚱보 아줌마, 해안가 풀숲에 몸을 포개고 있는 늙은 연인. 그리고 피()가 이 풍경 속에 묻혀 있다.

갑자기 그의 시선이 딱 멎는다. 푸르디푸른 물과 푸르디푸른 하늘, 이 두 공간 축이 시간 축과 만난다. 삼위일체의 접점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빨강과 노랑을 부조리한 배율로 섞어놓은 듯 오묘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백야의 끝자락에 우연히 낙조의 절정을 목도한 그는 깨닫는다. 종말이 멀지 않다.

 

이후 그는 오직 낙조를 보기 위해 바닷가 산책에 나선다. 북국의 맞바람이 너무 거세서 라이터도 켤 수 없다. 점퍼와 목도리로 중무장하고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고 연이어 담배를 피워대며 자갈밭 한가운데 반석 위에 앉는다. 푸르디푸른 허공과 바다가 점차 어둠에 잠식된다. 구름에 가려진 태양이 느린 듯, 빠른 듯 변덕스럽게 수평선으로 내려온다. 전락의 움직임보다 더 전율스러운 것은 그 찬연한 큰 원이 물의 선과 맞닿는 지독히도 찰나적인 순간이다. 태양-원은 수면-선에 닿아 한 점이 되기가 무섭게 급속도로 침몰하다가 함몰한다. 둔탁한 울림도 없고, 아슬아슬한 출렁임도 없다. 그러게, 태양 구멍이다.

낙조의 절정이 끝나면 그의 눈앞으로 광활한 무정형의 공간이 펼쳐진다. 푸르디푸른 공간과 검디검은 선의 사차원적인 만남은 로바체프스키의 두 평행선처럼 영원하리라.

 

어느덧 8월말, 가을을 예고하는 찬비가 내린다. 바닷가의 축축한 반석 위에 앉아 담배 연기를 마시며 맥주 한 병을 딴다. 두어 모금 마실 무렵 후줄근한 장바구니를 든 노파 하나가 다가온다. 어린아이처럼 작은 몸집인데, 그나마도 쭈글쭈글, 바싹 오그라들었다. 지하실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축축한 웃음을 흘리면 오싹 소름이 돋을 것 같은 형상이다. 입을 벌리자 헐렁한 잇새로 엉성한 말이 새나온다.

비도 오는데 뭐해? 등신 같은 놈, 젊은 놈이 그렇게 담배 피우면 못 써!”

이어 신세한탄이 이어진다. 노파의 조그맣고 헐거운 몸이 저 바다의 잔물결처럼 일렁인다.

요새는 애들이 많아져서 이 짓도 못 해먹겠어. 애들은 발도 빠르지, 힘도 좋지. 늙은이가 해봤자 얼마나 하겠어? 병 하나 팔아봤자 꼴랑 1루블이야. 빵 값은 또 얼마나 올랐는지. 치즈랑 버터는 엄두도 못 내. 자식새끼 키워봤자 말짱 도루묵이고아이고, 맥주 갖고 제사 지내냐! 빨리 좀 마셔, 이 등신아!”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의 입가로 겸연쩍은 듯, 무안한 듯 어색한 미소가 일다가 그대로 새겨진다.

갑자기 노파 하나가 또 나타난다. 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그의 곁을 슬그머니 맴도는 모양새가 익숙하다. 새 노파는 이미 터를 잡고 있던 헌 노파와 대놓고 싸움을 벌인다. 생의 한가운데서 생의 가두리로 밀려난 두 노파의 황혼녘의 전투는 시나브로 속살대는 밀담으로 바뀐다. 잇새로 뿜어져 나오는 늙은 숨결소리가 묘한 이중주를 이룬다. 거북살스러운 관객의 역할을 빨리 끝낼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다.

그는 남은 맥주를 얼른 처리한 다음 새 맥주병을 따서 식은 숭늉 들이키듯 벌컥벌컥 마신다. 병 두 개를 사이좋게 하나씩 나눠주자 두 노파는 고맙다는 말은커녕 자비로운 마음에서 쓰레기를 거둬주는 양 거들먹거리며 땅거미 지는 침침한 무대 너머로 사라진다.

 

두 노파가 사라진 자리, 비가 그친 하늘에는 짙은 먹구름이 무리지어 뻗어 있다. 수평선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둥근 태양이 점점 아래로 내려온다. 드디어 구멍처럼 뚫린 커다란 새빨갛고도 샛노란 원이 푸르디푸른 선과 맞닿는다. 종말이 코앞이다.

 

 

2. 변태(變態)

 

갑자기, 너무 비좁다.

방안, 컴퓨터 책상 앞에서 일어서는데 허벅지가 낀다. 걸음을 떼다가 의자 모서리에 무르팍을 부딪친다. 절름절름 침대 쪽으로 가는 길에 탁자용 작은 나무 상자에 복숭아뼈를 찧는다. 절로 구부러졌던 몸을 펴자 천장이 정수리까지 내려와 있다.

화장실, 원래 세면대도 없이 변기 하나만 달랑 있다. 오늘따라 더 비좁다. 안으로 들어가긴 했으나 문이 안 닫힌다. 두 손을 얌전히 모아 허벅지에 올리는데 팔꿈치가 양쪽 벽에 닿는다. 변기 뚜껑 위에 올려놓은 휴지를 향해 손을 뻗지만 닿지 않는다. 뒤치다꺼리는 더 힘들다. 고문 틀처럼 비좁아진 화장실을 간신히 빠져나온다.

야옹.”

의 눈앞에서 거의 이차원처럼 여겨지는 가늘고 납작한 검푸른 형상이, 하지만 고양이, 그것도 러시안 블루임이 분명한 어떤 형상이 어른거린다. ‘넌 대체 누구냐?’하고 묻고 싶지만 녀석이 먼저 입을 연다.

나는 영원히 악을 행하고 싶지만 영원히 선을 행하게 되는 힘의 일부야. 아니야. 나는 영원히 선만을 원하는 유일한 존재야. , 천만의 말씀.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해골 깨고 노는 것도 지루해, 지루해 죽겠어. 하지만 죽을 수가 있어야지! 고양이가 아홉 개의 목숨을 가졌다고 하잖아? 아홉 개가 뭐야? 9가 무한대로 이어지는 거야. 이런 불멸, 너무 싫어!”

녀석의 말은 다시 야옹으로 바뀌고 녀석의 형상도 사라진다. 공간의 협소화가 몸 곳곳에서 느껴진다. 집이 이차원으로 바뀌고 있다. 가만히 있다가는 종이인간처럼 짜부라질 것이다. 그는 황급히 집을 빠져나온다.

 

바닷가, 자갈밭 위의 나지막하고 야트막한 반석. 담배를 뿜어내고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들이켜고 트림을 뱉어내는 작업을 번갈아 해본다. 이 느린 박자에 맞추어 한 노파가 빈 맥주병을 받아 가고, 한참 뒤 또 한 노파가 두 번째의 빈 맥주병을 받아 간다. 글쎄, 어쩌면 같은 노파인가.

육지 쪽, 시커멓고 거대한 개 한 마리가 긴 꼬리를 허공에 날리며, 긴 다리를 쭉쭉 뻗으며 걸어온다. 그는 맥주병을 노리는 노파들처럼 천천히, 그러나 집요한 투지를 보이며 개에게 다가간다. 우유팩과 유리조각이 즐비한 자갈밭을 지나고 해변의 풀밭을 가로질러 날렵하게 개의 등 위에 올라탄다. ! 지금껏 그 흔한 말 타기 놀이조차 해본 적 없는데 이렇게 잘 하다니! 하지만 역시나 이건 환각이다. ‘하는 순간, 온 몸에 육중한 무게가 느껴진다. 어느덧 그는 두 손발(네 발)로 땅을 짚고 있으며, 개는 뒷발(다리)을 그의 등 좌우로 늘어뜨리고 앞발()을 그의 목덜미 근처에 가뿐하게 올려놓고 있다. 속수무책이다. 개는 손으로 그를 몰아대고 그는 네 발로 달린다.

정말 개 같군.’

그리하여 그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직립보행 하는 인간의 위엄을 뽐낸다. 일순간 개는 땅바닥으로 나뒹굴지만, 금방 자세를 바로잡고서 뾰족하고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그를 향해 돌진한다. 잇새로 끈적끈적한 침을 질질 흘리는 개의 험악한 면상을 본 찰나, 송곳 같은 이빨이 그의 머리뼈를 우걱우걱 씹고 골수가 꿀꺽꿀꺽 삼켜진다. 한쪽 눈알이 시커먼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 그는 아직은 먹히지 않은 한쪽 눈알로 섬광처럼 지나가는 낙조의 붉고도 노란 빛을 본다.

정말 아름답구나, 여기서 멈추어라!’

그 눈알마저 이내, 태양이 검푸른 바다 속으로 침몰하듯, 개의 컴컴한 목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엉덩이쯤에 이른 개는 기왕지사 먹은 것도 다 게워내고 싶다는 듯 꾸역꾸역 무성의하다. 그러면서도 집요하게 끝까지 씹어 먹는다. 마침내 개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의 몸 어딘가에 붙어있던, 점처럼 새까만 사마귀 하나만 남았다.

한참 뒤 술 취한 유쾌한 청춘들이 나타난다. 누군가가 사마귀를 밟고 움찔하더니 그것을 집어 올려 휙 던진다. 허공을 날아 바닷물 속에 풍덩 빠지는 사이, ()는 있지도 않은 머리를 굴려보며 존재할 수도 없는 미소를 흘린다.

나쁘지 않은 종말이군.’

 

*

<문학나무> 2017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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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나는 인정받는 소설가도 아니고 나 스스로도 아마 내가 하는 활동 중 제일 못하는 것이 소설쓰기라고 생각하는, 문제가 심각한 소설가이다. 그럼에도 소설 창작 강의를 기꺼이 맡은 이유는, (돈이 제일 크다마는 -_-;;) 좋은 소설이 어떤 것이냐, 어떻게 해야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나, 하는 고민을 그 누구보다도 많기 하기 때문이다. 통상 수업의 전반부에는 고전(단편)을 읽고 후반부에는 요즘 소설을 읽는다. 바빴지만 그래도 지난 7월, 수업 하는 김에 꼭 읽고 싶은 소설 몇 권을 챙겼다. 같이 읽으면 좋겠다 싶은 텍스트, 단연코 으뜸은 이것.

 

 

 

 

 

 

 

 

 

 

 

 

 

 

<사랑하는...>을 쭉 읽고 그 중 마음에 드는 소설 몇 편을 학생들과 공유했다. 우선은 짧아서 좋고, 그리고 너무 재미있는 것이다. 많은 작품들이 소설-산문임에도 거의 시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운율이 느껴졌다. 성석제를 오랜만에 읽는데, 그 특유의 사람과 사물에 대한 정겨운 사랑, 건강한 유머, 각종 부정적인 일에 대해 궁상 떨지 않음 등이 너무 좋았다. 이런 식의 소설을 쓰는 학생이 있었는데, 답안에 성석제 얘기를 많이 썼더라. 역시나 유유상종. 한동안 이만큼 좋은 콩트(엽편소설)는 나오기 힘들지 않나, 싶다. 왜냐면, 거듭 강조하거니와, 사람과 사물에 대해 성석제만큼 정겨운 말-이야기를 해주는 작가가 드물기 때문이다. 

 

 

 

 

 

 

 

 

 

 

 

 

 

 

 

여전히 체호프를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그리고 러시아문학이니 만큼 그 특유의 우수와 우울은 어찌할 수 없다.

 

 

 

 

 

 

 

 

 

 

 

 

 

 

 

지난 봄 학기 미뤄뒀다가 읽은 김영하는, 그가 여전히 우리 시대에 최고 작가임을 보여준다. (<알쓸신잡>에 나오는 김영하가 내 눈에는 여전히 젊어 보이는데, 이것 자체가 내가 이미 늙었음을 보여주는 슬픈 증거.) 개인적으론 그의 경장편 <살인자의 기억법>이 더 좋았지만, 이미 두 학기를 했고 또 신작이 나와서 단편 두 편을 읽었다. 표제작인 <오직 두 사람>, 이상문학상 받은 <옥수수와 나>. 전자는 좀 지루했고(혹은 작위적으로 여겨졌고), 후자는 아, 난감했다. 이 작품은 예전에도 읽었는데 무척 재미있다는 기억을 갖고 있었던 건 완독을 안 해서였던 것이다 -_-;; 이번에 다 읽어보니, 후반부(소설가 주인공이 출판사대표-사정의 마누라와 어쩌고 하는)가 거의 파탄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최근 소설 중 제일 재미있는 축에 속하고,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고 또 공감을 보여 김영하의 힘을 절감했다. 한편, <살인자의 기억법>은 다들 아시겠지만, 영화로도 나왔다. 소설 속 김병수(?)는 어딘가 위트 있는 모습이었는데, 영화 속 설경구에겐 (적어도 스틸컷 상으론) 그게 안 보여서 약간 아쉽다.  아무튼 이 장편은 최근 10여년간 가장 잘 쓴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김영하의 제자(?)이기도 한 김애란의 신작도 읽었다. <침묵의 미래>, <어디로...>에 집중했는데, <달려라 아비>를 쓴 어린(!) 작가가 이토록 성장했음에 짧은 시간이지만 만감이 교차했다. 개인적으론, 지금의 김애란은 너무 감상적이지 않나, 싶지만, 우리 독자들은 이런 따사로운 감상을 원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어딘가 무라카미 하루키 냄새가 짙은데, 요즘 한국 소설 전반의 경향인가 싶기도 해서, 안타깝다.) 무엇보다도, 이미 삼십대도 중반으로 들어선(넘긴?) 그녀의 소설에 이십대 독자들이 호응한다는 점. 이 역시 좋은 일이다. 소설이란 혼자 읽으려고 쓰는 게 아니므로!

 

 

 

 

 

 

 

 

 

 

 

 

 

 

 

 반면, 이 분은 여전히 '나만의 소설'을 고집하는 듯하다. 여기에 어떤 적극적인 의지가 있어서는 아닐 테고, 아마도 이렇게밖에 쓸 수 없어서, 일 거라고, 나 혼자 생각해본다. 아무튼 드디어 그의 신작을 읽었다. 시간에 너무 쫓겨 다는 못 읽고 표제작을 비롯하여 한 두 편, 때론 스킵. 정영문 소설의 장점-미덕 중 하나는 바로 이 '스킵'이 기법적으로(?) 허용된다는 것이다, 움하하핫. 가령 <오리무중에 이르다>의 경우, '나'와 웬 여자(애인인지 아닌지 애매한)가 나와, 날도 추운데 어디 호숫가인가로 떠난다, 떠났다가 너무 추워 숙소로 기어들었다, 대략 이런 식의 스토리인데, 보다시피 스토리랄 것이 딱히 없어 아무 데나 펴서 아무렇게나 읽어도, 너무 좋은 것이다! 이 역시 정영문 식 유머의 일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론, 스토리가 제법 만져졌던 <어떤 작위의 세계>보다 더 재미있었다. '개의 귀', 이런 것도. 그리고 어떤 심심한-지루한 도시 얘기도. 경상도의 촌구석에서 자란 그에게, 어떻게 이토록 도시적인(?!) 공간 감각이 가능한지. 부럽다.

 

 

 

 

 

 

 

 

 

 

 

 

 

 

 

고전을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다. 재미는 없을 지언정 그것을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반타작은 한다. 하지만 현대 소설을 읽을 때는 얘기는 전혀 다르다. 나름의 실패(돈 아까워 -_-;;)라고 생각하는 책도 있다. 기대를 갖고 읽는 정지돈의 소설. 이게 문지에서 나왔기 때문에 더 분했던(^^;;) 기억이 있다. 그 다음, 장르문학과 관련, 읽을 만한 단편이 마땅치 않아 도진기의 소설을 한 번 봤다. 아, 실망했다! ㅠ.ㅠ 작가가 법조인이라, 또 법조인이 쓰는 추리소설이라 너무 기대했던 것 같다. 두 부분 모두, 우리 머릿속의 전범에 비하면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법학도의 소설이라기엔 주제의식이 너무 약했고, 추리소설로 읽기엔, 님아, 스릴이 없었다오 ㅠ.ㅠ 후자와 관련하여 학생들이 추천한 작가는 히가시노 게이고. 나는 읽은 게 없어 이참에 읽어보려고 주문해보았다. 요즘은 인기가 좀 시들한가,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그리고 아쉽게도, 나는 많은 작품을 읽지 못했으나 매학기 열성팬이 있는 듯하다. 이 작가. 이번에 읽은 <식물애호>가 영어로 번역, 어느 잡지에 소개되었다는 기사를 본 듯하다.(영어를 모국어처럼 쓰는 한 학생도 들뜨서 얘기하더라.) 번역으로도 그 진가가 발휘될 작품인 듯하다.

 

 

 

 

 

 

 

 

 

 

 

 

 

 

 

 

잠시 쉬어가는 페이지, 시 몇 편을 읽었다. 심보선 시인의 신작 시집 출간 소식을 뒤늦게 들어 유감이었다. 언제 또 기회가 되겠지.

 

 

 

 

 

 

 

 

 

 

 

 

 

 

 

시뿐만 아니라 산문도 공유해볼 만한데, 마침 이런 책이 (헌책방에서 -_-;;) 걸려 들었다. 재미있더라, 왜 많이 읽히는지 알만했다.(이렇게 얇은 줄은 미처 몰랐다.) 중간에, 수업 시간에 읽은 카프카, <프로메테우스...>, 멜빌, <바틀비> 얘기도 들어 있어 더 유익했다.

 

 

 

 

 

 

 

 

 

 

 

 

 

 

 

*

 

소설 잘 쓰기 참 힘들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때론 넘친다. 대상에 대한 묘사를 주문했으나 '이야기를 구성해도 됨'이라고 단서를 달아놓았더니 열 줄 안팎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그게 인간이다. 그리고 그 몇 줄에도 문체가 있다. 역시나 그게 인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설이 되는 건 아니다. 솔직히, 책을 많이 읽는다고, 또 공부를 많이 한다고 소설을 잘 쓰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럴수록 더더욱 '오리무중'에 빠질 밖에. '오리무중'에 오리가 없다니, 유감.

 

*

 

종강을 한 지 오래됐음에도(게다가 요즘 계속 제대로 된 러시아문학 강의를 못 받고/얻고 있는데 -_-;;)  웃긴 꿈을 꾸었다. 수업 시간에 맞추어 강의실에 도착, 헐, 뭔가 이상하다. 의자와 책상의 배치가 바뀌어 있고 심지어 없어지고 매트 따위가 깔려 있다. 이건 뭐지. 그러고 보니 학생들이 죄다 유치원생들로 바뀌어 있다. 고**, 송**, 조**, 안** 등등 우리 아이의 친구들, 후배들이 즐비해 있는 것이다. "여러분, 고골은요~" 이렇게 운을 떼지만,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시끌시끌, 에공...-_-;; 잠에서 깨고 나서도 한참을 난감해했다.   

 

*

 

- "오늘 알림장 내용은 뭐야?"

한참 삐대다가 말한다.

- "가을이 왔어요~ 입추~"

발음이 좀 엉성하지만, 엄마는 알아듣는다, 알아듣고자 하는 의지 때문에.

이게 지난 주 월요일인가 그런데, '가을이 성큼', 이런 어구가 떠오르는 날씨다. 지구가 아무리 미쳐가도 음력은 역시, 칼, 같구나. 여름 원피스를 더 입어야 하는데 -_-;;

 

- "~ 너무너무 더워요 여름 하 / 곡식을 거두워요 가을 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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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다시금!) 도스토예스키(특히 <카라마조프>, 역시나 다시금!) 공부를 하다가, 논문 쓰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그래서 옛날 같으면 지나쳤겠지만 눈에 확 들어오는 문장이 나와, 여기다 옮겨본다.  

 

"The Dostoevskys were now relatively well off, compared with their economic situation in the past, but they had been unable to amass any capital and were much concerned about the future of their children.”

도스토예프스키 부부는 과거의 경제 상황에 비하면 이제는 상대적으로 형편이 좋았지만, 어떤 거금(자본!)도 모을 수 없었던 데다가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컸다.

 

 

 

 

 

 

 

 

 

 

 

 

 

 

(지금 보고 있는 건 저 시리즈 중 맨 마지막 권. 대학 시절부터 군데군데 읽어온 책. 너무 길어서 때려주고 싶다!)

 

지금 내 인생에 딱 들어맞는 문장이다. (정말 제일 중요한 건 책이 가르쳐주지 않는 모양이다!) 서른,  오랫동안 꿰차고 있던 학생증을 버리고 강사증(?)을 들었던 2004년 3월, 나의 월수입은 80만원 남짓, 방세는 세금 포함 28만원이었다. 사실상 50만원 갖고 한 달을 살았다. 그나마 방학 때는 수입이 없었다. 그때 나의 꿈은 월수입 2백. 그로부터 세월이 많이 흘러, 강사료도 제법 뛰었고(아, 그런데 왜 취직이 안 된 거냐,  흑흑 -_-;;) 애써 번역한 책들이 은혜 갚은 까치 노릇을 하고 있고,  간혹 연구비나 어디 기금을 받게 되는 해도 있다. 수입이 널뛰긴 하지만, 월 80만원에 비할 바 아니다. 그런데 왜 나는 가난한가. 왜 네 평짜리 원룸-월세방에 살 때보다 더 돈에 허덕이는가. 

 

우선 '모아둔 돈'이 없다, 가 문제. Capital, 이라는 저 무시무시한 단어. 항상 읽고, 이해하고 싶지만, 좀처럼 읽히지 , 이해되지 않는 단어, 캐피털. 아마 영원토록 완독 못 할 저 책. 부자는 노력이나 뭐 등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태어나는 것'임을 마흔 넘어서는 완벽히 깨닫는다. 애시당초 벌어지는 돈도 거금이 아니거니와 살아가면서 소비되는 돈이 또한 많기 때문에 영원토록 거금은 확보되지 않는다. 티끌 모아 소박한 티끌 더미, 태산이 아니라. 물론 그나마라도 긁어모아야지.

 

 

 

 

 

 

 

 

 

 

 

 

 

캐피털에 대한 집착은, 앞의 인용문의 마지막  어구에서 비롯된다.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 도-키는 사십대에 결혼했고, 당시로선 정말 늦은 나이에 아빠가 되었다. 그는 조만간(<카라마조프> 출판 하고 일년도 안 지나서) 죽게 되는데, 그때 그의 두 아이는 열 살, 열 두 살(?) 등 그야말로 아이였다. 어린 자식을 둔, 나이 많은 부모의 고민은 다 비슷할 것 같다. 서른 여섯 늦은 겨울에 임신, 서른 일곱 한여름에 출산, 그리고 정신없이 아이를 키울 때는 몰랐으나, 아이가 대여섯이 되면서부터 아이에게 내가 너무 늙은 엄마라는 것을 의식한다. 앞으로 아이와의 세대 차이도 커질 것이다.  모든 걸 그나마 조금이라도 보상해줄 수 있는 건 결국 돈, 이더라니. 관리만 잘 하면 돈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 그리고 돈 관리가 피부나 몸매 관리보다 쉽다. 아니, 나이 들수록, 후자도 돈이다.

 

꼬박 2년, 아니, 8월이니 그 이상 치료실을 다닌다. 치료비가 아주 약간의 에누리를 붙여서 딱 백, 이다. 어느 항목에 매달 지출비가 이렇게 될 수 있다니 참 놀라운데, 이게 1년 넘었다. 대문자 C, 저 캐피털에 대한 유혹이 어느 때보다 크다.  한 번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 다음은 점점 더 깊이 빠지는 일만 남았다. 그런 것 같다. 이게 또 캐피털의 마력. 캐피털은 결국 욕망의 동의어이다. 그러게 다시 한 번 이 지점에서 발자크의 위대성을 상기하게 된다. 내 안의 속-스러움이여!

 

 

 

 

 

 

 

 

 

 

 

 

 

 

 

 

 

시즌별로 업데이트 되는 FW, SS 신상품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나를 보면, 또 테레사 메이나 브리짓 마크롱(그밖의 알렉사 청, 엠마누엘 알트 같은 각종 셀럽들)의 패션을 '탐구'하는 나를 보면, 발자크 소설 속 남자주인공들과, 19세기 프랑스판 된장녀-촌년 엠마 보바리가 떠오른다.  "나 같으면 집구석에서 너처럼 그렇게 차려 입고 있으면 쪽팔려 죽겠다."(??) 대략 이런 식의 말을, 보바리의 시어머니가 던지는 장면도. 

 러시아에서 남이 버리고 간 옷을 주워 입고 살던 촌뜨기 대학원생-유학생의 남자 친구였다가 10여년 전 남편이 된 그가 한 날은 사심없이, 혹은 정말 한심하다는 듯 웃으며 말한다. "사람이 (저렇게 힘들게 번) 돈을 저렇게 한심하게 (옷 사는 데나) 쓰다니! ㅋㅋㅋ"  그러는 남편은 정녕 소비-욕망을 잘 모르는, 좀 과장하면, 독일식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 같다. 거의 5년째 똑같은 휴양지에서 똑같은 옷을 입고 휴가를 보내는 앙겔라 메르켈의 느낌. 물론 그게 학창 시절 나의 모습이긴 했는데...-_-;;   

 

자본, 소비, 욕망, (순수한) 꿈 등을 생각하자면, 언젠가 이 소설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읽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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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08-12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우아한 관찰주의자>에서 여러 페이지를 할애해 설명한 작품이 <위대한 개츠비> 표지 그림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