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에 다시 읽기 시작한 책. 재미있는 해적 이야기에서, 원래 알지만 푸는 사람에 따라 이렇게도 읽히는구나 싶은 표트르 대제, 그 다음 마리 앙투와네트를 거쳐 현재 로베스피에르까지 왔다.

 

 

 

 

 

 

 

 

 

 

 

 

 

 

주경철이 써온 많은 역사서 중 이번 시리즈가 유달리 더 마음에 든, 더 재미있게 읽히는 이유는 바로 (유럽)인'에 초점이 맞추어져서 그런 것 같다. 겸사겸사 '유럽인'이라고 되어 있지만 아주 넓게 러시아, 라틴 아메리카까지 다 망라되어 있어 실은 '세계인'이라고 해도 되겠다.

 

역사에 워낙 과문하여(넘 슬프다 ㅠ.ㅠ) 해적의 원조가 영국이었음을 새로 알게(혹은 상기하게) 되었다. 저 유명한 해적 마크(해골 밑에 있는 것이 단순한 엑스표시가 아니라 대퇴골이었다니, 헐) '졸리 로저' 역시 영국의 원조 해적에서 온 것. 나아가 여성 해적 둘까지. 무척 재미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세계사, 더 세부적으로 서양사를 배울 때 가장 집중하는 대목인 프랑스 혁명. 1학년때 1학기 서평 숙제로 무슨 책을 읽으라고 했는데 제목 조차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학업을 등한시했다. 그때 <서양문화사> C나왔는데, 학업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침체기였다. 나중에 학점은 소위 세탁했으나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왜 그리 음울하게 보냈는지 거참.

 

 

 

 

 

 

 

 

 

 

 

 

 

잘 정리된 글로 봐도, 모든 혁명이 다 그렇지만, 너무 복잡하다. 그 와중에 그때도 그랬겠지만, 왕자로 태어나서 더 불쌍한 루이 16세와 역시나 하필 그때 왕비 자리에 앉아 있어서 피를 본 마리 앙투와네트를 보면서 참, 팔자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특히 훗날 역사가 여자에게 갖다 붙일 수 있는 온갖 추악한 죄목을 다 붙인 그녀. 낭비와 사치, 저 책에서도 쓰고 있지만, 그녀가 그게 유달리 심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가령 지금도 영국 왕실의 왕세손비는 1년에 1억인가 하는 돈을 품위유지비, 즉 패션에 쓴다고 한다.) 경박과 음탕(특히 동성연애, 아들까지 등등), 이거야말로 날조이기 쉬울 거다. 경박했고 멍청했다는 것은, 그저 평범한 여자-사람의 머리와 감성(변덕)을 가졌다는 것이지, 역사-운명이 그녀에게 안긴 저런 대접을 받을 만큼 숭악한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이런 생각은 츠바이크의 전기를 보며서 했던(알게  된) 것이다.

 

 

 

 

 

 

 

 

 

 

 

 

 

 

그녀는 그저 철없고 공부하기 싫어하고 하지만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오스트리아 여제의 막내딸로 자라, 역시 그런 왕비로 살다가 조용히 묻혀/묻어 갈 수 있는 여자였다. 아, 그럼, 그녀는 정녕 죄가 없는가? 이 부분이 참 슬프다. "몰라서". 몰라서 그런 것도 죄라는 것을 프랑스 혁명은 가르쳐준다. 밖에서 민중들이 저렇게 고통받는데 궁전 안에서 그렇게 호위호식하는 것, 그러고서 바깥의 사정을 몰랐다는 것, 이게 바로 죄라는 거다. 살펴보면 이쪽 저쪽 모두 공감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한편, 주경철은 '외국(적국)에 시집온 공주는 인질이나 다름 없다'라고 하던데, 흑, 정말 그랬을 법하다. 이 문장이 한 두 번 나온 것 같은데, 아마 딸을 키우는 아버지의 시선이 살짝 들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아, 물론 그가 아들'도'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겸사겸사, 표트르 대제 이후 러시아제국을 쥐고 흔든 예카테리나 여제(2세) 역시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이다. 러시아어를 하나도 모른 채 몸종 하나만 데리고(더 왔을지도 모르겠다) 저 무서운 야만의 대륙에 온 것이다. 이런 인물, 이런 운명도 있는 것이다.

 

로베스피에르. 이 인물 역시 항상 (생쥐스트와 함께, 하지만 그보다 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해왔다. 참 사람 좋고 세상 유해보이는, 뭐랄까, 고등 한량이랄까 그런 느낌의 법률가. 누가 그를 공포정치의 화신으로 만들었는지. 그 많은 사람을 단두대에 올리고 그 자신 역시 그렇게 사라진 것은 역사의 보편성을 너무 잘 보여주는 것 같다.

 

 

 

 

 

 

 

 

 

 

 

 

 

 

(마지막 이미지는 삼십대 초중반에 열심히 본 애니메이션 <le chevalier d'eon>. 심지어 생제르맹 백작도 나왔던 것 같다. 여기에도 로베스피에르가 참 멋있게 나왔던 것 같다.)

 

<... 유럽인 이야기> 읽으면서 앗, 하는 대목. 마이크가 없던 그 시절, 그 많은 사람들 틈에서 어떻게 연설을 했을까, 하는^^;; 정녕 목소리 큰 사람(가령 당통)이 이겼겠구나 싶은 시절이었다. 비슷하게, 레닌의 연설 동영상을 봐도 마이크가 없던데, 아마 혁명을 하려면 예나(18세기말) 지금이나(20세기초) 목소리가 필수조건이었던 듯하다. 문제는 로베스-프는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는 것. 그렇기에 더더욱 혁명가로서의 그의 존재가 의미심장하다.

 

 

 

 

 

 

 

 

 

 

 

 

 

 

끝으로, 읽지는 않았는데, 이런 만화가 있다고 한다. 그 모델이 바로 샤를 앙리 상송, 즉 4대째 형리(망나니)로 일해온 인물이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는 것이다. 태어나보니 사형집행인의 아들. 아무리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고 결국 가업을 이었다고. 그리고 시절이 이렇다 보니 그는 루이 16세부터 쟁쟁한 인물을 모두 자기 손으로 처리했다. 놀라운 건 그는 왕당파에 사형제 폐지론자였다고, 에효. 게다 상당히 지적인 인물이었다고. 일이 없을 때는 외과의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 목을 치는 데는 엄청난 기술(외과적 술기!)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동양사 전반)에도 이런 예들, 일화가 많지 않은가. 사형수 찾아가서 뇌물도 많이 먹였다고 한다, 빨리 제대로 잘 쳐달라고.

 

charles henri sanson 치면 검색되는 이미지.

 

이것이 그의 실제 얼굴에 가까울 테고, 참, 대단한 일본 만화, 이런 캐릭터를 만들었다. 일본 만화가들이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새삼 실감하는 대목이다! 만화 읽을 시간이 없어서 유감이다..ㅠ.ㅠ

 

*

 

어릴 때 소설 읽는 것을 좋아하고 또 쓰고 싶어 한 것은 다름 아니라 '사람' 이야기여서였다. 역사 역시 그렇다. 사건이나 사물에 집중해도 되지만 사람에 집중하니 무척 재미있다. 유감스럽게도 학교에서는 시간(시대)에 집중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역시 피해갈 수 없는 대목. 학문(공부)에 왕도가 있나. '재미'를 보는 건 잠시, 결국은 꾸준히 학습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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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6 21: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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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7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톨스토이 같은 '핵금수저'에게는 굳이 관념이 필요 없었으리라. 현실은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다. 현실의 추한 측면은 역시나 현실의 코드로 수정, 개선하면 된다. 그래서 사회소설. 그게 안 되면 종교의 세계로 가는데, 톨-이의 러시아정교는 극히 행동규범 지향적(?), 윤리적, 뭐랄까, 현실적인 것이다. 미국식 청교도와 많이 비슷하다.(고들 하는데 아주 동의되는 바이다.)

 

반면, 도-키 같은 애매한 흙수저는 애초부터 현실과 대결, 불화한다. 아주 흙수저라면 먹고사느라 정신 없었겠지만, 불행히도 '애매한' 흙수저라 그렇다. 그 불화의 한 양상이 키릴로프인데, 옛 친구가 무척 좋아했던 인물로서, 오랫동안 그를(어쩌면 그 친구를?) 이해하고 싶었다. 이제라고 마땅히 이해가 되는 건 아니고, 마냥 웃긴다, 좋은 뜻이다.

 

야밤, 스타브로긴의 야행, 첫 방문의 상대가 키릴로프이다. 가가노프와의 결투에 입회인이 되어달라고 말한 다음, 대화는 자연스레 저 '관념'('바로 그 생각' - 자살, 인신 등)으로 간다.

 

그럼 스무 걸음으로 합시다, , 더 이상은 안 돼요. 아시다시피, 그는 진지하게 싸우고 싶어 하니까요. 권총을 장전할 줄은 아시죠?”

압니다. 나도 권총이 있으니까요. 당신이 그런 것으로 쏘지 않으리라고 약속하겠습니다. 그의 결투입회인도 약속할 겁니다. 두 벌의 권총에 동전 던지기로 그의 것과 우리 것을 결정하는 거죠, ?”

멋지군요.”

권총을 좀 보시겠습니까?”

그러죠.”

키릴로프는 구석에 놓인 트렁크 앞에 쪼그리고 앉았는데, 아직 다 풀지는 않았지만 필요할 때마다 물건을 꺼내곤 했다. 그는 밑바닥에서 내부가 붉은 벨벳으로 된 종려나무 상자를 끌어내더니 그 안에서 굉장히 멋스러운 값비싼 권총들을 꺼냈다.

전부 다 있습니다. 화약, 총알, 탄창. 연발 권총도 있어요. 잠깐만요.”

그는 다시 트렁크를 헤적여 미국식 6연발 권총이 든 다른 상자를 끌어냈다.

무기가 상당하군요, 그것도 몹시 값비싼 걸로.”

몹시. 굉장하죠.”

가난하다 못해 거의 빈곤한, 그럼에도 결코 자신의 빈곤을 인지한 적이 없는(замечавший) 키릴로프가 지금은 자부심까지 역력히 드러내며 틀림없이 굉장한 희생을 치르고야 획득했을 귀중한 무기고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직도 여전히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잠시 침묵한 뒤 스타브로긴이 다소 조심스럽게 물었다.

바로 그 생각이죠.” 키릴로프는 목소리만으로도 무엇을 묻는지 즉각 알아채고 짧게 대답한 다음 탁자에서 무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럼 언제?” 니콜라이 프세볼로도비치는 이번에도 잠깐 침묵하다가 훨씬 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사이 키릴로프는 상자 두 개를 트렁크 안에 넣고 아까 그 자리에 앉았다.

그건 나한테 달린 게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사람들이 말해 줄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는데, 이 질문이 좀 부담스러운 것 같았지만 동시에 다른 모든 질문에는 대답할 의향이 있음을 내비쳤다. 그는 예의 그 광채 없는 검은 눈을 떼지 않고 스타브로긴을 바라보았고 왠지 평온하지만 선량하고 반가운 감정이 느껴졌다.

나는 물론 자살을(застрелиться) 이해합니다.” 3분쯤 의미심장한 기나긴 침묵이 흐른 다음 니콜라이 프세볼로도비치가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나도 가끔 어떤 상상을 했고 그때마다 항상 어떤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어요. 만약 악행을 저지르거나 무엇보다도 부끄러운 짓, 즉 치욕스러운 짓을, , 몹시 비열할 뿐더러웃긴 짓을 저지른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천 년 동안 기억하고 천 년 동안 침을 뱉어 줄까, 싶은데, 갑자기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더라고요. <관자놀이에 한방만 쏘면 아무것도 없을 거야.> 그때는 사람들이 무슨 상관입니까, 그들이 천 년 동안 침을 뱉는다고 한들 무슨 상관입니까?”

그걸 새로운 생각이라고 부르는 겁니까?” 키릴로프는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나는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어느 날 잠깐 생각하다가 완전히 새로운 생각을 느꼈습니다.”

“<생각을 느꼈다>고요?” 키릴로프가 말을 똑같이 반복했다. “그거 좋군요. 항상, 또 갑자기 새로운 것이 되는 생각들이 많이 있죠. 그럴듯해요. 난 많은 것들이 지금은 꼭 처음 보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저 대사가 아주 잘 꾸며진 저택의 거실에서 행해지는 것이라면 지금과는 무척 다른 느낌일 것이다. 아무튼 '권총자살'에 대한 키릴로프의 집착은 거의 페티시즘 수준이다. 이어지는 부분도 무척 좋은데, 논다고 못 고쳤다. -

 

러시아인들이 생각하는 키릴로프는 이런 이미지인가 보다. 음, 글쎄, 어떻게 해도 소설 속 인물에는 2프로 못 미치는 것 같다. 어쨌거나 글자(책)는 '관념'(이론)이고, 이미지(실제)는 그것에 부합하지 않으니까. 겸사겸사, 사진으로  봐도 그렇지만 러시아 남자들은 러시아 여자들에 비해 인물이 어쩜 이렇게 빠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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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키의 <죄와 벌>이 던지는 치명적인 물음 중 하나가 이것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라스-프가 직접 소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누가 죽고 누가 살아야 하겠는가, 저 노파처럼 '못된' 자가 살아야 하겠는가, 마르-프 가족처럼 아무 죄없는 자가 살아야 하겠는가 등. 어릴 때 이 소설을 읽을 때는 이 물음, 이 전제 자체에 오류가 있음을 간과한다. 즉, 노파는 과연 '못됐나'. 적어도, 도끼에 맞아죽어야 할 정도로 악인인가. 그 다음 소냐 가족들은 무조건 '선인'인가. 그들에게는 그 어떤 결함이나 악덕도 없는가.

 

노파 알료냐의 이기주의와 탐욕은 결코 죄가 될 수 없다. 그녀는 직업 자체가 고리대금업이고(고로 '고리'를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저 자신의 원칙에 따라 열심히 살고자 했던 그냥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리자베타를 학대한 것 역시 어디까지나 소문이고 그녀의 장애 상태, 둘의 관계, 업무 분담, 노동 착취 등에 관해선 사실 별로 확인된 바가 없다.(참고로, 장애인 학대는 가족 사이에서 제일 많이 일어나지만, 이건 가깝기 때문, 많은 시간을 함께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라스-프가 소위 '구원'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부류는 무조건 선인인가. 차라리 그들이야말로, 온갖 악덕의 집합체이다. 나태, 음주, 열패감, 히스테리, 광증, 허영심, 과거 집착 등.

 

여기서 우리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제목을 떠올리게 된다. '불쌍한 것들'. 레 미제라블. 좀 더 세련되게, 영어 버전으론 '푸어 크리쳐'. 어느 대목에서인가 유발 하라리가 쓴 대로, 그들은 악마도 천사도 아니었다, 그냥 인간이었다.

 

 

 

 

 

 

 

 

 

 

 

 

 

 

 

 

라스-프의 범행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위의 전제가 충족되어야 한다. 즉, 그가 죽인 노파가 (리자베타는 뜻밖의 오류였다고 해도) 절대악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녀야말로, 혹은 그녀 역시도 그저 불쌍한 존재, 그저 인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과연 누가 죽어야 하고 누가 살아야 하는가. 겸사겸사, 그 다음에 충족되어야 하는 전제는, 노파 하나 죽인다고 과연 세계가 구원받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그렇다면 라스-프 이전에 그런 일이 행해졌을 터이다. 너만 똑똑하고('천재') 다른 놈들은 다 병신('이')인 줄 아니?^^;  

 

 

 

 

 

 

 

 

 

 

 

 

 

 

 

 

 

어릴 때 명화극장(?) 이런 데서 봤던 영화. <소피의 선택>. 여배우(메릴 스트립)가 좀 안 예쁘다고 생각하고 봤던 영화. 독일 나치, 무슨 소용소, 아들이냐, 딸이냐, 그런 선택이었던 것 같다. 언제 소설로 한 번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여태껏 못 읽었다. 아무튼 우리에게 이런 치명적인 선택의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랄 밖에.

 

 

 

 

 

 

 

 

 

 

 

 

 

 

그리하여, 노회한(!) 중년 작가 도-키는 그 대답을 신에게로 떠넘긴다. 이 점은 <안나 카레니나>의 제사에 드러난 톨-이의 은근한 비겁함(?)과 유사하다. 굳이 '비겁'하다고 한 이유는 그 누구보다도 '사회소설'(+가족소설)의 대가였기 때문이다. 현실의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하려고 누구보다도 노력했던 그마저도 결국 궁극의 해답은 현실에서 찾지 못하는 것이다. <전.평.>에서는 그게 그리 불가능하지 않았을 텐데(작가도 아직 삼십대) <안나...>, <부활>에 이르면 속수무책. "복수는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도-키에게 이 말을 해주는 신의 사도, 천사는 소냐이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그것을 결정하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니다, 하는 식. 사람이 나이 들 수록 종교로 가는 것이 요즘 정말 이해된다. 감성에서 지성에서(감성-지성에서) 영성으로. 

 

 

 

 

 

 

 

 

 

 

 

 

 

 

 

 

<내가 만난 하나님>. 이걸 지난 여름에 읽고 수업 시간에도 잠깐 소개했는데, 다들 웃었다, 문자 그대로 웃었다. <무진기행>의 작가의 개종이라, 거참. 이어령과 박완서의 저 책은 읽지 않았으나, 두 저자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 '참척의 고통'이라던가. 박완서가 쓴 글을 통해 알게 된 표현인데, 자식 잃은 고통을 그렇게 표현한다고 한다. 늙은이와 젊은이, 부모와 자식. 이들 중 누가 살고 누가 죽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그래도, 그나마, 여러 견지에서 봐도, 고민할 사람 별로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다시금 이 '비의'는 무엇인지. 정확한 문장은 생각이 안 나지만, 박완서 수필 어딘가에서 본 구절. "자식 먼저 보내고 밥을 처 먹는 어미의 모습이 너무 징그러워서..."  

 

*

 

의식을 찾고 퇴원하는 아이의 사진. 실루엣에서 이미 젊음이 느껴진다.(한데, 이런 사진, 이런 보도는 이제 좀 하지 않으면 좋겠다! 저널리즘의 저속에 대해서 또 한 번 분노하게 되는 순간이다.) 아이가 가진 그 젊음이 한편으론 왜 그리 슬퍼 보이냐. 또 다른 한편, 똑같은 시공간을 살았으되  이토록 엇갈리는 삶의 명암은 무엇이냐. '죄'는 있으나 '죄인'은 없는 상황. 사실 우리가 인생에서 수시로 마주치는 상황이다. 아들(남자친구) 면회를 마치고 돌아가가 교통사고를 당한 일가족도 그렇고.

 

'감성'과 '지성'(이성)의 대립항 외에 도-키가 굳이 '영성'을 설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오래 전에 한 학생의 질문에 대한 가장 확실한 답은, 군이 지금의 그 인생 계속 살아보라, 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

 

다시금 실루엣. 실루엣만 봐도, 윤곽만 봐도 나이가 보인다. 유년, 청소년, 청년, 장년, 중년, 노년. 아이의 성장 발달에서 만 6-7세가 되면 소위 '베이비몸매'를 졸업한다고 한다. 머리통이 몸통에서 보다 더 독립하고 가슴과 배의 윤곽이 형성되어 상체-몸매가 된다. 몸놀림이 날렵해지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아, 그래서 이 연령대가 학령기의 시작인 것이다. 두 번째 시기는 대략 만 10세쯤으로 잡는 듯하다. 적어도 피아제 이론은 그런 모양이다. 여기가 말하자면 인지 발달의 데드라인. 물론 전체 그림은 그 전에 완성되지만, 일종의 패자부활전, 연장전이랄까. 너무 암담해서 생각하기도 싫은 아이의 까마득한 미래와, 역시나 어딘가 꽉 막혀 도무지 뚫리지 않을 것 같은(연통?!) 나의 현재가 맞물려, 올 연말도 참 우울하다. 과연, 자리는 하나 밖에 없고, 누가 죽고, 누가 살아야할지. 아니면, 이렇게 다 죽어야할지. 모두가 다 죽는 저 비극이 오히려 희극일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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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책이 새로 나온 김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관한 논문을 쓰려 했다. 책도 다 구입했다. 이 참에 연구비 받던 '벨 에포크'에 주문해둔 톨-이 연구서도 처리할 겸.  그런데 <닥터 지바고> 일정에 맞추다 보니 그 논문을 먼저 쓰고 <전.평.>은 내년으로 미룬다. 여사여사 자료를 뒤지던 중 이광수가 이른바 '조선의 톨-이'를 자처했음을, 그 정도로까지 그를 좋아했음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이 부분을 좀 더 다루어 봐도 좋겠다. 비단 이광수뿐만 아니라 이 무렵 우리 지식인들이 사랑한 톨-이는 무엇보다도 <부활>의 작가였다. 정확히 <부활>도 아닌, <해당화: 가주사 애화>(중국어에서 번역했다고 한다)의 작가. 당시 각종 '애화'(대략 창부화된 여자들의 슬픈 이야기, 신파)가 무척 유행했는데 그 원조라고.  그리고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부활>의 한국어 완역(일본어에서) 역시 이광수(혹은 허영숙)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추정도 있을 정도라고.  아, 이광수는 러시아어도 구사했다고 한다.

 

 

 

 

 

 

 

 

 

 

 

 

 

 

 

겸사겸사 사족.  박형규 선생님 덕분에 <부활>을, 또 그밖의 많은 러시아 작품들을 훌륭한 우리말 버전으로 읽어왔지만(특히, 볼쇼이판 <전.평.>) 아, 이제는 세대교체가 절실하다고 여겨진다. 이게 번역 및 번역가의 숙명임을 우리는 꼭 알아야 한다. 번역가는 결코 작가가 아니다. 언제가 모 번역가 선생님의 말을 빌어 썼지만 번역가는 '그림자', 작가와 작품 뒤에 붙은 쓸쓸한 그림자이다. 모든 일, 모든 직업에는 '연령 제한' 있다. 학문이나 번역, 창작이라고 예외일 리 없다. 당장 눈이 어두워 내가 번역하는(혹은 쓰는) 텍스트도 제대로 못 보는 마당에..ㅠ.ㅠ 물론 그걸 뛰어 넘는 드문 천재들이 있긴 하지만, 역시나 '그럼에도'이다. 내 번역의 유효기간도 길지 않음을 또한 명심해야 한다.(그럼 뭐 먹고 살지?) 아무튼.

 

톨-이를 무척 사랑한 이광수의 소설 중 그의 흔적, 특히 <부활>의 영향이 아주 큰 작품이 <유정>이라고 한다. 헐, 기억 창고를 아무리 뒤져봐도 안 읽은 것이다, 님아 ㅠ.ㅠ 안빈, 석순옥(맞나?) 어쩌고 하는 무슨 사랑 얘기는 <유정>이 아니고 <사랑>이었나 보다. 그리하여, 이 주제를 다룬다고 하더라고 밑바닥으로 다 파야하게 생겼다.

 

 

 

 

 

 

 

 

 

 

 

 

 

 

 

 

<유정>이야 노골적이고, 이 주제와 비교적 무관하다는 <무정> 역시 이형식의 박영채를 계몽하려는(나아가, 네흘류도프가 카츄사에게 그랬듯, '구원'하려는) 그 심리적, 정신적, 도덕적 흐름에 있어 기본적으로 <부활>을 밑에 깔고 있다. - 고 하는데, 아주 공감된다. 덧붙여, 이 경우에도 우리가 꼭 넘고 가야 할 산은 이 분의 이 책.

 

 

 

 

 

 

 

 

 

 

 

 

 

 

 

이광수를 좋아한 적은 없다. 그러나 웃긴 신파나 그 못지 않게 웃긴 도덕소설(계몽~)이나 썼다고 여겨진 그가 왠지, 소설을 참 잘 쓴 염상섭보다 더 인간적으로(?!) 여겨지는 아이러니를 경험한다. 보다 더 정감이 간다고 할지. 언젠가 강의실에서 김윤식 선생님이 열심히 이광수를 '씹던' 기억이 난다. 그의 고아콤플렉스, 또한 '조선/인'에 대한 총체적 열등감, '잘난 것', '높은 것'을 향한 열망, 그가 결국 친일로 간 것은 내적 필연이었던 것, 그의 지적 흐름상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평론가 최재서던가, 그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던 듯하다.) 허영숙과의 로맨스, 결혼 생활 역시 그러하다. 아이들을 많이 낳았던데, 참, 천생 연분이었던 듯하다. 그러게 '사랑의 문법'이 곧 '소설의 문법'으로 이어진다.(이상, 염상섭, 이광수).  

 

 

 

 

 

 

 

 

 

 

 

 

 

 

*

 

우리가 학창시절부터 보아온 이광수는 머리가 훌러덩 벗겨지고 지나치게 둥근(동그란) 알의 안경을 끼고 한복을 입은 할아버지(기껏해야 늙은 아저씨) 이광수이다. 나이가 들어보니 우리의 얼굴과 몸이 양질전화한다는 것을 알겠다. 정확히 그 결절점을 찾기는 힘들겠으나, 아무튼 우리는 나비나 다른 곤충의 변태 못지않은 과격한 변화를 겪는다. 어쩌다 젊은 날의 이광수 사진을 봤는데, 헐, 윤동주 뺨치는 얼굴이었구나. 과연 청년 이광수는 지식인에 작가에 혁명가에(그리고 열정적인 연인에), 그 무렵에는 뭐든지, 누구든지 될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말년(중년)에 이런 얼굴이 된 것이다. 음, 호위호식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 역시, 출세지향적이던, 야망 많던 그가 원하던 대로.

 

 

겸사겸사, 톨-이의 역설은 늙어서 더 볼 만하다는 것. 그는 외모 콤플렉스가 무척 강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톨-이 원하는 톨-이의 모습에 가까워진다.

 

 

못 생겼다기보다는 못 됐게(!) 생긴 얼굴인데, 바로 이 대목 '악'을 누르고 '선'을 극대화하는 것이 톨-이의 일생일대의 과제였다. 그리고 말년엔 보다시피, 우리가 익히는, 또 많은 화가들이 사랑한 얼굴.(그리고 그런, 정정한 할아버지의 몸.) 저 수북한 털. 사실 머리카락도 꽤 오랫동안 무성했다. 그러니 그 '육'(=악)을 감당하기가 그렇게 힘들었겠지만, 실은 그것이야말로 창작(=삶)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니, 부러울 수밖에. 그게 없었다면 톨-이는 소설을 쓰지 않았을 터이다. 마음 착한 지주 귀족 할아버지가 돼서 여러 사회 사업, 자선 사업 하시고 아이들한테 민화 읽어주시고 그러셨을 터. 가끔씩 동네 처녀 총각 주례 서주시고 (믿거나 말거나 많은 사생아를 만드는 대신) 늙은 마누라랑 알콩달콩, 티격태격  잘 살고.   

 

결국 사람은 자신이 원하던, 그래서 걸어가던 그 길의 끝에 이르게 된다. 약간의 차이야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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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소리 2020-04-15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타겠지만, 전문가 분의 글에 호위호식...이란 단어가 찜찜하네요.^^
 

 

 

 

 

 

 

 

 

 

 

 

 

 

 

 

<악령>에서 그냥 쉽사리, 휙 놓치고 가는 장면. 지금 고치다가, 정말 하나도 버릴 게 없구나, 도-키의 소설은, 이런 생각이 들어 가져와 본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소설에 비해, 20여년 나의 번역에는 버릴(고칠) 것이 무척 많다. 단순히 '스킬'이 부족하여 문장이 어수선한 거야 그렇다 쳐도(그 사이 나의 성장이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 오역이 제법 발견되어 놀랍다.(송구스럽기도 하다.)  너, 그 무렵엔 러시아어 정말 잘 하지 않았니?^^;;

 

레뱌드킨 집의 문은 닫혀 있을 뿐, 잠겨 있지는 않았고 우리는 거침없이 들어갔다. 거처라고 해 봐야 더러운 벽지 뭉치가 그야말로 덕지덕지 붙어 있는 그을린 벽에 둘러싸인, 크지 않은 역겨운 방 두 칸이 전부였다. 주인인 필립포프가 술집을 새 건물로 옮기기 전 언젠가는 여기가 몇 년 동안 술집이었다. 술집에 딸린 나머지 방들은 지금 잠겨 있고 오직 이 두 칸만 레뱌드킨의 손에 떨어졌다. 가구래야 팔걸이가 떨어진 낡아빠진 안락의자 하나를 빼면 소박한 의자들과 판자 쪽으로 만든 탁자들이 전부였다. 두 번째 방의 한 구석에는 mademoiselle 레뱌드키나의 것인 무명 담요가 덮인 침대가 있었는데 대위 자신은 밤이면 옷을 입은 채 마룻바닥에 나뒹굴다시피 자기 일쑤였다. 곳곳에 부스러기, 쓰레기, 물기가 가득했다. 첫 번째 방은 마룻바닥에 흠뻑 젖은 두툼하고 큰 걸레가 뒹굴고 있고 바로 그 웅덩이 속에 닳아빠진 낡은 신발짝이 빠져 있었다. 여기서는 아무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난로도 떼지 않고 음식도 만들지 않는다. 샤토프가 상세히 얘기해준 대로 심지어 사모바르도 없었다. 대위가 여동생과 함께 도착했을 때 완전히 거지신세였고, 리푸틴의 말대로, 처음에는 정말로 집집마다 구걸하러 다녔다. 하지만 뜻밖에도 돈을 받게 되자 당장 술을 퍼마셨고 숫제 술에 절어 살았기 때문에 살림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한 mademoiselle 레뱌드키나는 두 번째 방의 구석, 판자 쪽으로 만든 식탁 앞 의자에 얌전히, 소리 없이 앉아 있었다. 우리가 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우리를 부르지도 않았고 숫제 자기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샤토프는 원래 그들은 집 문을 잠그지 않는데 한번은 밤새도록 현관문이 이렇게 활짝 열려 있었노라고 말했다. 쇠 촛대 위, 희끄무레하고 가느다란 양초 불빛 아래로 나는 서른 살쯤 된 듯한 병적으로 여윈 여자를 분간해냈는데, 짙은 색의 낡은 사라사 원피스를 입고 긴 목에 아무것도 감지 않은 채 듬성듬성한 짙은 색 머리카락을 목덜미에 두 살배기 어린애의 주먹만 한 크기로 묶어놓고 있었다. 그녀는 상당히 즐거운 듯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녀 앞의 탁자 위에는 촛대 말고도 시골풍의 작은 손거울, 낡은 카드 한 세트, 노래집 같은 다 해진 조그만 책, 벌써 두어 번 베어 먹은 독일식 하얀 빵이 놓여 있었다. mademoiselle 레뱌드키나가 얼굴에 하얗게 분칠하고 빨갛게 연지를 찍고 입술에도 뭔가를 바른 것이 눈에 띄었다. 눈썹도 시커멓게 칠해 놓았는데 원래도 가늘고 검은 눈썹이었다. 하얗게 분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좁고 높은 이마에는 세 줄의 긴 주름이 상당히 뚜렷이 그어져 있었다. 그녀가 절름발이라는 것은 이미 알았지만 이번에 우리가 가 있는 동안 그녀는 일어나는 일도, 걷는 일도 없었다. 언젠가 한창 때는 바싹 여윈 이 얼굴도 밉지 않았을 법했다. 하지만 조용하고 부드러운 회색 눈은 지금도 훌륭했다. 몽상에 잠긴 듯 진실한 무언가가 거의 기쁨에 찬 그녀의 조용한 시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카자크 채찍이며 오빠의 온갖 무자비함에 대해 모두 들은 다음이라, 나는 그녀의 미소 속에 표현된 이 조용하고 평온한 기쁨에 깜짝 놀랐다. 이상하게도, 신의 벌을 받은 이 같은 모든 존재와 함께 있을 때 흔히 느끼는 힘겹고 심지어 두려운 혐오감 대신에 나는 첫 순간부터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거의 유쾌했으며 나중에도 혐오감은커녕 애처로움에 휩싸일 뿐이었다.

보시다시피, 문자 그대로 몇날며칠을 저렇게 혼자 꼼짝도 않고 앉아서 점을 치거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겁니다.” 샤토프가 문지방에서 그녀를 가리켜 보였다. “그놈은 먹을 것도 주지 않아요. 가끔 곁채의 노파가 워낙 불쌍한 마음에 뭘 좀 갖다 줘요. 어떻게 촛불만 덩그러니 켜놓고 저렇게 혼자 내버려둘 수 있는지!”

놀랍게도, 샤토프는 그녀가 방 안에 없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안녕, 샤투시카!” mademoiselle 레뱌드키나는 상냥하게 말했다.

마리야 티모페예브나, 손님을 데려왔어.”

샤토프가 말했다.

, 손님이라니, 영광이네. 당신이 데려온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어, 이런 사람은 기억 안나.” 그녀는 양초 너머에서 나를 유심히 쳐다보더니 곧 다시 샤토프 쪽을 향했다(그리고 대화가 진행되는 내내 나라는 인간은 아예 그녀 옆에 없는 양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참, 너무 불쌍하고 딱해서, 원. 이 소설에서 형편 없는 악역(-축에도 못 끼는) 레뱌드킨. 사실 그도 어떤 의미에서는 희생양, 적어도 사회 전체를 놓고 보면 보호, 배려를 받아야 마땅한 존재이거늘. 자기가 당한 것을 고스란히 더 약한 자에게 푸는 이 메커니즘, 너무 낯익다.

지적장애에 자폐에 지체장애(어쩌면 뇌병변)까지 있는 서른살의 노처녀 마리야는 말할 것도 없다.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우리의 해묵은 편견도 새삼스럽다. "신의 벌을 받은.... " "혐오감... 애처로움(동정)..."

그리고 도입부에 포착된 저 가난, 그리고 술. 정말 지긋지긋하다. 이런 것을 제대로 소설화하지 못해 서럽다. 물론  전혀 '시의성'이 없는 주제이긴 하다. 하지만 이 역시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좀 잘 써보란 말이다, 쳇.

배고프다. 움직임이 적을 때는 조금도 먹어도 됐는데 (아이 때문에) 움직임이 많아지니 많이 먹어야 한다. 총체적인 소비량의 증가. 

 

*  

 

번역은  정말  하기 싫은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뭘 번역하냐가 중요한다. 도-키 소설을 번역하는 나는 불쌍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 그를 나는 정말 좋아하나 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연이라고 생각한다.(심지어 나와 가족을 먹여살리고 있다.) 작년에 어쩌다 그만(정녕 어쩌다?? ㅠ.ㅠ) 톨스토이 단편선(민화) 계약을 했는데 벌써부터 두려워진다. 순전히 아이가 읽을 책을 만든다는 사명감으로 해야 할 법하다...ㅠ.ㅠ 어떤 일(노동)에 굳이 '명분'을 찾아야 할 때 우리는 불행해진다..ㅠ.ㅠ  걍(그냥) 하는 것이 좋다. 과연, 프로정신 약한 번역가가  행복감과 자긍심을 동시에느끼면서 번역에 몰입하려면 그 텍스트에 대해 얼마만큼의 사랑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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