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인 파스테르나크(1890-1960)의 삶과 <닥터 지바고>
모든 일에서 / 극단에까지 가고 싶다. / 일에서나, 길에서나, / 마음의 혼란에서나,
재빠른 나날의 핵심에까지 / 그것들의 원인과 / 근원과 뿌리 / 본질에까지.
운명과 우연의 끈을 항상 잡고서 / 살고,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고, / 발견하고 싶다.
아, 만약 부분적으로라도 / 나에게 그것이 가능하다면 / 나는 여덟 줄의 시를 쓰겠네. / 정열의 본질에 대해서 /
오만과 원죄에 대해서 / 도주나 박해, / 사업상의 우연과 / 척골(尺骨)과 손에 대해서도 /
그것들의 법칙을 나는 찾아내겠네. / 그 본질과 / Initial을 나는 다시금 반복하겠네.
독문학자이자 수필가 전혜린의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66)에 실린 파스테르나크의 시이다. 독일어 중역인데다가 시의 마지막 네 연이 빠져 있음에도 “모든 일에서 / 극단에까지 가고” 싶은 서정적 자아의 차분한 집념 혹은 조용한 열정은 잘 느껴진다. <닥터 지바고>(이하 <지바고>)로 잘 알려진 파스테르나크는 실제로 소설가이기보다는 시인이었다.(...)
시인이었던 그가 산문 장르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이십대 후반부터이다. 1930년을 전후한 시점에서 몇 편의 서사시와 운문 소설, 자전적 에세이 <안전 통행증>(1931), 중편소설(「류베르스의 어린 시절」) 등이 쓰인다. 이러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지바고>의 집필과 그 동기는 작가의 문학적, 내적 욕구와 더불어, 어쩌면 그보다는 시대적 정황과 연결되어 있다. 1940년대, 파스테르나크는 모스크바 근교의 페레델키노에 칩거한 채 일종의 ‘내적 망명’에 돌입한다. 침묵과 고독 속에서 십여 년(1946년-1956년)에 걸쳐 장편소설을 쓰는데, 그것이 <지바고>이다. 스탈린 사망 직후인 1954년에 이 소설의 말미에 실린 시 중 10편이 잡지(<깃발>)에 발표되기는 했으나 전반적으로 소설의 운명은 순탄치 못했다. <신세계>에 출간을 의뢰했으나 편집진은 꼼꼼한 장문의 ‘퇴짜’ 편지를 보낸다. 이 서간체 평문에서 우선적으로 문제 삼는 것은 “소설의 정신, 그 파토스, 삶에 대한 작가의 시각”이다. “당신의 소설의 정신은 사회주의 혁명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파토스입니다. 당신의 소설의 파토스는 10월 혁명, 내전, 그와 연결된 이후 사회 변화가 민중에게 고통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았고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를 물리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파괴했다, 라는 주장의 파토스입니다.” <지바고>의 첫 독자-비평가들이 “극히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 소설”, “소설-설교”라며 내친 소설은 1957년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어 번역으로 출간된다. 이듬해(1958년) 노벨 문학상까지 받게 되자 파스테르나크는 작가동맹에서 제명되고 추방의 위협을 당한다. 결국 그는 상을 거부하고 사실상 거의 직후인 1960년 70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이 소설을 둘러싼 일련의 스캔들, 그리고 친(親)소비에트와 반(反)소비에트 양진영의 평가를 두루 살펴볼 때 두 가지 점이 눈에 뜨인다. 첫째, 작품의 정치성 내지는 경향성인데, 그토록 ‘무정치적인’ 작가, 또 그런 경향의 소설을 그토록 ‘정치적인 것’으로 만든 문학 외적 정황이 놀라울 따름이다. 둘째, 작품의 문학성과 관련하여, 사실상 표층적 차원인 문체 외에는 장점이 없다는 식의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출간 이후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물의-스캔들은 가라앉았지만 이 작품이 정치적 정황 때문에 과대평가되었다는 식의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물론, 이런 혹평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소설의 의의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어떻든 2018년 현재, <지바고>는 고리키, 숄로호프, 솔제니친, 불가코프, 플라토노프 등 여타 20세기 러시아 소설과 비교할 때 가장 많이 읽히는 소설이다. 1960년대의 인기는 데이비드 린의 영화(1965년)에 빚진 측면도 있겠다. 하지만 그 역시 과거지사, <지바고>는 비슷한 식으로 인기를 누린, 가령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6/1937 퓰리처 상)와는 달리 문학사의 심판에서 문자 그대로 살아남았다. 역사소설로 읽든 연애소설로 읽든 어쨌든 대중통속소설을 넘어선 맥락에서 작품을 평가해야 할 때이다.
2. <닥터 지바고> - 유폐된 지식인의 참회록
제목 그대로 닥터(의사) 지바고의 삶을 다룬 이 소설은 어린 지바고인 유라의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시작한다. 화려한 장례행렬에 관심을 보이는 자에게 주어진 답에서 이미 ‘산 자를 매장한다’(‘지바고(Zhivago)’에 ‘삶(zhizn', zhivoy)’의 의미가 들어 있다)라는 중의적인 의미가 생성되고, 다음 장면은 아예 아버지 지바고의 열차 투신자살을 포착한다. 조실부모한 지바고가 훗날 삶과 죽음의 친연성, 극히 기독교적인 의미의 부활과 불멸에 탐닉하는 것은 당연하다. 위대한 학자임이 수차례 강조되는 그의 외삼촌(니콜라이 베데냐핀)의 영향이기도 한바, 삶의 대극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부활’이다. 이것이 임종을 목전에 둔 안나 이바노브나(토냐의 어머니)에게 들려주는 지바고의 얘기의 핵심이기도 하다. “죽음이란 없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거든요.”(1, 122.) 산 자들을 임박한 죽음에서 구해야 하되 그 때문에 또한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자주 접해야 하는 의사라는 직업 역시 양가적이다. 이런 모순에 대한 인식과 수용이 현실 공간(의학)과 나란히, 그러나 외따로 존재하는 문학의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의사이자 작가인 지바고의 실제 삶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소설의 시작과 함께 사라진 자신의 아버지를 그대로 반복한다. 즉, 생활인-가장으로서 그는 예의 그 우유부단함과 나약함 때문에 ‘퇴폐적’이라는 말에 가장 걸맞은 행태를 보여준다. 라라와의 관계는 어떤 수사를 동원할지라도 불륜이고 파르티잔 생활 중에도 ‘내연녀’를 향한 그리움이 가족에 대한 걱정을 압도한다. 뿐더러, 라라는 사랑하되 그녀와의 관계에서 생긴 아이(타냐)에 대해서는 무심하고 사실상 세 번째 아내인 마리나와 두 딸을 낳았음에도 자기만의 세계로 도피한다. 불성실한 가장인 지바고는 사회적 존재로서도 ‘퇴폐적’, 즉 다분히 무기력하고 기회주의적인 지식인의 전형이다. 1차 세계대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한 것은 징집을 피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파르티잔이 된 것도 라라를 만나러 가던 길에 납치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지바고는 자기에게 주어진 각종 의무를 저버리거나 마지못해 이행하다가 자기만의 골방에 틀어박힌다. 여기에 나름의 이론 내지는 원칙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어떤 순간적이고 강력한 충격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다고, 역사 위에 뭔가 더 높고 더 숭고한 원칙이 존재한다고 믿는데, 그 전범이 <전쟁과 평화>의 작가 톨스토이다. “톨스토이는 나폴레옹, 통치자, 사령관의 선구자적 역할을 부정했으되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는 못했다.(…) 역사는 누가 만드는 것이 아니며, 풀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없듯,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 혁명, 차르, 로베스피에르 같은 자는 역사의 유기체적인 선동자, 즉 발효소일 뿐이다.”(2, 348) 역사의 크나큰 원칙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무조건적인 회피나 무기력한 수용이 아니라 운명과의 타협 내지는 경건한 운명애에 가깝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삶의 주체로서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역으로, 오직 이것만이 그의 나태한 삶의 알리바이가 될 수 있다. 특히 「17장. 지바고의 시」의 첫 시 「햄릿」은 혁명의 가두리에 머물다가 불가피하게 그 물결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귀족-인텔리겐치아의 역사와 개인의 소명에 대한 성찰을 담은, 일종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으로 읽힌다.
소요가 멎었다. 나는 무대로 나갔다./ 문설주에 기댄 채 아득한 메아리 속에서/ 나의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붙잡아 본다.
한밤의 어둠이 천 개의 쌍안경처럼/ 나를 향하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느님 아버지,/ 이 잔을 거두어 주옵소서.
저는 주님의 확고한 뜻을 사랑하며/ 기꺼이 이 역할을 맡겠나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극이 진행되고 있으니/ 이번에는 저를 면하게 해 주옵소서.
하지만 막(幕)의 순서는 짜여 있고/ 길의 끝은 피할 수 없다./ 나만 혼자이고, 다들 바리새주의에 빠져 있다./ 삶을 사는 것은 들판을 건너는 것이 아니다.(2, 457)
여기서 ‘서정적 자아’는 정확히 햄릿도 아니고 햄릿 역을 맡은 배우이며 은연중에 스스로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한다. 러시아문학사와 지성사에서 ‘행동’보다는 ‘사유’의 표상으로 받아들여진 햄릿은 혁명기의 러시아에서는 긍정적인 인물상이 될 수 없었다. 말하자면 지바고는 19세기 이래 러시아문학이 창조한 잉여 인간의 20세기 버전, 최후의 잉여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단,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사건이 이 조용한 낭만주의자의 삶을 강타한다. 햄릿-그리스도의 처절한 고백은 인간 개인의 힘으로는 뒤바꿀 수 없는 절대 법칙에 대한 작가 지바고-파스테르나크의 심오한 통찰과 고뇌의 산물이다. 우유부단해 보이는 삶 역시 이 법칙에 맞서 그가 취할 수 있었던 가장 적극적인 대응 방식이었으리라.
파벨 안티포프(스트렐니코프)는 소설의 구성상, 주제상 지바고의 짝패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05년 혁명 때 철도 파업을 주동했다가 투옥되었고 1917년 혁명 이후에는 무자비한 관료가 된 파벨 안티포프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정치적 과업을 위해 가족마저 내팽개친,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이지만(유형지인 유랴틴의 군법 재판소 위원임에도 아들의 가족을 외면한다는 점이 며느리 라라에 의해 강조된다) 섬세하고 여린 성정을 타고난 아들은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삶의 궤적을 좇아간다. 그런 그가 사실상 아버지 못지않게 잔혹한 혁명가로 생을 마감하는 것은 ‘반복의 비극’, 즉 개인사와 역사의 슬픈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1차 세계대전 발발과 참전, 혁명에의 투신 같은 행동에는 물론 프롤레타리아로서의 계급의식이 개입되어 있다. 지바고 앞에 늘어놓는 기나긴 고백을 들어보자.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죠. 당신이 이해할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당신은 다른 식으로 자랐으니까요. 도시 변두리의 세계, 철도 길과 노동자 숙소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더럽고 비좁고 죽도록 가난하고 노동자도 더럽혀지고 여자도 더럽혀지는 세상. 또 방탕, 마마보이들, 안감이 하얀 교복을 입은 대학생들, 상인들이 실실 웃어 대는 뻔뻔스러운 무법천지가 있었습니다.”(2, 358)
소년 파샤는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보편적인 역사의 차원으로 확대하고 그 구현을 라라에게서 발견한다. “아, 소녀 시절, 김나지움 학생이었을 때 그녀는 정말 예뻤어요!(…) 이 시대의 모든 주제, 모든 눈물과 모욕, 모든 충동, 그동안 축적된 모든 복수와 오만이 그녀의 얼굴과 자태에, 처녀다운 수줍음과 자신만만한 날씬함의 혼합 속에 쓰여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으로, 그녀의 입으로 이 시대에 대한 고소장을 제출할 수 있을 정도였죠.”(2, 359-360) 이어 그는 자신이 그녀를 위해 대학에 들어가고 또 교사가 되었다고, 결혼 후에는 그녀를 새롭게 쟁취하기 위해 전쟁에 나갔다고 고백한다. 혁명에 투신한 것 역시 그녀의 복수를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녀를 위해서’ 저 모든 것을 했다기보다는 저 모든 꿈을 이루기 위한 동력으로서 ‘라라-순수(이상)’를 필요로 했던 것은 아닐까. 라라는 한층 객관적으로 안티포프를 정의한다. 즉, 그는 “시대의 징후를, 사회적인 악을 가정적인 현상으로 착각”하고 부부의 관계가 망가진 것을 “자기 탓으로 돌려 자기가 벽창호이자 중치, 상자 속의 인간이라고 생각”했으며(2, 265) 전쟁에 나간 다음에는 그저 치기 어린 자존심 때문에 “역사에 심통을” 부리고 계속 “역사와 셈을 치르는 중”(2, 266)이라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안티포프의 저돌적인 움직임의 저변에 깔린 것은 프롤레타리아 해방과 같은 거국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지극히 개인사적인 것(특히 첫날밤에 완전히 확증된 라라와 코마롭스키의 관계)이다. 동기가 어떠했든 그것은 가정으로부터의 도피인바, 생활인-가장으로서의 무책임함에 있어 정녕 지바고와 비슷하다. 그러나 ‘죽은 혼’이 된 ‘안티포프’를 확인사살하고 ‘스트렐리니코프’로 부활한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저 구시대 러시아의 악의 대변자들에 대한 복수를 감행한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방관하는 지식인이 아니라 행동하는 지식인에 가깝다. 혁명이 완성되자 정식 당원이 아님에도 수뇌부와 너무 가까웠던 그가 최고형을 선고받고 쫓기는 신세가 되는 것 역시 혁명(이상)과 정치(현실)가 찰나적으로 결합했다가 영원히 결렬되는 역사의 보편적인 현상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는 라라가 떠난 이후 바르이키노로 숨어들었다가 자신의 아내와 한 시절을 보낸 남자와의 대화로 지새운 밤이 끝나기 전에 자살한다. 아침녘에 지바고의 눈에 포착된, 하얀 눈밭 위에 번진 선혈은 라라의 비유인 ‘빨간 마가목 열매’처럼 혁명과 열정과 순수와 파국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런 그야말로 혁명을 소재로 한 이 소설의 ‘주인공-영웅’이 되어야 마땅할 법한데 실상은 ‘햄릿’의 짝패를 이루는 ‘돈키호테’로 형상화된 측면이 있다. 지바고와는 달리 역사의 흐름을 한 인간의 의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신념, 그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이라는 선민의식은 비극적 패배를 낳았을 뿐이다.
‘닥터 지바고’라는 제목이 붙은 소설에서 주인공만큼이나 비중 있는 인물이 라라이다. 어떤 인물과 관계하느냐에 따라 그녀의 형상은 넓은 스펙트럼에서 진동한다. 또래 친구인 올랴(데미나)와의 관계에서는 야무진 중고생(김나지움 여학생)인 그녀가 거의 동시에 코마롭스키에게는 어린 요부의 전형이다. 라라 입장에서도 독자들의 손쉬운 오독과는 달리 일방적인 성폭력의 도식이 재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그에게 종속된 것이 아니라 그가 그녀에게 종속된 것이었다. 정녕 그녀는 그가 자기 때문에 얼마나 애를 태우는지 모른단 말인가?”(1, 87) 라라의 성장기가 끝난 모스크바 시절 이후에도 그들의 관계는 유지된다. 코마롭스키는 이미 다른 남자(파벨)의 아내가 되었을 뿐더러 심지어 또 다른 남자(유리)의 정부로 살고 있는 라라를 구하기 위해 유랴틴까지, 이어 일부러 며칠을 낭비한 다음 바르이키노까지 찾아온다. 코마롭스키의 감정의 진정성이나 그 전개 방식(가령 정식으로 청혼하지 않음)은 문제 삼을 수 있어도 그가 그녀의 삶에 가장 실질적인 도움을 준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지바고는 심지어 그녀의 남편보다도 코마롭스키에게 ‘구제불능의 질투’를 느낀다고 고백한다. 끝으로, 타냐의 말을 통해(「에필로그」) 라라가 말년에도 ‘코마로프 부인’으로서 코마롭스키의 그늘 아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어린 지바고에게 라라는 음란한 욕망과 타락의 상징이었다. 토냐, 미샤(고르돈)와 함께 톨스토이의 「크로이처 소나타」와 솔로비요프의 「사랑의 의미」를 읽으며 금욕과 순수를 논하던 시절, 라라는 ‘다른 세계에서 온 소녀’, 그만큼 신비스러운 존재이기도 했다. 이후 1차 세계 대전, 사회주의 혁명과 내전 등 운명은 군의관 지바고와 간호병 라라를 한껏 미화된 낭만적 사랑으로 묶어놓는다. 지바고에게 있어 그녀는 신비한 아름다움의 육화인 ‘나의 마가목 아가씨’임과 동시에 편안한 자세로 독서를 즐기는 지식인이자 청소와 빨래와 요리 등 각종 가사의 달인-주부이기도 하다. 어느 경우든 라라는 여성에 대한 유구한 표상인 ‘성녀-탕녀’의 20세기 버전으로서 지바고-파스테르나크의 성적 판타지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 본원이 막달레나 마리아인데, 「23. 막달레나 (I)」에서는 육욕과 타락의 이미지가 강한 반면 「24. 막달레나 (II)」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 전날 마리아를 포착한 만큼 희생과 구원의 이미지에 방점을 둔다. 이 시들을 소설 텍스트와 병치하면 파르티잔을 탈출하여 유랴틴, 이어 바르이키노로 돌아온 지바고를 간호하고 돌보는 라라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을 씻기던 마리아의 소비에트적 변주로 읽힌다. 비단 지바고 뿐만 아니라 혁명기 세 유형의 인물(햄릿-지바고, 돈키호테-안티포프, 고등 속물 코마롭스키)의 운명을 정리해주는 것도 그녀이다(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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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후반, 파스테르나크는 자신에 대한 비우호적 분위기가 만연한 가운데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방랑 시대>(그리고 <수업시대>), 디킨스의 소설에 맞먹는 작품을 쓰고자 한다. 이런 야망을 갖고 구상한 소설의 첫 제목은 <소년소녀들>이었다. 혁명과 전쟁을 겪으며 어른이 된 ‘소년소녀들’의 이야기는, 그러나, 전통적 의미의 소설이라기보다는 소설의 외피를 쓴 서정적 비망록이 되었다.
시인이 쓴 소설답게 서사 원칙, 즉 인과성과 개연성보다는 우연과 연상이 지배적이다. 많은 인물들, 심지어 주인공들조차 상징성이 너무 강해서 형상성이 다소 떨어진다. 특히 지바고의 이복동생 예브그라프는 ‘기계 타고 내려온 신’(Deus ex Machina), 즉 인물이 아니라 기능에 가깝다. 더 근원적으로, <지바고>의 전범처럼 여겨지는 <전쟁과 평화>와 비교할 때 인물 구도도 단순하거니와, 파스테르나크 특유의 온화한 귀족주의와 엘리트주의의의 반영인바, 혁명(전쟁) 소설에 일반적인 갈등의 증폭과 해결(파국)의 서사 구조가 구축되지 않는다. 차라리 소설 전체가 서사화를 원하지 않는 파편적 사건과 서정적으로 유려한 풍경 묘사와 적절히 철학적인 아포리즘의 향연에 가깝다.
이런 독특한 문학적 구조물을 그는 왜 만들어야했을까. 그 답은 그의 절친한 사촌이자 신화학자였던 올가 프레이덴베르그에게 보낸 편지의 일절에서 찾을 수 있겠다. 굳이 혁명이 필요 없었던, 심지어 혁명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으나 그럼에도 죽는 순간까지 자기 식으로 시대정신에 화답하고자 한 작가-인텔리겐치아의 조용한 고백이기도 하다.
“나는 모든 사람들 앞에 죄가 있어. 하지만 내가 뭘 어쩌겠어? 그러니까 이 소설은 나의 빚의 일부, 내가 조금이라도 ‘노력했다’라는 것의 증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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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지바고>를 번역하는 데 딱 3년이 걸렸다. 출간까지는 2년 정도가 추가되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사이 겨울방학이었지 싶다. 범우사판(오재국 번역)을 통해 이 소설을 읽었다. 사실상 단칸방이나 다름없는 집, 새벽에 시장에 나가던 부모님과 ‘국민학교’ 다니던 두 동생이 잠든 밤에 카세트라디오로 <라라의 테마> 같은 영화음악을 즐겨 듣던 시절이다. 노르스름한 스탠드 불빛 아래, 빼곡히 들어찬 자잘한 글자들 속에는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혁명, 문학, 불멸, 사랑, 비극, 관념…. 책을 읽는 동안에는 비루하고 옹색한 현실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월하고 나 역시 그런 다른 존재로 변신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책읽기, 특히 문학이 그런 것임을 그 무렵에는 꽤 난해했던 이 소설을 읽으며 배웠다.
그로부터 30여년이 흘렀다. 강조하건대, 파스테르나크는 시인이고 <지바고>는 시어로 쓰인 소설이다. 나는 소설가이고 러시아문학박사로서도 주로 소설을 연구해왔다. 훗날 이 소설을 더 많이 아끼는 역자가 나타나 더 좋은 우리말본을 만들어주길 바란다. 현재로서는 그래도 이 책이 우리 독자들에게 가장 마땅한 번역본이 되리라 자부한다.
끝으로, ‘여고시절’ 전혜린의 번역으로 즐겨 읽은 파스테르나크의 시를 마저 옮겨본다. “모든 일에서 / 극단에까지 가고 싶다.”는 이렇게 끝난다.
나는 정원처럼 시를 가꾸겠네. / 잎맥을 파르르 떨며 / 보리수들이 잇따라 / 연이어, 일렬로 꽃을 피우리.
시 속에 나는 장미향과 / 박하향을 넣겠네, / 풀밭과 사초와 풀베기와 / 천둥번개를.
언젠가 쇼팽이 소담한 영지와 / 공원과 숲과 무덤, / 그 살아 있는 기적을 / 자신의 에튀드에 넣었듯.
다다른 승리의 / 유희와 고뇌 - / 팽팽한 활의 / 당겨진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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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무와젤 플레리의 밀짚모자에 카밀레(캐모마일)과 함께 꽂힌 꽃 수레국화. васильки. 'синий'가 어떤 색인지 궁금하면 이 꽃을 보면 될 듯하다. 오래 전, 젊은 헬레나 본 햄 카터,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나왔던 <전망 좋은 방>에서도 본 듯한 꽃이다. 대단히 서구적으로(?) 느껴졌는데, 이 역시 들꽃, 서구적인(^^;;) 들꽃이다. 노발리스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파란꽃(!), 파란색도 독한 색인데 빨간색(양귀비) 앞에서는 여지없이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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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하루만 기다렸어도 '할 일 없는 사람'이 되지 않는 거였다. 버티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힘든 것이다. '닥터 지바고'에 '지바고'가 없어 놀랐으나 표지의 감각은 편집부를 믿는다. <죄와 벌> 표지도 편집부에서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