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수업 준비차, 사실상 처음으로(이게 놀라운 대목이다!) 레스코프를 읽는다. 19세기(후반) 러시아 소설가라면 우리는 도-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체호프 정도만 알지만, 본국에서는 곤차로프, 쉐드린, 레스코프 등도 (학자들만^^;) 적잖이 읽는다. 실상 지난 세기의 문학은 본토에서도 그리 많이 읽히기 힘들다. 이건 당연지사. 우리는 이광수의 <무정>, 염상섭의 <삼대>,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혹은 <감자> 등등의 단편), 이상, 김유정, 현진건 등을 얼마나 많이 읽나. 이 점에서는 러시아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하지만 학교, 즉 국문과라면, 특히 대학원이라면 사정이 좀 다르다. 19세기 전공자라면 응당, 곤-프, 쉐-린, 레-프 정도는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도 한시절에는(러시아 유학 시절인데) 열의에 가득 차 전집도 다 사고 수업도 찾아듣고 정독, 완독까지는 아니어도 통독, 발췌독 등을 하곤 했다. 지금은 국내에 번역도 다수 나와 있다. 귀국 이후 읽어봤으되 크게 감흥이 없거나(-_-;;) 감흥이 있어서 수업에서도 다뤄 봤지만 학생들의 감흥까지 이끌어내기는 힘든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무식해서? 천만의 말씀!!!
인생은 짧고 세상에 읽을 책은 너무 많다. 그렇기 때문이다.
문득 깨달았지만, 19세기 러시아 소설 전공자로서 레스코프를 읽는 마음가짐은, 우선은 도리의 차원이다. 왜냐면 읽을 책,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ㅠ.ㅠ 하지만 도리를 다하는 차원에서 일단은 뒤져보고 쭉 꼼꼼하게 읽는다. 보다시피, 국내 번역서는 모두 이상훈의 것. 언젠가 오다가다 한 번쯤 마주친 것도 같은데(삼십대 초반 박사 시절에는 학회에 자주 갔으니까), 이렇게 맛깔스러운 번역과 성실성(계속 공부를 하고 계셨구나!)에도 불구하고, 참 쉽지 않다,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란. 역자의 이력이 특이하다, 독일에서 학위받으셨다.
내가 작가 레스코프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사실, 학교 강의실에서가 아니라(유학 가서 처음 알았는데, 그도 그럴 것도 제대로 된(?) 19세기 소설가 전공자가 우리 과에 없었다) 벤야민의 책을 통해서였다. 아마 '스카즈'(이야기/이야기꾼) 얘기를 하면서 레스코프를 소개했던 듯한데, 조만간 다시 읽어보려고 한다. 그 다음은, 국내에 <마이 러브 카티샤>라고 소개된, 당시로선 엄청 야하게 느껴졌던 영화를 통해서였다.
전에도 한 번 썼지만, 여주를 맡은 배우가 너무 이지적이어서 좋았고(여주의 이름은 잉게보르가 답쿠나이테, 성이 너무 힘들다 ㅠ.ㅠ), 남주의 연기와 침묵이 좋았다. 엄청 야했고 그녀의 집착이 좀 이해가 안 됐지만(2-3학년 때 봤던 듯하다)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 영화 자체는 거의 번안된 것이고, 원작과 비교할 때 남자의 캐릭터에 무게를 더했다. 소설 속 남주(세르게이)는 말이 너무 많고 너무 야비하다, 그렇더라, 흑.
그 다음,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레이디 맥베스>. 그 다음, 소설 다시 읽다가 알았다, 최근에 영국식으로 번안된 영화가 나왔음을. 트레일러만 봤는데, 아니 저렇게 작고 뚱뚱하고 못 생긴(!) 여주라니, 흑. 하지만 짧은 화면 속에서도 금세 연기력과 표정이 빛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화를 보진 않았으나, '레이디 맥베스'는 '레이디 맥베스'(셰익스-어의)와 '레이디 채털리'의 종합에 가까운 느낌을 주려나? 아무튼 러시아의(오룔 현(도) 므첸스크 군의) 레이디 맥베스와는 다른, 그 나름의 매력을 가지고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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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코프는 말하자면 스펙트럼이 넓은 작가였다. 소위 민초가 작품의 주인공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작품들은 따라서, 대개 민중의 지혜(의뭉스러움/해학이 돋보임), 심지어 성스러움을 다루고 각종 성자와 종교 모티브가 많다. 심지어 도스-키의 <악령>과 같은 반(안티) 니힐리즘 소설, 즉 이데올로기(정치) 소설도 두툼하게 두 권이나 썼다. 그럼에도(!) 후대의 독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은, 역설인가, 열정과 죄악과 파멸을 다룬 <레이디 맥베스>이다. 어제 다 읽은 소설을 지금 막 다 정리했는데, 명불허전이다, 읽어보면 왜 그런지 안다. 어찌나 실감나게 썼는지, 나도 연애에 빠지고 싶을 정도, 간만에 그런 충동을 느꼈다!^^;
그런데 작가는 유감일까? 자신이 이 작품의 작가로 남은 것이? 그러게, 운명(자신의 몫)을 누가 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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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든 생각. 이 소설의 키워드 중 하나는 권태. 그 다음은 열정. 그 다음은 죄악. 또 하나 눈에 뜨이는 것은 카테리나가 책을 안 읽는다는 점. 세르게이가 그녀를 처음 꼬실 때 쓰는 수법도, 책을 빌리러 가는 것. "난 책 안 읽어, 나한테는 책 없어."(?) 그럼 뭐가 있지? 책이 없기에 더더욱, 욕망은 말하자면 '모방/매개' 없이 고속도로로 무한질주한다. 그만큼 직접적, 즉흥적, 한마디로 러시아적이다. 여기서, 떠오르는 소설은 응당 <마담 보바리>.
이건 프랑스식 지성주의의 발현일까. 에마 보바리가 책을 좋아한다는 점은 반드시 강조되어야 한다. 그녀의 욕망은 이식된 것일 수 있다. 덧붙여 꾸미는 것, 몸치장을 그녀는 무척 좋아한다. 소위 '된장녀'스러운 이 측면에 또한 미학을 향한 그녀의 끌림이 반영되어 있다. 반면, 카-나는 그게 없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책도 읽지 않고 몸치장에 열을 올리지도 않는다. 자연과 한 데 어우러져 오직 세르게이를 탐하는(!) 데만 집중한다. 여성이 이토록 도발적으로, 또한 범죄적으로 욕망(열정)의 주체로 나오는 19세기 소설이 잘 없을 듯하다.
그럼에도, 그녀가 범하는 네 개의 살인 중 공동상속자인 소년을 죽이는 것은, 정말이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막막한 독서>인가, 어느 블로그에 정리가 잘 돼 있었다.) 1번과 2번 살인까지야 그렇다 쳐도(시아버지, 남편 등) 고마까지, 그것도 거의 오로지 돈 때문에 교살하는 것은 우리의 윤리 감각을 심히 불편하게 만든다. 아마 그래서 영화들에서는 모조리 이걸 빼는 식으로 연출한 듯하다. 다른 한편, 이 대목에서 성자 테마를 그 누구보다도 좋아한 작가 레스코프의 특이성이 보이기도 한다. 꼬마가 교살당하는 그날 밤 할머니를 기다리며 읽는 책이 하필이면 성자전. '성'과 '성'의 근친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보게 되는 대목이다. 아니, 레스코프의 문학 세계 자체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