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또 기회가 주어질까. 그래서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큰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읽고 있고 그러려고 한다. 얼마 안 남았다, 그래서 더 소중한 시간, 최대한 아껴쓰자.

 

 

 

 

 

 

 

 

 

 

 

 

 

 

 

 

 

소설집이 나온 김에 <식물애호>를 다시 읽고, 무척 강렬한 인상을 남긴 <홀>도 상기하고, 작년에 사둔 <죽은 자로 하여금>을 읽었다. 삼분의 일정도는 못 읽었는데, 아무래도 뒤로 갈 수록 필력이 좀 딸린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독자로서는 아쉽고, 같은 작가로서는 안도의 한숨(-_-;;) 같은 것이랄까. 아무래도 편 작가는 단편에 좀 더 강한 것 같고, <홀>은 이야기 자체를 정말 잘 만난 듯하다. 무엇보다도 대사 하나 없는(말을 못하니 ㅠ.ㅠ) 오기와 말 많은(^^;;) 장모의 대립 구도가 참 좋았다. 반면 <죽은...>은 두 남주의 긴장 관계가 조금 약하달까, 그런 느낌이었다. 사회적 의제(내부고발자)를 다루고자 한 듯한데, 얼핏 미야베 미유키가 생각났다.

 

 

 

 

 

 

 

 

 

 

 

 

 

 

 

김영하의 신작 에세이를 읽고 싶어 그의 단편도 다시 봤다. 여전히 잘 쓰지만(말해야 뭣하랴!) 그가 어느 덧 오십대임을 곱씹게 하는, 그런 소재, 그런 주제, 그런 문체. <여행의 이유>는 쭉 읽고 <작가의 말>이 너무 즐거워(꾀돌이 얘기에서 빵~터졌다) 아이들과 공유하려고 한다. 계속 좋은 소설 많이 써주시길, 역시 독자로서 기대하고, 작가로서는 배가 아프고 그렇다. 그대의 재능, 그대의 학구열, 그대의 (겉보기와는 조금 달리^^;) 성실성 등.

 

 

 

 

 

 

 

 

 

 

 

 

 

 

 

 

말하자면 신인 작가도 꾸준히 읽어왔는데, 이번에는 박상영. 아직 안 읽었으나 <... 파스타>와 이번에 저 상 받은 <우럭...>을 읽으려고 한다. 음식, 좋아!^^;; 최은영, 김봉곤, 박민정(??) 등이 약간 내 스타일이 아니어서 조금 울쩍했는데, 이쪽은 모르겠다. 새 작가, 새 작품을 만날 때는 아무튼 기대된다! 

 

 

 

 

 

 

 

 

 

 

 

 

 

 

 

한강의 신작도 읽고 싶어 스캔을 떠놨고 권여선 신작 장편을 읽고 싶은 마음에 <...주정뱅이>를 다시 읽나 고민 중이다. 이러다 보면 (다시) 읽고 싶었으나 결국 못 읽겠는 책들 투성이다. 어떻게 해도 최수철의 신작 장편은 사수하고 싶어서 일단 바로 사뒀는데, 장편인지라 읽어도 나만 읽을 수 있겠다.

 

 

 

 

 

 

 

 

 

 

 

 

 

 

 

 

정녕 그렇지 않나. 읽을 책은 많고 인생은 짧다. 문득,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부질 없나 싶다. 특히 책을 사는 일 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독서-책읽기이지 책-물건이 아니다. 하지만 책을 좋아한다, 라고 말할 때는 대부분 두 가지를 다 포함한다. 그렇게 마흔 다섯살까지 살아왔는데 어느 날 보니, 언젠가 어느 기호학자-노문학자 선배의 지적대로, 이거야말로 물신(숭배)주의가 아닌가 말이다. 헌 책을 갖다 파는 일도 성가시고, 결국 온 집안이 불쏘시개 천천국이다ㅠ.ㅠ

 

아파트 평수는 제한되어 있고 아이 책과 물건이 점점 늘어간다. 정녕 책이 아니라 책읽기를 사야할 때, 이 문제를 고민해봐야 할 때다. 올해 전자북  인세가 작년의 두 배여서 깜짝 놀랐다. 물론 종이책 인세에 비할 바 없을 만큼 약소한 금액이지만, 현재 독서 시장의 흐름을 보여주는 대목인 듯하다. 물건(이 경우엔)을 집에 쌓아두는 일의 부질함. 모든 것을 데이터로.(이걸 좀 더 세련되게 표현할 수 없나 -_-;;) 초등학교 가정통신문도 앱으로 오는 세상이다. 방과후수업도 대부분 앱으로 신청. 이런 유의 사이버(??) 세계를 살게 될 줄,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거창의 산골, 75년의 나는 생각도 못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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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수업 준비차, 사실상 처음으로(이게 놀라운 대목이다!) 레스코프를 읽는다. 19세기(후반) 러시아 소설가라면 우리는 도-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체호프 정도만 알지만, 본국에서는 곤차로프, 쉐드린, 레스코프 등도 (학자들만^^;) 적잖이 읽는다. 실상 지난 세기의 문학은 본토에서도 그리 많이 읽히기 힘들다. 이건 당연지사. 우리는 이광수의 <무정>, 염상섭의 <삼대>,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혹은 <감자> 등등의 단편), 이상, 김유정, 현진건 등을 얼마나 많이 읽나. 이 점에서는 러시아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하지만 학교, 즉 국문과라면, 특히 대학원이라면 사정이 좀 다르다. 19세기 전공자라면 응당, 곤-프, 쉐-린, 레-프 정도는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도 한시절에는(러시아 유학 시절인데) 열의에 가득 차 전집도 다 사고 수업도 찾아듣고 정독, 완독까지는 아니어도 통독, 발췌독 등을 하곤 했다. 지금은 국내에 번역도 다수 나와 있다. 귀국 이후 읽어봤으되 크게 감흥이 없거나(-_-;;) 감흥이 있어서 수업에서도 다뤄 봤지만 학생들의 감흥까지 이끌어내기는 힘든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무식해서? 천만의 말씀!!!

 

인생은 짧고 세상에 읽을 책은 너무 많다. 그렇기 때문이다.  

 

문득 깨달았지만, 19세기 러시아 소설 전공자로서 레스코프를 읽는 마음가짐은, 우선은 도리의 차원이다. 왜냐면 읽을 책,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ㅠ.ㅠ 하지만 도리를 다하는 차원에서 일단은 뒤져보고 쭉 꼼꼼하게 읽는다. 보다시피, 국내 번역서는 모두 이상훈의 것. 언젠가 오다가다 한 번쯤 마주친 것도 같은데(삼십대 초반 박사 시절에는 학회에 자주 갔으니까), 이렇게 맛깔스러운 번역과 성실성(계속 공부를 하고 계셨구나!)에도 불구하고, 참 쉽지 않다,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란. 역자의 이력이 특이하다, 독일에서 학위받으셨다.

 

 

 

 

 

 

 

 

 

 

 

 

 

 

 

 

 

 

 

 

 

 

 

 

 

 

 

 

내가 작가 레스코프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사실, 학교 강의실에서가 아니라(유학 가서 처음 알았는데, 그도 그럴 것도 제대로 된(?) 19세기 소설가 전공자가 우리 과에 없었다)  벤야민의 책을 통해서였다. 아마 '스카즈'(이야기/이야기꾼) 얘기를 하면서 레스코프를 소개했던 듯한데, 조만간 다시 읽어보려고 한다. 그 다음은, 국내에 <마이 러브 카티샤>라고 소개된, 당시로선 엄청 야하게 느껴졌던 영화를 통해서였다.

 

 

전에도 한 번 썼지만, 여주를 맡은 배우가 너무 이지적이어서 좋았고(여주의 이름은 잉게보르가 답쿠나이테, 성이 너무 힘들다 ㅠ.ㅠ), 남주의 연기와 침묵이 좋았다. 엄청 야했고 그녀의 집착이 좀 이해가 안 됐지만(2-3학년 때 봤던 듯하다)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 영화 자체는 거의 번안된 것이고, 원작과 비교할 때 남자의 캐릭터에 무게를 더했다. 소설 속 남주(세르게이)는 말이 너무 많고 너무 야비하다, 그렇더라, 흑.

 

그 다음,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레이디 맥베스>. 그 다음, 소설 다시 읽다가 알았다, 최근에 영국식으로 번안된 영화가 나왔음을. 트레일러만 봤는데, 아니 저렇게 작고 뚱뚱하고 못 생긴(!) 여주라니, 흑. 하지만 짧은 화면 속에서도 금세 연기력과 표정이 빛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화를 보진 않았으나, '레이디 맥베스'는 '레이디 맥베스'(셰익스-어의)와 '레이디 채털리'의 종합에 가까운 느낌을 주려나? 아무튼 러시아의(오룔 현(도) 므첸스크 군의) 레이디 맥베스와는 다른, 그 나름의 매력을 가지고 있을 듯.  

 

*

 

레스코프는 말하자면 스펙트럼이 넓은 작가였다. 소위 민초가 작품의 주인공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작품들은 따라서, 대개 민중의 지혜(의뭉스러움/해학이 돋보임), 심지어 성스러움을 다루고 각종 성자와 종교 모티브가 많다. 심지어 도스-키의 <악령>과 같은 반(안티) 니힐리즘 소설, 즉 이데올로기(정치) 소설도 두툼하게 두 권이나 썼다. 그럼에도(!) 후대의 독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은, 역설인가, 열정과 죄악과 파멸을 다룬 <레이디 맥베스>이다. 어제 다 읽은 소설을 지금 막 다 정리했는데, 명불허전이다, 읽어보면 왜 그런지 안다. 어찌나 실감나게 썼는지, 나도 연애에 빠지고 싶을 정도, 간만에 그런 충동을 느꼈다!^^;

그런데 작가는 유감일까? 자신이 이 작품의 작가로 남은 것이? 그러게, 운명(자신의 몫)을 누가 알랴.

 

*

 

이번에 든 생각. 이 소설의 키워드 중 하나는 권태. 그 다음은 열정. 그 다음은 죄악. 또 하나 눈에 뜨이는 것은 카테리나가 책을 안 읽는다는 점. 세르게이가 그녀를 처음 꼬실 때 쓰는 수법도, 책을 빌리러 가는 것. "난 책 안 읽어, 나한테는 책 없어."(?) 그럼 뭐가 있지? 책이 없기에 더더욱, 욕망은 말하자면 '모방/매개' 없이 고속도로로 무한질주한다. 그만큼 직접적, 즉흥적, 한마디로 러시아적이다. 여기서, 떠오르는 소설은 응당 <마담 보바리>.

 

 

 

 

 

 

 

 

 

 

 

 

 

 

 

이건 프랑스식 지성주의의 발현일까. 에마 보바리가 책을 좋아한다는 점은 반드시 강조되어야 한다. 그녀의 욕망은 이식된 것일 수 있다. 덧붙여 꾸미는 것, 몸치장을 그녀는 무척 좋아한다. 소위 '된장녀'스러운 이 측면에 또한 미학을 향한 그녀의 끌림이 반영되어 있다. 반면, 카-나는 그게 없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책도 읽지 않고 몸치장에 열을 올리지도 않는다. 자연과 한 데 어우러져 오직 세르게이를 탐하는(!) 데만 집중한다. 여성이 이토록 도발적으로, 또한 범죄적으로 욕망(열정)의 주체로 나오는 19세기 소설이 잘 없을 듯하다.

 

그럼에도, 그녀가 범하는 네 개의 살인 중 공동상속자인 소년을 죽이는 것은, 정말이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막막한 독서>인가, 어느 블로그에 정리가 잘 돼 있었다.) 1번과 2번 살인까지야 그렇다 쳐도(시아버지, 남편 등) 고마까지, 그것도 거의 오로지 돈 때문에 교살하는 것은 우리의 윤리 감각을 심히 불편하게 만든다. 아마 그래서 영화들에서는 모조리 이걸 빼는 식으로 연출한 듯하다.  다른 한편, 이 대목에서 성자 테마를 그 누구보다도 좋아한 작가 레스코프의 특이성이 보이기도 한다. 꼬마가 교살당하는 그날 밤 할머니를 기다리며 읽는 책이 하필이면 성자전. '성'과 '성'의 근친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보게 되는 대목이다. 아니, 레스코프의 문학 세계 자체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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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간에 바흐친을 잠깐 생각한다. 그를 잠깐 다시 읽었다. 아니, 훑어보았다. 대학, 대학원 시절에는 번역이 많지 않았고 원서를 읽는 데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다. 지금은 번역이 많다, 그런데 이제는 많이들 읽지 않는다. 그런 것이다.

 

 

 

 

 

 

 

 

 

 

 

 

 

 

 

 

 

 

 

 

 

 

 

 

 

 

 

 

이미지가 중구난방인데 아무튼 그가 쓴 책도, 그에 대해 쓴 책도 적다고는 할 수 없지 싶다. 공부를 하려면 이전보다 더 좋은 여건이 되었음에도, /소년이로 학난성, 이라는 말이 왜 떠오르냐 ㅋㅋ/ 그를 다시 읽기에는 너무 늙어버렸다. 잠깐 들춰보니, 또 대학원생들의 발제문을 보니 그 옛날이 떠올랐다. 그의 말들, 그를 좋아했고 나름 탐독했던(나는 물론 '도..키 시학'을 제일 좋아했다) 시절 속의 나. 

 

아마 한국어로 제일 먼저 읽은 그의 책은 물론 <도..키 시학...>이고, 그 다음은 창비판 <장편소설과 민중언어>이다. 무척 절묘한, 놀라운 제목이 아닐 수 없다! 당시 한창 소설을 쓰고 또한 소설 이론 공부에 열을 올리던 때라, 루카치, 골드만은 물론 각종 서사학 책들을 마구잡이로 들추던 시절이라, 뭔 말인지도 잘 모르면서(-_-;;) 힘차게(!) 읽었던 듯하다. 다시 보니... 

 

글쎄, 소설을 쓰는 데 있어 소설론 공부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론과 실제. 소설을 잘 쓰려면 소설을 많이 읽어야 한다, 이건 맞지만, 소설론까지? 글쎄, 그건 오히려 시간 낭비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십대후반, 이십대의 나는 소설가를 꿈꾸었지만 동시에 인문학자를 꿈꾸었기에, 그 점에서는 또한 그런 공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즉, 소설을 잘 쓰기 위해서, 이기도 했지만, 그저 이론적으로 소설에 대한 표상을 갖고 싶었기에 공부한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대략 내가 유학 가 있을 때 나온, 나의 동기의 석사 논문이 바흐친의 라블레론에 관한 것이었다. 겸사겸사 읽어보려고 다운 받았다. **일까지 볼 수 있다고 기한이 정해져 있다. 좀 읽었으나 컴퓨터(혹은 스마트폰) 화면으로 보는 것이 힘들어, 도서관에 가서 열람을 요청했다. 아, 이제는 학위논문 종이책은 오직 보관용이고, 열람(읽기)은 오직 파일 형태로만 가능하다고 한다. 종이로 보고 싶으면 그 파일을 출력해야 한다. 이렇게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이다. 이제야 안 것이 오히려 놀라운가.

 

바흐친의 라블레론은 번역본으로 러시아에서 읽은듯하다. <가르.. 팡타...>는 귀국해서 읽은 듯하다. 생각만큼 흥겹지도, 재미있지도 않아서 놀랐다! 저 책에서 그로테스크, 웃음, 생성, 민중, 생명, 유쾌한 뒤집기, 패러디 등을 본, 그리고 그것에 대해 쓴 바흐친의 지성과 필력이 오히려 감탄스러웠다. 최근에 나온 바흐친 연구서도 들추어 보았다. 무척 공들여 쓴 책, 잘 쓴 책이다. 문제는 사랑인데, 연구 대상에 대한 사랑이 절절이 느껴졌다. 저자 역시 나의 동학(학번으론 후배)이다. 우리가 얼마나 힘든(쓸모 없는 -_-;;) 학문을 하고 있는지, 새삼 깨닫는다. 학문이란 본디, 외로운 것이다. 그 고독 속에서 찬연한 연구-공부의 꽃을 피워야 하는데...음...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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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빴다. 3월 내내, 바빴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전.평.>을 완독했기 때문이다. 인생의 시즌별로. 맨 처음은 십대, 고등학교 때. 박형규 번역, 사전판형(?)으로 읽었다. 이번에 새롭게 나왔으나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싶다.

 

 

 

 

 

 

 

 

 

두번째, 이십대, 대학 시절, 한학기 동안 톨스토이 수업  들으면서 다시 읽었다. 범우사판이었는데, 이 역시 박형규 번역이었나 보다.(이철 번역인 줄 알았네 -_-;;)

 

세번째, 삼십대, 귀국 하고 수업 준비하면서. 역시 같은 번역. 하지만 이제는 학생이 아니라 선생으로서 읽었는데, 그때문에 더더욱 고생했다. 학생은 수업 준비를 안 할 수 있지만 선생은 그럴 수 없다. 문자 그대로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수업을 한 번 휴강했던 기억이 있다. 다른 한편으론, 그만큼 완독과 정독을 향한 의지가 강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 사십대 중반, 네 번째 완독이자 정독이다. 그 간의 세월을 증명하듯, 새 번역이 나왔다. 워낙 중요한 작품이기에 새 번역에 대한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고, 또 그랬기에 아쉬움도 좀 크긴 하다. 역자가 70년대생인데, 아, 이 나이도 이제는 중년이다 ㅠ.ㅠ  사실 이쪽, 저쪽에서 다 번역 의뢰를 받았던 작품인데, 선뜻 손대지 못했고 결과적으론 잘 했다고 생각한다. 완독을 하는 것도 힘든 작품을, 번역까지 어찌 하랴. 인생이 너무 짧다, '도리' 차원에서 논문 한 편 쓰고 나도 빨리 소설 써야지^^;   

 

 

 

 

 

 

 

 

 

이번에 새삼 놀랐다. 나는 내가 <전쟁과 평화>를 아주 속속들이 안다고 자부했는데, 헐, 새로워 보이는 장면이 왜 이리 많나. 등장인물이 워낙에 많기도 하지만, 이번에 새로 알게 된(-_-;;) 인물도 있다. 그러게 겸손해져야지. 다른 한편으론, 이제 와서 뭘 어떡하랴. 기왕지사 알던 놈들이나 잘 건사해야지. 그럼 슬슬 원본을 훑어보기로 하자. 분량 앞에서 좀처럼 주눅들지 않는 나도 흔들린다, 후덜덜 ㅠ.ㅠ

 

*

 

2학년이 된 아이가 학교를 잘 다니고 있다. 수학도 잘 하고 알림장도 잘 쓰고 국어 발표도 잘한다. 음, 그런데 이건 담임 선생님 생각이시고(^^;;) 엄마인 나는 공개 수업 갔다 와서 무척 속이 상했다. 수학만 풀었지, 국어 교과서가 완전히 새 책이고, 작문을 전혀 하지 못하고 바보 짓- 과잉 행동- 많이 하고 분위기 파악 못하고 바보 같이 웃고 지시 수행 잘 안 되고 굼뜨고 등등.

 

그런 엄마의 욕심에 철퇴를 가하듯, 지난 금요일 새벽 2시 26분부터 시작, 10시간 동안 총 3번의 경련을 했다. 119를 불렀으나 경련이 멎고 의식도 돌아와서(말을 해서)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두 번째 경련에서(아침 8시 58분) 응급실 갔다. 응급실에 있는 동안 한 번 더 해서 총 세 번. 1번 경련은 자다가 한 것인데,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겠다. 열도 없어서 더 그랬다. 하지만 2번 경기 이후(이빨이 빠졌는데ㅠ.ㅠ 다행히 유치였다) 병원 도착 하니 38도, 3번 경기 직후 40도 넘어서 결국 '바이러스 감염으로 열성 경련'으로 진단되었다. 마른 경기가 아니라니 천만다행이었다..ㅠ.ㅠ 그럼에도, 이제는 열성 경련도 하지 않을 나이가 되었는데 계속하다니, 역시 '아픈 아이'였던 것이다..ㅠ.ㅠ

해열제가 잘 듣지 않아 입원실로 올라갔다. 당일 밤에, 그래도 열은 잡히는 양상을 보였다. 아침, 밥을 먹는다. 앗, 집에 가야지! 오줌 누겠다고 화장실도 자주 간다. 부축을 해줘야 하지만 상태가 좋다. 아싸, 다 나았다! 하지만 이건 엄마 생각이고, 완전 쫄아버린 아빠와 젊은 주치의의 생각은 또 달랐다. 실랑이 하다가 반나절 다 보내고 오후 늦게야 퇴원, 도착하자마자 잠 드는 아이를 보며 역시 집이 편하구나, 실감했다.

 

기념 삼아 사진을 올려둔다. 아이가 많이 자라서 한 침대에 같이 자기가 힘들 정도였다. '전쟁과 평화'. 전쟁 이후에 찾아오는 평화의 소중함! 혹은 전쟁과 전쟁 사이에 끼어 있는 평화는 커피우유 속 바닐라시럽처럼 달달하다. 아이는 다음 주 월요일부터 등교했다, 나도 그랬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뒤인 오늘, 금요일, 감기에 걸려 좀 누워 있었으나 심하게 앓을 것 같지는 않다. 이 평화를 만끽하도록 하자, 조심조심.

 

<전쟁과 평화>의 마지막 장면, 나타샤-베주호프 부부, 마리야-니콜라이 부부가 모두 한자리에 있다. 여기에 동참한 니콜라이 볼콘스키 소공작(15세가 되었다!)의 상념이, 역사 관련 잡설을 빼면, 사실상 소설의 마지막이다. 이 역시, 이번에 읽으면서 새롭게 발견한, 혹은 새삼 깨달은 것이다. 역시, '아이'에 대한 대작가의 배려! 아이를 낳지 않으면 '이야기-역사'(history)는 없다. 음, 나도, 그래도, 하나는 낳았는데(^^;) 솔직히 키우기 너무 힘들어서 정말 남한테 미루고 싶은 일이다 -_-;; 이제 남은 인생은 공부를 좀 하고 싶은데, 흑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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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직은 방학이라 좀 느긋하게 읽는 나폴레옹 평전에서 그의 사생활 부분.

 

 

 

 

 

 

 

 

 

 

 

 

 

 

"점심 식사는, 황제가 잊어버리거나 받아쓰는 작업으로 밀리지 않을 경우, 10시 정각에 했다. 아침 인견이 끝나면 다시 집무실로 돌아가 일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점심 식사는 주로 작은 테이블에서 혼자했다. 궁정 사무장 한 사람만 참석하고 급사장 뒤낭이 서비스를 한다. 나폴레옹은 소스가 묻을까 걱정하는 일 없이 격식을 차리지 않고 빨리 먹는다. 그러다 보니 손으로 먹는 경우도 있다. 프로방스식 닭고기 요리를 좋아해서 마렝고라는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양고기구이나 갈비구이, 생선튀김, 이탈리아 파스타, 그리고 강낭콩이나 렌즈콩도 좋아했다. 빵에 대해서 말고는 음식에 대해 까다롭지 않았다. 여러 메뉴 가운데서 쉽게 골랐다. 반주로는 부르고뉴산 와인 샹베르탱에 물을 타서 마셨다. 나폴레옹은 식도락가도 아니고 고급 포도주 애호가도 아니었다. 식사는 에너지를 충원하기 위한 것일 뿐이고 15분이면 끝났다."(334-335)

 

정말 저렇게 살았을 법하다. 정녕 쌍놈(!)의 식사법. 머슴들이 저렇다, 후다닥 먹고 또 일하다고 잠깐 시간 나면 먹거나 눈 붙이고 또 후다닥 일하고. 보통 나폴레옹 하면 수면법이 유명한데 대략 하루 4시간 정도 자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중간중간 잠을 보충하는 식. 의도한 측면이 없지 않겠지만 그의 신체적 흐름, 직업의 특수성(군인 - 때론 며칠씩 철야), 성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 식의 수면에 저런 식사라면, 응당, 위장병이 없을 리 없다. 요즘처럼 위내시경 하면 만성위염, 뭐 이런 거 아닐까 싶다. 식사의 즐거움, 먹는 기쁨, 이런 것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저 부분을 읽으며 나의 식사법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고등학교부터 점심 도시락을 친구들과 함께 먹어본 적이 없다. 왕따? 절대 아니고, 오직 그 시간도 아까워서, 딱 저런 이유. 정녕 "쌍놈"의 자식답다. 지금은? 오히려 반대다. 최대한 하루 한 끼는 맛있게, 천천히 먹으려고 한다. 결과는? -_-; 지금도 못 참는 건 밥 늦게 먹는 사람과 식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 아이가 그렇다, 이런 식의 천벌.^^; 밥 먹는 속도만 놓고 보면 우리 아이야말로 제국의 황제 수준이다.  

 

아무튼 이런 평전을 쓰려면 저자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연구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 그를 둘러싼 무수한 평가들을 섭렵하고 자신의 입장을 세우고 엄청난 서지, 정보를 정리 요약하고 등등. 한동안은 그놈하고 같이 사는 격. 스탈린, 히틀러가 나쁜 놈(!)인 줄 모르는 사람 어디 있나, 하지만 연구자이자 평전 작가는 그와는 다른 지점에 서서 보다 핵심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는 누구인가, 그의 탄생과 성장을 가능하게 한 역사적인 원동력은 무엇인가 등등. 이 점에서 이 책을 꽤 쓸만하다. 한 권 더 주문했는데, 식탁에 얹힌 모습을 보고 남편의 한 소리. 심지어 한 손에 들어보기도 한다.

 

- "이건 뭐야, 도둑 들어 오면 쳐죽이려고 샀냐? 너는 들지도 못하겠다."

 

그러게 나도 저렇게 두꺼운 줄 알았으면 안 샀을 걸. ㅠ 그래도 어쩌냐, 샀으니 들춰봐야지. 다 본 다음에는 팔든지 버리든지, 처분해야 한다. 요즘은 책을 빨리 처분하려고 어떻게든 읽으려/만지려 한다. 무덤에는 돈도 못 들고 가는데 하물며 책이야 말해서 뭣하랴. 도서관이 제일 싫어하는 것도 기증도서란다 ㅠ.ㅠ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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