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고독 속으로 도피하라

 

 

 

최근에 사망한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의 사진 속에서 가로로 꽂힌 어마어마한 규모의 장서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이 고양이였다. 유학을 러시아에서 했던 나에게 고양이는 개만큼이나 친근한 동물이다. 20012월 말, 전화번호와 주소 한 줄만 달랑 적힌 쪽지를 들고 눈 언덕이 된 모스크바 거리를 걸어, 함박눈을 맞으며 노교수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러시아의 교수들은 개인 연구실 없이 집이나 도서관에서 연구한다. 현관, 이어 복도 같은 공간을 지나(러시아는 아파트가 우리 같은 거실 형이 아니다) 안으로 들어갔다. 맨 안쪽, 햇볕이 잘 드는 고즈넉한 연구실, 넓은 나무 책상 위에 큼직한 줄무늬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는 소파로 옮겨갔다. 울음소리는커녕 사부작대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가구, 카펫, 책 같은 무생물과 늙은 호모 사피엔스 한 쌍의 사이 어디에 위치한 경계적이고 중간적인 존재랄까. 비단 인문학자뿐만 아니라 고도의 집중력과 창의력을 요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고양이만큼 같이 살기 좋은 존재는 없는 것 같았다.

 

 

 

 

 

 

 

 

 

 

 

 

 

 

 

기숙사 생활이 좀 안정되었을 때 고양이 한 마리를 샀다. 그 무렵 내 삶의 벗은 이렇게 둘, 담배와 고양이였다. 칼 라거펠트의 고양이와 비슷한 종인 샴 고양이 계열이었다. 발끝보다 약간 위쪽에 거무스름한 무늬가 있고 도톰한 앞발 끄트머리는 새하얀 털장갑을 낀 모양새였다. 또 눈 주변이 짙은 회색빛이어서 너구리를 닮은 구석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눈이 무척 아름다웠다. 샴 고양이 특유의 보랏빛과 갈색이 감도는 동그란 눈동자 주위로 터키옥을 섞어놓은 것 같으면서도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푸른빛이었다. 3킬로그램 정도 되는 이 부드럽고 따뜻한 생명체에게 꼬찍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를 죽이다(<내 아내의 모든 것>, 문학과지성사, 2005)에 그와의 인연을 제법 길게 써보기도 했다. “놈은 나의 취침 시간과는 무관하게 제가 자고 싶은 시간에, 자기가 웅크리고 싶은 장소 아무 곳에서나 잘도 잤지만 밤이면 어김없이 침대로 올라왔다. 주로 내 베개 위나 이불 위에서 잠을 청했는데, 간혹 내 다리 사이로 기어 들어오거나, 새우처럼 웅크린 내 몸의 안쪽으로 들어와 엉덩이로 나를 살짝 밀면서 자리를 잡는 경우도 있었다.”(222)

 

내가 집에 없는 동안에도 꼬찍은 허전해하기는커녕 별로 심심해하지도 않는 눈치였다. 내가 돌아오면 몸을 비비거나 더러 안기기도 했지만 주로 배가 고파서였다. 그런 최소치의 욕구만 충족되면 절대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간혹 논문이나 신문을 찢어놓거나 방안 산책을 즐기다 창턱 위의 책을 떨어뜨리는 정도의 사고가 전부였다. 꼬찍 특유의 우아한 심드렁함 내지는 무심함은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고양이 특유의 야생성과 무관하지 않을 법하다. 그 점이 나는 좋았는지도, 적어도 편했는지도 모르겠다.

 

러시아를 떠나며 꼬찍과는 헤어졌지만 담배는 그대로 가져왔고 그 때 만난 사람과 십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이듬해, 서른일곱 살에 아이를 낳으면서 세상이 바뀌었다. 꼬찍과 함께한 삶에서 꼬찍은 스스로 자연스레 지워졌지만, 아이가 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삶에서 이 존재를 지운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천인공로할 일이었다. 요컨대, 아이는 다르다. 그 다름의 핵심이 무거움이자 촌스러움이다. 2010121, 아이가 생긴 것을 알고서 담배를 끊었고 그 이후 쭉 비흡연자로 살고 있다. 지금처럼 비교적 명징한 정신으로 읽고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언젠가는 기필코 죽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이다. 조만간 출간될 독서 에세이 묶음 책의 서문에 그래서, 이런 사족 한마디를 달아본다. 내가 가끔 아이보다 책을 더 사랑한다고 해서 엄마가 아닌 건 아니다. 밤낮을 잊고 몇날며칠을 담배와 단둘이 골방에 틀어박혀 있던, 아이 이전의 황금시대가 너무 그립다.” 무릇 공부를 하려는 자, ‘부엌을 멀리하고 자신의 고독속으로 도피하라고 했거늘. 그 고독 속에서 담배와 제2의 꼬찍과 함께하는 삶은 정녕 영원한 노스탤지어가 돼 버린 것인가.

 

<민음사, ?? 봄>

 

*

 

점심 먹고 나서 소설을 좀 더 써-고쳐 보려다가 막혀서 몇 초간 망연자실했다가, 갑자기 청탁 받은 원고가 있음을 깨닫고 부리나케 써보기 시작했다. 아니, 겨우 2-30매만 채우면 되는데 이걸 왜 안 쓰고 있었지? 뭘 써도 소설 보다는 쓰기 쉽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 참에 지난 봄에 쓴 원고가 생각나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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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학교 다닐 때는 객관식 문제는 '사지선다'였다. 넷 중 하나 고르기. 요즘 아이들은 '오지선다'의 문제를 푼다. 내는 사람도, 푸는 사람도 힘들겠다. 사실 인생에서는 몇지선다든 다 힘들다. 이지선다가 제일 힘들 수도 있겠다. 탈락되는 것이 하나밖에 없으니 그 하나는 참 서운하겠다. 핵심인즉, 어차피 선택되는 건 하나. 이거 공개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올려본다.

 

    

 

 

 

 둘 다 프랑스와즈 사강인데, 이미지는 예쁘지만 잘못하면 그녀의, 혹은 그녀에 대한 책인 줄 알 것 같아 탈락(?)시키려고 한다. 그녀가 얼마나 예뻤는지, 새삼 실감한 이미지. 한편, 유감스럽게도,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사강 소설에 대한 글은 저작권 문제로 싣지 못했다.

 

 

딱 보자마자 꽂힌 이미지는 이것. 게다가 이렇게 비스듬히 포착한 뒷모습-옆모습, 좋다. 그 다음, 담배는 모름지기 연기가 있어야 한다. 사실 담배 피우는 여자(삼사십대)의 이미지는 내가 부탁한 것인데, 2010년 12월 1일 담배를 끊은 이후, 나는 진정한 담배 애호가, 심지어 담배성애자(??)가 된 것 같다.^^;; 지금 이 순간도 피우고 싶다, 저 담배.  담배를 실내에서 마음껏 피울 수 있는 그런 집이 우선 필요하겠구나, 요즘 같아선.

 

        

 

세 번째 계열들. 너무 구조적인 느낌이 강해서, 학술서, 연구서에 좋겠다. 러시아문학연구서 느낌은 아니지만, 그 책을 낼 때 이런 이미지면 좋겠다.

 

제목은, 나로서는 이례적인데, 돌고 돌아 내가 맨 처음 생각한 제목으로 간다. 이례적, 이라 함은 보통 책 제목은 장르 불문, 편집자가 고른 걸로 낙착되었기 때문이다.

 

*

 

내가 이 원고를 잊고 있던 순간에도 그들은(어쩌면 적들?^^;) 일하고 있었다. 그들이(역시나 적들?^^;) 나를 잊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그래서, 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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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좋다 보니 영화(드라마)로도 많이 만들어졌고 쭉 봐왔다.

 

 

 

 

 

 

 

 

 

 

 

 

 

킹비더의 영화는 다 빼고 오드리 햅번을 위한, 즉 나탸샤를 위한 영화. 세르게이 본다르축의 영화는 역시나 다 빼고 본다르축-피에르를 위한 영화. 혹은 대조국 전쟁을 위한 영화, 라고 해도 되겠다. 그럼에도, 나탈리아 사벨리예바, 굉장히 예뻤던 것으로 기억된다.(그녀는 소피아 로렌 주연의 <해바라기>에서 남주가 러시아에서 함께 사는 여자(문장ㅠ.ㅠ)의 역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미루어 두었던 BBC 버전 <전.평.>을 본다. KBS, 러시아 1 채널(^^;;)에서도 방영되었다. 재밌다!^^; 역시, 젊은-새- 버전을 따라가기는 힘든 것 같다 ㅠ.ㅠ 나는 그래도, 옛 버전을 볼 의향이 없지 않아 있는데, 수업 시간에 활용해본 결과, 정말 어떤 학생도 저 옛 버전을 좋아하지 않는다. 배우들은 너무 '올드'하고 화면이며 녹음이고 다 엉망이다. 반면, BBC 버전은 이게 새 것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우선 '보임성'(??)이 있다. 현재 3분의 2정도 봤는데, 알알이, 속속들이 정말 많이 대사와 에피소가 박힌 소설을 최대한 다 살리려는 저 영국놈들의 징그러운 노력이 놀랍다. (같은 섬나라인 일본과 비슷하게) 영국의 학구열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남주들은 비교적 캐스팅이 잘 된 것 같지만, 여주들이 왜 이런지 ㅠ.ㅠ 내가 다 울고 싶다. 우선 남주들. 피에르는 최고의 캐스팅인 듯. 소설 속 피에르는 좀 쭈뼛쭈뼛 어색하고 날이 갈수록 뚱뚱해지는 걸로 나온다. 하지만 그의 비만은 결코, 세르게이 본다르축 같은 중년의 비만이 아니다. 그는 겨우 이십대. 게다가 키가 크고 팔 다리가 굉장히 긴 걸로 나온다. 뚱뚱하기보다는 차라리 거구에 가깝달까. 그리고 작가의 분신답게, 무척 귀엽고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는 인물이다. 그의 어리숙함도 이런 장점의 일부이다. 그 다음, 안드레이. 무엇보다도 미남이어야 하는데, 썩 그렇지 못해 조금 아쉬웠고, 정작 미남 배우는 니콜라이 역을 맡았다. 잭 로던인데 <덩케르크>의 공군 역. 니콜라이도 비중이 적지 않은 인물인데 저 포스트에서는 빠졌다.

 

다소 조연으로, 바실리 공작. 저 훌륭한 연기, 저 개성있는 얼굴 누구지? 아주 오래 전에 본 이 영화의 아버지이자 아들. '푸줏간 소년'.  푸줏간의 아들은 결국 푸줏간을 하게 된다는, 알코올 중독자의 아들은 결국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는 에밀 졸라식 세계관. 무척 강한 인상을 받은 영화다.

 

 

 

 

 

 

 

 

 

 

 

 

 

 

다시 건너 뛰어, <전.평.>을 지배하는 세계관이 다름 아닌 저 환경결정론. 바실리 공작은 주색이나 밝히는 허랑방탕한 인간으로, 그러면서 돈 밖에 모르는 속물로 나온다. 오히려 배우가 점잖아(?) 영화 속에서는 꽤 착해(?) 보인다. 적어도 양심 정도는 있는 인물로 나온다. 그가 그 모양이니 그 아들딸도 그럴 거라는 식이다. 특히, 그가 아들 아나톨리와 함께 볼콘스키 노공작을 방문한다고 하자, 노공작이 대뜸 그런다. 애비가 그런 놈이니 아들도 별 수 있겠어, 더 하겠지. ^^;;

 

하지만 소설 속에서 아나톨리와 엘렌(옐레나)은 굉장히 미남/미녀로 나온다. 그런데 정작 배우들은...ㅠ.ㅠ 특히, 엘렌은 겉보기에 굉장히 우아하고 사교술에 능한 귀부인-아가씨 느낌인데, 너무 천박한 연기를 선보여 무척 실망했다. 게다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그녀의 불륜-외도야 나쁜 것이지만, 그녀가 성욕이 강하거나 사교계 생활을 즐기는 것은 결코 부정의 가치는 아니다. 오히려 잘 살려두었다면, 훗날에는, <전.평.>의 맨 처음을 여는 살롱의 여주인이자 사교계의 여왕벌인 안나 셰레르 고관부인처럼 됐을 터. 실제로, 다른 여주들이 너무 안 예뻐서, 그녀(질리언 앤더슨)가 제일 예뻐 보였다 -_-;; 덧붙여, 엘렌은 아이를 안 낳으면 여자도, 심지어 사람도 아닌 저 세계 속에서 그녀 나름의 소신(!)을 갖고 임신을 거부하는 인물이다. 현재의 러시아 같으면 정치인이 되었을 수도...^^;;   

 

원래도 박색임이 계속 강조되는 마리야.(요즘 같으면 서울대 수학과 교수 정도 되지 않았으려나, 싶은..^^;;) 그리고 니콜라이 로스토프.

 

피에르와 나타샤. 이쪽 저쪽 모두 다시 봐도 무척 달뜨는 커플들. 연애에서 결혼으로, 그리고 행복한 결혼생활. 정녕 전원시적인 삶으로서, 톨-이가 인생의 절정을 구가하며 쓴 소설이 맞다. 그 다음(<안나 카레니나>)은 불륜 얘기가 될 수밖에 ㅠ.ㅠ

 마지막 장면은 BBC <제인 에어>(기골이 장대한 제인 에어여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의 <전.평.> 버전 같다.  어쩌면 이보다 더한 해피 엔딩이 없는데, 청년 루카치는 이 소설의 마지막을 왜 그런 우울과 권태, 환멸의 정조에서 읽었던 것인지. 역시 관점의, 입장의 문제인지.

 

 

 

 

 

 

 

 

 

 

 

 

 

덧붙여, 불로소득의 문제. 놀고 먹는 문제. 사람 좋은 로스토프 집안이 보여주듯, 19세기 러시아 귀족의 삶은 둘 중 하나다. 좋은 쪽: 좋게 먹고 마신다 - 손님 접대, 무도회, 파티, 사냥 등. 나쁜 쪽: 나쁘게 먹고 마신다 - 유곽, 방탕, 결투, 도박 등.  결국, 일하지 않고 놀기만 한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비단 19세기 러시아만? 그렇지 않다. 하지만 20세기초 혁명이 제일 먼저 일어난 곳은 러시아다.

 

 

 

 

 

 

 

 

 

 

 

 

 

 

 

 

 

그 와중에 톨-이라는 작가. 99.999퍼센트의 귀족이 아~무 생각 없이 살았건만 그는, 소설 속 피에르처럼, 이것이 틀렸음을 인지한 인물이다. 비록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지는 못했으나(그럴 수가 없다, 자식이 열 셋이다 ㅠ.ㅠ) 적어도 그러려고 시도했던 인물이다. 타고 나길 성욕이 강했고 젊은 날(어쩌면 결혼 생활 동안에도) 소위 '방탕'했으나 그 못지 않게 강한 도덕성, 도덕 감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사회 사업에 대한 꿈이 커서 학교나 공공 시설을 많이 지었고 노년에는 손자, 손녀뻘 아이들과 즐겨 어울렸다. 그들을 위해 쓴 것이 민화. 10대, 20대 독자였던 나는 이런 톨-이를 위선자라고, 이중인격자라고 생각했으나, 30대, 40대 독자인 나는 톨-이가 정말로 위대한 거인임을 알겠다.

 

물론 그럼에도, 놀고 먹는 귀족들의 삶, 오래 보기는 힘들다 -_-;;

왜냐면... 우리 모두 이런 삶을 꿈꾸기 때문이다. 이게 참 힘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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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ssbaum 2019-06-24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툭 내려놓는 글이지만 푸른괭이 님의 관점이 잘 깔린 리뷰 잘 봤습니다. ^^

푸른괭이 2019-06-25 10:41   좋아요 0 | URL
뭘 ‘툭 내려놓는‘ 글로 읽혔을까요?^^;;
 

 

 

 

 

 

 

 

 

 

 

 

 

 

 

 

 

돈 문제에 예민한 편이라 이 부분이 눈에 확 들어온다. 

 

 베주호프 백작의 재산이 막대하긴 했지만, 재산을 물려받고  수입 50 루블을 받게  이후 피에르는 고인이  백작에게서 1 루블을 받던 때보다 돈이 훨씬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는 수입과 지출 상황에 대해 대충 다음과 같이 어렴풋하게 짐작하고 있었다. 영지 전체에 대해서는  8 루블이 지방 의회에 납부되었다. 모스크바 근교의 영지와 모스크바의 저택 유지비, 공작 영애들의 생활비로  3 루블이 들었다. 현금으로 1 5000루블, 그리고 자선 단체에도 그만큼이 나갔다. 백작 부인의 생활비로 15 루블이 송금되었다. 빚에 대한 이자로  7 루블이 나갔다. 이미 개시된 교회 건축에 지난   동안  1 루블이 나갔다. 나머지  10 루블은 그도 어떻게 쓰는지 모르게 없어졌다. 그래서 거의 매년 그는 빚을 지지 않을  없었다(민음사 판, 2, 211)

    

피에르는 키릴 베주호프 백작의 사생아인 지라 상속 자격이 없었으나, 마지막에 극적으로 막대한 유산과 작위를 상속받는다.(황제에게 백작이 청원한다.) 졸지에 부유한 젊은 백작이 된다, 라고 나오는데 이런 추상성(!)은 소설에서 배격되어야 한다. 중요한 건 구체성, 디테일이다. 귀족의 후예답게, 돈 속에 묻혀 살았던 사람답게 톨-이는 이 부분을 거의 무슨 명세서, 영수증처럼 썼다. 지주귀족이 된 피에르에게는 영지 경영 역시 중요한 업무이다. 어쩌면 이게 제일 중요한 것이다. 재산이란 관리하지 않으면 당연히 줄어든다. 아니면 '기법으로서 줄어들기'(?) 같은 기부나 뭐 이런 것도 있겠지만, 그래서 말년의 톨-이 역시 이런 것을 꿈꾸긴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라도 일단은 제대로 된 관리와 증식이 필요하다.

 

1810년을 전후한 상황인데, 연수입이 50만루블이다. 세월이 흘러흘러, 1860년대가 배경인 <백치>.  로고진이 나스타시야 필.-나를 '사는 데' 요구되었던 돈이 스또-뜨이시치, 즉 100,000루블이다. 십만 루블.  1870년대가 배경인 <카라마조프>. 드미트리가 아비를 죽이네 마네 하면 언급하는 돈이 3천 루블이다. 184-50년대(?), 지주 귀족의 아들인 투르게네프가 엄마한테 1년 용돈으로 받은 돈은 6천 루블이다.

 

이 맥락에서 이 소설의 꽃인 나타샤 로스토바. 지참금 없는 가난한 백작 영애에서 모스크바 굴지의 대부호의 아내로, 키릴로바 백작 부인으로 거듭난다. 특별히 하는 것도 없이 모두에게 사랑 받고(by 소냐) 항상 행복한 여자. 어릴 때 읽었을 때는 이런 풍경이 참 싫었지만, 내가 백작 부인 나이가 되고 보니(즉 나타샤 엄마 나이^^;;) 이거야말로 삶의 진실임을 여실히 알겠다. 인간사, 결코 새옹지마가 아니다... 잔혹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꼬마 소공작 니콜렌카(어릴 때의 톨-이를 연상시킨다)의 삶 역시, 여느 고아와는 너무 다를 터.

 

문득 떠오르는 얼마 전 뉴스. 어려서 엄마한테 버림 받고 아빠마저 죽고 고모 가정에서 자랐다가 결혼을 앞두고, 웬 조현병 운전자에 의해 얼토당토 하게 사망한 한 젊은 여성. 죽은 이후에도 스토리는 끝나지 않는다. 30년만에 돈 찾아 나타난 생모라니. 본질과 무관하게, 어떤 댓글대로, 그녀의 인생이 참...  

 

그러게 더더욱 현재의 처지에, 바로 오늘에 만족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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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마지막 수업 준비차 살트이코프-셰드린의 장편소설을 읽는다. 러시아에서 수업 들을 때는 작품 제목이며 내용(요약본-_-;;)이며 공부를 좀 했지만 한국 와서는 제대로 읽을 기회가 없었다. 반 정도 왔다. 아, 이런 소설이었구나. 제목 그대로, 골로블료프 집안의 삼대에 걸친 이야기. 우선 여주는 여지주 아리나.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으나, 딸 안나가 딸 둘만 낳고 죽었다. 그래서 사실상 세 아들(+두 외손녀)의 이야기가 된다. 응당 <카라마조프>가 생각난다. 아닌 게 아니라, 여지주 아리나는 그 탐욕과 이기주의에 있어 과연 여자 표도르(카라마조프)라 할 만하다. 그 다음, 이렇게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가족서사, <전쟁과 평화>를 떠올릴만하다.(19세기 후반, 러시아 문학의 한 풍경을 반영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요약상에서만 그렇고, 소설 속을 깊이 들여다 보면...

 

이건, 아주 부정적 의미로, 상당히 그로테스크한 소설이다. 아리나는 물론 악덕의 덩어리지만, 표도르의 경우와 같은, 긍정의 모멘트, 하다 못해 웃음의 모멘트도 거의, 전혀 없다. 모성이 거의 없는 것처럼, 그래서 돈 몇 푼(이른바 "한 조각")만 던져주는 식으로 나오는데, 아니 세상에 그 돈은 어디서 나오는 거냐. 이런 계기들을 조금씩 다른 관점에서 포착, 묘사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작가는 시종일관 매몰차다. 왜 그런지. 셰드린을 잘 몰라서 잘 모르겠고 앞으로도 계속 모르고 싶다.^^; 이게 대표작인데, 대표작이 이러니 누가 2작, 3작을 읽나.

 

여지주 아리나에 가려, 남지주(즉 주인어른)는 거의 나오지도 않는다. 그 다음 바톤을 받는 자들은 세 아들, 특히 못됐고 그렇기에(꼭 그런 양 나온다) 승승장구하는 차남이다. 장남과 삼남은 방탕하거나 멍청하거나 나약하거나 모두인 부정적 캐릭터다. 후반부 얘기 역시, 전반부와 비슷하게 읽기 불쾌할 것으로 보인다.

 

*

 

그렇다, 불쾌한 독서. 불편함과는 좀 다르다. 그냥 기분 나쁘고 기분 더럽고 읽기 싫은 거다. 과연 '부정'(No!)의 파토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이 소설을 읽으면서 깨닫는다. '부정'이 의미가 있으려면, 오직 또 다른 '긍정'이 담보될 때이다. 이 상호작용을 잘 쓰면 카타르시스, 숭고미, 변증법적 지양 등등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쉽지 않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는 (톨스토이와 더불어) 어느 시대에도, 어느 세상에도 다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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