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1869)와  생활-일상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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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평화: 나타샤 로스토바의 형상과 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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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어떤 여성이든 19세기 러시아 귀족사회라는 시공간적 특수성 때문에 결혼 상품으로서의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들 중에서도 나타샤가 단연코 돋보이는 것은, 첫째 예쁘고 사랑스러운 귀족 여성이며, 둘째, 삶에 대한 반성적 사유 없이 오직 삶을 사는 데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귀족 작가로서는 우선 전자가 중요하다. 번역본에서는 전혀 표현되지 않았지만 <전쟁과 평화>의 상당 부분이 프랑스어로 쓰였음이 강조되어야(김진영, 19-40) 한다. 한마디로, 이것은 귀족(혹은 그런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작가가 직접 첨부한 러시아어 번역의 도움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언어적 진입장벽이 높은 소설이다. 나타샤의 태생이나 가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그녀의 성격이다. 소설의 에필로그까지 염두에 둔다면 남성적 원칙(‘전쟁’)이 여성적 원칙(‘평화)에 의해 극복된다는 것, 여성성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 핵심이다. 나타샤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다산한(아이를 잘 낳는) 암컷 плодовитая самка이라는 점은 그래서 중요하다.

 

 

나타샤는 1813년 이른 봄에 결혼했다. 그리고 1820년 그녀에게는 이미 세 딸과 그녀가 간절히 바라던 아들이 있었다. 요즘 그녀는 아들에게 직접 수유를 했다. 그녀는 살이 찌고 펑퍼짐해졌다. 이 강인한 어머니에게서 예전의 날씬하고 발랄한 나타샤를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얼굴선은 또렷해졌으며, 차분하고 부드럽고 맑은 표정을 띠었다. 얼굴에는 예전에 그녀의 매력을 이루던 그 끊임없이 타오르는 생기의 불꽃이 없었다. 지금은 종종 얼굴과 몸만 보일 뿐 영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직 강인하고 아름다운 다산의 암컷만 보였다.(4, 528)

 

예전의 불꽃이 타오르는 경우는 아픈 아이가 회복되었을 때, 마리야와 함께 안드레이를 회상할 때, 그리고 지금처럼 남편이 오랜 출장에서 돌아왔을 때이다. 이어, 소설은 어린이 방의 부부를 포착한다. 청년 루카치는 유럽의 '환멸적 낭만주의' 소설(<돈키호테>, <마담 보바리> )의 마지막에 톨스토이의 소설을 위치시키고 위대한 순간의 허허로움을 지적하면서 <전쟁과 평화>, 특히 에필로그 부분에 주목한다. “모든 정열과 찾음의 시도가 그 종말을 고한 뒤의 아기방의 조용한 분위기는 문제적인 환멸 소설의 종말보다도 더 서글프고 더 우울한 것”(루카치, 199)이라고 그는 쓴다. 모든 정신적인 것이 동물적인 자연에 완전히 흡수되어 완전히 ()’가 되기 때문이다. 전일성과 총체성(서사시의 시대)의 강박에 사로잡힌 채(Lukacs, 78-94) 분열(소설의 시대)을 읽어냈던 젊은 루카치의 환멸과 권태가 보이는 대목이다. 과연 위대한 순간이후 자연과 관습(사회)의 세계를 굳이, 청년 루카치의 감상대로 따분함과 지루함의 극치로 봐야 할까.

 

 

 

 

 

 

 

 

 

 

 

 

 

 

 

 

 

 

소설을 마저 읽어보면 요절한 안드레이의 아들인 니콜렌카가 나온다. , 피에르를 좋아하고 또 동경하는 그의 마지막 말이 사실상 이 기나긴 소설의 마지막이다. “하지만 피에르 아저씨! ,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 그런데 아버지는? 아버지! 아버지! 그래, 난 그분조차 흡족해하실 그런 일을 해내고 말 테야.”(4, 588) 여기서 환멸적 낭만주의-사실주의 소설의 최고봉인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떠올려 보면, 러시아 귀족 작가의 시선이 냉혹한 만큼이나 따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영미권 연구자의 도식대로 <전쟁과 평화>는 픽션과 역사와 메타역사, 현재와 과거와 영혼의 세 차원을 아우르는(A. Wachtel, 180) 방대한 소설이다. 달리 말해, <전쟁과 평화>는 역사소설(과거)의 외피 밑에 현재의 찬미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얘기하는 소설이다. 여느 유럽 환멸 소설에는 아예 없거나 소품처럼 취급되는 아이()’가 여기서는 큰 의미를 지닌다. 작가 자신처럼 조실부모한 니콜렌카는 (다른 아이들과 더불어!) 이 불멸의 걸작의 유일한 희망이자 가능성이다. 아이 없이, 시간-성장 없이 소설의 2부는 쓰일 수 없다. 톨스토이가 고슴도치였든 여우였든(벌린, 21) 바로 이 점을 소설화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

 

논문 쓸 준비를/공부를 하는 동안, 논문을 쓰는 동안 절실히 깨달았다. 이 글은 <전쟁과 평화>, 어쩌면 그보다는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을 (어쩌면 마지막으로?) 다시 읽기 위해 쓰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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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위에서 전범으로: 페터 한트케, <소망 없는 불행>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페터 한트케이다. 그의 이름은 낯설 수 있어도 관객모독이라면 누구나 알 법하다. 그 덕분에 그에게는 베케트 이후 가장 전위적인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은 듯하다. 1965년에 쓰이고 1966년에 초연된 이 희곡은 고도를 기다리며보다 충격적인데, 우선은 등장인물이 없다. 이른바 등장인물인 배우 네 명에 관한 한, 성별, 나이, 생김새 등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다. 대신 <배우를 위한 규칙들>이 있지만 건달이나 게으름뱅이가 거리를 배회하는 모습이나 슬롯머신 앞에서 도박하는 모습을 관찰할 것처럼 너무 세부적이어서 오히려 추상적이다. 텅 빈 무대 위의 네 배우에게는 말하는 순서와 자세, 말의 분량에 대한 지시가 주어진다. 맨 처음 대사는 이렇다.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이 작품은 일종의 머리말입니다.

 

여러분이 아직 들어 본 적 없는 것은 여기서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직 본 적 없는 것은 여기서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곳 극장에 오면 늘 보았던 것을 여기서는 전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곳 극장에 오면 늘 들었던 것을 여기서는 전혀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17)

 

첫마디부터가 어불성설이다. 기존에 듣고 보지 못한 것도 없고 또 기존에 듣고 봤던 것도 없다면 뭐가 있다는 소리일까? 이후 대사는 이런 식의 오묘한 궤변의 연속이다. 무엇보다도, 배우들은 자기들끼리 말하지 않고 관객을 향해 말한다. 그로써 관객은 모독의 객체-대상이 아니라 연극의 주체로 부상한다. 아무것도 연기하지 않는 만큼 어떤 행동도, 어떤 이야기도 없다. ‘몸짓의 연기 대신 언어의 표현이 핵심이 되는 언어극의 탄생이다. 배우들이 끊임없이 호명하는 여러분은 연극을 존재하게 하는 동력이다. 마지막에는 욕설의 객체가 되지만 그 욕설조차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은유로 가득하다.

관객모독공연은, 한트케의 첫 소설 <말벌들>과 달리, 뜻밖에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지금 읽어도 작가의 젊음과 치기, 미학적 도발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러시아 형식주의,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엿보인다. 에세이 문학은 낭만적이다(1966)의 문학 버전으로서 일종의 순문학 선언, 언어 제일주의 선언으로 봐도 무방하겠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발표된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1970) 역시, 소설이라는 장르의 틀을 고려하면, 전위적인 측면이 강하다.

 

이전에 꽤 유명한 골키퍼였던 요제프 블로흐는 건축 공사장에서 조립공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일하러 가서는 자신이 해고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일꾼들이 모여 있는 대기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마침 오전 새참을 먹고 있던 현장감독이 그를 힐끗 올려다보는 순간 그는 그것을 해고 표시로 이해하고 공사장을 떠났다.(9)

 

어느덧 카프카 소설의 첫 문장처럼 유명해진 이 도입부에서 이미 주인공의 상태가 일반적이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엇 때문에 블로흐는 현장감독의 힐끗시선을 해고 표시로 받아들였을까. 거리를 배회하다가 매표소 여직원과 하룻밤을 보낸 그는 오랫동안 축적되었을 광기와 분노를 기어코 토해낸다. “오늘 일하러 가지 않으세요?”(24) 이 평범한 질문에 맞서는 주인공의 교살 행위에 은근한 공감이 이는 것은 왜일까. 이후 소설은 거의 전적으로 국경으로 도주한 주인공의 불안과 공포를 추적하는 데 집중한다. 소설 내내 대사가 거의 없던 블로흐는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야 골키퍼의 불안을 큰따옴표 속에 담아낸다. 여러모로 독자의 학구열을 자극하는 소설이다.

이런 전위의 근원을 비슷한 시기에 쓴 <소망 없는 불행>(1972)에서 찾아볼 수 있다. “<토요일 밤 A(G)51세 가정주부,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자살.>”(9) 지역 신문 일요일 자 부고란에 실린 기사의 주인공이 화자의 어머니다. 그로부터 거의 칠 주가 지난 다음 그는 어머니의 인생을 복기한다. 슬로베니아계 혈통의 목수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학창 시절에 성적이 좋고 영리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소망 없이 사는 것을 모두가 불행하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소망 없는 불행에 빠지지 않고 뭔가를 배우고 싶다는 욕망을 불태운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배움이 아니라 첫사랑에 관한 것이다. 어머니는 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나치 당원이자 은행원이었던 경리 장교와 사랑에 빠져 임신을 하게 된다. 그녀보다 키도 작고 나이도 훨씬 많고 거의 대머리였던 그는 그녀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유부남이었다. 임신부인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자기를 사랑해온,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아도 상관이 없다고생각한 어느 독일군 하사와 결혼한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였지만 아이에게는 아버지가 필요하다는 의무감, 또 누군가가 자기에게 호감을 보인 사실에 대한 감동 때문이었다.

나머지 이야기에서 화자는 생부든 의부든 다 제쳐놓고 오직 어머니만 회상한다.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벌써 그 당시에는라는 말을 곧잘 하던 그녀의 우울한 삶에서 강조되는 것은 지적인 성향이다. 그녀는 신문을 즐겨 읽고 정치에도 관심이 있고 다양한 독서를 통해 자신의 삶을 곱씹기를 즐긴다. 화자와 함께 책을 읽는 일도 잦다. 크누트 함순, 도스토예프스키, 막심 고리키, 윌리엄 포크너 등 독서 수준도 제법 높다. 어머니가 화자에게 보낸 편지가 그 방증이다.

 

<어제 난 텔레비전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온순한 여자를 보았다. 밤이 새도록 아주 끔찍한 것들을 보았단다. 꿈을 꾸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보았던 거다. 몇몇 남자들이 벌거벗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성기 대신에 창자를 덜렁거리며 달고 있더구나. 121일이면 네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온다. 매일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와 어떻게 같이 살 수 있을지 상상이 안 된다.>(75)

 

어머니의 부음을 받은 다음 날 저녁 오스트리아행 비행기를 탄 화자는 그녀의 자살에 긍지를 느껴서 제정신이 아니었노라고 고백한다. 자살은 그녀의 지적인 인생의 정점처럼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뿌듯한얘기만 있었을까. 가령 화자는, 어머니에게 침으로 아이들의 콧구멍과 귀를 닦아주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침 냄새가 너무 싫었다고 말한다. “이야기를 글로 쓰는 작업을 할 때 가끔 나는 그 모든 솔직함과 정직함이 지겨워졌다. 그래서 약간 거짓말도 하고 진의를 숨길 수도 있는 그런 것, 예를 들면 희곡 같은 것을 쓰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83) 요컨대, 󰡔관객모독󰡕거짓말-기교의 텍스트라면 󰡔소망 없는 불행󰡕솔직함과 정직함의 텍스트다. 그만큼 그에게 출생, 특히 어머니의 존재는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나 싶다.

난해하고 실험적인 작가로 알려진 한트케의 소설과 산문이 의외로 쉽게 읽혀서 놀랐다. 알량한 겉멋과 현학을 고급스러운 문학의 징표인 양 착각하는 일단의 작가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대목이다. 덧붙여, 오늘의 전범은 대부분 과거의 전위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의 문학이 전위-혁신에서 전범-고전으로 갈지는 훗날 문학사가 판단해줄 것이다.

 

 

 

 

 

 

 

 

 

 

 

 

 

 

 

지난 10월(11월?) 민음사 ??에 실은 글이다.  (중간에 표현이 좀 '쎈'(-다고 평가된) 부분은 편집자가 수정했다. 다른 책도 좀 들추었으나 지면이 한정되어 있어 더 쓰지 못했다. 마침 수업에서 (처음으로!)  <고도를 기다리며>를 하려던 참이라, <관객모독>까지 덤으로 얘기해보았다. <고도>, 더 정확히, 공연물, 영상물 대본에 대한 반응 내지는 관심이 높아 다음 학기에도 읽어보려고 한다. 서울대 수업에서 <고도...>를 다루는 일이 있을 줄 몰랐는데, 큰 영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불어 수업을 하면서 알았다, 너무 어려운 텍스트라는 것을. 이런 것도 있어야, 그러나, 공부할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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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나만의 '옥수수밭'이 있다. 옥수수밭 뿐이랴. 들깨밭, 참깨밭, 고추밭, 고구마밭, 심지어 소나무 숲, 대나무 숲, 찔레나무 숲(덤불) 등등 하고 많은 숲과 밭이 있다. 하지만 이런 체험-기억과 소설은 역시 별개인 것 같다. <김승옥문학상...>에 실린 편혜영의 <어쩌면 스무번>을 읽으며 해본 생각이고 가져본 슬픔이다.

 

 

 

 

 

 

 

 

 

 

 

 

 

 

 

<식물애호>를 포함, 세 편을 다 읽었다. 그래도 제일 잘 쓴 건 <식물..>인 것 같지만, <호텔 창문>과 <어쩌면...>도 참 좋았다. 이미지만 놓고 보면 옥수수밭 쪽이, 호텔창문이나 강가보다는 좋았지만, 스토리는 후자가 더 나은 것도 같고, 뭐, 아무거나 다 잘 썼다. 아이들은 어떻게 읽었는지 나중에 답안을 보면 알겠다. 나도 나만의 밭/숲을 잘 가꿔보고 싶은데, 아무 이야기도 날 찾아와주지 않는다. 몸과 마음이 모조리 다 너무 피폐하여 무슨 이야기를 찾아나설 힘도 생기지 않는다. 곁들어, 윤성희, 권여선 소설도 읽었다. 한밤에 놀이터에서 킥보드를 타는 할머니의 이미지 너무 좋았다. (그러나 글자가 너무 빡빡합니다ㅠㅠ) 쓰러진 할머니를, 마침 공부를 하다 말고(실은 하지 않음) 귀가한 한 청년이 목격하여 신고한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할머니를 구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를 위로하는 한마디다. 남은 소설들은 내년 봄에 읽으려고 한다. 이 책은 선별, 편집이 무척 좋다. 흑, 역시 문학동네 ㅠㅠ 문학동네가 현재 우리 문단의 '로마'다. 모든 길은 로마-문동으로 통한다.

 

- 아,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친(춘)다면!

- (... 이겨) 춤을 추겠네!

 

그렇게 기꺼이 춤추는 소설, 김영하를 읽었다. 이번에 새 판본이 나와서 청년 김영하의 소설을 읽는 기쁨을 누렸고, 덩달아 그런 김영하를 읽던 청년 김연경을 되돌아보는 (슬픈) 기쁨을 맛보았다. <엘리..터>는 물론, <사진관...>, <흡혈귀>까지 봤다. 저 춤추는 '끼'를 어쩔까. 건필하시라, 우리의 영원한 오빠여.

 

 

 

 

 

 

 

 

 

 

 

 

 

 

시간은 없지만 배수아, 이장욱까지 엿보았다. 이장욱 신간은 <행자...>를 읽는 순간, 아싸~ 이거다, 하고 감이 와서 한 번 골라보았다. 평소 이장욱답지 않게 모종의 생기발랄, 이런 것이 느껴져서이다. 아이들도 재미있어 했지만, 나에게 이장욱은 너무 학구적인(?!) 작가라 그런지 실감이 좀 덜한 작품이었다. 아마 김영하와 같이 읽어서 그럴 수도. 발랄한 스토리텔러의 '끼'가 없어도, 그러나,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다. 배수아를 보라.

 

 

 

 

 

 

 

 

 

 

 

 

 

 

아, 나는 영원한 (앨리스의) '토끼'. 정말 시간이 없다. 마지막 주에는 박상영의 소설을 읽을까 한다. 한국소설을 더 읽고 싶은 욕심이 크지만, 장르문학 쪽 단편도 하나는 보는 것을 늘 목표로 하고 있어서 이것까지 꼽사리로. 사실 꼽사리가 될 만한 작가는 아니다만.

 

 

 

 

 

 

 

 

 

 

 

 

 

 

욕심만 내고 못 읽은 작가는 내년 봄으로 미뤄둔다. 미루는 데는 또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적들도 졸지/자지/놀지 않지만, 나도 내 나름으로 일하고 있단 말씀.

 

*

 

다시금 48년생 로커.

- 내 음악(노래)을 평가하고요? (...) 나는 내 음악이 너무 좋아, 최고야, 하하하  

GOOD!!!!

 

옛날에는 나의 책, 소설, 학력, 번역 등에 '겸양'의 차원에서 후지다, 라는 식의 말을 많이 했다.  하지만 그 후진 책, 왜 쓰나. 쓰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왜 출간하나. 그걸 사보는 독자는 뭐가 되나.  강의 역시 마찬가지. 교수-강사가 강의를 후지게 하면, 그걸 듣는 학생들은 뭐가 되나. 다른 한편, 이런 자기비하, 겸양은 자신의 이상을 지나치게 높이 잡는 데서 비롯되는 오만의 산물이기도 하다. '사십오도 경사에서 뒹굴다 보면 곧 오십'인 처지, 실제로 나의 책, 소설 등등은 후지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럴 지언 정 '대외적인' 차원에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건 흡사 다음과 같다. 

 

아이가 잠들면 십원짜리 쌍욕을 해본다. 말 그대로 평범한 쌍욕. 과거 할머니가 늘어놓는 구성진, 그래서 문학적인 그런 쌍욕도 아니고, 아이를 키우지 않는다면, 평소에도 제법 할 만한 그런 욕들. 아이 때문에 참는 말들, 그런 표현, 특히 담임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 등을 혼자 떠들기도 하고 남편한테 말하기도 한다.(보통 그는 알고 보면, 자고 있다 -_-;;)

 

"내가 생각해도 난 미친*이다. 야, 이 미친 *아, 너는 마누라가 미친*이면 좋냐? 애 앞에서 어떻게 말을 그따구로 해?"

"그 개**는 왜 그 **이야. 그 **들 중에 나보다 공부 잘 하는 놈 하나 없고 나보다 소설 공부 많이 한 놈 하나도 없어, 몽땅 다 **에 **들이야!"

 

 

이런 말을 몇 마디만 하고 나도 상당한 '설욕'의 쾌락이 느껴진다. 욕설의 카타르시스랄까. 이러고 나면 내가 '급' 착해지는 것을, 내 입이 '급' 아름다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라고 해서, 특히 아이 엄마라고 해서 항상 '바르고 고운 말'만 쓸 수 있나. 우리에겐 이런 카타르시스의 문학이(도) 필요하다. 무엇이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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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낮에 지하철을 타고 먼 길을 떠났다. 살다살다 지하철 안에서만 한 시간 반 정도를 보내기는 처음, 즉 두번째다. 갈 때는 책을 좀 읽었다.(올 때는 기차가 미어터져 죽을 뻔했다.) 대낮이라, 도중에 바깥 풍경을 구경할 여유도 조금 있었다. 몇 년전(언제던가) 경의중앙선 타고 경희대 가던 일이 떠올랐다. 다섯살, 여섯살 아이가 어느덧 아홉살도 끝내는 중이니 참 덧없다. "엄마, 덧없다가 뭐야?"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그러나 이번에도 라디오이다. 너무 오랜만에 가서 무척 재미있었다. 게다가 생방송이어서(더러는 녹음도 있었던가? - 이것도 가물가물하다) 더 재미있었다. 교수채용에 1차 탈락하여 아주 무의미해진, 공개강의를 위해 준비한(김칫국, 쩐다 ㅋㅋㅋ) 정장을 (라디오-_-;;) 방송을 위해 입고 갔다. 교수자리는 얻지 못했으나 정장은 얻었다/남았다.

 

(<ebs 이승열의 세.음.행.> 홈피에는 그 다음 사진이 올라갔는데 나는 이게 좀 더 마음에 든다. 그런데 자켓이, xs이 없어서 s을 샀더니, 역시 크구나! 수트는 사이즈-핏이 생명인데. 또 사야겠다 -_-;)

 

 

언젠가도 쓴 것 같지만, 카세트라디오를 거의 끼고 살았던 나(아마 우리 세대)에게는 라디오 속, 혹은 그 너머 세계가 너무 궁금한 것이었다. 보다시피 이랬다. 프로그램의 특성상 음악을 미리 선곡해서 보냈는데, 시간상 다 못 틀었다. 혹은 내가 너무 많이 떠들어서(-_-;;) 뒤의 음악은 한곡 짤렸다. 처음에 염두에 둔 곡들은 이 정도다.

 

3번은 이런저런 맥락과 아무 상관없이 오로지 그냥 내가 좋아하는 곡이다. 유학 시절 라디오에서 자주 들었는데 귀국한 뒤에야 알았다. 노랫말이 인도 시인 타고르의 시임을. 물론 보편성에 밀려 방송에 나가지는 않았다. 이 곡도 여러 버전이 있다. 나머지 곡들은 수업 시간에 아이들과 듣고 또 일정 부분 강독도 한 것들이다. 노래 가사 강독/해석이 굉장히 힘들다는 건 이 때 수업하면서 처음 알았다. <백만송이 장미>는 심수봉과 장기하(목 밑에 장미 코사지? 달고^^;)가 부르는 것도 즐거웠다.  결정적으로 빠진 가수는 브이소츠키인데, 지금 넣어본다.   

 

1. 블랏 아쿠자바 - 기도 (음유시인 수준^^;)

Булат Окуджава - Молитва

https://www.youtube.com/watch?v=yCnlaBJRKcE

 

2. 빅토르 최(쪼이): 혈액행 (영화 <바늘> 삽입)

Виктор Цой "Группа крови"

https://www.youtube.com/watch?v=6C2ti3x9OAA

 

3. 이리나 오티예바 - 마지막 서사시(청춘물 영화 Вам И Не Снилось 주제곡)

Ирина Отиева - Последняя Поэма

https://www.youtube.com/watch?v=W_tZNxyGAwI


4. 알라 푸가초바, <백만송이 장미>

Миллион алых роз (Песня 1983)

https://www.youtube.com/watch?v=4yEeT6Swh5s

 

 

5. 드미트르 호보로스토프스키, <백학>(<모래 시계> 주제곡) 

Журавли" Дмитрий Хворостовский (4.2003)
https://www.youtube.com/watch?v=JTjPbkd_UlY

 

6. 블라디미르 브이소츠키 - 야생마들(말 안 듣는 말들^^;)

Владимир Высоцкий - Кони привередливые

https://www.youtube.com/watch?v=vA0aWBGqTR4

 

원래 방송 원고에 의하면, 마지막에는 이(런) 겨울에 어울리는 책을 한 권 소개하는 것이었다. 겨울이라면, 당연히 <닥터 지바고>^^; 추운 날, 따뜻한 방안에서 엎드려, 혹은 벽에 기대, 혹은 책상 앞에 앉아, 때론 영화음악 프로그램 들어가며 쉬엄쉬엄 읽으시라. 나도 그리 읽었다.

 

 

 

 

 

 

 

 

 

 

 

 

 

 

 

 

 

*

 

쾌락의 대가는 쓴 법. 지난 주말? 이번 주초부터 왼쪽 어깨가 묵직하고 손끝이 저리고 한 것이, 목디스크(즉 추간판 탈출)가 심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여기에 왼쪽 다리까지 불편해왔는데 아마 이건 디스크보다는 혈액 순환이나(하지 정맥류??) 근육 뭐 이런 문제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일주일이 거의 다 됐음에도, 널뛰면서 계속 좋지 않아 병원에 가보아야 할 것 같다. 이런 식의 '작은' 불편과 통증에 감사한다! 마구마구 심술이 나다가도 그래도 감사하게 된다.

 

더불어,

글쓰기의 시작은 '분노-부정'일 수 있어도

그것이 글을 끝내게 하는 원동력일 수는 없다.

어떤 종류든 한 편의 글(음악이나 그림도 똑같을 터)을

완성하는 힘은, 결국, '사랑-긍정'이다.

모두, 모두, 조금씩만 아프자. 

 

 

 

*

 

사진 속에도 잘 표현된 나의 검정 단발. 우리의 간사함이여, 가진 건 잊고 산다. 부산 가면 엄마가 상기시켜준다. 나의 머리카락은 전혀 세지 않았다. 칠순을 넘긴 아빠도 그렇다. 간혹 새치 한 두 개. 빠지지도 않았다. 할머니도 돌아가실 무렵인 87세에도 머리카락이 빽빽했고 그 무렵엔 반백이었다. 가족력이란 참. 하얘지는 건 괜찮아, 빠지지만 말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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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9-11-23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제 유명 인사 되신 듯합니다. 검정 단발 참 단아하게 잘 어울려요. 머리카락이 전혀 세지 않았다는 말씀에 담주 화욜 새치 염색 예정되어 있는 저로서는 정말 부럽네요. 집안 내력이라니 더욱 그러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흰머리, 아버지는 차마 대머리라고 얘기하면 너무 속상해하실 듯해서.... 미래가 난망시됩니다.

푸른괭이 2019-11-23 14:05   좋아요 0 | URL
저는 파마(펌^^;)도 거의 해본 적 없고 염색은 단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생각해보니 그것도 머리카락을 저렇게 타고난 덕분인 것 같아요
요즘 머리카락이 가늘어지니 볼륨(ㅋ)이 약해져 펌을 해봐야 하나,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물론 이런 것보다는 집안이 다 ‘속‘이 좋지 않아, 저 역시 미래가 난망시되네요 ㅋㅋ

전명호 2020-02-08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배님 안녕하세요~ 저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96학번 전명호라고 합니다. 제 와이프가 우연히 EBS 라디오에 선배님 방송을 듣고 Молитва 노래가 너무 좋았다고 말해서, 이렇게 글 남겨요~ ^^**

푸른괭이 2020-02-08 14:52   좋아요 0 | URL
^^;;

전명호 2020-02-08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배님~~ 와이프가 Молитва 가사를 번역해 내라고 안달입니다... 노어노문학과 출신이면 러시아어를 국어처럼 읽을 줄 아는 걸로 대단히 착각하는 듯... 계속되는 등쌀에 먼지묵은 도서출판 主流 로한사전을 꺼내보지만, 17년만의 강독과제라니... 포기하고 도움 청합니다.. 혹시 가사 번역본 있으시면 acrozen@naver.com 으로 부탁드려요~~ ^^;

p/s. 아이가 이제 3학년 올라가나 보네요~ 제 첫째딸도 3학년 올라가서, 더욱 정감이 가네요~
 

 

에세이, 라고 하면 고급스럽다. essai(s). 단순히 일기 수준의 신변잡기 이상의 글쓰기는 되어야할 것 같다. 아무래도 고전부터 넘겨온 까닭에 이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우리 문학의 고전에 참 무지한데, 조선 최고의 문장가라는 박지원의 <열하 일기> 같은 것을 꼽아볼 수 있을까? 이름만 알지, 읽지는 않은 정약용, 이런 양반들의 글은 어떨지. 검색해보니 <열하일기>, 헉, 이렇게 두꺼운 거였냐, 냐, 냐 -_-;; 나는 한 권짜리도 읽은 것 같다.

 

 

 

 

 

 

 

 

 

 

 

 

 

 

 

20세기 초반 에세이는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소비되었던 것 같다. 교과서에서 그렇게 배웠고, <중고생 필독서 - 수필편> 이런 데 실린 글을 반복해서 읽으며 동서양 수필에 입문했다. 찰스 램(?), 이런 이름도 있지 않았나. 교수 부부의 딸이었던 사촌 동생은 심지어 <바보네 가게>, 이런 것도 읽고 있었는데, 그 지적인 풍미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20세기 후반부터 에세이는 '산문'이라는 이름으로 생산, 소비되는 것 같다. 소설가나 시인이 어느 정도 명망이 쌓이면 산문집을 냈다. 작가의 이름값에 비례해 관심을 얻었고 또 지금도 그런 것 같다. 영화 에세이도 적잖았고 언제부터인가 독서에세이, 각종 독후감책도 많아졌다. 21세기부터인가 그야말로 수많은 '작가'가 생겨났다. 소설가, 시인, 극작가, 이런 명칭과 달리 '작가'란 뭐든 쓰면 된다.(심지어 만들면 된다^^; - 작, 쓰꾸루!) PC통신은 이미 고물이고, 인터넷, 이어 스마트폰에 힘입어 쓰기(+ 사진 찍기 등)가 무척 용이해졌다. 덕분에 옛 기준이라면 도무지 '작가 아닌 작가'도 많아졌다. 그러나, 물론, 소위 등단(=자격증)이 그 작가의 품격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역시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21세기, 어느 지점부터 호칭에도 "- 작가님"이 일반화되었다. 대학교에서도 "교수님"이라는 호칭이 퍼진 것과 비슷한 듯하다. 누구에게나 두루 쓸 수 있는 경칭인 '선생님'과 달리, 이 교수님은 직업에다 '-님'을 붙이는 것이라 처음에는 상당히 낯설었다. 물론, 내가 시간강사인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보다 원론적으로, '직업+님'이 주는 불편함을 얘기하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 언중들의 합의에 따라 이제 보편화되었고, 나 역시 길들여지는 것을 느낀다. 청소부님, 환경미화원님, 고객님, 의사님, 교사님, 강사님, 헤어 스타일리스님, 간호사님, 의사님 등등. 그래도 여전히 이상하긴 하다.

 

아무튼 다양한 종류, 성향의 작가들이 책을 낸다. 나야 물론 문학가들에게 먼저 끌리지만 독서의 지평을 최대한 넓히려고 무척 노력하고 있다. 노력까지 해야 하는 이 상황(나이와 애 엄마라는)이 참 서글프지만, 그 시간에 한 권이라도 더 훑어보려고 한다. 이런 것 역시 관성이려니.

 

 

 

 

 

 

 

 

 

 

 

 

 

 

 

지난 주말에 이삼일 동안 세 권을 훑었다.  허수경은 나에게 왠지 해탈한 개룡, 약간 이런 느낌을 주었다. 왠지 그녀의 전공만큼이나 독일에서의 그런 최후는 그녀에게 잘 어울린다는 느낌. 반 정도를 읽었는데, 중간중간 울컥하곤 했다. 반면 <시절일기>는 오랫동안 김연수의 소설을 읽어온 독자로서, 뭐랄까, 그가 지금 한 박자 쉬는 중이랄까, 이런 느낌을 받았다. 쉬는 동안 무엇을 할까. 역시 공부밖에. 제목은 '시절일기'지만, 나는 '공부일기'로 읽었다. 음, 그런데, 쬐금 지루했다^^;;

 

그래서 다음 책으로. '칼럼계의 아이돌'로 불리는 '김영민'이라는 이름을, 오랫동안 다른 이름의 주체와 착각하여, 이제야 비로소 읽었다. 캭, 웃겨 죽는 줄 알았다. 웹상으로 읽은 글들이 너무 재미있어, 나로서는 잘 없는 일인데, 이 책 한 권만 달랑 당일배송 주문했다. 얼굴은 굉장히 싱겁게(?), 재미없게 생겼는데, 문체는 정반대다. 그를 스타덤에 올린 이른바 '추석이란 무엇인가'(**란 무엇인가) 외에 거의 모든 칼럼이 굉장히 유의미하다. 학생들에게 쓴(주례사 포함) 글도 재미있었다. 15년 정도 아이들의 레포트를 읽어온 결과 쌓은(?) 내공이지만, 아무래도 사회과학(정치외교학부 교수라니)을 공부한 사람의 글쓰기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명민한 학생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들 글쓰기의 특징의 일관된 특성 중 하나는 '-끼' 없음이다. 간혹 '-끼'가 있어도 (레포트라는 제한된 장르에서!) 잘 발휘되지 못하기도 했을 터. 김영민의 프로필을 찾아보니 역시 학부가 고려대 철학과.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활자화된 (아마) 첫 글은 영화평론이다. 인터뷰 들어보니, 영화를 만들어 출품한 적도 있다고. 그런 '-끼'들이 '포텐 폭발' 하듯 넘치는 글들의 모음집이다. 지성과 감성이 만나면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지 보여준다. 반 이상 왔는데 마저 읽을 생각이다. 소설보다 재미있다니, 소설가로서 반성할 수밖에^^; 참고로, 저 책의 한 꼭지에 이인성의 <마지막 연애의 상상>이 언급되었다. '마지막 강의'를 상상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가용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언제 저런 것까지? ^^;

 

*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생각한다는 것,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 살아 있으리라.

- 아침에는. 즉, 아침에 일어나 있으라.

- 생각. 그냥 멍때리거나 몽상하지 말고 생각, 생각을 하라.

 

*

 

모든 일에서 기대치를 낮추라. 추석과 설날은 물론, 모든 일에서. 거창한 계획을 세우지 마라. <기생충> 생각난다. 계획을 세우면 반드시 망한다. 반드시 계획대로 안 된다. 이참에 저 책에 인용되는, 마이크 타이슨의 명언을 새겨(^^;) 본다. .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 하나는 있다, 쳐맞기 전까지는

Everyone has a plan, until they get punched in the mouth

 

너무 많이 '쳐맞아서' 지금 이 커피가 너무 고맙다. 오늘 아침 일주일만에 또 몸이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몸이 회복된 것에 회심의 미소를 흘리며, 어젯밤에 저 에세이를 읽으며 오징어파전을 한 판 다 먹고 감자칩까지 먹는 욕심을 부려서가 아닌가 싶다. 비 오는 날에는 부침개를 먹는다, 라는 계획을 버려야지. - 그러게,

 

- 욕심이란 무엇인가.

- 계획이란 무엇인가.

- 시험이란 무엇인가.

- 서울대란 무엇인가.

- 교수란 무엇인가.

- 아이(자식)란 무엇인가.

질문은 무한히 이어질 수 있다.

- 질문이란 무엇인가.

- 무엇이란 무엇인가.

.....

 

 

*

 

많이 찌질한 사족.

아마 내가 꿈꾸던 사오십대의 나는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왕년에 소설을 좀 써본, 그러나 소설가로 일가를 이루기에는 재능이든 열정이든 뭐든 좀 부족했던, 그래도 그 '-끼'를 가지고 무슨 유사한 글쓰기를 하는 서울대 교수. 이건 정말로 사족이다. 이참에 찾아본다.

 

- 사족[뱀 발]이란 무엇인가.

 

 

*

 

유의미한(?) 족.

'쳐맞다'. 혹시나 싶어 찾아보니 역시 사전에 없는 비속어이다, 헐.

'처맞다'도 없는 말이다. 안타깝다! 

가끔씩은 내가 (입-아가리를?) 더 쳐맞아야(!) 정신을 차리겠지,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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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8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괭이 2019-11-18 15:54   좋아요 1 | URL
앗, <죄와 벌>은 민음사에서 나왔습니다, 나온지 오래 됐습니다^^;

타이슨은, 사실 저는 누구인지 잘 모르는 인물이고요,
저 책을 보다가 찾아보고 ‘아, 이 양반~‘ 했지요.
러시아의 전설적인 레슬러 알렉산드르 카렐린과 붙여보고 싶다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Falstaff 2019-11-18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쳐맞다‘ 혹은 ‘처맞다‘는 띄어쓰기 하면 괜찮은 거 같네요. 부사로 ‘ㅊ‘ 형제가 뜰 테니까요. ^^
제가 생전 처음 읽은 수필집이 램이 쓴 셰익스피어였습니다만.... 생각나서 댓글 쾅!

푸른괭이 2019-11-18 20:23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새로 찾아보니, 저 책에는 ‘처맞다‘라고 되어 있더라고요.
댓글 감사합니다, 좋지 않은 메일 받고 외로웠어요 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9-11-19 18:43   좋아요 0 | URL
사전 찾아보니 : ˝ 처 - ˝ 가 마구, 많이를 뜻하는 접두사‘라고 나오네요.
처먹다, 처넣다, 처맞다, 처박다, 처대다, 처담다......

푸른괭이 2019-11-19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접두사는 그런데요, 처먹다, 처넣다 등은 사전에 있는데 처맞다, 는 너무 쎈^^; 탓인지 없던데요? 아무튼 어감은 잘 전달되는 듯요^^;
- 근데 대댓글(?) 다는 법을 모르겠네요 ㅋㅋ

Mind 2019-11-20 16:5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대댓글 다는 건 댓글 타래의 맨 위 댓글에 있는 ‘댓글달기’ 단추를 눌러서 작성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위에서 곰곰생각하는 발 님한테 대댓글 드리려면 Falstaff 님 댓글에 있는 댓글달기 단추를 눌러 작성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처맞다’가 맞고 ‘쳐맞다’는 틀린 거란 사실을 확실히 밝혀두고 싶네요. 물론 아시겠지만 틀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이참에 여기에 확실하게 밝혀두는 겁니다. 위 곰곰생각하는발 님 댓글에 나와 있듯이 ‘처- ’ 접두사는 (대개는 부정적인 의미로) 강조를 나타내는 접두사죠. 접두사 ‘처-’는 웬만한 동사에는 다 갖다붙여서 활용할 수 있습니다. 해서 그런 활용 동사를 일일이 사전에 등재할 수는 없을 겁니다. ‘처맞다’란 동사가 아직 사전에 올라와 있지 않은 까닭이겠죠.

한데 요즘 인터넷 누리꾼들이 대부분 잘못된 접두사 ‘쳐-’를 붙여 쓰고 있습니다. 네이버와 다음(Daum) 기사 댓글란에 가보면 잘못된 접두사 ‘쳐-’를 붙인 비난 · 조롱 · 욕설 · 열폭 댓글들이 넘쳐납니다. 한국의 인터넷 언어가 무척 거칠어지고 천박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장하면 한국인들의 종특이 언어에도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볼 수 있죠. 참고로 저는 한국인들의 의식 수준이랄까, 민도랄까, 양식이랄까, 이런 걸 아주 낮다고 봅니다. 지위고하, 학력고하, 빈부격차, 권력유무를 막론하고 모두 다 찌질하고 비열·비굴하고 천박하기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봅니다. 저 자신도 거기에 포함되는 건 물론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