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국어시간, 지금 생각하면 '폭력', 심지어 '변태'지만, 국어 선생님은 우리의 귀를 꼬집는 버릇이 있으셨다. 그것이 체벌의 한 형태였다. 아, 다행히(?!) 남 선생님 아니고 여 선생님이었는데, 어쩌면 그렇기에 더 변태? 어느 날, 선생님이 '인간돼지' 얘기를 해주셨다. 아주 옛날 중국에, 어떤 왕비가 왕(남편)의 첩을 질투해서 눈, 귀를 멀게 하고 말도 못하게 하고 팔다리도 다 자른 다음 돼지우리에 던졌다고, 그렇게 사람 인분을 먹고 살게 했다고. 하! 과연 저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도다! 아마 역사(정사)가 아니라 어디 야사나 신화, 설화에 기록된 것이겠지.

 

 

 

 

 

 

 

 

 

 

 

 

 

 

세월이 흘러흘러, 갑자기 뭔 바람이 불었나, 지난 주말에 천 카이거 감독의 <풍월>이 궁금해졌다. 나는 심지어 이 영화 보지도 않았고(-_-;;) 장국영이 부른 주제곡을 아주 좋아했다. 오랜만에 <패왕별희>의 추억도 떠올리고 천- 감독이 <시황제암살>이라는 영화를 찍었음을 알게 된다. 그 동안 내가 영화로부터 얼마나 멀어져버렸는지 알게 되는 슬픈 순간이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불현듯(!) 중국사가 궁금해져 여기기저기 뒤지니, 가없어라, 유튜브-플랫폼이여,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설립, 진시황제 암살(특히, 형가, 고점리 등), 초한지 등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갑자기 미친 척, 중국 현대사도 다시 복습. 다시 보니 정겹다, '마지막 황제 푸이'. 서태후는 과연 그렇게 악녀였을까, 나이 드니 새삼 의문이 든다. 동태후보다야 그랬겠지만서도... 그리하여, 추억은 방울방울, 여중시절 국어 시간으로 돌아가고, 앗, 전설 속 주인공-여귀신인 줄 알았던 그녀는 바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아내 여씨(여태후)였다. 게다가 이것은 엄연한 정사, 옥소독스의 기록이었던 것이다!

 

 

 

 

 

 

 

 

 

 

 

 

 

 

 

정녕 <역사란 무엇인가>. 내가 죽기 전에 저 책을 다시 읽을 수 있을지. 대학 들어온 1학년, <서양문화사> 서평 책 1호였는데, 그때는 문화적 충격이 너무 컸고 공부에 몰입한 형편이 아니어서 뭘 읽었는지도 모르겠다.(학점이 C+이었고, 나중에 3학년 때 '세탁'하여 A로 올려놓는다.) 굉장히 도발적인 물음. 역사란 무엇인가. 더 현실적으로(!!!), 역사 기록(역사 읽고 쓰기)이란 무엇인가. 사마천의 <사기>를 읽지 않았음이 너무나 유감스럽지만, 이제라도 -_-;; 이것저것 뒤지다가 유시민이 다시 푼 한나라 이야기 등을 본다. 그 속에 여씨, 여태후. 보는 관점은 다 다르다. '아줌마'인 내가 보기엔 그렇다.

 

유방이 동네 양아치 시절일 때(점잖게는 '시정잡배') 그의 인물됨을 알아본 놈이 딸을 그놈한테 준다. 즉, 여치라고 해서 유방이 딱히 좋아서 결혼했겠나. 이른바 '사랑-결혼'은 낭만주의 이후의 컨셉이다. 그 전에는 모두 (특히 상류층일 수록) 정략결혼이라고 보면 된다. 결혼하고 보니 얼씨구나 좋을 수도 있지만, 순서가 그렇다는 것이다. 둘은 아들딸을 낳은 것 같다.(그 중 아들이 왕이 된다.) 이후 유방은 항우랑 싸운다고 정신 없고, 심지어 여치는 (아마 자식들까지?) 시아버지와 함께 항우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무려 4년이나! 그렇게 진정한 조강지처의 삶을 사는데, 돌아와보니 남편 옆에서는 새파랗게 젊은 년(!)이 붙어 있다. 척부인(척희)다. 당시의 도덕률을 생각한다면, 이거야 그렇다 치자. 남편은 황제가 되고 아내는 황후가 된다. 첩이 아들을 낳는다. 이것도 좋다. 이런 고대에도 꼭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이 있는데, 바로 '서열'이다. 유방은 척부인이 낳은 아들(유여의?)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이미 나라도 세웠고 본인도 나이가 들었고 점점 더 안정의 욕구가 컸을 법하다. 측근들도(저 유명한 한신!) 너무 많이 '팽'하지 않았나. 여태후의 입장에서, 다른 여자를 보는 건 참아도, 아들을 건드리는 건 폭발할 일. 결국 그녀가 이기고, 왕위는 아들이 갖게 된다. 그러나...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라는 말답게

 

여태후는 척부인의 아들(왕자)를 독살하고 척부인도 위에 쓴대로 정말 잔인하게 응징한다. 심지어 '인간돼지'가 된 그녀를 자기 아들(혜제)에게 직접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 아들이 한 말이, 내가 그때 국어 선생님 애기를 듣고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다. 정말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ㅠㅠ 그로 인해 충격 먹은 아들-혜제는 정사를 그만 두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 원래도 병약했던 것으로 나오는데, 이것이 유방이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저어했던 이유이기도 할 터.

 

여태후에 초점을 맞추면, 과연 프랑스 속담대로, 복수는 식혀서 먹는 음식(이름 까먹음 -_-;;)이다. 당장에 분을 못 이겨 길길이 날뛰는 성정의 여자라면, 저 난세(!)에 남편을 황제로 만들지도, 그녀 또한 태후가 되지도, 또 아들을 황제로 만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척부인에게는 또 그나름의 스토리가 있겠지만(젊은 과부로서 황제의 아들을 낳기까지, 또 황제의 성은에 발맞추어 자기 아들을 황제로 올릴 꿈을 꾸기까지, 그녀 역시 만만한 캐릭터는 아니었을 것 같다) '아줌마'로서(^^;) 여태후에 집중하면, 그녀의 행동이 무척 이해된다.

 

잔혹함에 관한 한, 아마 그 주체가 여자여서 다들 깜놀(!)하는 건 아닌지. 고대와 중세(심지어 마녀사냥이 있었던 근대 초입에도!) 저런 일화는 비일비재하다. 그런 것으로 안다. 다만, 감히 여자가! '사람/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저런 잔인한 응징의 주체라는 사실에 우선 놀라고, 그다음, 그것을 추동한, 복수욕, 정치욕, 정복욕 등등에 또 놀라고 이런 식인 것 같다. 여태후의 이후 인생은 비극이지만 아마 측천무후의 모델이 아니었을까하나 싶다. 그런데 당나라까지 갈 시간이 없고, 잠깐 현대사(!)에 눈을 힐끗 하면 - 

 

1) 신격호 회장의 장례식에 이른바 첩과 첩의 자식은 참석하지 않았다(못했다?).

첩에게는 또 첩의 스토리가 있을 터, 비난은 금물이지만, '법도-서열'은 그렇다는 것. 그것이 없다면 가정도, 왕조도 지탱되기 힘들 터.

2) 노태우는 싫어해도, 참고 참다가 때를 봐서 이혼 소송을 낸 노소영은 국민 대다수가 응원한다,

댓글러들이 남자든 여자든 애를 셋씩이나 낳은 '조강지처'를 두고 불륜에 혼외자를 낳고

심지어 떳떳이(^^;) 공개하고 이혼소송까지 한 '유책자'에 대한 시선은 따갑다,

대한민국이 언제부터 일부다처제였나!

3) 멀리 영국, 브렉시트 못지않게 '매그시트' 역시 현대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면 권리도 포기함이 당연할 터, 왕실과 구성원은 그 자체가 '문화재'이다,

문화재가 문화재로 존재하길, 행동하길 포기함은 당연히 떠나주셔야.     

 

*

 

 

 

 

 

 

 

 

 

 

 

 

 

(흑, 홍콩 배우들, 넘나 멋있다...장국영은 뭐하러 그리 빨리 갔더나, 어차피 곧 가는 인생인 것을. 장만옥을 무척 좋아하지만 '중국-대륙'을 생각하면 역시 공리만한 배우가 없는듯. 늙어서 보니 더 예쁘다, 흑흑ㅠㅠ)  

 

다시 앞으로. 문제는 남녀가 아니라,,, '혁명 이후'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500년이나 이어진 난세를 통일한 진나라의 영정은 정녕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었을 터. 장예모의 <영웅>의 해석도 맞을 법하다. 그가 아니면 천하를 통일할 자가 없었을 터. 문제는,,, 통일 이후이다. 현재 우리의 정치 상황도 비슷하다. 저 아름다운 촛불 혁명 이후? 그 다음이 문제인 것. 천하통일보다 어려운 것이 정치(!)임을 알겠다. 진시황제가 정치력을 발휘한 건 그의 인생, 또 역사 전체를 놓고 보면 아주 잠깐이고, 그 다음은 (로마제국) '몰락사/쇠망사'가 된다. 그를 미치게 만든 것, 그것은 결국 불멸의 욕망이다. 참 슬프다... 나도 죽기 싫다 ㅠㅠ

 

그 점에서 유방은 보다 더 양반(?), 적어도 점잖았던 것 같다. '술과 계집'을 좋아하고 천성이 무르고 게으른(과연 그랬을까? 이 역시 '컨셉' 아니었을까?) 시정잡배 출신이라서 그런가? 어째서 운명은, 귀족 출신에 젊고 건장한(심지어 순애보 - 우희) 항우가 아닌, 그의 손을 들어주었나. '혁명 이후' 정치가로서 그가 빛난 시절은 역시나 짧았던 것 같다. 각종 토사구팽에 덧붙여, 그는 어쩌면 연장할 수도 있었던 삶을 53세(?)에 종결한다. 사는 것도 이제 귀찮다? 이꼴 저꼴(여태후와 척부인, 그밖의 여자들이 싸우는? 꼴??) 다 보기 싫다? 글쎄, 그 마음을 우리가 어찌 알겠는가.

 

그럴수록 더더욱, 저런 역사를 기록한 자의

거룩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인걸-영웅은 죽지만 역사 기록물은 영원하다.

역사에는 나라를 세운 영웅만 있지 않다,

어쩌면 실패한 자들, 엑스트라였던 자들이 더 많다, 

그들까지 일일이 기록하다니(열전), 확실히 난놈이다.

어릴 때는 사마천=궁형, 이렇게 외워졌던 것 같은데,

중국사의 맥락에서 '궁형'은 수치스럽긴 하지만

어쩌면 제일 약한 -_-;; 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세상에 공짜가 없다. 주후반에 저렇게 놀며 흥분(!)했더니 월화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주지육림'(유시민 강연보다가 꽂힌 단어인데, 너무 어렵고나 -_-;;)에 빠져 있었으니 당연한 일. 눈을 뜨며 '죽음'을 생각했다. "아픈 거 싫어~" 게다가,,, 죽기 싫다ㅠㅠ 싸움을 좋아하는 자는 결국 싸우다가 죽고(그런 자들이 가만히 앉아 정치를 하려면 더 미칠 듯, 그래서 진압할 반란이나 침입해올 외적을 더 기다린 건 아닐지?) 이야기를 좋아하는 자는 결국 이야기 속에서 허덕이다 죽는다. 역사는 이야기다. 언제 들어도, 언제 읽어도 너무 재미가 있어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겠다. 그래서 더더욱, 그것을 즐기는, 누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기록하는 것이기도 하다. 에효, 나 같은 인간은 다 읽기도 힘들겠지만, 한 번 시도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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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교 시절에 처음 만나는 이상은 [날개]의 작가(소설가)이거나 [오감도]의 시인이기도 하지만 [권태]를 쓴 수필가이기도 하다. 요즘식이면 정말 작가. '권태'의 놀라운 점은 그 모던(!)함이다. '권태' 자체가 우리식 정서가 아니다. (그 무렵의 한국문학을 잘 모르지만-_-;;) 이광수 <무정>, 염상섭 <삼대> 이런 것이 쓰이고 읽히던 시절, 권태는 너무나 이국적? 너무나 뜬금없는 것? 귀신 씨나락? 아무튼 현실과는 굉장히 동떨어진 심리적 정황일 법하다. 병리적, 도착증적, 변태적, 이런 수식어를 붙여도 될 법하다. 한마디로, 이것은 '이식된'(=식민화) 것. 유럽에서 직수입이 아니라 일본을 통해 이중, 간접 수입된 것이다. 원조는 어떠했나.

 

 

 

 

 

 

 

 

 

 

 

 

 

 

영국과 프랑스의 (초기)낭만주의는 '이상'이 중요했던 독일의 그것(1기 - 노발리스, 슐레겔 형제 등)과는 다소 다르게, 권태와 (나아가) 환멸의 정서가 강하다. 러시아에 수입되어 인기를 누린 건 이쪽이다. 독일 낭만주의로는 일세대보다는 말기에 붙은 호프만이 오히려 더 큰 호응을 얻었다. 아무튼 우리(=동양) 문학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것이 몽땅 '서양-것'인데, 20세기 전후 일본 지식인-작가들이 배우고 익히고 닮고자 했던 것이기도 하다. 물론, 루쉰은 빠져야 할 것이다,행동하는 지식인, '메스' 대신 '붓을 든 작가로서 그의 정서는 권태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다시 원조로 가서. 권태란 오랫동안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여자가 어찌 감히 권태를!!! 권태를 느끼려면 많은 것이 갖추어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돈, 돈, 돈이다. 최소한의 물리적 안정 없이 권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다음, 이것을 행동 차원으로 옮기려면(주로 여행을 가는데) 역시나 돈이 필요하고, 그다음은 육체적 자유가 필요하다. 여러 정황상, 여자는 감히 누리기, 혹은 실천(?)하기 힘든 것이 권태이다. 자, 그런데, 1857년(버버리가 <버버리>를 만든지 1년 뒤^^;) 삼십대 작가가 <보바리 부인>이라는 소설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여자가 감히 권태를! 그것도 소설을 많이 읽어서!  그러다가 주제 파악 못하고 파멸하는 얘기라니. 그 파멸은, 결코 남자주인공들의 경우와 같은 비극이 아니다. 오히려 어처구니없는 세태극이다.

 

 

 

 

 

 

 

 

 

 

 

 

 

 

 

 

엠마의 여자로서의 열등감은 결코, 적은 비중을 차지 않는다. 그녀가 아들을 바라는 가장 큰 이유는 '복수'하기 위해서다. 여자로서의 자신의 삶에 대한 복수.

 

 이렇게 사내아이를 갖게 된다고 생각하니 마치 과거의 모든 무력감에 대하여 희망으로 앙갚음하는 느낌이었다. 남자로 태어나면 적어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온갖 정념의 세계, 온갖 나라를 두루 경험할 수 있고 장애를 돌파하고 아무리 먼 행복이라 해도 붙잡을 수가 있/. 그러나 여자는 끊임없이 금지와 마주친다.(...) 여자는 언제나 어떤 욕망에 이끌리지만 어떤 체면에 발목이 잡혀 있다.”(131-2)

 

'다른 것'의 가능성에 대한 상정에서 권태는 생겨난다. 내가 아닌 다른 나, 여자가 아닌 남자, 이 남자(여자-애인)가 아닌 다른 남자(여자-애인), 이 집이 아닌 다른 집, 이 세상이 다른 세상 등등. 남편 샤를르는 멀쩡 이상의 멀쩡이지만 엠마는 계속 다른 가능성을 꿈꾼다. 그럴 수록 현재(남편)는 싫어지고 권태는 더 강해지고 급기야 환멸로 이어진다.

 

그녀는 우연의 다른 짝맞춤으로 누군가 딴 남자를 만날 도리는 없었을까를 자문했다. 그리고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그 사건들, 달라졌을 그 생활, 알지 못하는 그 남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상상해 보려고 애썼다. 과연 어느 누구도 저 남자와는 닮지 않았다. 그는 미남이고 재기발랄하고 품위있고, 매력적인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옛날의 수도원 친구들이 결혼한 상대는 정녕 모두 그럴 것임에 틀림없다. 그녀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도회지에 살면서 거리의 소음, 극장의 술렁거림, 무도회의 광채를 만끽하면서 가슴이 터질 듯하고 관능이 활짝 피어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거다. 그런데 그녀는, 그녀의 삶은 마치 햇빛받이 창이 북쪽으로 나 있는 지붕 밑 골방처럼 냉랭했고 소리없는 거미와도 같은 권태가 그녀의 마음 구석구석의 그늘 속에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70)

 

엠마의 불륜(정사)은, 영화로는 제법 야하게 표현되지만, 소설 속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이 너무 '연극적'이고, 작가-화자 입장에서는 너무 분석적, 메타적이다. 권태에 대한 소설적 탐구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 끝은 결국, 여주인공의 파멸인데, 가장 의미심장한 대목은, 강조하거니와, 결코 '사랑' 때문이 아니라 '돈-빚' 때문이라는 것이다. 엠마 역시 끝까지 인정하지 못하는, 심지어 모르는 대목이 바로 이것이다. 로돌프한테 돈 빌려달라고 했다가 퇴짜맞고 나온 뒤.

 

물론 아직은 몽롱한 상태였다. 그녀는 자기를 이토록 끔찍한 상태에 몰아넣은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즉 그게 돈문제였음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괴로운 것은 오로지 사랑 때문이었다.”(452)

 

엠마의 음독은 바로 이런 자기기만에 대한 미학적 단죄이다. 이미 숨이 끊어진 엠마를 염하고 장례 치루는 과정에서 미학적 죽음은 더 잔혹하게 진행된다. 작가는 그녀에게 왜 이리 잔혹했을까. 어쩌면 그보다 마흔도 안 된 작가는 왜, 이렇게 멍청하고(ㅠㅠ) 허영심 많은, 예뻐 본들 중치 수준인 시골 의사의 부인을 자신의 페르소나로 내세운 것일까.  게다가, 이런 '된장녀-유부녀'의 자살을 완료하는 데 왜 (번역본으로) 20쪽에 가까운 페이지를 써야 했던 것일까.  많은 의문이 생기는 소설, 새삼스럽지만, 걸작임에 틀림없는 소설이다. 명불허전.

 

 

 

 

 

 

 

 

 

 

 

 

 

 

 

 

이미 낭만주의가 저물고 사실주의가 자리를 잡았을 무렵, 작가 자신 역시 감상주의, 낭만주의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왔을 무렵, 1860년대 분위기를 십분 반영한 <악령>에서 도-키는 전형적인 '권태-환멸'의 캐릭터를 창조한다. 스타브로긴. 사십대 중반에 읽는 그는 실은 이춘재(ㅠㅠ)급의 극악범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대가의 붓은 이런 극악범을 '위대한 죄인'으로 만들었다. 스타브로긴의 내면이 조명되는 이른바 <스타브로긴의 고백>(티혼의 암자에서)의 일절. 핵심적인 사건(마트료샤 사건 이후) 한 문장, "... 지겨웠다", 권태에 간만에 꽂힌다.

 

나는 대체로 그 무렵 사는 것이 머리가 멍해질 만큼 몹시나 지겨웠다. 위험이 지나자 고로호바야 사건도 당시의 모든 일처럼 완전히 잊어버렸을 텐데, 내가 겁을 집어먹었음을 회상하며 계속 분해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나는 아무에게나 분풀이했다. 그 무렵에는 아무 이유도 없이 어떻게든 삶을 불구로 만들자, , 가능한 한 훨씬 더 역겹게 만들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벌써 1년째 권총으로 자살할 생각을 했다. 뭔가 더 좋은 것이 나타났다. 한 번은 빈민굴에서 잔시중을 좀 들기도 한 절름발이 마리야 티모페예브나 레뱌드키나를, 당시에는 아직 돌아버린 건 아니고 나에게 남몰래 푹 빠져서(우리 패거리도 눈치챘는데(выследили)) 그저 환희에 젖은 백치 여자를 보고서 갑자기 그녀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스타브로긴이 그야말로 이런 밑바닥 존재와 결혼한다는 생각에 나의 신경이 꿈틀거렸다. 이보다 더 추악한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내 결단 속에 무의식적으로나마(당연히 무의식적으로!) 마트료샤의 일 이후 나를 사로잡은 저열한 비겁함에 대한 분노가 개입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겠다. 사실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도-키의 후기작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권태-환멸을 알지만, 이렇게 허랑방탕한 놈은 없었다. 라스-프도, 이반도 다들 열심히 공부(!)하는 자였다. 스타브로긴처럼 '몹쓸 짓'을 일삼지는 않았다. 어릴 때는 굉장히 문어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읽었던 것 같은데, 지금 읽으니 (심지어 아이의 엄마로서!) 이런 처 죽일 놈! 어린 아이를! 물론 이런 극악범죄는 스타브로긴의 말그대로 '십자가'를 위해서 필요한 장치였기도 하다. 권태에 절어 방탕과 범죄를 일삼는 귀족 도련님은 그 존재만으로 '악령'이고 그 출처(원조^^;)는 물론 서유럽이다. 서유럽에서 수입(이식)된 권태와 환멸. 확실히 이것은 고급(!)한 것이라 충족을 모른다. 엠마의 권태와 같은 것이다. 상대적으로 저급(!), 혹은 원시적이고 즉흥적인 권태는 욕망을 채울 대상이 나타나면 이내 해결된다. 가령 <레이디 맥베스>의 권태 같은 것.

 

 

 

 

 

 

 

 

 

 

 

 

 

 

 

-나 리보브나는 빈 방들을 돌아다니며 지루함에 하품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계단으로 이어진, 그다지 크지 않은 다락의 부부 침실로 올라간다. 여기서도 잠깐 앉아 사람들이 광 앞에서 삼의 무게를 달거나 밀가루 담는 것을 내려다본다. 다시 하품이 나온다. 나른한 기분에 젖어 한두 시간 누워 잠을 잔다. 깨어나면 또다시 러시아의 권태, 상인집의 권태가 찾아온다. 그걸 견디느니 차라리 목을 매고 죽는 게 낫다고 말할 정도이다. -나 리보브나는 독서를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집에는 책이라고 해봤자 키예프의 교부전이 전부였다.(14)

 

저렇게 집안을, 마당을 돌다가 만난 하인과 소위 살을 섞는 데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  세르게이의 농간(?)이기도 하지만, 어떻든 이런 경우 뭔가의 부재와 권태와 욕망과 그것의 충족 등은 굉장히 단순하게 이루어진다. 소재가 성-섹슈얼리티(치정살인)여서 그렇지, 아니라면, 거의 동화를 읽는 느낌이다. 민중 작가가 파악한 민중의 진면목, 혹은 적나라한 실체이기도 할 터.

 

*

 

권태. ennui. 이 주제를 무척 좋아했다. 이 단어를 좋아했다. 그리고 환멸.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보바리>를 읽으면서 다시 상기되었다. 권태와 환멸의 끝은 구토, 다. 만약에 우리가 '구토' 이후에 살아남아 '놀이(게임)의 끝'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이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세계멸망(=2차대전) 이후 폐허, 잔해의 정서. 네 늙은이의 놀이에 비하면 19세기의 권태는 굉장히 생산적이고 역동적이고 음탕(!)한 것이었다. 심지어 연애도, 섹스도, 살인도 한다! 젊으니까, 젊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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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소설집은 중고샵에서 사주지만 2018년 경장편은 '매입불가', 흑. 전자에는 '권태/환멸'이 있다. 후자에는 '권태/환멸'이 없다. 소설들이 쓰인 시기를 놓고 볼 때 '비포-애프터'. '비포'에는 권태와 환멸이 가능했고, '애프터'에는 그게 불가능하다. 엠마 보바리는 '비포-애프터' 변화가 없는 훌륭한(아이러니다!^^;) 인물, 훌륭한 여자다. 갓난아이를(더불어 어린아이를) 내팽개치고 연애에 몰입하기 쉽지 않은데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아닐 수 없다. 이 때의 에너지는 성적, 육체적 에너지라기보다는(물론 이것이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소설처럼!" 되고자 하는 모방 욕망, '형이상학적 욕망'의 엄청난 에너지다. 작가는 그녀를 명백히 바보로 그렸지만, (비단 플로-르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엠마 보바리, 혹은 워너비-엠마인 것을, 어쩌랴! 말마따나, 지금 이 순간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연애!^^;

 

권태여(환멸이여), 다시 한 번!

Yesterday, onc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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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만한 사람은 다 알았을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망할 것임을. 작년인지 재작년인지 모심사장에서 만났던 한 국문자의 말대로, '**사는 회생이 불가능할 만큼...' 망가졌다. 참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출판사는 그나마 <이상문학상> 때문에 연명되고 있었다...라고 다들 생각할 것이다. '왕년에는'(! - 세상에 이보다 더 슬픈 말이!) 좋은 책들이 참 많았는데 이제는 쓸 만한 책이 거의 없고 심지어 이 상조차!

 

 

 

 

 

 

 

 

 

 

 

 

 

 

 

 

 

 

 

 

 

 

 

 

 

 

 

아주 오랫동안 이 상은 모든 작가의 로망, 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93년도 이상문학상 <얼음의 도가니>(최수철), 94년 <하나코는 없다>(최윤) 등 문학회 세미나 목록 1순위가 이 책이었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단편이 여기 실리는 것만으로도 감격했을 법하다. 젊은 독자들은 비단 수상작뿐만 아니라 여러 수록 작품을 읽으며 현대 소설의 흐름, 방향을 가늠해보고 자신의 나아갈(^^;;) 바를 그려보기도 했다.

 

 

 

 

 

 

 

 

 

 

 

 

 

 

 

대략 위에 가져온 이미지의 작품 정도는 나도 읽었다. 그다음에도 꾸준히 샀다. 수업에서 다루려고 비교적 열심히 읽었으나 도무지 작품이 안 되는 것이다ㅠㅠ 좋은 작품도 있으나 너무 재미가 없기 일쑤고, '잘' 썼다기 보다는 '애'쓴 작품이 많았다. 한 상이 이렇게 망하구나, 하는 슬픔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던 차, 다른 상들이 이 상의 자리를 가뿐히 대체한지 오래다. 단편의 경우, 권위로 치자면 이미 황순원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등이 가져갔고, 소위 지형도를 읽기에는 오늘의작가상이 좋다.

 

<이상...> 수상작의 조건 중 하나가 작가의 작품집에 수상작의 제목을 쓰지 않는(못하는) 것, 이었던 것으로 안다. 상 받은 모든 작가들이 동의했다는 것인데, 이상의 얼굴 옆에 자신의 이름과 작품 제목이 붙는다는 사실에 대한 자부심의 방증이기도 하겠다. 최수철의 <얼음의 도가니>는 <내 정신의 그믐>에 수록되었다. 3년씩 발표를(재수록) 못하게 한 줄은 이제야 알았는데(아니, 그 문구가 편집자의 실수로 들어갔다니!!! 이 변명이 더 슬프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말하나마나, 나도 등단했을 때 제일 받고 싶은 상이 <이상문학상>이었다.

결국 못 받았고 이제는 줘도 흥~이게 되어버렸다.

나의 단발머리도 윤기가 없고 그저 세지 않은 것, 빠지 않은 것을 감사해야 할 처지.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무엇이 문제인가.

시간은 흐르는데, 나이는 먹는데, 저 변함없는 도도함이 문제인 것이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변함없음은 결국 퇴행/퇴보를 말한다.

 

'숭고미'가 '추'로 바뀌는 데 몇 년 안 걸렸다.

저러다가 이럴 줄 알았지.

 

*

 

차라리 아주 조현병이나 치매나 그 수준의 질환으로 넘어갔으면 모를까, 그 직전의 상태가 참 무서운 것 같다. 정상과 비정상의 애매한 경계 말이다. 특히, 중증(주로 정신) 질환에 인식 거부증까지(용어를 까먹음-_-;;) 들러붙으면 사태는 정말 심각해진다.

 

"**야, 너 그 약을 매일 매일 꼬박꼬박 먹어라. 그래야 앞으로 더 큰 실수를 막을 수 있다."

 

아버지의 유산-연금을 받기 위해 최근에 정신장애등급까지 받은 (왕년에는 정말 명민했던!) 한 사촌 오빠에게 큰엄마가 해준 충고였다. '완치'는, 물론, 없다!ㅠㅠ '그래야 병이 낫는다~' 이런 건 없다는 말이다. 백모의 충고는 '더 큰 실수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미 진단되고 인지된, 그래서 열심히 치료-관리 중인 질환보다 더 무서운 것이, 강조하건대, '의증-경계' 단계의 질환이다. 본인이 '노망' 든 줄 모른 채 여전히 '왕년'을 외치며 기세등등 굴며 시대착오적인 말을 늘어놓는 (시/친정)아버지들의 망언을 다들 조금씩 경험하리라. 비슷한 짓을 중년의 나/우리는 또 청장년에게, 심지어 소아청소년(자식들)에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멋진 중년? 멋진 노년?

꿈도 야무져, 욕심도 많지.

민폐나 끼치지 말자.

출판사든, 문학상이든, 사람-개인이든

망하는 건 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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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7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괭이 2020-01-07 14:53   좋아요 0 | URL
이어령 선생님 시절이야 정말 전성기였을 테고, 권영민 선생님 주간이실 때도 잡지 <문학사상> 월평란에만 언급되어도 감개무량, 감지덕지의 시절이 있었지요.

‘너무 고고해서‘ 망하기론 비단 <문학사상사>뿐만이 아닙니다. 시대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는 <창비>에 비하면 <문지>도 실은 많이 아쉽고요ㅠㅠ 우리 개개인도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2020-01-07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괭이 2020-01-07 14:54   좋아요 0 | URL
아, 그것이 사실 ‘저작권‘ 개념이 지금과는 달랐던 시절이라서요. 저도 97년 첫 소설집을 <문학과지성사>(당시로서는 상당히 좋은^^;)에서 냈는데, 계약서도 안 썼답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첫 번역도, 역시 계약서 쓴 기억이 없어요 ㅎㅎ 저는 지금도 계약서 똑바로 안 읽는다고 남편한테 혼납니다 -_-;

문제는 세상에 달라지고 현재 삼사십대(혹은 더 젊은) 작가들의 세계관이 전혀 다른데, 그걸 출판사가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죠 ㅠ
 

 

 

<월간에세이>

 

뇌종양이 일상이 되었다

   

 

 

여동생의 다급한 문자를 확인한 건 8월 말, 저녁이었다. “언니야, ** 뇌종양이란다.” **는 우리의 남동생이다. 문자 그대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다.

뇌종양. 실로 대단한 낱말이다.

남동생은 추석 연휴 직후에 P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도 뇌종양 중 양성인 청신경초종이었다. 작년 봄 현기증이 잦아 메니에르병 진단을 받고 잠시 휴직했다. 올여름, 현기증이 더 심해지고 왼쪽 귀도 잘 안 들리고 입안의 근육도 불편, 심지어 마비되는 느낌이 들었다. 왼쪽 눈의 시력도 급격히 나빠졌다. 정밀 검사 결과 종양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정말 힘든 것은 수술보다 그 이후였다. 귀 뒤에는 10는 족히 되는 흉터가 생겼고 의식이 돌아오면서 각종 통증과 불편이 시작되었다. 왼쪽 눈이 감기지 않아 잠이 엄청난 사치가 돼 버렸다. 밥 한 끼 먹는 것도 고역이었다. 심하게 비뚤어진 얼굴, 영락없이 장애인이었다.

장애인. 더더욱 대단한 낱말이다.

그나마 혼자서 화장실을 갈 수 있는 것이 고마웠다. 수술 전 입원까지 포함하여 정확히 2주일 만에 남동생은 혼자서 병원을 나왔다.

지난 103, 남동생의 얼굴을 보았다. 앞서 열거한 낱말들의 위력에 지레 질려서인지, 썩 괜찮아 보였다. 혼자 고기도 굽고 먹기도 잘 먹었다. 수족을 쓰고 말하는 데 큰 지장이 없는 것이 아무래도 비장애인에 가까웠다. 그러나 아홉 살, 일곱 살 아이가 있는 마흔 살 가장으로서 당장 밥벌이가 큰 문제다. 남동생은 2년 전 재수까지 하며 힘겹게 환경미화원이 되었다. “내가 지금 노가다 하고 있었으면 어쩔 뻔했노.” 수술과 회복 기간에도 자리가 보존되고 기본급까지 나온다.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한 술 담배를 끊었다. 마침 아이 엄마도 마음에 드는 직장을 얻었다. 여러모로, 불행 중 다행이다.

 

혈육이 이렇다 보니, 세상에는 뇌종양 환자가 참 많다. 초점을 소아에 맞추면 소아암 중 가장 많은 것이 백혈병, 즉 혈액암과 뇌종양이라고 한다.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리는 질병, 장애, 사고 등이 실은 굉장히 가까이 있다. 물론, 남의 일에 지나치게 감정 이입을 한 나머지 값싼 동정에 사로잡힐 필요도, 미리부터 불안해할 필요도 없다. 다만, 타인의 불행이 많은 경우 인과응보가 아님을 명심할 필요는 있다. 선천적인 중증 장애나 희소병도 뭔가 잘못해서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운명-팔자라는 말을 떠올려도 좋겠다. 초등특수교사인 여동생이 40를 출퇴근하며 가르치고 돌보는 아이들 대부분이 중증이다. 그들 역시 누군가의 소중한 자녀로서 그런 장애와 질환을 갖고 태어날 궁극의 원인은 없었다. 그냥 그리된 것이다. 아홉 살인 나의 아이 역시 운동 발달이 장애 수준으로 지체되어 있다. ? 이 물음 앞에 한없는 무력함을 느낀다.

2019년을 넘기면 만으로도 마흔다섯 살이다. 질병은 눈먼 장님과 같아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의 뜻을 알겠다. 비단 질병뿐이랴. 어떻든 사람은 다 죽는다. 이건 결코 입방정이 아니다. 필멸의 존재임을 기억할 때 우리의 삶은 더 농밀해질 수 있다. 오랜만에 폴 발레리의 시구를 떠올린다. “바람이 분다!살아야겠다.”(해변의 묘지)

 

*

  

 

 

 

 

 

 

 

 

 

 

 

 

 

 

 

 

'운명-팔자'와 관련하여 떠올린 건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럭키-포조 커플은 이런 운명의 역동성을 대변한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노예인가. 누가 정상이고 누가 장애(장님)인가. 모든 것은 운명의 테러-장난의 산물일 뿐이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힘이 빠진다. 더군다나 이번 2학기, 특히 12월은 아이가 '작은 장난'의 희생양이 되어 두 번이나 아프고 있다. 즉, 현재 진행형. 12월 초에는 편도선염으로 고생하더니 마지막주는 기관지염이다. 지난 금요일, 기침이 안 좋긴 했으나 열이 없어 학교를 보냈으나 한시간 남짓 뒤 담임 선생님이 전화를 주셨다. 세아이의 엄마이자 20년 이상 경력의 교사의 촉은 참 정확하다. 두 세시간 뒤 열이 오르기 시작, 항생제와 소염진통제의 도움을 받아도 계속 콜록콜록의 연속이다. 그나마 어제밤에는 열이 나지 않아 한숨을 돌렸으나 '기관지염 -> 폐렴' 이런 도식을 아는지라 조마조마하다. 그래도(아니, 그래서?) 나는 논문을 써보려고, 쓰기 시작하려고 간만에 주말 외출(외근?!)을 감행했다. 덕분에 아이는 아빠와 단둘이 깨가 쏟아지는(반대인가?) 시간을 보내고 있으리라. 질투가 나서 곧 들어가려고 한다. 

 

이 '엄마'라는 자리가 아주 웃긴 것이,,

자기가 딱히 더 잘 하지도 않으면서 왠지 남이 더 잘할 것 같으면 약 오르는 그런 자리다!

 

*

 

아이는 눈을 기다리는데, 이 역시 '팔자-운명'.

 

 

*

 

 

 

 

 

 

 

 

 

 

 

 

 

 

 

 

(제목의 '마담'은 바꾸고 싶당~^^:)

 

'운명-팔자'의 극 사실주의 버전. 너무 사실(주의)적, 심지어 자연주의적이라 소름 돋는 소설. 아주 오래 전 어느 술자리에서 불문학자이자 소설가인 은사가 술에 취해 꼬인 혀로 밑바닥을 보면서 혼잣말처럼 "<보바리>는 진짜(끔찍하게) 잘 쓴 소설이야"라고 말했던 기억이 되살아나고, 이제야 비로소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엠마가 음독했음을, 곧 죽을 것임을 알게 된 후, 샤를르와 그녀의 대화. 엠마의 음독부터 사망까지 무려 17쪽의 분량, 즉 시간이 필요하다! 놀라운 대목이다. 겸사겸사, 나도 매사에, 내가 맡은 모든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난 그래도 한다고 했는데!"

 

 

"왜 그랬어? 누가 시켰어?"

그녀는 대답했다. 

"하는 수 없었어요, 여보."

"“당신은 행복하지 않았어? 내 잘못이야? 난 그래도 한다고 했는데!"

"네... 맞아요...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샤를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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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9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괭이 2019-12-29 17:58   좋아요 1 | URL
가까운 사람(들)에게 큰일이 닥치면 욕심을 많이 버리게 되더라고요^^; 그게 또 좋은 점입니다. 그런데 왠지 요즘은 하얀 눈 위에 빨간 꽃 이미지가 좋네요 ㅎㅎㅎ
 

 

 

 

 

 

 

 

 

 

 

 

 

 

 

 

오후-저녁에 아이가 공부하는 동안, 유튜브에서 '김영하'를 (몰래, 아웅~) 검색해본다. 최근에 이런 '-짓'을 많이 하지 않아 안/본 것들이 제법 된다. 훑어보던 중, 앗, 이거다! <소설 쓰기를 위해 내가 하는 것> 겨우 4분 32초, 넘나 재미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zaR_FZ-has&t=17s

 

대략 내 식으로(그래봐야 '인용'에 살짝 덧붙이는 것인데) 풀어본다.

 

1) 소설가가 된 이상, 고독해야 한다.

혼자 있어야 한다. 세상과 단절되어야 한다.

너의 고독 속으로 도피하라.

 

2) 사람과 사물을 사랑하라.

답은 일상의 사람과 사물 속에 있다. 계속 응시하다면 보면 뭔가 보인다.

그속으로 파고 들어가라.

사람과 사물을 불러라,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라. (김춘수, <꽃>^^;)

 

3) 악마와 싸워라.

이 악마란 바로, 소설 쓰기를 막는 게으름, 좌절, 절망 등의 정서다.

이건 쓰레기야, 클리셰야, 유치해, 말이 되냐, 예전보다 못하잖아(헉!) 

이런 악마들을 때려부수고 전진!

 

4) 다름 아닌 소설을 써야 하는 단 한 가지 이유에 대해 생각하라

동어반복이다. 소설을 써야 하니까 쓰는 거다.

소설을 쓰지 못하는, 쓰기 싫은 백 가지 이유는 잊으라.

 

5) 가령, 나에게 소중한 물건이 사라진(제자리에 없는) 걸 알았을 때의 황망함.

손톱깎기^^; 그것을 찾았을 때의 기쁨. 손톱을 깎는 기쁨. 깨끗해진 손톱으로, 자 때리는 거다, 키보드를.  

 

* 딱 한 문장만!!! 한 문장만 쓰는 거다, 한 문장인데 뭐 어때!!!

 

어릴/젊을 때는 김영하의 '재주', 즉 천재성과 스토리텔링의 재능이 부러웠다. 여차하면 추리소설도 쓸 수 있는 머리(!) 같았다, 대단함. 아이큐 무진장 높을 거라고, <사진관 살인사건> 읽고 생각함.  그 다음은 담배를 끊은 그 의지력(^^;), 요즘은 요컨대 저런 능력이다. 성실함, 지구력, 장인정신, 그리고 '꼰대'이길 거부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책 시장의 다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는) 하는 프로의식. 한편으론, <여행의 이유> 관련 동영상에서 선보인 그의 공책(다이어리 느낌의)을 보고 탄복했다. 저 아날로그는 뭐지? 저 색연필은? 빌 게이츠가 아이들의 컴퓨터, 인터넷 노출 시간을 최대한 제한하는(비슷하게 페북, 유투브 CEO도 마찬가지) 것과 비슷하리라. 게다가 저 그림 솜씨, 어쩔겨, 헉 ㅠㅠ

 

역시 글은, 소설은,

손가락의 힘으로,

몸와 허리의 힘으로

쓰는 것이다.

 

 * 딱 한 문장만! 나도 딱 한 문장을 썼다,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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