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일은 14일로 찍혀 있는데 실물을 받은 건 지난 주, 서점에는 오늘에야 떴다. 아무렴, 요즘 같은 시국에 책이 나와준 것만으로도 감사한다. 20세기 부분을 쓰지 못해(않아) 분량이 적은데, 막상 책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니 그리 얇다는(가볍다는) 느낌도 없다. 요즘 책들이 워낙 얇기 때문인 것도 같고, 19세기러시아문학 교과서, 이 정도만 읽으셔도 됩니다^^;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는 작품을 읽는 데 쓰시는 걸로 - 나는 20세기 작가, 작품에 대한 논문을 순차적으로 쓰고 '후일담'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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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근대, 인간, 소설, 속악
이 책은 푸시킨, 고골, 레르몬토프,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등 19세기 러시아문학의 대표 작가, 대표 작품을 다룬다. 이들을 아우르는 핵심어로 근대, 인간(개인), 소설, 속악(俗惡: 속물성)을 꼽겠다. 앞의 세 요소는 르네상스, 특히 세르반테스-돈키호테와 셰익스피어-햄릿 이래 형성된 서유럽의 19세기 문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네 번째 항목이다. 러시아어 poshlost’는 ‘속물성’으로 번역된다. 영어의 banality보다는 더 ‘평범-진부’하고 vulgarity보다는 덜 ‘저속’한 개념인 것 같다. 근대와 함께 탄생한 인간-개인은 ‘주인공-영웅’이든(푸시킨, 레르몬토프) ‘대중-단역’이든(고골) 이 속물성-속악을 피해갈 수 없다.
유라시아 대륙에 자리 잡은 러시아는 대체로 아시아에 등을 돌린 채 유럽을 지향하는 식의 입장을 취해왔다. 표트르 대제 시절부터 본격화된 이런 모방 욕망이 그들의 속물성의 기저에 깔려있는지도 모르겠다. 19세기 러시아문학이 묘파한 속물성은 훨씬 더 다층적이다. 그것은 특정 정체(政體)와 같은 ‘환경’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의 문제이다. 그렇기에 인간과 세계의 대립 구도는 더 복잡한 희비극이 되고, 여기에는 또 다른 개념인 신-구원이 요청된다. 고골과 도스토예프스키가 대표적인 예이다. 등단할 때부터 생활 밀착형 소설을 썼던 톨스토이는 중년과 노년에 이르러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에 더 몰입한다. ‘침체기’(bezvremen’e: 직역하면 ‘시간-시대 없음’이라는 뜻이다), 즉 세기말의 작가로서 체호프의 문학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시작된다. 그는 우리가 모두 ‘작은 인간’이며 이 ‘작음’은 인간 본연의 속성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이른바 인텔리겐치아의 소명도 투르게네프를 비롯한 저 ‘삼두마차’ 선배-스승 작가들과는 다른 식으로 받아들인다. 비단 희곡 덕분이 아닐지라도 체호프는 19세기를 마감함과 동시에 20세기를 여는 작가로 평가될 만하다.
이 책의 토대는 지난 15여 년 동안 모교에서 러시아문학을 강의하며 학술지에 발표한 여러 편의 논문이다. 그러나, 연구서이면서도 학부생을 위한 교과서적 성격을 갖도록, 또 러시아문학을 사랑하는 지적인 독자도 흥미를 갖도록 작가의 전기를 소개하고 전체 형식과 문체를 대폭 수정했다. 각주를 최대한 줄이고 외국어, 특히 러시아어로 된 개념어와 서지를 거의 다 뺐다. 학술정보와 전문자료가 필요한 독자는 이 책의 끝에 붙은, 대폭 간추린 참고문헌을 보기 바란다. 책 제목에 ‘연구’나 ‘강의’처럼 정형화된 단어 대신 가뿐한 느낌의 ‘산책’을 넣은 것은 빠진 주제(낭만주의 시인들, 벨린스키를 비롯한 사상가-비평가, 레스코프·레스코프·살트이코프-셰드린· 곤차로프 등 사실주의 소설가들, 극작가 오스트롭스키 등)가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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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 앞에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93학번’이라는 명찰이 붙은 이래 나는 항상 노문학도이자 노문학자로 살았다. 2004년 3월 초, <러시아 명작의 이해> 시간, 인문대 6동 1층의 한 강의실로 처음 들어설 때 입었던 10만 원짜리 감색 트렌치코트를 아직도 좋아한다. 그때부터 러시아문학 연구서를 쓰는 것은 당연지사, 하늘이 두 쪽 나도 끝내야 하는 숙제였다. 박상순 시인이 민음사에 있던 2007년에 기금을 받은 것이 직접적인 자극이 되었다. 애초에는 20세기 문학이 3부로 예정되었으나, 작업 중에 현재의 목차가 되었다. 원래는 부제도 ‘문학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는가’였다. 30대 초중반의 미혼이었고 하루에 담배를 두 갑 이상 피우던 시절이었다. 거의 10년 차 비흡연자에 만 45세를 넘긴 지금의 생각인즉, 문학은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한없이 치사해질 때 그나마 문학이 있기에 벌레가 아니라 인간이구나, 라는 위안을 받기는 한다. 이 책이 ‘러시아문학은 속된 우리를 어떻게 위로하는가’라는 물음에는 어느 정도 답하지 않나 싶다.
훌륭한 학자가 되고 싶은 야무진 꿈이 물론 한때는 있었지만, 이제는 그저 ‘학자’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도록 죽기 전까지 최소한의 소임이나 다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첫 연구서를 낸다. 여전히 비정규직 신분이기에 학적 성취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고 싶은 열망은 더 크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 한 학자의 충고대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 2020년, 여름을 앞두고 김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