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세계에서 우주 가기

 

 

 

 

 

생활 세계에서 우주보다 낯설고 먼 과거에 다녀왔다

거창에는 나의 유년이 없다 그곳에는 거창이 있다

부산에도 나의 소년은 없다 그곳에는 부산이 있다

서울에도 나의 청년은 없다, 새삼스러울 것 없이 서울만 있다

익숙한 곳이 시간의 덮개를 뒤집어쓴 채 한없이 낯설다

우주에는 빈집만, 비닐하우스만 덩그러니 한 채 있다

 

오늘의 오소리감투와 간은 꿀맛이었다

그런데도 아이는 철저하게 튀김만 탐닉했다

오징어, 새우, 김말이에 고구마까지

이런 날도 있다

아이는 싸구려 튀김이 그리웠던 것이다

나는 그동안 아이를 너무 몰랐다  

 

생활 세계에 살면서 관념 세계에 놀러 다녔다

그것이 '푸른괭이'에게 잘 어울렸다 

세계의 우울이 바로 옆에 있었다

빈집이 차는 동안 세계의 우울이 울고 있었다 

불안에 떨며 환멸로 넘어가 권태가 될 참이었다

그러지 마, 내가 놀아줄게

아침 햇살 같은 웃음과

너무 한낮의 연애 같은 포옹과 

동짓날 밤의 정사 같은 열정으로

흥, 순거짓말쟁이, 까르르!

 

낡은 우주 셔틀 타고 푸른괭이의 빈집에 놀러오세요

빈집이라 빈방이 많아요, 빈방 채우는 재미가 쏠쏠해요

다 차면 하나씩 태워요, 비닐하우스를, 헛간을, 뒷간을

불길이 활활 치솟으면 생활 세계로 돌아오는 거예요 

의기양양하게 또 의기소침하게

자존심도 세우고 자존감과 자신감도 갖고서,

반의어는 실은 동의어, 적어도 유의어임을 알 수 있네요

 

아이는 내일 아침에 참치김치볶음밥이 먹고 싶다고 했다

치킨 스튜는 싫다고, 오늘 밤에는 도넛 터널을 질주하는 꿈을 꿀지도 모른다

아이를 위해 생활 세계에서 우주를 다녀올 소담한 꼬마 셔틀을 준비해야겠다  

 

 

 

 

 

 

*

 

어젯밤에 썼는데(그러고 박상순 시를 읽고) 세상에 공짜가 없어 또 늦잠을 자버렸다 -_-;

 

 

 

 

 

 

 

 

 

 

 

 

 

 

 

 

 

- 이장욱, <생활 세계에서 춘천 가기>, <세계의 우울> 

- <잠입자>의 '멧돼지'는 дикообраз: 산미치광이, 호저, porcupine. 찾아보니 애버랜드에도 있구나, 헉. 생긴 것과는 달리 초식!인 이 녀석과 남편이 모스크바에서 쇠사슬에 묶인 모습인 채로 있는 것을 봤다는 '그리즐리 베어'에 대해 써야겠다.  

- 헛간을 태우다(하루키) / 비닐하우스를 태우다(이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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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죽과 킹크랩

 

 

 

 

이번 동지에는 먹었다 팥죽, 마지못해

액운을 쫓아야 하니까 새알까지, 꾸역꾸역

그런데 올해는 애동지라 팥떡을 먹어야 한답니다 

어쨌든 팥은 팥이니까 액운을 쫓아주세요

그런 믿음을 가지려고 합니다만 -

 

올해 동지는12월 21일, 올해도 성탄절은 25일

21일 밤 1미터짜리 조잡한 트리는 따사롭게 빛났고

새벽에 아이는 제법 아팠고, 사흘 뒤 그리스도 대신

킹크랩이 큼직한 스티로폼 박스에 담겨 왔다 

푹푹 쪄지며 투덜투덜 시큰둥한 다리를 쭉 뻗어갈 때 

한국산 솥 안에서 러시아산 킹크랩은 어떤 믿음을 가졌을까

이런 물음이 게딱지 속 싯누런 뇌수처럼 질질 흘러내린다

 

겨울이 저 지극한 정점을 찍자 정녕 밤이 짧아지는 것 같아

작은설을 축하하고 새해를 맞이할 희망을 가져도 될 것 같고   

팥죽색 립스틱을, 하다 못해 죽이 된 팥이라도 바르면  

입술에 발그스레 혈색이 돌아 봄날이 오는 것도 같습니다만 -

 

유년을 회상하면 인간은 착해지는 법, 그렇다  

믿음이 없다면 인간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

 

 

 

 

 

 

 

 

 

 

 

 

 

팥죽의 여러 이미지 중 가장 촌스럽고 그래서 맛깔스러운 것으로 골랐다^^; 저 '오봉' 너무 정겹다.

 

https://www.iksanop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88012

 

 

*

 

 

 

 

 

 

 

 

 

 

 

 

 

 

과거에 집중해라, 집중하면서 삶을 회상해라, 과거를 회상하면 인간은 착해진다. / 중요한 건 믿는 것. 왜 믿음을 없애려고 하는가. (??) - <잠입자>

 

 

*

 

 

https://www.10000recipe.com/recipe/6860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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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세계에서 춘천 가기>

 

생활 세계에서 춘천을 갔네.

진리와 형이상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생활 세계에서 춘천을 갔네.

초중등학교 때 우주의 신비와 시를 배웠지.

공부도 열심히 했고 연애도 했는데

또 독재자를 뽑았구나

(...)

 

저는 종교적인 인간이라 매일 기도를 합니다만

고백성사를 한 뒤에 영성체를 모셔야 합니다만

아아, 유물론이 옳았다.

(...)

 

-> <알라딘>에 소개된 이 부분이 너무 웃겨서 시집을 아예 구입했다. 1연 읽고 빵 터지고 3연 읽고 빵 터지고. 춘천은 시인의 아내의 고향(?)인 걸로 안다. 아닐 수도. 나도 두 번 가본, 그리고 아주 잠시 머문 적이 있는 춘천에 대해 좋은 기억이 있다.

 

 

<경복궁>

 

형식은 성실하고 친구가 없었다. 소진되지 않는 목적을 생각하며 기원에 갔다. 바둑은 졌지만 석양을 좋아했다. 병원에 가서 무표정하게 앉아 있다가 죽은 사람과 대화를 했는데 그것이 형식에게 어울렸다. 대기실에서 누가 허공에 대고 욕을 하다가 형식에게 말을 걸었다. 그 사람이 자꾸 너 창식이냐고 창식이 맞네라고 창식아 이 새끼야라고 오랜만이다라고... 형식은 사실 창식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디 사는지 뭐 하는 새낀지도

(....) 

 

-> 2연은 창식 얘기. 헉, 창식이 진짜로 나온다고? 소설로 써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시인이 이걸 진짜로 소설로 쓰면 망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 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겸사겸사, 시집 제목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다. 좋은 시들, 제목들이 많은데 왜 하필 저런 표제를? 무슨 깊은 뜻이?^^;

 

<세계의 우울>("세계의 우울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독심>, <도봉구의 대립>, <긍정적인 공기 속에서 밤의 귀가> 등의 시도 좋다. 지금 졸려서(겨우 9시임에도!) 옮겨 적지를 못하겠다. 마지막에 붙은 산문(에세이), 너무 좋다. 우리의 소중한 시인들을 '동물'의 메타퍼로 잘 풀어낸다, 유머러스하고 위트 있다. 그다음, 작가의 동물원 체험. 특히, 러시아 이르쿠츠크 동물원 체험, 하! 꼭 읽어보시길, 그런 나라다, 러시아란. 하지만 러시아만 그럴까. 그다음, 동물(성)과 식물(성)에 대한 어려운 얘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집은 처음 사봤는데, 마음에 안들어요 ㅠㅠ 너무 얇고, 가벼운 건 좋으나, 정도껏 가벼워야지, 책이 넘어(?) 갈 것 같다, 너무 얇고 작아서. 아무튼 한 권만 주문하기 서운해서 같이 주문한 시집은 내일 읽자, 시간이 될지. <나는 장난감 신부와 결혼한다>는 전에 샀는데, 이쪽은 너무 묵직해서 또, 거참, 휴대하며 읽기는 힘들겠다. 괜찮다, 한달치 사물함을 2만원에 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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薔薇, 얼어붙다

 

 

 

 

 

12월 엄동설한, 도무지

무슨 생각으로 피려고 했을까요? 

장미의 가냘픈 절규로 청신경을 씻어낸다

앙상한 가지가 철제 울타리를 가로지르고

이파리는 초록의 흔적만 간신히 간직한 채  

오직 장미꽃 한 송이만 야멸차게 빨갛다

 

12월 여수 밤바다, 도무지

무슨 생각으로 태어났을까요?

부엌은 후끈하고 곰솥은 뜨겁고 나는

홍합의 들끓는 절규로 또 청신경을 씻어낸다 

양식 홍합은 날카로운 입을 쩍쩍 벌리며

부글부글 분노의 싯누런 거품을 토해낸다 

 

장미의 凍死란 서글픈 死의 가능성

얼어죽은 것이 아니라 얼어붙어 박제된 것 

얼어붙음이 완료되기 직전 몰랑함의 감각

마지막 숨이 멎기 직전 생의 감각

살아 있음의 마지막 감각

그건 어떤 것인지 장미에게 물어보고 싶다 

 

 

 

*

 


 

 

https://360tv.ru/news/obschestvo/23-fevralya-v-lyubercah-vozlozhili-cvety-k-pamyatniku-voinu-osvoboditelyu-48131/

 

 

https://stihi.ru/2013/02/01/10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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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없음

 

 

 

 

 

'제목'을 넣으라고 한다 떠오르는 제목이 없다

'무제'라고 쓰기 싫어 '제목 없음'이라고 쓴다

 

캐나다 설탕단풍나무 수액을 뽑아 시럽을 만들어요

에티오피아산 커피콩을 볶고 한국산 우유를 끓이고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가 커피 한 잔에

메이플라떼를 타서 마셔 봐요

우울에 먹히지 않길, 불안에 잠식되지 않길

이 모든 것이 꿈인가 싶네요

무섬증과 어지럼증과 구토에 시달리지 않길

 

죽은 자가 돌아온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죽은지 사흘 후가 아니라 20년 후의 부활이라면

아내는 젊은 신부 남편은 대머리 중년

엄마는 어린 새댁 아들은 건장한 청년

 

기괴한 광경이군

이런 유의 부활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아  

 

 

 

 

 

*

 

기괴한 광경이군/ 이런 유의 부활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아. -> <솔라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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