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참척慘慽을 당하고 가장 힘들었던 일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원망을 도저히 지울 수 없는 거였다. 원망스럽기만 한 게 아니라 부끄러움까지 겹쳤다. 저 여자는 무슨 죄를 많이 지었기에 저런 일을 당했을까? 수군거리면서 손가락질들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이 나만 보고 흉보는 것 같아 두문불출하고 있어도 하늘이 부끄럽고 땅이 부끄러웠다. 슬픔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게 원망과 치욕감이었다. 하늘도 부끄럽고 땅도 부끄러워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피할 곳이 없으니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때 만난 어떤 수녀님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당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래, 내가 뭐관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을 나에게만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된다고 여긴 것일까. 그거야말로 터무니없는 교만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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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가 남편, 아들과 찍은 사진을 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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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작은 불행은 겪으면 누구나 던지게 되는 질문. 왜 하필 나야?! - 왜 너는 안 되는데? Why me? Why not? - 이렇다고 조 바이든 관련 글들에서 보이는 문구. 박완서는 큰 아픔을 겪은 사람(여자/엄마/작가)답게 그 이야기를 여기 저기에 많이 써놓았다. 아들 졸업 사진, 남편 아들과의 식사 등까지 남아 있고 (짐작컨대) TV 방송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정말이지 인기 작가였나 보다. 아마 혹자는 (정말이지 못됐지만 이 역시 우리 안의 본능일 터!) '샘통',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으리라.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더 큰 문학을 이룩한 것은 역시, 그녀의 힘. 여러 사람(+여자+엄마+작가) 기죽인다^^;
위의 인용문 중 특히 "저 여자는..."이라는, 가상의 타자들의 수군거림. 아직도 비틀거리는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감히 비유하자면, '니들도 한 번 당해봐라~'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다른 한편, 어떤 불행에 처한 사람을 보았을 때 '무슨 죄'를 지었겠지, 라고 생각하면, 우리 마음이 편해지는 측면이 있다. 그 '무슨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그 불행은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자꾸 원인을 찾으려는(흉을 보려는) 것이다. 가령, 노산이 아니었다면 다운증후군은 없고, 흡연 안 했으면 기형아 출산도 없고, 운전대를 안 잡았으면 교통 사고도 없고, 밤에 술자리에 안 갔으면 성추행도 안 당했고 등등. 하지만 대략 마흔(사람마다 다르겠지만)은 그런 나이인 것 같다.
과연 '무슨 죄'를 지어야 '벌-불행'을 받나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되고 또 일정 부분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
박완서는 작가지만, 즉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워할^^; 직업이 아니지만, 미모의 판사 출신 전 국회의원 정치인이라면 다르다. 많은 이들이 나경원과 다운증후군 딸을 '샘통'이라고 여겼을 법하다. 마치 의인의 타락을 기다리듯, 그런 마음으로. 얼마 전 인구에 회자된 방송을 얼핏 보며 든 생각. 아, 나경원은 정말이지 여자들, 엄마들, (특히) 장애아 내지는 아픈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을 기죽이는구나^^; 위의 글을 인용하자면, 출산과 동시에 자신이 장애아를 낳았음을, 혹은 내 첫 아이가 장애아임을 알게 된 그녀에게는, 이후에도, '슬픔'은 있었겠지만, '원망'과 '치욕감'(부끄러움)은 별로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물론, 왜 없었을까. 하지만 그녀 나름으로 그것을 중화(?)시키는 방법마저 터득했던 것이리라. 환갑도 멀지 않은 나이에 굳이 서울 시장 하고 싶을까? 이건 게을러터진 우리 같은 범인(보통 사람^^;)의 생각이고, 일반적이지 않게 태어난 아이를 저 정도로 키우고 자기 일까지 열심히 하는 그녀는, 정치적 입장을 떠나서, 진정한 위너, 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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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집이긴 하지만 박완서의 글을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니, 의외로 문장이 짧지 않다. 은근히 중언부언도 많고 고집스레 반복되는 어휘로 인해 문장이 꼬인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그건 좋은 문장이다. 역시 중요한 건 내용. 이른바 미문이 결코 좋은 문장인 것은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또 하나는 그녀의 소설이 거의 백프로 자전소설인데, 언제부터 가톨릭 신자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서유럽의 고백문학과 많이 닿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고백의 대상이 주로 생활 속의 죄악^^, 속악이긴 한데 큰 맥락은 그렇다는 것이다.
루소 역시 인간의 표본으로서 자신을 내세우며 미주알고주알 있는 얘기 없는 얘기를 다 늘어놓는다. 박완서는 생활 속에서 자신이 겪는 얘기들, 마주치는 사람들, 보고 들은 풍경들 등을 일일이, 역시나 미주알고주알 쓰고, 그것에 구조=형식을 부여한다. 후자는 물론 문학적 재능이고, 전자는, 작년 문단에서 화제가 된 작가의 표현의 자유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이야기를 쓰려면, 본의 아니게?! 타인의 얘기가 들어가게 되고, 그 타인에는 내가 만난, 들은 사람이 포함된다. 박완서는 어쩌면 낯뜨거운가, 아무튼 자신의 남편과 자식들, 친인척들 얘기도 거침 없이 쓰고, 가령 (지난 수필처럼) 어쩌다 마주친 택배기사(소년) 얘기도 가감없이 넣는다. 아니, 문학적 가감 있이(!) 넣는다.
또 하나. 나아가 비교적 가볍든 아주 무겁든, 이런저런 얘기를 쓰면서, 그렇게 씀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죄악을 스스로 용서하고 또한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른바 글쓰기 치료, 라고 할 만하다. 직업이 읽고 쓰고 (그것을 갖고) 떠드는 것인 나는, 요즘 더더욱 그것의 효과를 절감한다. 너무 아프고 힘들 때는 쓸 수도 없다, 다들 알지 않는가. 아픈 것, 힘든 것에 대해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치료의 시작. 그리고 쓰면서 절반 이상 치료된다. 나머지 상처, 슬픔은 다음 쓸 거리를 위해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