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두 해가 더 흘러갔다. 그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성가신 목숨을 스스로 끊기로 했으며, 그가 아는 깊은 동굴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동굴 아래로 내려가려니 당연히 겁이 나서 흠칫 물러섰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생각하니 더 이상 바랄 게 아무것도 없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서 기분이 짜릿했다. 그는 어두컴컴한 커다란 문을 통과하여 한 계단씩 아래로 점점 깊이 내려갔다. 그렇게 몇 걸음을 내려가자 벌써 하루 종일 걸어온 느낌이 들었고, 마침내 맨 아래까지 내려가서 으슥한 곳에 있는 조용하고 서늘한 지하 납골당에 다다랐다. 등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 브렌타노는 납골당 문에 노크를 했다. 불안을 견디고 버티면서 까마득히 오랜 시간을 기다리자 들어오라고 무시무시한 명령이 떨어졌다. 어린 시절이 생각날 정도로 겁을 먹고 안으로 들어가자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가 무뚝뚝하게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너는 가톨릭교회를 섬기는 종자가 될 거지? 여기서는 그렇게 해야 해." 음침한 느낌을 주는 사내가 그렇게 말했다. 그때 이후로 사람들은 브렌타노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브렌타노 2>, 437-438)
결국 <세상의 끝>을 주문했고 편한 마음으로, '산책하듯' 읽고 있다. 이렇게 읽어야 좋은 책인 것 같다. 이걸 몰랐기에 전에 읽은 <산책자>는 오히려 기대보다 더 적은 감흥을 얻은 것 같다.
<세상의 끝>에는 사진이 많은데, 특히 마음에 드는 사진은 이것. 스위스 사람답게 그는 산책을 많이 했는데 요양원에서 보낸 인생의 후반부에서도 그랬던 모양이다.(정신질환으로 인해 요양원에 들어오기 전에는 거의 유랑 생활 수준으로 거처를 자주 옮겼던 모양이다, 차라리 요양원이 나았을 수도.) 어느 눈 오는 날, 눈 내린(쌓인) 거리로 산책 나갔다가 저렇게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하, 귀한 사진. 무척 부럽다. 왜 이렇게 행복해 보이나. 나도 저렇게 죽고 싶다. 남의 죽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바 아니지만, 니체 역시 토리노에서 얻어터지는 말 끌어안고 울다가 죽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한편, 발저의 글쓰기를 보면 장르나 형식이 그렇게 중요한가, 라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모든 글이 다 구성적인 짜임새를 갖출 필요는 없다,라는 생각도 하게 만드는 글들 투성이다. 소설은 어떻게 썼을지 궁금하다.
다시 위의 글. '그', 즉 발렌티노가 동굴에 간 것은 자살하기 위해서다. 마침내 동굴 속(아래) (지하?)납골당에 다다른 그는 자살에 성공한 것인가? '가면' 사내는 누구인가? 가톨릭 종자가 되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설마 문자 그대로, 죽지도 못하고, 종자?? 아니면 자살을 통한 영생?? 오묘한 텍스트다. 그런데 로-트 발저의 많은 글이 그런 것 같다. 그러니까 산책하듯 천천히 읽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