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나의 부재 증명
1.
사막에도 어김없이 봄이 왔음에 대한 확실한 물증이 있다
나는 나의 봄에 결석했고, 극형을 선고받고 빚을 탕감 중이다
내가 결석한 나의 봄, 나의 존재에 알리바이가 생겼다
2.
내가 지각 중인 나의 사막을 나의 낙타가 걸어간다
완연한 봄, 도금한 카멜색 낙타는 단봉 쌍봉 지방을 짊어지고
두 발가락으로 모래를 찍고 콧구멍을 막고 귓구멍 속 털을 일렁이며
서면지하상가를 걸어간다, 가게를 훑고, 분수를 지나, 계단을 올라
지상으로 나가, 작은 의원과 약국을 스쳐, 아스팔트를 건너간다
어쩜, 낙타야, 너는 공간을 차지하지 않으면서 공간 속에 있을 수 있지?
고답적인 희랍 신화 대신 적나라한 자연주의 소설 깊숙이
아리아드네의 실도 없이 거울의 거울의 또 거울을 투과해
이카루스의 날개는 모형심장 속에 접어넣고 미노타우로스를 잡으러
다이달로스가 새로 구상한 부전시장의 미궁까지, 나의 낙타는 타박타박
잘도 걷고 나는 권총을 든 채 따라가는데, 자살을 권할 심산인 것이 분명하다
낙타야, 넌 절망이, 희망이 뭔지 아니까 나 대신 죽어줄 거지?
서면지하상가 지나 부전시장의 미궁에는 발자크와 졸라가 싱싱하게 썩어가고, 돼지 배 속에서 탈출한 내장이 원래 모양 그대로 푹푹 삶기고, 늙은 마녀의 시뻘건 선짓국 솥에서는 콩나물과 우거지가 과자 뜯어먹는 아이들처럼 허우적대고, 연노랑 콩국과 투명한 면 사이로 얼음 큐브가 빙산의 일각처럼 뾰족 솟아 있건만 -
어쩜, 낙타야, 너는 목도 마르지 않니? 배도 고프지 않니?
그렇다, 엄연한 나의 봄꿈에 나는 부재했고, 아, 일장춘몽이여!
그곳은 거울이 켜켜이 무한대로 이어지는 거울 미궁의 극한,
미노타우로스는 없다, 있는 미노타우로스는 무한 제곱 거울이 복제해낸
허허로운 허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특정하고 소명할 필요가 있다
낙타야, 무서워할 것 없어, 모래 바람도 거울의 허전한 반사광일 뿐인걸, 걷고 걸어, 저리로 건너가서 너의 알리바이를 지우렴, 낙타야, 너는 그때 그곳에 없었어, 너는 지금 이곳에 있어, 너의 봄 속에
3.
나와 나의 낙타,
한 마리의 잡식 동물과 한 마리의 초식 동물을 거울 속 사막의 봄꿈에 봉쇄한 거대한 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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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 <오감도 15호>
* 황지우, <구반포상가를 걸어가는 낙타>
* 바흐틴, "존재에 (나의) 현장부재증명(알리바이)는 없다." (мое) не-алиби в быти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