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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슬기 할매는 구덩이 오막살이 옆, 가짜 대궐에 살았다. 구덩이 오막살이보다 못한 흙집을 가짜 대궐로 바꾼 것은 민박을 치기 위해서였다. 할매는 여행객들에게 다슬기 해장국을 끓여 팔았다. 하지만 손님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때문에 할매가 잡은 다슬기는 대개 동네 사람들이 먹어치웠다. 남는 것은 도회지로 팔려나갔다. 그렇게 번 돈으로 할매는 가짜 대궐을 다듬었다. 어쩌다 여행객이라도 한두 명 와서 묵고 간 다음 날엔 가짜 대궐의 벽 색깔이나 처마의 장식이 조금씩 달라졌다.

 

다슬기 할매는 이 동네에서 제일가는, 또 유일한 점쟁이이기도 했다. 다들 수시로 할매를 찾아가 뭘 물어보았다. 정작 그녀의 대답은 썰렁하고 시큰둥했다. 그런데도 다들 이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언제 돼지를 잡아야할지, 언제 메주를 쑤어야 할지, 큰 아이를 학교에 보내야할지 말지 알 수 없다는 식이었다. 큰일이 있을 때도 다슬기 할매를 불렀다. 누구 며느리가 물에 빠져 죽었을 때도 다슬기 할매 없이는 장례도 치루지 못했다. 누구 손자 돌잔치에서도 다슬기 할매는 상석에 앉았다. 누구 아들 군대 갈 때도 혼자서 돼지 머리 하나를 다 먹어치웠다. 그때마다 다슬기 할매의 머리카락 속에는 이가 한 마리씩 늘어났다. 오래 전 겨울, 다슬기 할매의 머리카락에 서캐가 주렁주렁 열렸을 때 할매를 위한 잔치가 있었다. 그것이 몇 번째 생일인지는 아무도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그날을 기점으로 다슬기 할매는 그냥 점쟁이에서 연금술사이자 점성술사로 책봉됐다. 심지어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는 것도 할매의 몫이었다.

 

그 때부터 할매의 가짜 대궐 옆에는 허름한 비닐하우스 가게가 세워졌다. 이제 할매는 사업가로 거듭났다. 귀한 물건들이 하나둘씩 비닐하우스를 채워갔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물고기로 만든 통조림, 삼일운동이 있던 해 거둬들인 밀로 만든 과자, 또 다슬기 할매가 시집가던 때 지어진 공장에서 막 출시했던 라면 등. 다슬기 채처럼 원시적인 물건도 있었지만 조그만 전구가 별처럼 무수히 박힌 손전등처럼 최첨단 전기제품도 보였다. 형형색색의 찌를 비롯하여 낚시 용품들도 팔았다. 미끼용 지렁이와 구더기도 우글거렸다. 죄다 할매의 가짜 대궐의 가짜 대들보 밑에 똬리를 틀고 있는 구렁이만큼이나 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굵은 산 지렁이만은 무척 싱싱했다. 매일 새벽 산 속에서 지렁이를 생포해오는 것이 또 할매의 일이었다.

 

소영이는 다슬기 할매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배가 다 차지는 않았지만 공깃밥의 삼분의 일을 남겼다. 다슬기 해장국도 그만큼 남겼다. 국물 밑에는 굵직한 다슬기 몇 마리가 보였다. 건져 먹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지만 애써 참았다.

이놈의 가시나 봐라, 밥을 왜 남기노?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니까!”

나도 알아. 우리 할머니도 배고파.”

새로 퍼준다니까, 이 가시나가 참, 어른 말을 안 듣네! 다 그래 니 멋대로 해라!”

다슬기 할매는 성질을 부리며 남은 밥과 국을 조그만 쟁반에 담아, 신문지로 덮어주었다.

안 쏟고 들고 가겠나?”

!”

소영이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슬기 할매는 혀를 끌끌 찼다.

문디 가시나, 늦되는 건지 아예 안 되는 건지, . 가자!”

 

그러고선 쟁반을 머리에 이었다. 신기하게도 이 자세만 취하면 다슬기 할매는 한창 때처럼 허리가 빳빳하게 섰다. 심지어 양손을 모두 허리에 대거나 그냥 놀리면서도 나긋나긋 잘만 걸었다. 할매의 머리 위에서 쟁반이 가볍게 일렁였지만 절대 떨어지는 법은 없었다. 소영이는 할매를 뒤를 졸졸 따라갔다. 자기 할머니와 다슬기 할매가 커다란 늙은 호박을 하나씩 머리에 이고 걷던 장면이 낡은 흑백 사진처럼 떠올랐다. 왜 할머니가 걸음마를 멈추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슬기 할매보다도 훨씬 더 젊은데 말이다.

 

소영이의 구덩이 오막살이는 강 아래쪽, 고무신 공장 옆에 있었다. 길을 가는 내내 다슬기 할매는 혼잣말로 주문을 외웠다. 한참 뒤에 철도가 나왔다.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버려진 기찻길이었다. 거기를 건너 좀 더 내려가자 조그만 골목이 나왔다. 닥지닥지 붙은 나무 쪽문 중에 제일 초라한 것이 소영이네 구덩이 오막살이였다. 쪽문은 평소처럼 빠끔히 열려 있었다. 소영이가 손을 대자 활짝 열렸다. 그래본들 성인 둘은 함께 지나기 힘들 만큼 좁은 공간이었다. 소영이가 먼저 문 안으로 들어갔다. 다슬기 할매는 투덜투덜 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아주 좁고 제법 가파른 돌계단이 땅 밑으로 이어졌다. 돌계단이 끝나자, 편편하고 넓은 구덩이 같은 뜰이 나왔다. 뜰의 끝에는 수돗가가 있고, 뜰 오른쪽엔 뚱딴지와 감나무, 상추와 파가 심어진, 꽃밭과 텃밭의 중간쯤 되는 것이 있었다. 구덩이의 가두리를 쭉 에워싸는 식으로 게딱지만한 반 지하 단칸방들이 붙어 있었다.

 

구덩이 오막살이에는 열두 명이 살고 있었다. 연탄집, 배추집, 쌀집, 사과집 등 이곳 사람들은 그들이 파는 물건이 곧 이름이었다. 하지만 변소 바로 옆, 계단으로 올라가, 2층에 사는 부자만은 예외였다. 그곳은 조장집이라고 불렸다. 그 집 아저씨는 고무신 공장의 조장이어서 월급을 많이 받았다. 뇌물도 많이 받았다. 아저씨에게 일자리를 부탁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던 것이다. 뇌물은 늘 막걸리였다. 형편이 좀 되는 사람은 소주를 사주기도 했다. 때문에 조장 아저씨는 늘 술에 취해 있었다. 그 집 딸이 난쟁이인 것도 아저씨가 술을 너무 많이 먹고 아이를 만든 탓이라고들 했다. 어떻든 조장집은 방도 세 칸이나 되고 수도도 따로 딸려 있었다. 그래서 늘 복작대는 공동 수돗가를 쓸 필요가 없었다.

 

조장집이 아무리 부자여도 변소를 따로 가질 순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 득실대는 구덩이 오막살이에서 딱 하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변소였다. 그 앞에는 늘 두엇의 대기자가 있었다. 변소는 빨리 차올랐고 이에 맞추어 구더기도 빨리 증가했다. 쌀집 아줌마는 정기적으로 변소에 염산을 뿌렸다. 그날이 구더기의 제삿날이었다. 살아서 스멀거리는 놈이든, 새카맣게 타죽어 널브러진 놈이든 구더기는 죄다 지옥이었다. 구더기가 너무 싫어 소영이는 심심찮게 똥오줌을 참았다. 그 바람에 어린 나이에 방광염에 걸리고 걸핏하면 변비를 앓았다. 그러니까 딱히 배추집 아들이 무슨 잘못을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한 번 변소에 들어가면 10, 20분은 족히 앉아 있는 이 오빠가 소영이는 죽도록 미웠다. 그런 일이 하루에도 두 세 번은 족히 됐으니 더 미웠다. 돌계단이 끝나자마자, 그리하여 변소 옆에 이르자마자 소영이는 습관적으로 요의를 느꼈다.

, 오줌 마려워.”

오줌 한 번 싸는 게 무신 유세라고 이리 떠들어쌌노? 얼른 갔다 오든지.”

다슬기 할매는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지곤, 맞은편으로 침침하고 비좁은 동굴로 들어갔다. 소영이는 변소 문을 잡아당겼다. 잠겨 있었다. 또 배추집 아들인 게 분명했다. 소영이는 성질을 부리며 변소 문을 두어 번 쾅쾅 쳐주었다. 나무판자를 붙여서 만든, 닫힌 문틈으로 해묵은 악취가 배어나왔다. 소영이는 하는 수 없이 방금 다슬기 할매가 들어간 그 비좁고 침침한 동굴로 들어섰다.

 

소영이네 방은 구덩이 오막살이 안에서도 제일 구석에 있었다. 미닫이문은 늘 열려 있었다. 문 뒤에는 곧장 비좁고 어두침침한 부엌이 있었다. 거기에는 기름때가 낀 석유곤로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지저분한 식기 몇 개가 돌 선반 위에 제멋대로 엎어져 있었다. 엉덩이를 간신히 붙일 수 있는 옹색한 툇마루에 방문이 붙어 있었다.

 

소영이의 할머니는 오늘도 무릎을 세운 채 문지방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할머니의 앙상하고 쭈글쭈글한 무르팍은 축 늘어진 주름덩어리 같은 귀를 덮고 있었다. 그 옆에는 다슬기 할매가 온화하고 자비로운 죽음의 사자처럼 앉아 있었다. 한 시절엔 어머니와 딸과 같았지만 이제는 둘 다 알맹이와 물기가 쏙 빠져나간, 텅 빈 거죽 같았다. 말을 잃어버린 한 노파의 손 위에 말이 너무 많은 다른 노파의 손이 얹혀졌다. 하지만 다슬기 할매도 이곳에 오면 고집 센 조개 마냥 입을 다무는 버릇이 있었다.

 

할머니들!”

소영이의 날카롭고 높은 음성에 다슬기 할매는 정신이 번쩍 드는 성 싶었다.

어딜 갔다가 인자 오노?”

변소에 누가 있어. 배추집 오빠일 거야, 분명히.”

? 그래, 아까 오줌 마렵다 켔제. 여기만 오면 나도 정신이 오락가락 하네, . 오줌 참으면 병난다, 수돗가 가서 누고 와라.”

우리 할머니 밥 먹는 거 보고 갈 거야.”

문디 가시나, 어른이 말을 하면, , 알겠습니다, 해야지!”

소영이는 문지방에서 잠깐 뭉그적거렸다. 오늘은 할머니가 밥 먹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모든 걸 알고 모든 걸 할 줄 아는 다슬기 할매가 옆에 있지 않은가. 사람은 밥 힘으로 산다고 다슬기 할매도, 또 구덩이 오막살이 어른들도 말했다. 소영이는 할머니가 밥을 영영 못 먹게 된 것이 아닐까 무서웠다. 그럼에도 아직은 할머니가 밥을 먹을 줄 안다고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반쯤 차 있던 밥그릇이 비워지는 것이 그 증거였다. 또한 이 때문에 할머니가 밥을 먹는, 아니 전혀 먹지 못하는 장면은 차마 볼 수 없었다.

 

수돗가에서는 마침 연탄집 언니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매일 연탄을 날랐지만 언니의 얼굴은 보름달처럼 둥그렇고 뽀얬다. 덩치도 커서, 쪼그려 앉은 소영의 몸이 다 가려졌다.

 

소영이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다슬기 할매는 사라지고 없었다. 소담한 밥상도 치워진 상태였다. 소영이는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려 소영이의 얼굴을 매만졌다. 할머니의 미소가 유난히도 흐뭇해보였다. 배 안에 금방 한 밥과 따뜻한 국물이 들어가서일 것이라고 소영이는 생각했다.

할머니, 다슬기도 먹었어? 쫄깃쫄깃, 맛있어, 그치?”

할머니는 묵묵부답이었다. 말을 잃어버리면서 할머니의 표정은 더 다채롭고 섬세해졌다. 흐뭇한 미소에는 이내 서글픈 우수가 어리었다. 간혹 눈물이 고였다가 눅눅한 물방울이 되어 할머니의 척박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대낮에도 빛 하나 들지 않는 이 침침한 방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것 같았다. 소영이는 할머니의 손길을 느끼며 조잘조잘 오늘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할머니, 할머니! 나 오늘도 그 이상한 아저씨 봤어. 그 아저씨 되게 이상해. 뭐가 이상한 줄 알아?”

할머니는 여전히 하회탈 같은 미소만 머금은 채 말이 없었다. 하회탈의 두 눈에서 또 싯누런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슬퍼서가 아니라 몸의 다른 기관들처럼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버린 눈이 저도 모르게 진물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소영이는 혼자 키득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매일 물고기 잡으러 오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아, 히히. 날도 더운데 옷 껴입고 있어. 그 아저씨 바보야, 나처럼. 할머니, 근데,”

소영이는 요즘 늘 그랬듯 떡붕어 아저씨의 모습을 할머니에게 전해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말을 해놓고 보면 실제로 보고 들은 것과 차이가 나는 것만 같았다. 소영이는 슬슬 짜증이 났다.

아이, 어떻게 말해야 되지? 정말 커다란 아저씨인데, 냄새도 이상하고, 무슨 냄새라고 해야 될까? 에이, 할머니, 이제 영영 못 일어나? 옛날에는 뛰기도 했잖아, ? 이제 사과집 아기도 걸음마한단 말이야. 할머니, 손 좀 줘봐, ? 내가 걸음마 가르쳐줄 게, ?”

하지만 곧 바스러질 것처럼 약한 할머니의 손은 소영이의 손을 꽉 쥐지도 못했다. 소영이는 금세 풀이 죽었다. 하루 종일 방과 툇마루만을 간신히 오가는 할머니가 안쓰러웠다. 구덩이 오막살이 사람들은 그런 소영이를 안쓰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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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떡붕어 아저씨와 꼬마 소영이

 

   

떡붕어 아저씨의 손에서는 톱밥 썩는 냄새가 났다. 낚시 바늘에 미끼를 꿰느라 손을 꼼지락대자 냄새는 더 심해졌다. 톱밥더미에서 건져 올린 지렁이의 움직임도 맹렬해졌다. 미끼들의 몸이 찢기고 터지고 뚫리며 흘러나온 체액이 고스란히 그의 손에 스며들었다. 그 손으로 그는 수시로 코를 파고 귀를 긁었다. 땀구멍에서 솟아나는 피지와 땀을 닦아내기도 했다. 가끔은 땀이 줄줄 흐르는 등짝을 문지르기도 했다. 오후가 되면 떡붕어 아저씨의 몸 전체에서 톱밥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냄새를 뒤집어 쓴 채 낚싯대를 드리워놓고 강가에 앉아 있었다. 그의 체취도 자연이 만든 풍경화 속에 속절없이 묻혀버렸다.

 

떡붕어 아저씨 앞으로 넓은 강물이 흐르고 맞은편에는 깎아지른 듯 가파른 절벽이 서 있었다. 간간히 강 위쪽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군인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떡붕어 아저씨의 시선은 저 멀리 낚싯대의 끝 어디에 던져져 있었다. 강물의 흐름을 읽어내고 있는 것일까. 절벽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소나무들의 움직임을 완상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무들의 꼭대기까지 내려앉은 구름을 좇는 것일까. 간혹 산들바람이 일어 톱밥 썩는 냄새가 강의 수면 위로 퍼졌다. 그 진동이 유달리 심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그때마다 그의 손이 움찔했다. 또 절대로 표정이 바뀌지 않는 무뚝뚝한 얼굴 한복판에서 눈만은 유달리 번득였다. 요 며칠 째 잡히는 건 꺽지나 동자개는커녕 피라미밖에 없지만 말이다. 오늘은 간밤에 내린 비 때문에 강물이 불어 그나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떡붕어 아저씨는 더 집요하게 미끼통을 헤적였다. 톱밥 썩는 냄새 때문에 강가가 온통 후텁지근하고 야릇한 냄새의 도가니로 바뀌는 것 같았다.

 

 

꼬마 소영이는 구덩이 오막살이에 사는 일곱 살짜리 아이였다. 지금까지 머리를 제대로 감아본 적이 없는 아이였다. 소영이의 머리카락 숲에는 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서캐들이 구석구석 진을 쳤다. 비누칠을 해 본 적이 없는 얼굴에는 뽀얗고 건조한 마른버짐이 야들야들한 박꽃처럼 피어났다. 옷은 늘 소영이의 몸보다 훨씬 컸고 그나마도 다 남자애들 옷이었다. 구덩이 오막살이 아이들이 대부분 남자애들이었기 때문이다. 여름이라 소영이는 슬리퍼를 끌고 다녔다. 슬리퍼도 배추집 아들 것을 물려받아 몹시 낡은데다가 몹시 컸다. 옷도, 신발도 너무 큰 탓에 소영이의 몸집과 얼굴은 더 작아보였다. 검정 고무줄로 질끈 묶어 올린 긴 머리카락이 촐랑거릴 때면 꼭 새카맣고 작은 얼굴에 커다란 두 눈만 동동 뛰노는 것 같았다.

 

밥을 먹고 나면 소영이는 구덩이 오막살이 밖으로 나왔다. 할머니가 언제인가 걸음마를 멈춘 순간부터 늘 혼자였다. 그래도 심심한 줄을, 아니 심심이란 말을 잘 몰랐다. 구덩이 오막살이 근처에는 크고 작은 산이 많았다. 비탈진 곳에 계단식 논이 층층이 이어졌다. 군데군데 척박한 밭이 펼쳐졌다. 그 사이사이로 계곡과 시냇물이 흘렀다. 그래도 소영이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터는 강가였다.

 

햇볕이 장애물 없이 곧바로 내리쬐었고 얕은 강물에서는 다슬기도 딸 수 있었다. 돌을 덮은 물이끼 위에는 딱딱하고 갸름한 점처럼 다슬기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물이 깊어야, 또 흐려야 다슬기가 많았다. 물론 소영이는 깊은 곳까지 들어가진 못했다. 움직임도 서툴러 많이 따지도 못했다. 그래도 다슬기 할매에게는 적잖은 보탬이 됐다. 다슬기에 싫증이 나면 사람 구경을 했다. 구덩이 오막살이 근처에서는 보기 힘든, 도회지 사람들이 강가에는 무척 많았다. 그 때문에도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밝고 넓고 즐거운 놀이터였다 

 

*

 

 

늦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날 낯선 사람이 강가에 나타났다. 척 보기에도 여느 도회지 사람과는 달랐다. 옷차림이 세련되지도, 피부색이 뽀얗지도 않았다. 이렇다 할 동행도 없었고 윤이 반짝반짝 나는 승용차도 없었다. 두툼하고 무거운 천 가방 두 개, 낡은 미끼통, 그리고 낚싯대가 전부였다. 다른 물건들이 다 낡아빠지고 빛이 바랬는데 오직 낚싯대만은 날카로운 광택이 나고 반들반들했다. 한편, 그 주인은 소영이 눈에는 그야말로 거인, 톱밥 썩는 냄새가 나는 시커먼 거인이었다. 몸통은 장독만큼이나 두툼하고 투박했으며 어깨는 떡 벌어지고 배까지 푸짐했다. 저 멀리 강의 끝을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 있는 거인의 모습은 나지막한 담장 같기도 했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소영이는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우아, 거인이 나타났다!”

 

하지만 거인은 소영이의 외침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 번 더 소리를 질렀지만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그것이 소영이의 호기심을 더 자극했다. 소영이는 매일매일 거인을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그의 등은 더 커지고 몸의 색깔은 더 검어졌다. 간혹 그 담장이 꿈틀대고 사부작댈 때도 있었다. 그 진동에 자갈들이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러댔다. 소란한 틈을 타서 소영이는 그의 옆으로 바투 다가설 용기를 냈다. 이제 옆얼굴이 보였다. 몸통 못지않게 시커먼 구릿빛 얼굴은 짙은 눈썹과 텁수룩한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뭉툭한 딸기코 속의 새카만 코털이 파르르 움직였다.

우아, 담벼락이 살아있다!”

소영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가 큰 소리로 기침을 했다. 굵은 침방울이 튕기면서 그의 얼굴이 괴물처럼 일그러졌다. 지레 겁을 먹은 소영이는 줄행랑을 쳤다

 

며칠 뒤에도 소영이는 강가에 와 있었다. 떡붕어 아저씨도 여전히 강가를 지키고 있었고, 소영이는 백열등 주위의 하루살이처럼 그 곁을 맴돌았다. 석상처럼 굳은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기도 했다. 너무 무뚝뚝해서 삼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 이상 무섭지도, 이상하지도 않았다. 커다란 몸뚱어리가 재채기를 하며 들썩일 때는 마냥 웃음이 나왔다. 강아지도, 고양이도 다 쪄죽을 판인데 몸에는 두툼한 조끼를 걸치고 있었다. 얼굴과 팔다리에서 땀이 시냇물처럼 흘러내렸다.

아저씨 바보! 더울 때는 옷을 벗어야지!”

 

순간, 소영이는 그가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말을 걸지도 말고, 행여나 저쪽에서 말을 걸어와도 모르는 척할 것! 외지 사람들이 이곳을 자주 드나들게 되자 할머니가 늘 되뇌던 말이었다. 하지만 호기심이 불안을 눌렀다. 게다가 오랫동안 봐 왔으니 아는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아저씨,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을 해야지!”

 

석상은 역시나 답이 없었다. 아무래도 정말 바보인 모양이었다. 그러자 그가 한층 더 가깝게 여겨졌다. 소영이는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강을 앞에 두고 바보 둘이 나란히 앉아 있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강 맞은편에 우뚝 솟은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소영이에게 그것은 이 세상의 끝이었다. 그 끝을 향해 열심히 돌을 던졌다. 하지만 돌은 늘 그랬듯 세상 끝에 닿지 못하고 바로 코앞의 강물에 첨벙 빠졌다.

 

갑자기 지금껏 꿈쩍도 않던 석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떡붕어 아저씨는 미끼통을 목에 걸고 낚싯대를 매만지더니 천천히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무릎이 물에 잠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벅지까지 물이 차올라왔다. 그럼에도 황소걸음은 계속 됐다. 급기야 그의 몸의 절반이 흐르는 강물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으악! 사람 살려!”

소영이는 벌떡 일어나 사방팔방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다슬기 할매가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듣고서 몸을 폈다. 얼굴로 내리쬐는 햇빛이 곤혹스러운지 손 가리개를 하고서 힘겹게 이쪽을 바라보곤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문디 가시나, 낚시 하는 거 처음 봤나? 오두방정하곤, . 저거는 앞으로 커서 뭐가 될꼬.”

다슬기 할매는 얼마간 몸을 그대로 펴고 있었다. 삭정이처럼 앙상한 몸은 서 있을 때도 거의 직각에 가깝게 구부러져 있었다. 그랬기에 다시 등을 굽히며 기울어지는 모습이 더 자연스러워보였다. 다슬기 할매는 다슬기 채를 수면 위로 가져가, 투명한 플라스틱에 눈을 바싹 갖다 댔다. 한 손으론 열심히 다슬기를 따서 채에 담았다.

 

꼬마 소영이는 다슬기 할매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 몸짓과 투박하면서도 정겨운 억양만은 포착할 수 있었다. 정말로, 강 한가운데에 몸을 담그고 있는 떡붕어 아저씨는 강가에 있을 때보다 더 평화로워 보였다. 햇빛이 그의 몸을 길게, 그리고 깊숙이 가르며 강물 속으로 침잠했다. 강물은 또 그 햇살을 다소곳이 받아들였다. 간혹 햇살보다 더 가는 낚싯줄이 강물의 출렁임보다 더 섬세한 흐름을 타며 아슬아슬하게 진동했다. 그의 시선은 특별히 어떤 것을 응시하지 않은 채 허공중에 부유했다. 소영이는 강 너머 깎아지른 절벽, 세상의 끝을 응시하다가 돌멩이 하나를 집어 힘껏 던졌다. 돌멩이는 세상의 끝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하나 더 던져보았다. 그 역시 얼마 가지 못했지만, 대신 떡붕어 아저씨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렇게 잠깐,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소영이 쪽을 바라보았다. 소영이의 맑은 두 눈이 저 멀리, 떡붕어 아저씨의 흐리멍덩한 눈과 어렴풋이 마주쳤다.

 

그때 앙상하고 딱딱한 손이 매섭게 소영이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놈의 문디 가시나, 그래 돌을 던지면 물고기들이 깜짝 놀라서 도망을 안 가겠나? 사람은 마음을 곱게 써야 되는 법이다. 얼른 집에 가자!”

우아, 할머니! 다슬기 진짜 많이 잡았다! 어라, 이건 나뭇가지잖아?”

소영이는 볼멘소리를 하며 나뭇가지를 집어냈다. 돌조각도 보였다.

소영이 할머니는 다리가 썩었고 다슬기 할매는 눈이 썩었어, 헤헤.”

아이고, 문디 가시나 말하는 거 하곤.”

할매는 못 하는 거 없잖아? 그런데 왜 우리 할머니 다리 못 고쳐 줘?”

그나마 내가 손을 봐줘서 숨이라도 쉬고 있는 기다, 알겠나?”

? 그런 거였구나.”

 

소영이는 어느새 떡붕어 아저씨를 잊고 다슬기 채를 품에 안았다. 새카맣고 굵직한 다슬기들이 뾰족한 더듬이를 세웠다. 채 바깥으로 기어 나가려고 무던히 애쓰는 중이었다.

귀여워, 헤헤. 먹음직스럽기도 하고.”

바로 끓여주마.”

우리 할머니는?”

이놈의 가시나, 국 끓이는데 니 국 내 국이 어딨노? 너거 할머니도 와서 먹으면 되지.”

아참! 할매는 이거 팔아서 먹고 살잖아? 내가 잡은 것도 가져가. 어라, 이 녀석이 어딜 갔지?”

소영이는 바지주머니 속에 넣어둔 다슬기를 찾았지만 영 보이지 않았다.

아이고 요놈의 가시나야, 시끄럽긴, ! 문디 코에서 마늘을 빼먹고 문디 똥구멍에서 콩나물을 빼먹지, 니 겉은 병신 가시나한테 돈을 받겠나, ?”

 

소영이는 다슬기 할매의 왁살스러운 말이 듣기 좋았다. 이 동네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할매뿐이었다. 할매의 말투가 괴상한 건 백년, 이백년, 아니 천년을 깊은 산골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산이 알아서 변해갔다. 처음에는 밭이 되고 논이 됐다. 그 이후 산은 점점 더 평평해졌다. 어떤 곳에는 높은 집들과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버스와 자전거가 오가더니 자동차도 등장했다. 급기야 공장이 들어섰다. 고무신 공장이라고 했다. 그 주변으로 소영이의 집과 같은 구덩이 오막살이가 생겨났다. 사람들의 말투는 점점 바뀌어갔다. 하지만 다슬기 할매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래 쪼만해서 언제 크겠노? 시집을 보낼 수가 있나, 식모살이를 보낼 수가 있나, 학교를 보낼 수가 있나. 니는 아무데도 못 보낸다. 하긴 크면 더 문제지. 너거 할매가 이 바보를 두고 우째 눈을 감겠노.”

눈 감는 게 뭐 힘들어? 요렇게!”

소영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바람에 몸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다슬기 채가 흔들거렸다. 마침 다슬기 채의 벽을 거의 다 타고 올랐던 다슬기 한 마리가 땅바닥으로 톡 떨어졌다.

이놈의 새끼, 니는 땅에서 사느니 끓는 물에서 죽는 게 낫다!”

다슬기 할매는 잽싸게 다슬기를 집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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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99 2015-03-03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슬기 할머니 멋지다.
ㅋㅋㅋ
나도 이런 구성진 말투의 할머니 만나고 싶었는데. ^^

푸른괭이 2015-03-04 10:00   좋아요 0 | URL
헉, 소설에 댓글 달린 것이 처음이라 감격스럽니다! 마저 읽어주세요^^;;
 

 

일상의 당혹, 혹은 일상으로부터의 도피

- 카프카(1883-1924), 변신(1915)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9) 당장 출근을 해야 하는데 큰일이다. 문밖에서는 가족들이 난리법석이다. 결국 잠자의 염려대로 지배인이 찾아온다. ‘변신이라는 환상적인 사건이 소설의 첫 문장에서 완료되자, 보다시피, 이후의 시간은 잠자-벌레의 일상으로 채워진다. 수시로 끼니를 거르고 진득이 사람을 사귈 겨를도 없이 연일 기차를 타고 출장을 다니는 영업사원의 삶 대신 방바닥과 천장과 벽과 가구 사이를 기어 다니는 갑충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껏 잠자에게 의지해 살아왔던 가족도 이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한다. 텅 빈 줄 알았던 금고가 열리고 늙은 퇴물로 전락했던 아버지가 푸른 제복 차림의 늠름한 일꾼으로 변해 있다. 어머니와 여동생도 일자리를 구한다. 빈 방은 하숙인들이 차지하고 반쯤 자발적으로 해고된 젊은 하녀 대신 뼈대가 굵고 몸집이 큰 늙은 할멈이 가사 일을 돕는다.

 

 

 

 

 

 

 

 

 

 

 

 

 

 

 

 

 

 

이토록 촘촘하게 짜인 일상의 시간표 속에서 잠자-벌레는 보살핌은커녕 뒤치다꺼리를 요하는 존재일 뿐이다. 등짝의 살 속에 깊숙이 박혀 썩어가는 한 알의 사과는 그 상징처럼 읽힌다. 그렇기에 여동생의 바이올린 연주에 이끌려 거실로 기어 나온 그의 절규가 더 절박하게 들린다. “음악이 그를 이토록 사로잡는데 그가 한 마리 동물이란 말인가?”(66) 하지만 동물의 몸을 하고 동물의 소리를 내는 것이 동물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이 말똥구리가 아직도 인간일 수 있다면 그건 그가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일 테지만 그래본들 파출부 할멈의 눈에는 옆방의 저 물건”(77)일 뿐이다.

 

사건이 종료됐을 때 잠자 가족은 간만에 교외로 나가는 전차를 탄다. 따뜻한 3월이다. 앞으로의 생활에 관한 얘기를 나누던 중 잠자 부부는 어린 딸이 어느덧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했음을 인지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목적지에 이르러 딸이 제일 먼저 일어서며 그녀의 젊은 몸을 쭉 뻗었을 때 그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새로운 꿈과 좋은 계획의 확증처럼 비쳤다.”(78) 이렇게 변신은 끝난다. 과연 이 소설은 인간을 거대한 전체의 한 부분, 심지어 부품으로 전락시키는 산업사회와 관료사회에 대한 풍자일 뿐인가.

 

 

 

 

 

 

 

 

 

 

루이스 스카파티가 그린 변신의 삽화에서 잠자-벌레는 카프카의 얼굴을 하고 있다. 실제로 이 소설에는 작가의 전기가 많이 투영돼 있다. 카프카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태어났으되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었다. 이방인의 운명을 타고 난 셈이다. 그러나 세 개의 문화가 서로 만날듯하다가 결렬되는 지점에서 곧 그의 문학이 생성된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와의 관계 역시 간과할 수 없다. 벌레로 변신한 아들을 향해 분노에 차 사과 폭탄 세례를 퍼붓는 잠자의 아버지를 보라. 실제 카프카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장남의 의무를 강요했으나(적어도 카프카 스스로 그런 강압을 느꼈으나) 정작 카프카는 모계의 혈통을 이어받아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에 키는 컸으되 허약한 체질이었다. 이런 자신을 그는 아버지의 건장한 몸 앞에서 곧잘 주눅이 드는 상속권을 박탈당한 자식”(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으로 정의했다.

 

한편 법학 박사 학위가 있었던 카프카는 근무 시간이 비교적 적다는(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이유로 <노동자 산재 보험국>에 들어갔다. 그러고도 수시로 업무 때문에 글을 쓸 시간이 없다고 투덜댔으며 동시에 글을 쓰다가 다음 날 지각이나 결근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법과 문학, 법률가와 문학가 등 두 영역은 꽤나 생산적인 공생관계를 유지했다. 적어도 법률과 업무의 굴레, 그것으로부터의 도피 욕망이 카프카의 문학에 독특한 색깔을 부여해주는 것은 분명하다. 영원한 이방인을 자처하며 문학의 언저리를 맴돌며 끊임없이 문학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것!

 

다시 변신으로 돌아가자. 무엇이 평범한 영업사원을 벌레로 바꿔놓았을까? 더 정확히, 그가 벌레가 되면서까지 벗어던지고 싶었던 굴레는 무엇일까? 아마 잠자가 자신의 변신을 깨닫기 전에 꾸었던 불안한 꿈”, 즉 소설의 바깥에 버티고 있는 현실과 일상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사람이 한 마리의 벌레로 변해도, 그것은 그저 일상의 당혹일 뿐,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잠자 스스로 짊어진 장남과 가장의 의무가 우스꽝스러운 자기 환상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이렇듯 변신은 장밋빛 진보를 약속한 근대의 몽상에, 안일한 인간관과 세계관에 물음표를 찍고 진화 대신 퇴화(인간에서 동물, 심지어 벌레로!), 상승 대신 전락, 성공 대신 실패, 축조 대신 해체에 대해 얘기한다. 죽음의 순간에 삶이 조망되듯 인간이 인간이길 멈출 때 비로소 그 본질이 밝혀진다. 변신을 덮는 순간 우리가 저 치명적인 변신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건 이 때문이 아닐까.

 

 

- 간행물윤리위원회 <&>(20122월호)

 

 

** 너무 잘 쓴 소설이라서 어떤 말을 덧붙여도 다 초라하게, 부실하게 들리지만 그럼에도 계속 쓰도록 만드는 소설, [변신]!   

 

** <안개 속의 고슴도치> 연재와 나란히, 책으로 출간하기에 앞서, 현재 연재 중이거나 연재가 끝난 세계 문학 관련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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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의 고슴도치>

- 프롤로그

 

 

 

 

 

 

 

 

저녁이 됐군요. 오늘도 고슴도치는 딸기잼을 들고 곰을 만나러 갑니다. 둘이 함께 딸기잼을 곁들인 홍차를 마시며 별을 헤아릴 거랍니다. 고슴도치는 걸음을 옮기면서 계속 혼잣말로 옹알댑니다.

“곰에게 무슨 말을 할까… 곰아, 너 주려고 딸기잼을 가져왔어. 내가 이렇게 말하면 곰은…”

 

바로 그때 고슴도치의 눈앞에 자욱한 안개가 어립니다. 그 안개 사이로 하얀 말이 떠 있습니다. 어쩜, 저렇게 아름답고 신비스러울 수가! 고슴도치는 넋을 잃은 채 안개 속으로 들어갑니다. 안개 속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 고슴도치는 궁금해집니다. 조심스레 첫 발을 내딛어 봅니다. 이런, 자기 발도 보이지 않네요. 안개가 얼마나 짙게, 깊게 깔려 있으면 말이지요.

 

고슴도치는 두렵지만 안으로 더 들어갑니다. 커다란 나무들이 괴물처럼 버티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다니는 것도 같군요.

“으악!”

고슴도치는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릅니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고슴도치를 부르네요.

“고슴도치야!” “고슴도치야!” “고슴도치야!”

 

하지만 이 애타는 메아리를 고슴도치는 듣지도 못한답니다. 어머나! 그러고 보니 딸기잼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네요. 안개 자욱한 숲 속에 갇힌 고슴도치는 몸을 움츠리고 벌벌 떱니다. 여기가 대체 어딜까?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안개의 문은 어디 있지? 고슴도치는 오도 가도 못하고 눈알만 굴립니다. 불안하고 무서워 죽을 지경입니다.

 

그때 귀가 길게 축 늘어지고 코끝이 새카맣고 동그란 강아지가 나타납니다. 심지어 코를 킁킁거리며 고슴도치의 얼굴까지 바싹 다가오네요. 무척 귀여운 강아지이지만, 웬걸, 고슴도치는 금방 기절이라도 할 것처럼 얼굴이 새하얘집니다. 하지만 강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고슴도치의 냄새를 맡더니 뭔가를 건네주고는 웃으며 사라집니다. 아, 딸기잼 보따리! 잃어버린 딸기잼을 다시 찾았지만, 고슴도치는 왠지 기쁜 것 같지 않네요. 왜 그럴까요? 글쎄요.

 

갑자기 고슴도치는 미친 듯 어디론가 마구 달려갑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시커먼 강물이 나타납니다. 고슴도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강물 속으로 풍덩, 뛰어듭니다.

 

자, 이제 고슴도치는 출렁이는 물 위에 둥둥 떠 있습니다. 죽은 걸까요? 아, 아니네요. 혼잣말처럼 뭐라고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걸요. 뭐라고 하는 걸까요?

“나는 고슴도치. 나는 물에 빠졌어. 이제 곧 물속으로 가라앉을 거야.”

그때 뭔가가 말을 걸어옵니다.

“내가 너를 강가로 데려다 줄게.”

 

대체 누굴까요? 아니, 뭘까요? 궁금해 죽겠지만, 미끈미끈할 것 같은 시커멓고 거대한 형상만 보일 뿐, 도무지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군요. 그런데도 고슴도치는 무섭지도 않은가 봐요. 저항하지도 않고 얌전히 있는 걸 보면 말이지요. 그 시커먼 뭔가는 조용히 고슴도치를 자기 등에 태우고 물을 따라 떠내려갑니다.

 

얼마나 갔을까요? 드디어 고슴도치가 눈을 뜹니다. 고슴도치 옆에는 곰 한 마리가 앉아 있습니다. 양쪽 볼에 부푼 풍선을 집어넣은 것처럼 통통하고 팔다리와 몸통이 커다란, 정말 귀여운 곰이네요. 고슴도치와 곰 앞에는 모닥불이 활활 타오릅니다. 그 위에 차 주전자가 놓여 있습니다. 주전자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걸 좀 봐요. 곰은 오래 전부터 고슴도치를 기다렸던 모양이에요. 그래서일까요, 곰은 불만이 많습니다. 투덜거리며 쉬지 않고 말을 늘어놓네요.

 

“고슴도치야, 대체 어디 갔던 거야? 얼마나 불렀는지 알아? 아무리 불러도 대답도 하지 않고…. 대체 어디를 갔었어? 이렇게 모닥불도 지펴놓고 의자도 갖다 놓고 차도 끓여 놓고…. 우리 둘이 함께 차 마시기로 했잖아…. 아참, 너, 딸기잼 가져온다고 했지, 응? 계속 기다렸단 말이야! 너랑 별을 헤아리고….”

 

곰은 잠깐 말을 멈춥니다. 잠깐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열고 한숨을 크게 내쉬네요.

“휴우…. 네가 없으면 누구랑 같이 별을 세겠어, 응?”

 

곰의 길고 긴 잔소리가 고슴도치에게는 감미로운 자장가처럼 들리나봅니다. 귀엽고 커다란 곰을 바라보며 고슴도치는 생각에 잠깁니다.

‘어쨌거나 참 좋구나, 다시 곰과 함께 있으니….’

하지만 연이어 이런 생각도 떠오릅니다.

‘저어기, 저 안개 속의 하얀 말은 어떻게 됐을까?’

 

조막만 한 고슴도치와 집채만 한 곰 위로 캄캄한 밤하늘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하네요. 저 별을 언제 다 헤아릴까요? 별을 다 헤아리기도 전에 너무나 쉬이 아침이 오는 것은 아닐까요? 차를 마시고 별을 헤아리는 동안에도 고슴도치가 계속 하얀 말 생각을 하면 어떡하죠? 이런, 참, 궁금한 것도 많네요!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만 고슴도치와 곰을 단 둘이 남겨두고 사라져야겠지요?

 

 

 

 

 

 

 

― 소영이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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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화는 유리 노르슈테인의 단편 애니메이션 「안개 속의 고슴도치」(1975 / 각본 - 코즐로프)를 토대로 쓴 것입니다. 애니메이션은 http://www.youtube.com/watch?v=oW0jvJC2rvM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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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화요일부터 본격적으로 구덩이 오막살이의 꼬마 소영이 얘기를 쓰려고 합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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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99 2015-03-03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딸기잼!!!
냠냠^^

최재혁 2023-11-11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둘이서 뭘 했을지 알것만 같은 묘묘하고 기기하고 현현하는

푸른괭이 2023-11-12 16:19   좋아요 0 | URL
10여년 전의 글에 댓글을 달아 주셔서 감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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