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지하로부터의 수기>
보통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주인공을, 또 그가 주변 인물들과 함께 만들어내는 사건을 추적한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이런 관성을 철저히 배반하는 소설이다. 특히 1부 「지하」는 마흔 살의 한 남자가 밑도 끝도 없이 늘어있는 말들의 향연이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그는 한 시절 외톨이 관리였고 사벨을 절거덕거리는 한 장교 때문에 화를 내기도 했을 만큼 관직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그러던 중 한 친척으로부터 거액의 유산을 받게 되자 오롯이 ‘지하’에 틀어박혔다. 그 이후 그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화자의 물리적 정황이 최소화됐고 사회와의 접촉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소설적 사건도 있을 수 없다. 진눈깨비를 매개로 한 회상, 즉 2부 「진눈깨비에 관하여」는 좀 수월한 편이다. 이른바 줄거리는 이 부분을 토대로 정리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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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만 놓고 보자면 소설적 인물로서 화자의 형상은 낭만적 주인공-영웅과, 다분히 고골풍, 즉 초기 도스토예프스키적인 희극적 얼뜨기 사이에서 진동한다. 우선, 가히 낭만주의가 창조한 주인공의 후예답게(바이런, 푸시킨, 레르몬토프 등 낭만주의자의 작품이 직접 언급되기도 한다) 그는 ‘아름답고 숭고한 것’에 목말라 한다. 이것이 곧 그의 이념이자 이상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 화자는 비극적 갈등, 긴장 어린 결투, 거국적 화해, 매춘부와의 교감 및 구원 등 책을 통해 학습한 것을 현실에 그대로 이식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숭고한 몽상은 페테르부르크의 비루한 현실과 부딪치면서 기괴한 불협화음을 낸다. 그의 열변은 좌중의 무관심에 묻히거나 기껏해야 비웃음만 사고, 그가 내민 화해의 손짓은 때와 장소에 전혀 맞지 않는 광대놀음에 가까워진다. 대체로 ‘지하’에서는 낭만주의와 이상주의를 양식으로 한껏 고양되었던 화자였지만 ‘지상’에서는 볼품없는 외모와 사회적, 경제적 지위로 인한 콤플렉스, 괴상한 피해의식과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우스꽝스러운 낙오자로 전락한다.
이 희비극의 핵심은, 리자가 간파한바, ‘책을 따라한다’(책에 따라 말한다/산다)라는 것에 있다. 달리 말해, ‘살아 있는 삶’(지상)과 ‘이념’(지하)의 대립 구도가 문제이다. 둘 사이의 충돌로 인해 철저히 망가진 젊은 날의 지하 인간(2부)으로부터 모종의 진화 작용을 거쳐 마흔 살의 지하 인간(1부)이 나온다. 이는 또한 1840년대 러시아를 풍미했던 이상주의와 낭만주의로부터 1860년대의 허무주의로의 이동이기도 하다. 어떻든 이제 그는 살아 있는 삶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채 오직 이념(관념)만, 즉 ‘말’만으로 존재한다. 그 자신의 정의에 따르면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 아닌 ‘종이 인간’, 자연의 품이 아니라 ‘증류기에서 태어난 인간’이다. 지하의 달콤한 몽상은 악몽으로 변하고, 그 악몽은 중년의 ‘역설가’, 차라리 요설가의 말로 가득 차 있다. 1부, 나아가 이 소설의 핵심은 무엇인가.
1864년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형과 발행한 잡지 <<세기>>에 발표되었을 때, 평단은 이 작품을 급진세력(‘60년대 세대들’)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풍자이자 패러디로 받아들였다. 도스토예프스키 형제의 잡지는 보수를 표방했기도 했거니와, 체르니셰프스키의 장편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피력된 급진적 이데올로기, 즉 맹목적인 합리주의와 공리주의, 그에 기초한 낙관적이지만 동시에 기만적인 역사관이 여러 모로 도스토예프스키를 불편하게, 심지어 불안하게 했던 같다. 그는 체르니셰프스키가 사용한 몇몇 모티브를 그대로 가져와 직접적인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
가령, 지하 인간의 입을 빌어, 1851년 영국 런던의 무역박람회에서 선보인 수정궁은 이성과 과학이 창조한 지상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산술적 계산에 종속시켜 인위적으로 축조한 ‘개미집’, 가짜 유토피아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 ‘활동가’라면 수학 공식(‘2x2=4’)과 자연 법칙(‘돌 벽’)에 무조건 복종하지만, 대체로 인간이란 ‘2x2=4’가 어찌할 수 없는 불변의 원칙을 알면서도 ‘2x2=5’에 탐닉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오로지 자신이 ‘피아노 건반’이나 ‘오르간 스톱’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성적으로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행동을 하고 또 그런 욕망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경우 공리주의자들이 말하는 ‘이익’이란 완전히 무의미하다. 왜냐면 인간은 실용적 관점에서는 무슨 이익은커녕 오히려 해가 될 것임을 알면서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위험하고 파탄적인 쪽으로 치닫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급진파 이데올로기에 대한 중년 보수 작가의 비판으로만 읽을 수는 없다. 그 목적이 우선적이었다면 분명히 보다 더 직설적이고 논리적인 화법을 택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이 작품의 문체는 작가가 의도했든, 아니면 그와 무관하게 말이 그 자체로 생명력을 얻은 것이든 어쨌거나 혼돈의 미학을 구현하는 것 같다. 지하 인간은 의식의 흐름이라는 모더니즘적 기법이 무색할 정도로 과잉된 의식과 조장된 분열을 뽐내며 일견 무의미하고 서로 모순되는 말을 마구 뒤엉킨 상태로 고스란히 기록해 나간다. 심지어 루소의 <고백>과 그에 대한 하이네의 평가를 예로 들어가며 그 기록의 목적을 또렷이 명시하기도 한다. 글쓰기를 통한 도덕적 징벌과 교화, 글쓰기가 갖는 미학적 효과, 끝으로, 무위와 권태를 달래는 수단으로서의 글쓰기 등.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 독특한 쾌감이다. 그것은 정치 이데올로기나 철학 사상, 도덕적 교훈의 설파는 물론이거니와 촘촘히 짜인 이야기-서사의 축조조차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는, 전적으로 무목적적이고 무관심적인 쾌감, 오직 지하에서만 가능한 쾌감이다.
실제로 지하란 개연성과 인과성에 기초한 모든 논리와 맥락에 반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무중력의 시공간이다. 여기서 지하 인간은 사회와 개인, 전체성과 개별성, 몽상과 환멸, 꿈과 현실, 이성과 욕망, 합리와 부조리, 상식과 광기의 경계를 오가며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성의 요소를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본질적으로 무정형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욕망과 자유의지를, 나아가 자연 법칙에 대한 부조리한 반항(치통!)을 찬미한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어떤 이익도 주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억지로 지어낸 가짜일 수도 있지만, 세계로부터 나에게 폭력적으로 주어진 ‘2x2=4’와는 달리, 내가 의식하고 내가 창조한 세계이다. 그것이 또한, 우리 내부의 깃들어 있는 침침하고 눅눅한 지하이기도 하다. 지하 인간은 지하가 비참하다는 것을 또렷이 의식할수록 더더욱 지하에 침몰한다. 지하는 ‘책에 따라 말하는(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그러고 싶지도 않은 그의 실존이기 때문이다(“지하 만세!”).
하지만 <지하로부터의 수기>에는 지하 찬미와 더불어, 병적으로 비대해진 자의식의 전횡, ‘그들(모두) 대(對) 나(홀로)’라는 공격적이고 자폐적인 대립구도, 세계를 향한 허무주의적 냉소 등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물음이 동시에 들어 있다. 즉, 작품 바깥에서 작가는 주석을 통해 이런 인물이 존재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이 다분히 부정적인 현상임을 암시한다. 실상 건전한 상식과 윤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실존의 한 양상으로서의 지하 인간의 반항과 부정(否定)은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낙관적 전망도 담보하지 못하며, 이런 병적인 실존을 작가는 절대 옹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편의 소설로서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이 괴상한 주인공은 어쩌면 작가가 의도했을 법한 여러 가능성을 넘어선다.
지하 인간은 끊임없이 이성에 반기를 들지만 정작 그가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이성이 만들어낸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려는 집요한 욕망과 의지, 이른바 ‘이성의 광기’(쿤데라)이다. 이후,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은 모두 내부에 지하를 담은 채 지상으로 올라간다. 그들은 자기만의 이념에 사로잡혀 노파를 죽이고 또 자기 자신을 죽이며, 현실 속에서 정치 혁명을 꿈꾸는가 하면 몽상 속에서 천년왕국의 도래를 꿈꾸며, 나아가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를 죽이면서까지 ‘돌 벽’에 저항한다. 말하자면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지하-지상의 내적 메커니즘을 최초로, 더욱이 응축적인 형태로 보여준 기념비적인 작품인 것이다. 물론 이 소설이 그 자체로 갖는 놀라운 매력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지하 인간은 “나는 실상 여러분이 감히 절반도 밀고 나가지 못한 것을 내 삶에서 극단까지 밀고 나갔을 뿐”이라고 말한다. 8년의 공백기를 거친 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동안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혹은 시도는 했으나 “분별”의 논리에 복종하느라 끝까지 관철하지 못한 새로운 형식의 소설을 선보인다. 미학적, 시학적 실험은 그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을 수 있지만 그의 소설가적 직관과 본능은 기존의 소설 문법과 세계 인식의 틀을 배반하면서 소설 장르의 극단으로 치닫는다. 이 작품이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표 장편보다 훨씬 더 난해하고 모던한 것, 나아가 가장 문제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나는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게다가 이 ‘나’는 주인공-영웅이 되기는커녕 ‘반(半)주인공’, 심지어 ‘반(反)주인공’에, 그야말로 무위도식하는 백수에 불과하지만 오직 쓰는 행위를 통해 세계를 내 안에 담은 주인공으로 등극한다. 바로 이것이 발자크적 리얼리즘에 지배되던 19세기 소설 문법을 비켜나가 <지하로부터의 수기>만이 보여준, 심지어 발견한 우리 의식과 실존의 새로운 지평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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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2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손에 들었다. 시집처럼 얄따란 두께가 만만해 보였을 것이고 특이한 문체에 끌렸을 것이다. 어쨌거나, ‘실험’이라는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그것에 목매던 시절, 나의 첫 소설 습작은 이 작품의 패러디였다. 나는 대학 노트에 연필로 나만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써나갔다.
“나는 아픈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는 위장이 아픈 것 같다. 연일 속이 더부룩하고 신물이 올라오고 트림이 난다. 하지만 절대 병원에는 가지 않겠다! 과외비를 받아도 병원만은 가지 않겠다! 의사 따위는, 내시경 따위는 엿 먹으라지! 삼십만 원으로 매일 밤 라면을 끓여먹고 위장을 더 망칠 테다!”
말들은 끝 간 데 없이 계속 이어졌다. 탈고를 한 뒤에는 어느덧 유명인사가 된 모 선배에게 일독을 부탁하는 호기까지 부려보았다. 그로부터 15년이 흘렀다. 더 이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렇기에 더 소중한 첫 소설을 되살려내듯,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한 자 한 자 우리말로 옮겼다. 번역의 시간은 곧, 이 소설을 향한 나의 살가운 감정을 어루만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지하 인간 못지않게 지하에 탐닉했던, 문자 그대로 대학가의 반지하방에 틀어박혀 오직 문학을 향한 꿈만을 먹고 살았던, 정녕 그것이 가능했던 내 청춘의 ‘진눈깨비’를 기록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청춘의 찬치는 진즉에 끝났고 ‘살아 있는 삶’과 ‘이념’의 변증법도 이미 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 ‘수기-기록’은 이렇게 남아 있다. 지하 인간은 그것을 발표하지도 않을 것이고 독자 따위는 필요도 없다며 악다구니를 썼지만, 책의 모양새를 갖춘 이상 그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이 책의 역자이자 이 번역본의 첫 번째 독자인 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권한다.
자, 페테르부르크의 음습한 지하, 그 지하의 몽상에, 그 달콤한 악몽에 한 번 빠져보시길!
-- <지하로부터의 수기>(민음사: 역자 해설)
-- 최근 세계문학전집(물론 이 말 자체가 역설이지만!)이 많이 나오고 덩달이 이 작품도 많이 번역됐는데요, 여전히 마뜩치 않은 것은 제목입니다...ㅠ.ㅠ 숙고 끝에 저렇게 뽑았지만 <지하의 수기>, 뭐 이래도 좋았을 것 같고, 여전히 아쉬움은 남습니다. 무엇보다도, '지하생활자'라는 말이 너무 익숙하여(또 문예출판사판을 무척 좋아했던 까닭에) 저부터 잘 고쳐지지 않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