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대심문관의 입을 빌어 복음서의 이른바 그리스도의 유혹부분을 그 나름대로 해석한다. 실상 기적’, ‘신비’, ‘권위에의 유혹은 모두 에서 출발하여 으로 귀결되는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라는 대심문관의 도발적인 물음이다.

 

을 받아들였다면, 너는 개개의 인간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총체적이고 영구적인 우수에 대한 해답을 함께 줄 수 있었을 것이니 그건 다름 아니라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пред кем прекло- ниться)의 문제이다.() 하지만 인간이 찾는 그 대상이란()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일시에 만장일치로 그 앞에 함께 경배할 수 있어야만 되는 것이다. 이는 이 가련한 피조물들은 나나 다른 사람이 경배할 수 있는 대상을 찾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고 그 앞에 경배할 수 있는, 반드시 모든 사람이 함께’(все вмес-те) 경배할 수 있는 그런 존재를 찾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기 때문이지. , 바로, 경배를 하긴 하되 공동으로’(общность)해야 한다는 요구야말로 인간 개개인이 개별적으로건 인류 전체로건 태초부터 골머리를 앓아온 주된 문제인 것이다.

 

복음서에서 하느님의 말씀’(천상의 가치)의 대립항(지상의 가치)으로서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 기껏해야 부분적으로만 필요한 것으로 읽힌다. 대심문관의 해석에서도 빵은 물론, 일차적으론 지상적 욕구와 필요를 의미하지만 그것이 내포한 문제는 보다 복잡하고 심오하다.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라는 물음, 더욱이 모든 사람이 함께”, “공동으로라는 요구 조건은 이미 유물론적 차원을 넘어서 관념론적인 차원을 건드린다. , 인간의 삶이 제대로 영위되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물리적 욕구와 더불어 심리적, 정신적 욕구가 동시에 충족되어야 한다. 복음서는 후자의 영역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명명하지만, 대심문관으로 대표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반항아들은 그 하느님의 말씀마저도 천상이 아닌 지상의 세계에서 찾고자 한다. 이 욕망이 현실에서는 두 형식, 즉 종교(신화)와 정치(혁명)로 표현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요 소설들이 신과 인간의 본질을 묻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와 더불어 일관되게 정치와 혁명을 다루는 것, 적어도 그것을 배면에 깔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렇듯 빵 속에서 단순히 빵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을 찾으려는 욕망, 나아가 그 와중에 하느님의 말씀마저도 손에 넣고자 하는 인간의 대범하면서도 비굴한, 또한 오만하면서도 겸허한 욕망의 기저에는 신화화-탈신화화의 메커니즘이 도사리고 있다. 이 문제를 소설적 틀에서 담아낸 작품이 곧 <악령>(1871-1872)이다.

 

 

 

 

 

 

 

 

 

 

 

 

 

 

<악령>은 그 자체로 신화(희랍신화)와 태생적으로 연결된 고대비극의 유비로 읽혀왔으며 뱌체슬라프 이바노프에 의해 소설-비극’(роман-траге-дия)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이 고전적 정의가 여전히 유효한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여타 장편, 특히 <악령>비범한 인간’(신의 유비로서의 영웅)과 운명(стихия) 간의 비극적 투쟁 및 파국이라는 도식을 소설적으로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바노프는 신화-비극의 부활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것이 지닌 근대적 의미도 간과하지 않았다. , 근대의 장르로서 소설은 개인주의의 반영이 됨으로써 개인과 세계의 결별 내지는 분열을 전제로 하며 이 경우 비극적인 것은 희극적인 것으로 바뀌고 파토스는 유머로 와해된다.”라는 것이다. <악령>의 이념적, 시학적 복잡성에 대한 이바노프의 예리한 통찰에서 출발하여 V. 테라스는 이 작품을 파토스와 바토스(bathos), 숭고와 그로테스크, 미와 추가 혼재하는 희화된 비극’(tragedy in travesty)으로 정의하고 주요 인물들의 범속하고 희극적인 요소를 집중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이 두 독법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일견 서로 상반될 수 있지만 동일한 발생학적 근원을 갖는 소설-비극희화된 비극사이의 긴장이다.(중략)

 

 

 

 

 

 

 

 

 

 

 

 

 

 

 

 

 

 

 

2. 혁명의 신화에 대한 탈신화화 전략 - ‘웃음

 

2-1. 니힐리즘 vs. ()니힐리즘

 

주지하다시피 <악령>은 발표 당시 급진적 정치세력을 겨냥한 정치팸플릿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는 집필 당시 작가가 의도한 바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봐도 이 작품은 명백히 네차예프 사건을 모델로 한 정치소설(선동소설, 참여소설, 경향소설)이다. 이 당연한 사실이 <악령>의 신화적 위상 때문에 작품 이해에 있어 모종의 전제 같은 것으로만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강조하건대 이 작품이 위대한 것은 그것이 정치적 층위를 뛰어넘어 형이상학과 종교학의 층위로 이월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차원을 소설적 세계 속에서 동시에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시도는 본질적으로 실패하거나 적어도 기형적인 형식을 띨 수밖에 없다. M. 홀퀴스트의 분석에 기대어 표현하자면, 부분-개인과 전체의 관계(‘정치’)는 엄정한 체제(statecraft)를 요구하지만 현실적 균형감각을 상실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체제를 빗겨나가며 무질서한 몽상(wild utopianism), 즉 엔트로피의 법칙에 종속된다. 정치(현실)와 신화(이상)의 척력적인 길항 관계에 기반한 만큼 <악령>은 총체적인 혼돈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극우-보수의 중년 작가가 일차적으로 탈신화화하고자 했던 대상의 이론적 진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략)

반면,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 니힐리즘은 단순히 젊은 급진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그의 과도한 불안과 혐오는 타인에 대한 비판이나 경고에 앞서 통렬한 자기반성, 심지어 참회의 산물이다. 임종을 앞둔 스체판 베르호벤스키의 장황한 신앙 고백은 작가적 차원의 발언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지금 나는 한 가지 생각이, une comparaison(한 가지 비유)가 떠오르는군요.() 이건 꼭 우리 러시아와 같아요. 환자에게서 나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간 그 악령들, 이건 모두 독이고 전부 전염병이고 하나같이 불결한 것이고 위대하고 사랑스러운 환자, 즉 우리 러시아 속에서 수세기 동안, 수세기 동안 우글거렸던 온갖 마귀들과 마귀의 새끼들입니다! Oui, cette Russe, que j'amais toujours(그래요, 내가 언제나 사랑해왔던 그 러시아라고요). 그러나 위대한 사상과 위대한 의지는 그렇게 더 높은 곳에서부터, 이 광기 어린 마귀 같은 것 위로, 바로 러시아 위로 그늘을 드리울 테고, 그러면 이 모든 마귀들이, 온갖 불결함이, 표층에서 곪기 시작한 온갖 이 추잡한 것이 밖으로 나올 테고그놈들이 직접 나서서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할 겁니다. 어쩌면 벌써 들어갔는지도 몰라요! 이건 우리들이고, 우리들은 바로 그들, 즉 페트루샤와et les autres avec lui(그 녀석과 함께 한 자들), 그리고 어쩌면 내가 그 우두머리인지도 몰라요. 우리는 완전히 무엇에 홀린 듯 광포하게 날뛰면서 절벽에서 바다로 돌진할 겁니다, 모두 빠져 죽을 거예요. 바로 거기가 우리의 길이거든요. 사실 우리는 그래도 싸니까요. 그러면 환자는 완치되어 예수의 발아래 앉아 있는겁니다.”(하권, 1011)

 

게라사(가다라)의 악령들’(마태복음, 8: 28-34/마르코복음, 5: 1-20/루카복음, 8: 26-39)의 알레고리는 노골적이다. 심지어 작품의 제목 및 제사마저도 이 부분에서 취함으로써 도스토예프스키는 1860년대 일단의 보수 작가들 사이에서 유행한 ()허무주의 소설’(антинигилистические романы)의 흐름을 충실히 따른 셈이다. 간단히 말해 제목에서 이미 암시되거니와 󰡔악령󰡕의 거의 모든 인물들이 악령’(бесы)에 들린 돼지 떼이다. 하지만 르네 지라르의 명민한 분석이 보여주듯,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가적 직관은 악령을 니힐리즘의 메타포로 취하면서 그 복잡성을 예리하게 간파했다. ‘악령은 말 그대로 실체가 없기에 살아있는 육체에 빙의(憑依)되어야만 하는 유령이다. 나아가, 이 단어에 붙은 복수의 표식과 군대(ле-гион)라는 말에 포함된 다수의 단일성을 통해 체계’(전체)를 상정하되 개성’(부분)을 부정함으로써 악령과 희생양, 폭력과 성스러움의 내밀한 근친관계를, 또한 그 기저에 도사린 모방 욕망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이쯤 되면 악령-니힐리즘과 반()니힐리즘의 대립 관계는 의미가 없어진다. 작가의 노골적인 선언과는 다소 별개로 문제는 저 대립구도의 기저에 도사린 메커니즘이 무엇이며 그것이 실제 인간사에서 어떻게 반영되는가, 이다. 달리 말해 신화화-탈신화화의 메커니즘의 운용 양상, 구체적인 인간(личность)과 특정한 관념(идея) 사이의 역동적인 상관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특정한 인물이 특정한 사상을 대변하는 것은 문학사적으로 전혀 특이할 것이 없다. 도스토예프스키, 특히 󰡔악령󰡕의 미학적 성취는 바흐친의 용어로 말해 관념인’(герой-идеолог)의 내적, 외적 운동성, ‘인간관념사이에 형성되는 미묘한 결렬에 있다. 그것은 크게 두 층위(현실 층위, 즉 정치 및 혁명과 관념 층위)에 걸쳐 나타난다.

 

 

 

 

 

 

 

 

 

 

 

 

 

 

 

 

 

 

-- <신화화-탈신화화의 메커니즘과 '소설-비극' {악령}>(2009)

 

 

-- 오랜만에 <악령>을 수업시간에 다루게 됐습니다.(아마 '마지막 수업'일 수도 있겠는데요...)

수업 준비 차 오래 전에 쓴 논문을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통상 논문이란(특히 돈 받는 논문-_-;;) 의무감에서 쓰기 쉽지만 [악령]에 대해 여기저기 뿌려놓았던 말들을 긁어모아, 나름대로 신열(!)에 들떠 열심히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름 잘 쓴 것 같아요 ^^;;

그때, 이십대 중반, 석사과정 마치며 번역했던 <악령>을 다시 꼼꼼히 봤는데, 언제 기회가 되는 대로 대폭 손보려 합니다. 밀린 일들이 많네요..ㅠ.ㅠ

참조한 레퍼런스 중 아마 가장 강력(?)했던 건 지라르의 저작들이었던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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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을 넘어:

-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이런 남자가 이웃이 되면 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거의 모른다고 해도, 이 진리가 동네 사람들의 마음속에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를 자기네 딸들 가운데 하나가 차지해야 할 재산으로 여기게 마련이다.(9)

 

<오만과 편견>의 그 유명한 시작 부분이다. 이어 빙리 씨를 사윗감으로 점찍은 극성스럽고 귀여운 베넷 부인의 활약이 펼쳐진다. 결국 그녀의 소원대로 출중한 미모와 선량한 성격을 자랑하는 큰딸 제인은 빙리 씨의 아내가 된다. 덧붙여, 베넷 부인 입장에서는 까칠한 성격 탓에 가장 골칫거리이지만 베넷 씨 입장에서는 가장 큰 자랑거리인 둘째딸 엘리자베스, 경박한 리디야 등도 모두 결혼에 성공한다. 말하자면, <오만과 편견>은 젊은이들이 서로 만나고 호감(혹은 반감)을 갖고 청혼을 거쳐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다룬 소설이다. 구혼소설이자 가정소설답게 미시적인 규모로 오밀조밀하게 포착된 세태와 풍속, 인물들의 섬세한 심리가 도드라진다. 과연 이들 삶의 절체절명의 화두인 결혼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잠깐 위컴 씨에게 호감을 느꼈던 엘리자베스는 가드너 부인을 앞에 두고 반문한다.

 

근데, 외숙모, 결혼에 있어서 돈만 밝히는 것과 신중한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거죠? 신중함이 끝나는 지점은 어디고 탐욕이 시작되는 지점은 어딘가요?”(219)

 

강조하건대 열정과 낭만은 작가의 관심사가 아니다. 결혼 생활의 생리에도 무관심하다. 소설은 오직 결혼에 이르는 길을 지배하는 심리적, 사회적 메커니즘을 밝히는 데 집중하는데, 그 메커니즘이 곧 오만과 편견이다. , 성격과 신분-계급과 부가 다양한 방식으로 부여한 오만, 또 그것이 낳은 편견과 오해를 해소하는 과정이 곧 이 소설의 내용이다. 오만이 거만이 아니라 진정한 자긍심과 동의어가 되는 순간 소설도 끝난다.

 

 

 

 

 

 

 

 

 

 

 

 

 

 

가령, 다아시는 엘리자베스에게 허영은 진짜 결점인 반면 오만은진정으로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라면 늘 그것을 잘 통제하기 마련이고, 그건 오만이라기보다 자긍심이라고 해야”(84)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성격이 꽁한 편임을 고백하면서 자기한테 한번 잘못 보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장”(84)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실제로 그의 언행은 오만의 극치처럼 보인다. 특히 메리턴의 무도회 이후 베넷 부인도, 엘리자베스도 심한 모욕감에 치를 떤다. 반면 샬럿 루카스는 차분하다.

 

다른 경우와는 달리, 그분이 오만한 게 나한테는 그렇게 거슬리지 않아.”하고 살럿이 말했다. “그럴 만한 근거가 있으니까. 가문이며 재산, 모든 것을 다 갖춘, 그렇게 훌륭한 젊은이가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잖아. 이런 표현을 써도 좋다면, 그분은 오만할 권리가 있어.”

그건 맞는 말이야.” 엘리자베스가 말을 받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 자존심을 건드리지만 않았더라면, 나도 그 사람의 오만을 쉽게 용서할 수 있을 거야.”(31)

 

오만과 편견은 극히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상황과 관계의 맥락에 종속되기 쉽다. 그것을 잘 조율한 결과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는 공동의 목표에 도달한다. 전자는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꼭 필요한 명민한 아내를 얻고, 후자는 신중’, 즉 실용적인 가치를 손에 넣음과 동시에 중간계급(중산층) 여성으로서의 자긍심을 지킨다. 한편, 애초부터 오만과는 거리가 멀었던,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럿은 어떠한가.

 

 

 

 

 

 

 

 

 

 

 

 

 

 

 

 

 

그녀는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했다가 무참히 거절당한 콜린스 씨의 청혼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재산이 없는 아가씨에겐 오직 결혼만이 명예로운 생활 대책이었고, 결혼이 가져다줄 행복 여부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해도 결혼만이 가장 좋은 가난 예방책임이 분명했다.”(177) 더욱이 소설에서 수차례에 걸쳐 강조되거니와 그녀는 스물일곱이라는 나이에 한 번도 예뻐 본 적이 없는 여자”, 즉 박색이다. 아무리 분별 있고 똑똑해도, 적어도 엘리자베스처럼 그럭저럭 봐줄 만은한 수준의 외모도 타고나지 못했으니 어쩌랴. 샬럿은 자신의 선택을 치졸한 정략결혼쯤으로 보는 엘리자베스의 반응에 예의 그 특유의 담담함으로 응수한다.

 

네가 놀라는 것도 당연해. 무척 놀랍겠지. (중략) 너도 알지만 난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야.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 내가 원하는 건 단지 안락한 가정이야. 그리고 콜린스 씨의 성격과 집안 배경, 사회적 지위 등을 고려해 볼 때, 내 생각엔 우리에게도 다른 어느 커플 못지않게 행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어.”(181)

 

대체로 <오만과 편견>은 인간의 속된 욕망과 생활의 논리(짝짓기와 돈!)를 건전하고 합리적인 시각에서 훌륭하게 묘파하면서 재기발랄한 위트와 유머, 경쾌한 현실 풍자와 비판마저 곁들인 수작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사회-세계를 상대로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가장 안정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애쓰고, 결국 중용타협의 원칙을 좇음으로써 원하던 것을 손에 넣는다. 한데 정작 작가 제인 오스틴은 평생 독신이었고 고로 당시로서는 아주 드물게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소설가로서의 삶을 살았는데, 그녀가 남긴 적지 않은 편수의 소설은 거의 다 구혼을 다루고 있다. 사실상 첫 소설인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처럼 되고 싶은 희망을 슬쩍 내비친 그녀가 실은, “식구들 가운데 유일하게 못생긴 편이라 지식과 교양을 쌓으려 열심히 공부”(38)한 메리에 가까웠던 것은 아닐까.

 

 

-- 네이버캐스트

 

 

 

 

 

--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싸늘한 비가 내리는 을씨년스러운 날씨입니다. 그래서 비교적 경쾌하고 밝은 소설을 골라 봤습니다. 사춘기 때는 썰렁하게 여겼던 소설인데 서른 넘으니 오히려 재미있게 읽히더라고요. 영화도 많지만(특히 키이라 나이틀리가 엘리자베스 베넷 역을 맡은), BBC에서 만든 드라마가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에마>(엠마), <맨스필드 파크> 등의 드라마 버전도 볼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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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이는 1학년 1반에 배정됐다. 담임교사는 열 살이나 먹은 이 늦깎이 초등학생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일주일쯤 지나자 소영이가 이른바 바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때부터는 어른에게 반말을 한다며 꾸짖는 일도 없었다. 소영이는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바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일주일이나 허비했으니 말이다. 소영이는 곧장 특수반에 보내졌다. 아무래도 특수반교사는 머리가 좋은 것 같았다. 적어도 첫 눈에 소영이가 바보라는 걸 알았다. 나아가, 소영이가 정신지체나 발달장애가 아니라 축적된 학습 결핍과 그로 인한 학습 능력의 현저한 저하로 판단된다는 소견을 내놓았다. 떡붕어 아저씨는 이 말에 상당히 위안을 얻었고, 기쁜 마음으로 서류에 서명했다.

 

특수반은 다른 교실과는 달리 별채 건물에 있었다. 도르래가 달린 우물 바로 옆이었다. 특수반 아이들은 소영이를 포함하여 총 세 명이었다. 은학이는 재작년에도, 또 작년에도 6학년이었는데 올해도 6학년이었다. 은학이의 아버지가 은학이를 중학교에 보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얻어맞는 일만 더 많아질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의 눈에는 아들이 세상에 갓 나왔을 때의 모습, 2킬로가 간신히 넘는 미숙아의 모습으로만 보였다. 껴안는 것도 조심스러울 만큼 작은 아내를 대할 때보다 더 애틋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사실 은학이는 거의 이 섬을 통틀어 가장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아이였다. 그런 녀석이 또한, 수시로 아이들의 주먹질과 놀림을 당하면서도 정작 자기는 주먹을 휘두르는 일이 없는 비폭력주의자에 평화주의자였다. 한 번은 모래밭에서 혼자 모래 장난에 몰두하고 있는 은학이에게 아이들이 콜라 캔을 던진 적이 있었다. 은학이의 머리나 어디 몸에 맞았다면 괜찮았을 것을(이런 일은 허다했다), 하필 그것이 이제 막 쌓아 올린 모래성을 무너뜨려버렸다. 은학이는 순식간에 온 몸이 화석처럼 굳는 것 같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모래밭을 막 달렸다. 그러곤 괴성을 지르며 운동장 끝에 있던 쓰레기통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플라스틱 쓰레기통이 단번에 박살나면서 쓰레기가 와르르 쏟아졌다. 그러고도 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은학이는 발로 쓰레기를 짓밟기 시작했다. 이 장면을 본 뒤로 아무도 은학이를 건드리지 않게 됐다. 저만한 괴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을 가만히 놔뒀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역시 바보라서 그런가봐.”라며 쑥덕거리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학교 측에서도 은학이를 계속 받아주었다. 가뜩이나 학생 수가 적은 학교였다. 주로 승진을 염두에 두고 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교장과 교감도 길어야 2, 3년 주기로 바뀌었다. 더러 내년에는 저 녀석을 꼭 중학교에 보내야겠다며 단단히 벼르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내년이 왔을 때는 그 자신이 우물이 있는 학교를, 때론 아예 섬을 떠나버렸다.

 

일반 교사들과 직원들은 은학이를 총애했다. 거친 일, 특히 물건을 나르는 일을 늘 도맡아하는 아이였던 탓이다. 무엇보다도 이 만년 6학년생의 아버지가 바로 우체부였다. 그는 고군분투하며 학교를 오가는 모든 우편물을 담당했다. 섬 중앙의 교육청으로 가는 중요 문서는 죄다 우체부의 손을 거쳤다. 그가 없으면 아직도 소설가의 꿈을 접지 못한 어느 중년 교사는 해마다 연말이면 신춘문예에 응모를 할 수 없었다. 또 꽃 편지지에 편지 쓰는 낙으로 사는 한 늙은 남자교사는 머나먼 육지에 남겨둔 가족에게 편지를 부칠 수 없었다. 이 학교에서 유일하게 인터넷 쇼핑의 존재를 알고 그것을 즐기는 신임 여교사도 우체부를 소중히 여겼다. 우체부 아버지를 둔 덕분에 은학이는 몇 년째 모래장난을 즐길 수 있었다.

 

은학이 옆에는 지난봄에 입학한 태형이가 있었다. 태형이는 키도 작고 몸도 성냥개비처럼 가늘었다. 얼굴도 뽀얀 것이 꼭 계집애 같았다. 샘이 많고 아기자기한 물건을 모으는 데도 열심이었다. 6학년인 은학이가 구구단을 외우자 자기에게도 구구단을 가르쳐달라고 고집을 부렸다. 특수교사는 더하기와 빼기를 한 다음에야 구구단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열심히 타일렀다. 그러자 태형이는 사내아이들처럼 반항하기보단 혼자 책상 위에 엎드려 훌쩍거렸다. “선생님, 미워요!” “, 미워!” 불만이 있을 때마다 태형이가 늘 내뱉는 말이었다.

 

공작 시간에도 태형이는 만용을 부렸다. 별 접는 것도 힘들어하면서 종이학과 개구리를 접고 싶어 했다. 아무리 접었다 펴고 또 폈다 접어도 종이학이나 개구리가 탄생하지 않으면 너덜너덜해진 종이를 꼭 껴안은 채 훌쩍댔다. 특수교사는 남은 종이로 종이컵 인형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믐달, 초승달, 반달, 보름달이 태형이의 종이컵 위에 예쁘게 붙었다. 태형이는 끝내 종이학이나 개구리가 되지 못한 종이 뭉치를 그 종이컵 속에 소중히 담아 간직했다.

 

그렇게 선물을 많이, 많이 모아 누군가를 찾아가는 것이 태형이의 꿈이었다. 다름 아니라, 재작년 봄에 싸리 꽃을 꺾어 온다며 집을 나갔다가 영영 사라져버린 누나였다. “선생님, 마녀잖아요? 우리 누나 보러 가요, ?” “, 우리 누나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나랑 같이 가 줄 거야?” 하지만 특수교사도, 은학이도 난감해했고, 나중에는 아예 얘기를 피하려 했다. 오직 소영이만 관심을 보였다.

어쩌면 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갔는지도 몰라.”

우아,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누나는 바다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아?”

당연하지, 거기서 왔는걸!”

소영이는 으스대며 구덩이 오막살이와 다슬기 할매의 대궐 얘기를 늘어놓았다. 태형이 눈에는 소영이 누나가 무척 대단해 보였다. 뭍으로 떠나는 사람은 있어도, 뭍에서 오는 사람은 정말 드물었던 것이다.

 

이제 태형이는 소영이를 붙잡고 누나를 찾으러가자고 졸랐다. 소영이는 슬슬 겁이 났다. 누군가가 자기한테 매달리는 일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당혹스럽기도 했다. 저도 모르게 꼬리를 내렸고, 태형이는 그때마다 누나, 미워!”라며 눈물을 훌쩍였다. 결국 소영이는 나뭇잎이 빨갛게, 노랗게 물들면 꼭 함께 그 누나를 찾으러 가겠다고 약속했다. 까마득히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곧 다가왔다.

누나, 교문 옆에 단풍나무 봤어? 빨개졌지? 우리 누나 찾으러 가줄 거지? 약속 안 지키면 진짜 미워할 거야.”

에잇! 유치하긴 정말! 그래, 가자!”

 

*

 

금요일 오후, 특수반 아이들은 머나먼 길을 떠났다. 한사코 반대했던 은학이도 결국 따라 나섰다. 아니, 선두에 섰다. ‘어린 것을 단둘이만 보내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세 아이가 막 운동장을 지나왔을 무렵, 뒤에서 특수교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들아! 집에 가니?”

특수교사 옆에는 고양이 얼굴을 한,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느긋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뇨! 선생님, 우리는요, 아주, 아주 먼 길을,”

태형이가 옹알대기 시작하자 은학이가 말을 가로막았다.

선생님, 지금 우리가 집에 가느냐고 물으셨죠? , 그건 아닙니다.”

? 그럼 어딜 가는데?”

우리가 어딜 가느냐고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어라, 선생님한테도 비밀이야? 에이, 그러지 말고 선생님한테 살짝 말해주면 안 돼?”

정 궁금하시면 네이버한테 물어보세요. 그럼, 이만! , 얘들아, 가자!”

특수교사는 피식 웃었다. 가봐야 결국 요 근처 바닷가가 아닐까 싶었다. 아닌 게 아니라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특수교사는 고양이 얼굴을 한 커다란 개의 등에 몸을 싣고 유유자작 집으로, 성으로 향했다.

 

특수교사의 짐작대로, 학교를 빠져나간 아이들은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해안도로는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졌다. 이제 곧 딴 세상이 나오리라 기대했지만, 지금까지 걸어온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길의 연속이었다. 오른쪽으론 뒤에 무엇이 있는지 통 알 길 없는 험준한 산들이, 왼쪽으론 바다가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은학이는 물과 도시락을 꺼냈다. 배를 채운 뒤 아이들은 또 걷기 시작했다. 해안도로를 등지고 산 속으로 접어들었다. 처음에는 해안도로와 비슷한 아스팔트길이 나왔다. 아이들은 나란히 선 채 타박타박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가자 이번에는 시멘트길이 나왔고 길이 좀 좁아졌다. 더 들어가자 신작로가 나왔다. 시멘트길보다 더 좁았고 다니는 차도 별로 없었다. 어쩌다 한 대라도 지나가면 몇 분 동안 신작로에는 뽀얗게 먼지가 일었다. 아이들은 슬슬 지쳐갔다. 태형이는 투정을 부렸다.

 

누나, 얼마나 더 가야돼?”

너희 누나 집이 나올 때까지 가야지.”

우리 누나 집이 어디야? 바다는 언제 건너 가?”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누나가 찾아준다고 했잖아?”

네가 말을 안 해줬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 이런 바보들이 다 있나! 위치를 모르면 출발하기 전에 네이버에게 물어봤어야지! 너희들을 믿은 내 잘못이다!”

 

은학이는 진심으로 자책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묵념이라도, 묵상이라도 하는 듯했다. 분위기가 숙연하고도 침울해졌다. 드디어 은학이가 고개를 들고 전투적인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작로 옆쪽, 산속으로 꼬불꼬불하고 좁은 오솔길이 나 있었다. 은학이는 이제야 영감을 얻은 양 소리쳤다.

저쪽이다! 얘들아, 가자!”

소영이와 태형이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다시 씩씩한 행군이 시작됐다. 은학이를 앞세운 채 나머지 두 아이가 따라 붙은 모양새가 꼭 짜리몽땅한 줄줄이 사탕 같았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다. 맨 뒤에 섰던 태형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이 사라지고 없었다.

! 큰일 났다!”

은학이도 덜컥 겁이 났다. 태형이의 말을 듣고 뒤를 보니 얼룩덜룩하고 울창한 숲 높이를, 또 두께를 가늠할 수 없는 벽이 돼 있었다. 그때 소영이가 감탄을 내질렀다.

우아! 저거 좀 봐!”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앞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과자로 만든 집이 의기양양하게 서 있었다. 아몬드 초콜릿 볼, 초콜릿 아이스크림, 참깨 크래커, 과일 드롭스 캔디, 버터 쿠키, 생크림 케이크, 고구마 케이크, 치즈 케이크, 슈크림 빵, 감자 크로켓, 호밀 빵 샌드위치. 휘황찬란하고 먹음직스러운 과자를 보자 군침이 고였다. 태형이는 입맛을 쪽쪽 다셨다.

얘들아, 안 돼! 선생님이 읽어준 동화 생각 안 나? 과자로 만든 집엔 절대 들어가면 안 돼!”

은학이는 목청껏 외쳤지만 제일 먼저 달음박질을 시작한 것도 은학이였다.

 

과자로 만든 집의 문과 벽은 알록달록한 색깔의 사탕이었다. 아이들은 사탕을 핥아먹기 시작했다. 빨강색에서는 딸기 맛이, 연녹색에서는 풋사과 맛이, 주황색에서는 귤 맛이, 초록색은 멜론 맛이 났다. 노란색은 망고 사탕이었다. 아이들은 뭔가 달콤하고 향긋한 망고 맛에 반해버렸다. 벽과 문을, 또 문의 손잡이를 아무리 핥아먹어도 사탕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기둥을 이루고 있는 막대 과자 역시도 세 아이가 모두 달라붙어 뜯어 먹는데도 끄떡없었다.

 

갑자기 문이 천천히 열렸다. 이제 막 소녀티를 벗은 예쁜 아가씨가 치맛자락을 팔랑이며 나왔다. 볼에서는 복숭아 과육 냄새가, 검은 머리카락에서는 옥수수수염 냄새가 났다. 새카맣고 투명한 눈동자는 뜨거운 햇빛 아래서 농염하게 익은 오디와 비슷했다. 아가씨는 웃으며 앵두로 된 입술을 살짝 열었다. 풋풋한 향내가 퍼져 나왔다. 하얀 이빨은 개암나무 열매로 돼 있었다.

누나, 저 누나가 우리 누나야? 우리 누나는 조그만 아이였는데.”

바보! 우리 선생님이잖아?”

소영이가 핀잔을 주었다.

에이, 그럼 우리 누나는 어디 있어?”

태형이는 이제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기세였다. 조그맣던 누나가 저렇게 커버렸다는 것이 통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껏 사태를 살피고 있던 은학이가 마침내 소리를 질렀다.

얘들아, 저 아줌마는 우리 선생님도, 태형이 누나도 아니야! 얼른 가자, 얼른!”

오빠, 바보! 태형이도 바보야! 왜 선생님을 몰라 봐?”

그래, 소영이가 제일 똑똑하구나. 들어오렴.”

아가씨는 안으로 들어가며 손짓을 했다. 소영이는 통통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은학이와 태형이도 주춤하며 따라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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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 지식인의 초상

- 자연의 아들이 될 것이냐, 의지의 인간이 될 것이냐

- 나쓰메 소세키, <그 후>

 

 

 

 

 

여름비가 사정없이 퍼붓는 날, 한 청초한 여인이 백합을 들고 다이스케의 집으로 들어선다. “향기가 참 좋지요?”라며 그녀는 가까이서 꽃향기를 들이마신다. 그런 그녀를 만류하며 다이스케는 꽃을 받아 수반에 꽂는다. 그녀가 웃으며 말한다. “당신도 그때는 코를 대고 향기를 맡았었잖아요?” 그런 적이 있었던가, 다이스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비와 백합 얘기가 나온다. 이번에는 다이스케가 백합을 사온다. 온 집안에 백합 향기가 진동하는 가운데 그는 인력거를 타고 빗속을 달려올 미치요를 기다린다.

 

오늘 비로소 자연의 옛 시절로 돌아가는구나.’

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 때,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안위(安慰)를 온몸에 느꼈다. 왜 좀 더 일찍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왜 자연에 저항을 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는 비 속에서, 백합 속에서, 그리고 재현된 과거 속에서 순수하고 완벽하게 평화로운 생명을 발견했다. 그 생명은 어디에도 욕망이 없고 이해관계를 따지려들지도 않았으며 자기를 압박하는 도덕도 없었다. 구름과 같은 자유와 물과 같은 자연이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행복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276)

 

사실 여름비와 어우러진 백합 향기처럼 아찔한 것은 나쓰메 소세키의 문체이다. 탐미적인 문체 덕분인지 이 소설을 읽다 보면 간통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순수하고 고결한 형식, 심지어 가장 플라토닉한 형식인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주인공들의 사랑이 그 정도로까지 환상적이라는 것이다. 제법 절친한 사이인 갑과 을이 한 여자를 사랑한다. 갑은 을이 그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자, 비록 그 자신도 그녀를 사랑하지만, “의협심에 사로잡혀 그들의 결혼을 주선한다. 3년 뒤 을 부부가 다시 도쿄로 돌아왔는데, 아이를 잃은 상처에 덧붙여 당장 생활도 궁핍하다. 을은 갑을 통해 일자리를 구하려 하고 을의 아내는 그녀대로 갑에게 돈을 꾼다. 그러는 와중에 갑과 그녀는 점점 더 가까워진다. 결국, 갑은 가족과 의절하면서까지 정략결혼을 거부하고 그녀를 선택한다. 이것이 다이스케, 히라오카, 미치요를 둘러싼 사랑 놀음의 전말이다. 과연 속된 말로 손 한 번 제대로 잡아보지 않은 남녀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생활의 원칙, 도덕과 관습의 불문율을 저토록 깡그리 무시할 수 있을까. 그 후를 읽으며 품게 되는 가장 큰 의문이다.

 

 

 

 

 

 

 

 

 

 

 

 

 

 

 

 

이 소설은 3인칭 시점을 취하고는 있지만 사실 다이스케의 시점에 국한된, 다이스케의 얘기이다. 고등교육을 받고도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아버지와 형의 돈으로 먹고 살면서도 곧잘 남에게 돈을 빌려주기도 하는 서른 살의 귀족 도련님, 이른바 고학력 백수((高等遊民!). 무엇보다도 그 스스로 이런 생활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으며 그 나름의 원칙 또한 분명하다. 가령, 먹고 살기 위해 음악 선생 노릇을 하다가 오히려 음악으로부터 멀어진 한 지인을 예로 들며 그는 말한다. “빵과 관련된 경험은 절실한 것일지는 모르지만 사실은 저열한 거지. 빵을 떠나고, 물을 떠난 고상한 경험을 해보지 않고서야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 없지.” 이런 가치관이 졸업 직후 곧장 취업을 하고 가정을 꾸린 히라오카의 반발을 산다.

 

자네는 돈에 궁해 본 적이 없어서 문제야. 생활이 곤란하지 않으니까 일할 생각이 나지 않는 거야. 요컨대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고상할 말만 늘어놓고.”

다이스케는 히라오카가 밉살스럽게 느껴져서 도중에 말을 가로막았다.

일하는 것도 좋지만, 만일 일을 한다면 단지 생활만을 위한 일이어서야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없지. 모든 신성한 일이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빵과는 무관한 법이야.”(106-107)

 

다이스케는 그 무렵 히라오카를 비롯한 많은 일본인을 사로잡은 생활욕유럽으로부터 밀어닥친 해일로 치부하며 경멸한다. 절과 절 사이, 공장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커먼 연기도 추해 보이고, 근대화와 산업화의 주역이 되기 위해 아등바등, 발버둥치는 것도 못마땅하다. 하지만 이는 다이스케가 유달리 고상한 탓이 아니라 구태여 생활욕을 갖지 않아도 충분히 생활이 영위되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의 삶 자체가 역설적이다. 그는 사무라이 문화, 즉 전근대적 일본을 부정하지만 동시에 서양의 영향에 침윤된 현재의 일본, 즉 근대화의 환상을 혐오한다. 한데 다이스케의 품위가 유지되는 것은 구세대적 일본이 이룩한 가치 덕분이다(부유한 명문가의 아들이잖은가). 또 그의 탐미적인 삶은 서양, 특히 영국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과 반발의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면서 동시에 그것에 대한 어설픈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이중성이 메이지 시대 일본의 많은 지식인이 직면했던 딜레마의 핵심이리라. 다이스케는 이 물음을 연애의 범주에서 던진 것이다. “자연의 아들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의지의 인간이 될 것인가.” 자연은 곧 사랑(불륜)이며 의지는 제도(결혼)이다. 전자, 즉 비와 백합을 택하는 순간 치명적인 문제가 대두된다. 놀고먹는 삶이 불가능해진 마당에 무슨 수로 입에 풀칠을 할 것인가? 다이스케는 결국 일자리를 알아보러 나간다. 과연 그 후가 궁금해지는 소설이다.

 

-- 네이버캐스트

 

-- 나쓰메 소세키의 탐미적인 문학이 체질에 맞지는 않지만,  그 역시 일종의 넘어야 할 산 같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과 함께 읽으면 더 그런 느낌이 들지요. 어쨌거나 소세키는 소위 시대정신의 육화인지라...

-- 스무 살 넘기면서 10년 이상을 하루에 두 갑쯤은 거뜬히 바닥내는 골초로 살았는데, 그래서 담배 없이 책읽기와 글쓰기가 가능할까 싶었는데, 읽어지고 써지더라고요...-_-;; 저 글이 그 첫 증거였습니다. 글을 쓰는 내내 엄청나게 담배를 피우고 싶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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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쯤 뒤 떡붕어 아저씨는 민물낚시를 떠났다. 소영이는 이번에는 떡붕어 아저씨의 말을 어기고 방 밖을 나갔다. 그러곤 성채를 반 바퀴 돌아 뒤쪽으로 갔다. 저 높이 성 꼭대기에 백발을 꼬아서 만든 굵은 밧줄이 계단 모양으로 매달려 있었다. 소영이는 그 끄트머리를, 꼭 땋은 머리를 묶은 리본 같은 것을 한 번 잡아 당겼다. 허연 머리채가 성벽을 따라 굽실굽실 춤을 추었다. 갑자기 떡붕어 아저씨의 방, 아니 욕실 창문으로 튕겨나가 하늘을 날던 기억이 났다. 저도 모르게 머리채를 양손으로 붙잡고 첫 계단 위에 발을 올려놓았다. 보기와는 달리 넓고 평평한 땅에 닿은 것처럼 편안했다. 소영이는 천천히 머리채 계단을 딛고 올라갔다.

 

구름이 몇 번이나 소영이의 등을 훑고 지나갔고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렸다. 한참을 차곡차곡 올라간 뒤 아래를 보니 연못이 조그맣고 파란 동그라미처럼 보였다. 이상하게도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위를 쳐다보았다. 저 멀리 커다란 창문만한 사각형의 구멍이 보였다. 소영이는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창문에 다다랐다. 다락방보다 한참 더 높은 곳, 손을 뻗으면 하늘을 긁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높은 곳이었다. 소영이는 조심스럽게 창턱으로 발을 올린 다음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발에 와 닿는 감촉이 부드러웠다.

 

방 한가운데에 거대하고 물렁해 보이는 형체 하나가 있었다. 소영이는 가까이 다가갔다. 그것은 어떤 할머니였다. 다만, 소영이의 할머니보다 훨씬 더 늙었고, 바싹 말랐던 할머니와는 달리 몹시 피둥피둥했다. 흡사 쭈글쭈글한 자루 속에 공기와 살을 잔뜩 집어넣어 부풀린 것 같았다. 사람은 늙을수록 마르고 쪼그라드는 줄만 알았는데, 늙으면서 더 커질 수 있다니 좀 놀라웠다. 할머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디마저 살에 묻혀버린 손과 손가락 끝이, 또 검버섯으로 뒤덮인 얼굴의 주글주글한 주름들이 보일 듯 말 듯 파닥대고 있었다. 할머니는 경사가 완만한 안락의자에 반쯤 눕다시피 앉아 있었다. 볼끈 잡아맨 복주머니처럼 생긴 입에는 투명한 뚜껑이 씌워져 있고,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은 길게 늘어져 벽으로 이어졌다. 벽은 온통 기괴한 구멍으로 가득 차 있었다. 머리카락은 그 무수한 구멍을 한 오라기씩 통과하여 벽 너머로 드리워졌다. 할머니 곁에는 한 중년여자가 고도의 기술로 만든 인조인간처럼 서 있었다. 낯선 사람이 들어와도 눈동자 한 번 돌리지 않고 눈꺼풀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할머니!”

소영이의 외침은 조용하고 넓은 방안에서 더 큰 메아리가 되어 소영이에게로 돌아왔다. 제 목소리에 흠칫 놀란 소영이는 더 크게 외쳤다.

할머니 누구야? 밥은 먹을 줄 알아? 죽은 거야, 산 거야, ?”

그러자 뚱보 할머니의 입술이 달싹이며 무슨 말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음절로 나눌 수 없는 괴상한 소리였다.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야.”

갑자기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문지기였다.

함부로 죽지도 못하는 세상이 됐어. 저렇게 삶을 죽이면서, 죽음을 살면서 30년이 넘도록 누워 있는 거지. 저런 식이라면 불멸은 최악의 징벌이야.”

에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나 하고, 정말! 아저씨 오뉴월에 불알이나 터져버려라!”

소영이는 다슬기 할매한테 들은 주문을 되는 대로 마구 지껄였다.

저 할머니는 누구야? 아저씨 아는 사람이야?”

우리 어머니. 그리고 주인이지.”

저 할머니가 여기 주인이야? 우아, 이 성이 전부 다 저 할머니 거라고? 에이, 나는 떡붕어 아저씨가 주인인 줄 알았네. 주인 아닌 사람은 매달 방세 내야 되는데, 에이, 좋지 않아!”

소영이는 떡붕어 아저씨를 생각하며 실망감과 미안함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산송장처럼 누워 있는 뚱보 할머니를 보니 금세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라, 저렇게 가만히 누워만 있으면 방값은 어떻게 받아, ? , 아저씨가 대신 받는구나?”

문지기는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너 그만 집에 가야겠다. 아빠가 찾잖아.”

, 나 아빠 없는데. 그래도 집에 갈래.”

 

소영이는 곧장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창턱은 아까와는 달리 턱없이 높았고 머리채 계단은 아예 사라지고 없었다. 소영이는 울음을 터뜨릴 기세로 문지기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소영이의 손을 잡고 빠른 속도로 앞을 향해 걸었다. 계속 해서 칸막이가 나와, 눈 깜짝할 새에 그들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침내, 마지막 칸막이 앞에 이르렀다. 문지기가 돌출부를 누르자 칸막이가 쩍 벌어지면서 조그만 방이 생겼다. 문지기는 소영이를 안으로 밀어 넣은 뒤 자기는 바깥에 멍하니 서 있었다. 조그만 방은 소영이를 태운 채 급속도로 하강하다가 갑자기 털커덕 멈추어 섰다. 소영이는 낯익은 복도에 서 있었다.

 

소영이는 달려온 떡붕어 아저씨의 목을 감으며 안겼다.

아저씨, 나 때문에 방세 더 많이 내야 돼?”

? 그게 무슨 소리야?”

아저씨 자살할 거야?”

도대체 어디서 그런 이상한 말을 배웠어?”

구덩이 오막살이 살 때 맨 끝 방 아줌마랑 아저씨 죽었어. 방값 못 내서 죽었대. 사람들이 자살이라고 그랬어.”

어휴, 네가 없어도 방세는 내야 되니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그리고 자살이란 아주 나쁜 말이니까 잊어버려.”

왜 나빠? 아저씨, 그런데 있잖아,”

소영이는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떡붕어 아저씨는 시종일관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속으론 웃고 있어도, 또 울고 있어도 그의 얼굴은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소영이 얘기를 들으며 떡붕어 아저씨는 민물고기를 다듬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닿을 때마다 물고기는 비명 한 번 못 지르는 한을 풀겠다는 듯 죽어라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아무리 발악을 해도 쉽게 죽지도 못했다. 내장이 완전히 제거되고 비늘이 싹 벗겨진 채 멍한 눈을 치켜뜨고 아가미를 뻐끔거리는 물고기의 뱃속에 양파와 다진 마늘과 생강이 들어갔고, 그 몸통에는 골고루 소금이 뿌려졌다. 물고기는 그렇게 죽음과 삶의 처절한 경계를 오가야 했다. 뜨겁게 달궈진 전골냄비에 들어가자 펄펄 끓는 간장이 물고기의 온 몸을 파편으로 뒤덮었고, 물고기는 마지막으로 최후의, 또 최고의 비상을 시도했다. 하지만 떡붕어 아저씨가 능수능란한 손놀림으로 잽싸게 뚜껑을 덮어버리자 천정까지 뛰어오르지도 못하고 꼬꾸라졌다.

 

슬슬 보내야겠는걸.”

누구? 어딜?”

요 녀석, 이제 학교에 가야지.”

떡붕어 아저씨는 굳어버린 얼굴에 근심을 담아내고 싶었다.

 

*

 

화창한 초가을 아침이었다.

 

성을 나와 논밭을 따라 쭉 걷자 바다가 나왔다. 그 바닷가를 따라 또 쭉 걸어가니 큰 도로가 나왔다. 우체국, 약국, 은행, 대형 슈퍼마켓, 세탁소, 다방 등이 보였다. 그 길을 따라 몇 발짝을 떼자 교문이 소담하게 서 있었다. 넓은 운동장 너머로 고즈넉한 바다가 그보다 더 넓게 펼쳐졌다. 운동장의 오른쪽엔 등나무가 연보랏빛 꽃을 피웠고 밑에는 나무벤치가 단정하게 배열돼 있었다. 왼쪽에 나지막한 집이 한 채 서 있었다. 원래는 외지에서 온 교사들을 위한 숙사였지만 아무도 살지 않아 그냥 버려졌다.

 

운동장 옆을 따라 걸어가자 학교 건물이 나왔다. 그 옆으로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며 총 천연색을 뽐내고 있었다. 건물 바로 앞에는 조그만 꽃밭이 있었다. 그 예쁜 꽃들을 다 제압할 기세로 동상 하나가 서 있었다. 한 쪽 겨드랑이에 책보를 낀 어린소년의 대리석상 밑에는 이승복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문구도 보였다. 소년으로부터 좀 떨어진 곳엔 한 소녀의 대리석상이 있었다. 소녀는 긴 머리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다소곳이 앉아, 얌전하게 모아진 허벅지에 책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 옆으로 좀 더 가서 학교 건물을 끼고 돌면, 너무 많이 자라서 들국화처럼 돼 버린 쑥 틈새로 도르래가 달려 있는 우물이 나왔다. 우물 위에는 나무 지붕이 쳐져 있었다. 옆에 수돗가를 두고서도 아이들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렸다. 아이들이 줄을 잡아당길 때마다 도르래가 노래를 불렀고, 물통과 물이 우물 벽을 때리며 화음을 넣었다. 이곳이 소영이가 다닐 학교였다. 섬사람들이 우물이 있는 학교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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