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은학이는 모래를 뒤집어쓴 채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웬일인지 침까지 탁탁 뱉어댔다.
“침은 왜 뱉고 그래? 그건 나쁜 버릇이야.”
“입안에 모래가 가득 들어갔어요.”
은학이는 무심하게 말을 받았다.
“또 모래 장난 했어? 비도 오는데?”
흡사 은학이의 독특한 취미를 오늘 처음 발견했다는 투였다. 특수교사는 따뜻한 옥수수차를 머그컵에 따라주고, 수건으로 은학이의 목과 팔을 닦아주었다. 은학이의 몸이 좀 데워지면 감자와 고구마가 나왔다. 은학이는 특수교사와 마주 앉아 입김을 호호 불며 이 음식을 먹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그 순간은 무척 짧았다.
구구단 외우기가 시작됐다. 5단을 시작한 건 올해 봄부터였다. 여름방학을 할 땐 분명히 다 외웠는데, 개학을 하고 나니 거짓말처럼 머릿속에서 싹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나름대로 일관된 암기 방식에 근거한 것이었다. 가령 봄 학기 내내 4단을 외우고 가을 학기가 되면 다 까먹었다. 하지만 내년 봄이 됐을 때는 4단의 절반은 남아 있었다. 이런 식으로 느리긴 하지만 어쨌거나 5단까지 온 것이었다.
“자, 그림을 봐. 다섯 개에 다섯 개를 더 하면 열 개지? 다섯 개가 두 개라고 생각하면 돼. 다섯 개에 다섯 개를 더 하고 또 다섯 개를 더하면, 다섯 개가 셋? 그럼 몇 개?”
“열다섯 개요.”
“옳지! 바로 그거야.”
복습이 끝났다. 은학이는 오만상을 쓰며 5단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오’를 넘기지 못하고 대뜸 물었다.
“선생님, 단무지를 만든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그게 5단이랑 무슨 상관이야?”
은학이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불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래도 5단을 읊조리긴 했다.
“오일은 오, 오이 십, 오삼 십오, 오사 이십, 오오 이십오, 오육 삼십, 오육 삼십, 오육 삼십, 오칠, 오칠은, 오칠이, 오칠이 녀석이….”
은학이는 눈을 꼭 감은 채 무던히도 애를 썼다.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은학이는 한 쪽 눈을 살짝 내리뜨곤 책을 힐끔 봤다.
“오육은 삼십, 오칠은 그러니까 삼십오, 오팔은, 오팔은….”
“자, 이제 앞에서부터 복습하고 나머지는 다음 시간에 외우자.”
“헤헤, 그럼, 선생님, 이제 대답해보세요. 단무지를 맨 처음 만든 사람이 누굴까요?”
“일단 복습부터! 오일은 오, 시작!”
“오일은 오, 오이 십, 오삼은 십오, 오사 이십, 오오 이십, 이십, 이십….”
“아까까지 잘 했잖아?”
“까먹었어요.”
“또 왜? 단무지 때문에?”
“아, 생각났다! 오오 이십오! 오육은 삼십이고, 단무지 처음 만든 사람은 누굴까요?”
“아, 몰라. 누군데?”
“모르면 네이버한테 물어봐야죠!”
은학이는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 소리는 운동장까지 들썩이게 만드는 종소리에 묻혀버렸다.
은학이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교실을 나갔다. 하지만 잠시 뒤에 근엄한 자세로 거들먹거리며 다시 교실로 들어왔다.
“선생님, 단무지를 맨 처음 만든 사람은 다꽝입니다!”
마치 어마어마한 비밀이라도 폭로하는 듯 비장한 표정이었다. 그 와중에도 난로 위의 군밤을 냉큼 집어 입안에 넣었다.
“선생님, 그럼 해시계와 물시계를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요?”
입안에서 놀고 있는 군밤 때문에 발음도 어설펐다.
“장영실?”
“맞아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이번에는 정말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며칠 뒤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서 사라졌다. 기나긴 겨울이 시작됐다.
*
떡붕어 아저씨는 벽을 열었다. 그 안에는 금고가 붙박여 있었다. 무수히 많은 숫자를 입력하자 금고 문이 열렸다. 싯누런 금괴들이 소복이 쌓여 태양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하나를 꺼내고 다시 문을 닫았다. 벽의 상처도 감쪽같이 아물어, 갈라졌던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떡붕어 아저씨는 소영이와 함께 성을 나섰다. 바다를 건너진 않았지만 머나먼 길이 시작됐다.
아저씨가 도착한 곳은 거대한 실내 시장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생필품을 잔뜩 샀다. 그 다음엔 농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막 추수한 쌀과 햇과일, 배추와 무를 비롯한 야채, 태양에 말린 고추 한 포대 등을 샀다. 트럭이 거의 다 찬 상태였다. 그 다음에는 숲속으로 갔다. 떡붕어 아저씨는 곳곳에 덫을 놓았다. 그리고 소영이를 판판한 돌 위에 앉혀 놓고 한참을 기다렸다. 토끼 세 마리, 꿩 다섯 마리, 어미 잃은 새끼 멧돼지 한 마리 등 소득이 컸다.
집에 돌아온 떡붕어 아저씨는 하루 종일 저장 음식을 만들었다. 김치를 담그고 감을 깎아 곶감을 만들고 고기를 해체해 일부는 냉장고에 넣고 일부는 다른 방에 걸어 말렸다. 모든 것이 다 끝났을 때 아저씨는 음습한 방으로 들어가 미끼용 벌레들을 꺼내왔다. 소영이에게는 겨울 잠바를 입히고 구명조끼도 씌웠다.
“우아, 나, 물에 들어가는 거야?”
“아니. 발을 헛디딜까봐 그러는 거야.”
둘은 바닷가로 나갔다. 떡붕어 아저씨는 낚싯대를 세 개나 설치했다. 낚싯대가 번갈아 가며 끊임없이 달그락거렸고 주둥이가 뾰족한 검푸른 꽁치들이 수도 없이 몰려들었다. 잡힌 꽁치들은 순식간에 그물망에 들어갔다. 그 즉시 꿈틀대는 갯지렁이를 싹둑 잘라, 반 토막씩 낚시 바늘에 꽂았다. 소영이에게도 낚싯대가 주어졌다. 어쩌다 꽁치가 걸려들면 폴짝폴짝 뛰며 즐거워했다. 옆에서 아저씨는 고등어 잡이용 미끼를 준비했다.
“어라, 그건 뭐야?”
“가짜 미끼야.”
“에이, 고등어가 바보야, 그런 걸 먹게?”
하지만 거짓말처럼 고등어가 우수수 걸려들기 시작했다.
“이런, 고등어가 꽁치보다 더 바보였네. 덩치만 커갖곤.”
“고등어가 꽁치보다 눈이 더 나빠서 그래. 개체수가 많아서 먹이쟁탈전도 더 심한 거고. 고등어는 성질도 급해. 스트레스를 엄청 많이 받는 녀석이거든. 그래서 도시의 일반 식당에서 회로 팔기가 힘든,”
“으악, 아저씨!”
소영이는 저도 모르게 낚싯대를 손에서 놓아버렸다. 떡붕어 아저씨가 용케 붙잡아 끌어올렸다.
“허허, 갯지렁이를 문 문어는 처음 보는 걸.”
아저씨의 딱딱한 얼굴에 경련이 일면서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실은 기뻐서 실실 웃고 있는 것이었다.
떡붕어 아저씨와 소영이는 해질녘에 집으로 돌아왔다. 떡붕어 아저씨는 오랫동안 물고기를 다듬었다. 내장을 제거당한 물고기들은 두세 마리씩 묶여 냉동실에 안치됐다. 이번 겨울은 족히 날 수 있는 양이었다. 소영이는 문득 성탑 안에 누워 있는 뚱보 할머니를 생각했다. 그 할머니에게도 겨울이 올까. 한편 떡붕어 아저씨는 성 안에 거대한 수족관을 만들었다. 떡붕어 아저씨는 성 바깥의 연못에 관을 연결해 이쪽으로 물을 끌어왔다. 바윗돌과 돌멩이, 자갈도 깔고 온갖 민물고기와 해초를 다 풀어 놓았다.
월동 준비가 끝나자 슬슬 겨울이 올 기미를 보였다. 겨울 속에서도 계절은 매일매일 바뀌었다. 어제는 봄비가 내렸지만 오늘 낮 기온이 30도에 육박했고 모레는 눈이 퍼부었고 그 모레 다음날에는 앙상한 진달래 나뭇가지 끝에 꽃봉오리가 맺혔다. 하지만 진달래가 꽃을 피우기도 전에 또 겨울이 와버렸다. 진분홍색 진달래는 새하얀 눈보라에 묻혀버렸다. 다음날 곧바로 눈이 녹으면서 폭염이 시작됐고, 신록은 어느덧 우거진 녹음이 됐다.
---- 2부 끝났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3부로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