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패배와 전락을 향하여:
모래 속으로 사라진 한 남자를 통해 조명한 자유의 문제
-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어디론가 떠났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자의 이야기는 항상 흥미를 자극한다. “8월 어느 날, 한 남자가 행방불명되었다.” 31세에 자그마한 체형의 교사 니키 준페이는 사흘간의 휴가를 얻어 모래사막에 서식하는 곤충을 찾아 떠난다. 신종 곤충을 발견하여 기나긴 라틴어 학명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곤충 도감에 올리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정작은 사구에 파묻힘으로써 원래의 이름을 상실하는 동시에 그 자신이 모래 속의 희귀 생명체, 즉 벌레-곤충으로 변신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모래의 여자>는 니키 준페이가 ‘남자’, 심지어 ‘인간’의 대명사가 되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남자는 모래 구멍 속 여자의 집에 감금된 순간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그런 남자의 눈에는 여자가 안쓰러울뿐더러 한심하기까지 하다. 밤마다 모래를 퍼내야 하고 모래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삶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잡혀 온 이방인도 아니면서 왜 자유를 반납하고 사냐고, 혹시 마을 사람들에게 뭔가 수치스러운 짓이라도 한 것이냐고 남자는 여자를 추궁한다. 여자의 반응은 차분하다 못해 심드렁하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 봐야, 딱히 할 일도 없고…….」
「걸어 다니면 되잖아!」
「걸어 다녀요……?」
「그래, 걷는 거야……. 그냥 걸어 다니기만 해도 충분하잖아……. 내가 여기 오기 전까지는 당신도 마음대로 나다녔을 것 아니야?」
「하지만 볼일도 없는데 나다녀 봐야, 피로하기만 할뿐이니까요…….」
「무슨 그런 웃기는 소리를 하는 거야! 자기 마음을 열어 보라고, 모를 리가 없으니까! ……개도 우리 속에만 갇혀 있으면 미쳐 버려!」
「걸어 봤어요…….」
여자는 불쑥, 껍질을 닫은 조개처럼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지, 끔찍하도록 걸었어요……. 이곳에 올 때까지…… 애를 안고, 오래오래……. 이제, 걷는 데는 지쳤어요…….」
이 단순하고도 묘한 논리에 당황한 남자는 말문이 막힌다.
그렇다……. 십몇 년 전, 저 폐허의 시절에는 모두 한결같이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찾아 광분하였다. 그렇다고 지금,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에 식상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실제로 너 역시 그런 환상을 상대로 한 귀신 놀이에 지친 나머지 이런 사구를 찾아오지 않았던가…….
무엇이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이며 무엇이 ‘걸을 수 있는 자유’인가. 이러나저러나 중요하지 않다. 모래 바깥에서처럼 모래 속에서도 남자는 여전히 자유를 찾아 헤맨다. 첫 번째 탈출 시도가 실패하자 더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급기야 여자를 반쯤 혼수상태에 빠뜨려 놓고 손수 만든 밧줄을 이용해 사구 밖으로 빠져나가기에 이른다. 46일만의 자유!
하지만 이 자유가 모래밭을 계속 ‘걸어 다녀야’ 하는 상황, 즉 도망자의 상황으로 이어진다. 추격을 피해 열심히 도주한 결과 그가 다다른 곳은 개도 얼씬거리지 않는 ‘소금밭’. 늪과 같은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남자는 “판으로 찍어 낸 싸구려 과자 신세라도 좋으니, 아무튼 살고 싶다!”라고 생각한다. 결국 ‘적들’의 손에 구출된 그는 다시 무덤과 같은 모래 구멍 속에 안치된다. 이 모든 과정이 실은 저들의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라니, 얼마나 허무한가.
그럼에도 자유를 향한 남자의 몸부림은 계속된다. 바깥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만 있다면 노인의 ‘외설스러운’ 제안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한다. 그러나 정작 그 자유를 손에 넣었을 때는 그것을 향유하기는커녕 사구 밖으로 한 번 나가 볼 뿐, 자신이 발명한 유수 장치를 살피기 위해 이내 되돌아온다. “딱히 서둘러 도망칠 필요는 없다. (중략) 도주 수단은, 그다음 날 생각해도 무방하다.” <모래의 여자>는 이렇게 끝난다. 도주를 유예하는 것이 비단 병원에 실려 간 여자를 기다리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과연 남자는 무기력하게 무너진 것인가.
저 독특한 ‘모래 왕국’을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체제의 은유라고 생각해 보자. 실제로 모래의 속성을 이용한 부조리한 노동 착취와 인권 유린, ‘감시와 처벌’의 메커니즘(망루를 지키는 시선!), 자유의 박탈과 개성의 말살 등은 여러 반(反)유토피아 소설 속의 국가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아베 코보는 <모래의 여자>의 세계를 이데올로기적 은유로 축소하기보다는 실존적인 정황으로, 보편적인 인간 조건으로 확장한다. ‘모래의 여자’가 보여 주듯 자유의 개념은 유동적이며 상대적이다. 남자 역시 이 점을 슬슬 깨달아간다.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생각했던 것만큼의 저항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변화의 원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물 배급이 중단될까 봐 두려워서인가, 아니면 여자에 대한 자책감 때문인가, 아니면 또 노동 자체의 성격 때문일까? 과연 노동에는, 목적지 없이도 여전히 도망쳐 가는 시간을 견디게 하는, 인간의 기댈 언덕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여기서 노동은 삶의 동의어에 가깝다. ‘모래의 여자’를 그냥 비참한 수인(囚人)으로만 볼 수 있을까. 오히려 그녀야말로 모래와 더불어 살면서 매순간 모래, 즉 세계로부터의 자유를 향유한 것은 아닐까. 비슷한 맥락에서 남자는 사구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무한한 자유를 보유한 채로 사구 속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오히려 더 자유로워지는 것 같다. 거듭되는 패배와 전락, 이것이야말로 니키 준페이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핵심적인 요소인 셈이다.
-- 네이버캐스트
갑자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완전 칩거하겠으나, 무조건 밖으로 나와야 하는 상황이라, 눈 속에서 절절 매게 됐지요. 덕분에 떠오른 저 책입니다. 눈의 싸늘함과 축축함, 모래의 뜨거움과 건조함... <모래의 여자> 속의 모래 더미는, 개인적으론 러시아 유학 시절 경험한 눈 더미를 상기시키더군요.
이 소설을 토대로 만든 영화 속 주인공 '모래의 여자'입니다. 얼마 전에 사망했다는데, 영화도, 영화 속 그녀의 느낌도 강렬했어요. 별로 야한(?) 영화가 아닌데, 이미지는 대부분 다 에로틱 쪽이네요 ^^;
아베 코보, 라는 이름은 좀 생소했는데요, 다른 소설도 좀 뒤져보니 카프카와 비교되는 이유는 알 것 같더라고요. 그럼에도, 저 사진은 한 시절 탐독했던 국내 비평가를 닮았어요 ^^; 바로 이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