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망, 혹은 꿈꿀 권리
- 스탕달, <적과 흑>
1. 스탕달, 혁명, <적과 흑>
1789년을 전후한 시점부터 1848년 2월 혁명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프랑스는 실제로 혼돈과 격변의 공간이었다. 제정(帝政), 왕정, 공화정, 등 정체(政體)의 변화는 곧 세계의 변화였다. 문학은 당연히 그것을 반영한다. 스탕달의 생몰년도(1783-1842)는 이 ‘혁명의 시대’와 거의 일치한다. 그의 소설이 두 후배 작가(1799년생인 발자크, 1821년생인 플로베르)와 달리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소설이 어떤 특정한 분파나 정체,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지를 담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의 삶의 궤적이 혁명 및 정치의 그것과 맞물려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이 경우 혁명은 역사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정작 그의 전기는 놀라울 정도로 따분한 편이다.
(흠, 좀 박색이죠?^^; 그렇다고 해서 플로베르나 발자크처럼 극적인(?) 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마음에 안 드는 얼굴입니다.. ㅋ)
젊은 날 스탕달은 나폴레옹 체제 하에서 군인과 관리 생활을 했으며(1812년 전쟁 때는 러시아까지 갔다가 나폴레옹 군대와 함께 퇴각했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에는 주로 이탈리아에 머물며 딜레탕트적인 삶을 살았다. 그가 다시 관직을 얻은 것은 1830년 7월 왕조가 성립됐을 때이다. 대체로 일신의 행복과 안락을 추구했던 그의 삶은 별다른 얘깃거리를 주지 않는다. 문학적 측면만 봐도 그러하다. 그에게서는 보통 19세기 작가들이 보여주는 순교자적 측면을 찾아보기 힘들다. 가령 그는 ‘펜의 도형수’를 자처하며 괴물처럼, 짐승처럼 써나갔던 ‘열혈남’ 발자크와도, ‘일물일어설’의 원칙에 따라 피를 말리는 고통을 맛보며 소설 쓰기에 임했던 ‘냉혈한’ 플로베르와도 다르다. 등단 시기도 상당히 늦었다. 첫 소설 <아르망스>가 발표된 것은 1826년, 그가 불혹의 나이를 넘겼을 때였으니 말이다. 이후 그가 쓴 작품은 회상록이나 에세이를 빼고 소설에만 국한한다면 그다지 많은 양이 아니다. 그런 그가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매혹적인 소설 중 하나인 <적과 흑>을 썼다. 바로 이 대목이 극적이다.
군인 혹은 관리로서의 출세를 꿈꾸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못 생긴 외모에 대한 보상 작용인 양 수차례 연애를 거듭했으나 대개의 경우 실연을 당했던(대신 <연애론>을 남겼다) 한량이 1830년에 <적과 흑>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완성한다. 그때 그의 나이는 이미 47세였다. 이 소설은 182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실제로 있었던 한 형사 사건(‘베르테’ 사건)을 소재로 취했는데, 그 시의성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다(스탕달은 발자크보다 지명도가 낮은 작가였다). 그러나 스탕달은 자신의 소설이 훗날에는 유명해질 것이라고 믿었고(그러고 싶었고) 결국 그 예언이 실현되었다. 실제로 <적과 흑>은 문학성은 물론 읽는 재미마저 갖춘, 고전 치고는 제법 드물게 가독성이 높은 소설이다. 좀 더 세부적으로 보자.
<적과 흑>은 주인공의 야망과 좌절에 주목한다면 비극적인 성장소설이자 모험소설이고, 그의 사랑과 연애에 집중한다면 대단히 감성적인 연애소설이며, 자유간접화법의 사용이 돋보이는 섬세한 심리 묘사에 매료된다면 훌륭한 심리소설이다. 어떤 경우든 이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매혹적인 청년 쥘리엥 소렐이다. 나폴레옹이 힘으로써 세상을 뒤흔들었다면 스탕달은 문학으로써, 쥘리엥은 연애로써 비슷한 위업을 달성한다. 작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나폴레옹에 대한 자신의 양가적인 입장을 주인공에게는 순수한 열광과 숭배의 형태로 반영한다.
한편 스탕달은 부유한 부르주아 출신으로서 귀족과 민중 모두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특히 민중에 관한 한 혐오와 경멸을 감추지 않았다. “나는 더러운 것을 혐오하는데, 민중이란 내 눈에 항상 더러워 보인다.”라거나 “민중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내게는 순간순간마다 고통이 될 것이다.”라거나 “가게 방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기보다는 매달 보름씩을 감옥에서 보내는 편이 좋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지 않은가(<앙리 브륄라르의 삶>). 그럼에도 정작 자기 소설의 주인공은 목수의 아들, 즉 민중에서 택했다. 무엇이 그토록 매력적이었던 것일까.
2. 야망, 혹은 꿈꿀 권리 - 나폴레옹처럼!
쥘리엥 소렐은 무식하고 거친 목수의 아들이다. 그럼에도 아비나 형들과는 달리 도무지 육체노동에는 적합하지 않을 법한 야리야리한 몸에 뽀얗고 곱상한 얼굴, 나긋나긋하고 조용한 행동거지, 뛰어난 지력과 예민한 감수성 등 모든 점에서 너무나 민중답지 않다. 환경결정론과 유물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주인공의 성격에 동기화가 다소 부족한 편이다. 달리 말해 작가의 입장에서는 주인공의 현재 위치와 야망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과 차이가 중요했던 것 같다. 즉, “드높은 마음, 비천한 신세”(1부 10장의 제목)!
쥘리엥에게 있어 출세는 ‘군인’과 ‘성직자’라는 구체적인 명사로 나타난다. 물론, 그의 진짜 꿈은 늙은 군의관이 불어넣어준 대로 ‘나폴레옹’이 되는 것이었다. 인생을 나폴레옹처럼!
그는 혼자 부르짖었다. “아아! 나폴레옹은 프랑스 청년들을 위해 하느님이 보내주신 사람이었다! 누가 그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인가? 나보다는 부자라고 해도 그저 좋은 교육을 받을 정도의 여유가 있을 뿐, 자기 대신 입대할 청년을 사거나 출셋길을 개척할 만한 돈이 없는 가련한 사람들은 나폴레옹 없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 숙명적인 그의 기억이 있는 한, 무슨 일을 하든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으리라!”(1, 154-155.)
나폴레옹에 대한 향수는 비단 쥘리엥뿐만 아니라 하층 계급 전반에 걸쳐 만연해 있다. 소위 나폴레옹 신화의 핵심은 무엇인가. ‘신분’은 숙명처럼 주어지는, 고로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계급’은 본인의 능력과 노력, 어쩌면 운을 통해 어떻든 조금이나 변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혁명, 특히 코르시카 섬 출신의 자그마한 군인 하나가 어느 날 갑자기 황제가 된다. 개천에서 용이 태어난 셈인데, 나폴레옹이 증명한 것은 바로 그 가능성이다.
나폴레옹을 향한 쥘리엥의 모방욕망에 늙은 군의가 심심파적으로 베푼 교육의 영향까지 가세한다. 그는 틈나는 대로 <세인트헬레나의 기록>을 읽고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성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아비의 집을 떠난 이래 그는 예비 사제로서 주로 검정색 옷을 입지만(‘흑’), 그 내면은 나폴레옹적 야망과 열정으로(‘적’) 가득 차 있다. “쥐라 산맥의 가련한 농사꾼이나, 평생 동안 이 음울한 검은 곳을 걸치고 있어야 할 내가 아닌가! 아아! 이십 년 전만 해도 나는 그들처럼 군복을 입었을 것이 아닌가! 그때라면 나 같은 남자는 전쟁터에서 죽거나 아니면 ‘서른여섯 살에 장군이 되었을 텐데.’”(2, 106)
그렇다면 ‘적’과 ‘흑’은 단순히 군직과 성직이 아니라 순수한 열정과 현실적 타협, 혁명의 시대와 왕정복고(반동)의 시대 등을 상징하기도 한다. ‘흑’은 차선책이었던 셈이다. 셸랑 신부는 이 점을 일찌감치 간파한다. “자네 성격의 밑바탕에는 어두운 격정이 엿보이는 것 같아 걱정이네. 그것은 성직자에게는 꼭 필요한 절제라든가 세속적 이득의 완전한 포기 같은 것을 보여주지 않는단 말이야. 자네의 재주는 전도유망하다고 생각하는 바이지만 그러나 (…) 성직자가 될 경우 나는 자네의 구원이 염려되는 바일세.”(1, 78)
그러나 목표가 설정됐다면 움직여야 한다. “쥘리엥에게 출세한다는 것은 우선 베리에르를 떠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자기 고향이 질색이었다.”(1, 43) 더욱이 그에게는 야망을 뒷받침해줄 충분한 능력(특히 신약 성경을 다 외우고 라틴 고전 문학까지 섭렵할 만큼 뛰어난 라틴어 실력)이 있다. 그리하여 이 19세 청년은 아비의 집을 떠나 베리에르 시(市) 시장 집의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이어, 브장송의 신학교, 파리의 드 라 몰 후작의 저택 등 계속하여 대처(大處)로 나간다. 쥘리엥의 동선, 즉 시골 청년의 상경 스토리는 19세기 근대소설의 일반적인 구성을 반복한다. 자, 쥘리엥은 ‘검은 옷’의 나폴레옹이 될 수 있을 것인가.
-- <신동아>
-- 완연한 겨울입니다. 무척이나 추웠던 겨울날, 소위 '입신양명'을 위해(과연 그랬던가, 이 역시 조작된 기억이 아닐까, 싶지만요) 등가방 하나만 달랑 메고서 부산역에서 통일호 타고 서울에 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이 됐네요.
이런 개인사도 있고 하여, 세계문학의 여러 걸작 소설을 통틀어 '마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가 <적과 흑>입니다. 서른을 넘긴 뒤에도 김붕구 선생이 번역한 범우사판으로 읽었는데, 이제는 정말 선택의 폭이 무척 넓어졌죠? 어쨌거나 소설은 뭐라뭐라해도 주인공이 멋있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