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레트헨 비극: 열정의 시험

 

메피스토펠레스의 인도를 받으며 파우스트는 동화에나 나올 법한 마녀의 집에 도착한다. 그곳, ‘마법의 동그라미안에서 마녀의 약을 마시고 청춘을 되찾은 그는 곧이어 순박한 평민 아가씨 그레트헨(마르가레테)에게 반한다. 한편, 그녀의 입장에서 젊고 잘생긴 귀공자 파우스트가 마음에 든 것은 당연한 일.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힘을 빌려 선물 공세를 펴며 그레트헨을 집요하게 유혹한다. 처음에는 이웃집 여인 마르테의 집에서 밀회를 갖던 그들이 점점 더 대담해져 그레트헨의 집에서 밤을 보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그레트헨은 파우스트가 건네준 수면제를 어머니에게 먹임으로써 본의 아니게 어머니를 죽인다. 나아가 순결한 누이동생의 타락을 알아챈 오빠 발렌틴이 파우스트 일당과 싸움을 벌이다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훗날 감옥에 갇힌 그레트헨의 말을 참조하면, 이후 그녀는 파우스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물에 빠뜨려 죽이고 반쯤 미친 채로 감옥에 갇힌다. 

(젊어진 파우스트와 그레트헨)

 

이것이 이른바 그레트헨 비극(‘초고 파우스트라고 불린다)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우리의 신파극을 연상케 하는 이 시민 비극은 메피스토펠레스의 기획에서 보자면 죄악과 타락에의 유혹이다. 실제로 파우스트를 사로잡은 그레트헨은 귀족 아가씨도 아닐뿐더러 별로 미인도 아니다(“저는 아가씨도 아니고, 아름답지도 않아요”: 1, 141). 그러니까 파우스트는 그야말로 악마의 묘약, 즉 약기운에 취해 그녀에게 반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은유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파우스트는 악마의 의도와는 달리 단순한 육적 쾌감 이상의 것을 성취한다. 지고지순하고 숭고한 사랑의 카타르시스와 비극, 이것이 그가 열정의 시험에서 얻은 소중한 체험이다. 1부의 결말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청춘, 열정, 뭐, 이런 말 생각할 때 절대 빼먹을 수 없는 작품이죠? 나이 들어 읽으니 딱 한마디면 족하겠더라고요. "명불허전" ^^)

 

51일 전야, 발푸르기스의 밤이 끝날 무렵, 파우스트는 감옥에 갇힌 그레트헨을 발견하고 메피스토펠레스를 책망하며 감옥에 잠입한다. 형리를 기다리며 불안에 떨고 있던 그녀는 파우스트-하인리히의 등장에 열광하지만 탈옥하자는 그의 권유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도망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들이 절 노리고 있을 텐데요. / 구걸한다는 건 정말 비참한 일이에요. / 게다가 양심의 가책은 어떡하고요? / 낯선 고장을 떠돌아다니는 건 또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요. / 결국 그들이 절 붙잡고 말 텐데!”(1, 246) 보다시피 그레트헨이 도주를 거부하는 것은 비단 양심의 가책”, 즉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다. 어떻든 그레트헨은 죽음을 택함으로써 오히려 구원받는다. 그리고 2부의 마지막에 속죄하는 한 여인이 되어 파우스트의 구원과 부활의 순간을 함께 한다.

 

한데 파우스트의 입장에서 보면 그레트헨을 향한 열정은 그것이 아무리 강렬한 것일지라도 궁극의 지점은 아니다.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는 말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열정의 비극은 말하자면 청춘의 상징인바, 청년 파우스트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적어도 괴테의 관점을 빌자면, 삶의 절정에 대해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장년과 노년을 거쳐야 한다.

 

4. 헬레나 비극: 관료이자 가장으로서의 파우스트

 

파우스트의 인생에서 장년과 중년에 해당하는 시기가 곧 <파우스트>21-3막이다. 그는 여전히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으로 여러 술수를 부려가며(가령 지폐를 만들어 뿌린다) , 그리고 궁정 귀족 사회와 어울린다. 권태에 찌든 그들이 고대 신화 속의 헬레나와 파리스를 데려오라고 하자 그마저도 얼결에 승낙하고 만다. 이에 메피스토펠레스는 자기는 이교도라서 직접 갈 수 없다고 하면서 어머니들의 나라로 통하는 열쇠를 건네준다. 그곳에서 삼발이 향로를 훔쳐오면 된다는 것이다. 악마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파우스트는 목적을 달성하여 궁정 사람들 앞에 헬레나와 파리스를 대령한다. 그러나 그 스스로 헬레나에게 반한 나머지 그녀를 구하겠다고(더 정확히, 질투에 사로잡혀 파리스를 제치고 헬레나를 차지하겠다고) 설치다가 파국을 맞는다.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폭발한 것이다.

 

 

 

 

 

 

 

 

 

 

 

 

 

 

 

(사실 파우스트의 '호문쿨루스'와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으나 어쨌거나 호문쿨루스, 하면, 이 만화가 떠오릅니다. 파우스트와 메피의 거래가 보여주듯, 이 만화도 등가교환(의 법칙)에 기반하죠. 흠, 요즘 만화볼 시간이 없군요...ㅠ.ㅠ 얘들아, 다들 잘 있냐? ^^;)

 

실신한 파우스트를 메피스토펠레스는 그 옛날의 실험실로 데려간다. 파우스트의 제자 바그너는 드디어 플라스크 속의 작은 인간(난쟁이), 호문쿨루스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태어나자마자 말도 할 줄 아는 이 영특한 녀석은 곧 파우스트의 고뇌를 알아차리곤 그의 치료법을 찾기 위해, 즉 헬레나를 만나기 위해 함께 떠난다. 한편, 헬레나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이후 다시 메넬라오스의 궁전으로 돌아왔으나, 적국의 여자가 되었던 몸이기에 자신의 운명을 무척 걱정하고 있다. 메피스토펠레스(포르키아스로 변신)는 바로 이런 심리적 공황 상태를 이용, 헬레나를 선동하여 파우스트의 궁정으로 데려간다. 마땅한 대안이 없어진 그녀는 파우스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 때, 메넬라오스의 군대가 쳐들어오고 호메로스가 <일리아드>에서 선보인 트로이 전쟁이 괴테의 손으로 재창조된다. 전투장면이 상세히 묘사되지는 않으나, 다음 부분에서 헬레나와 파우스트는 명실상부한 부부가 되어 있으며 아들(오이포리온)까지 두고 있다. 그런데 이 아들이 문제이다. 그는 부모의 사랑과 근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는 비상을 꿈꾸며 제멋대로 날뛰다가 결국 이카루스처럼 너무 높이 올라가는 바람에 불길에 휩싸여 추락, 사망하고 만다. 이에 상심한 헬레나는 아들을 따라죽는다. 그녀가 유품처럼 남긴 옷이 파우스트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고 간다.

 

 

 

 

 

 

 

 

 

 

 

 

 

(헬레나 비극을 읽어내려면 우선 호메로스부터...-_-;;)

 

대략 이렇게 요약되는 헬레나 비극은 <파우스트> 전체를 통틀어 가장 난해하고 어쩌면 지루한 부분이다. 신화와 알레고리가 현실 속에 너무 깊이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과거와 신화적 과거가 뒤섞인 우주적 스케일 역시 혼란을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 단순화시킨다면 핵심은 두 가지인 듯하다. 첫째, 파우스트가 정부 관료로서, 궁정 사회의 일원으로서 모종의 시험을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부각된다는 것. 둘째, 1부의 청춘의 열정 이후 보다 성숙된 사랑의 시험이 전개되고 그런 만큼 결혼과 가정이라는 제도 속에 진입한 파우스트의 가장으로서의 고뇌가 암시된다는 것. 두 가지 시험은 모두 악마와의 계약의 범주에 드는 것으로서 결과적으로 비극으로 종결된다. 파우스트 입장에서는 새로이 몰입할 대상을, 시험의 대상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곧 세계 건설이다.

 

5. 위정자-개발자 비극: 세계 건설의 시험

 

파우스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가로 왕으로부터 영토를 하사받는데, 그곳을 개발하여 지상낙원으로 만들고자 한다. 애초부터 척박했던 이 해안지대에는 필레몬과 바우치스 부부가 살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이들은 제우스와 헤르메스를 정성껏 대접한, 부부애가 돈독하기로 유명한 노부부이다. 이들이 왜 여기 있을까. 일찍이 파우스트는 궁정 사회에 자본을 도입하기도 했거니와 황무지 간척사업에 착수함으로써 근대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마냥 낙관적이지는 않다. 지상낙원 건설이라는 미명 하에 거침없이 개발이 진행되지만 그 때문에 노부부의 터전은 파괴되고 그들도 죽고 만다.

 

 

 

 

 

 

 

 

 

 

 

(이런 것도 같이 읽어줘야죠? 헉헉, <파우스트>, 그래서 따라잡기 힘든 작품입니다.)

 

한데 파우스트는 세속적인 권력욕을 은연중에 숭고한 인류애로 포장하려고 한다. 실제로 그런 식의 승화 작용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근대 세계의 확립이 신화 세계의 와해를 전제로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양날의 칼과 같은 진리가 위정자-개발자 비극의 핵심이기도 하다. 결국 그는 근심으로 인해(회색 여인 근심이 입김을 불어넣고 가버린다) 눈이 멀어버린다. 그 순간에 그가 궁극의 지점에 다다른다는 것은 대단한 역설이다.

 

파우스트는 해안지대에 수로가 건설되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곤 곧 지상낙원이 완성될 것이라는 꿈에 젖어 고양된 독백을 늘어놓는다.

 

그렇다! 이 뜻을 위해 나는 모든 걸 바치겠다. /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다. /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 그래서, 위험에 둘러싸이더라도 여기에선 / 남녀노소가 모두 값진 나날을 보내는 것이다. / 나는 이러한 군중을 지켜보며, /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살고 싶다. 그러면 순간을 향해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세상에 남겨놓은 흔적은 /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이같이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 / 지금 최고의 순간을 맛보고 있노라.”(2, 363-4)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드디어 이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여기에 상당히 웃긴 반전이 있다. 그를 감동시킨 소리는 수로가 아니라 무덤, 더욱이 파우스트 자신의 무덤을 파는 소리였던 것이다. 정녕 파우스트가 죽음 직전에 다다른 저 황홀경은 자기기만이자 자기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의 영탄 역시도 감정의 자연스러운 토로라기보다는 반쯤은 당위적인 요구였을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파우스트는 이미 너무 늙어버렸기(괴테의 구상에 따르면 100살이다!) 때문이다. 악마와의 계약을 갱신하지 않는 한 더 이상의 삶은 없고, 따라서 더 이상의 시험은 없다.

 

---- 단순히 제목 때문에 찾아 읽은 이런 소설도 있습니다. 주제상의 유사성은 있을지 모르겠으나 우리의 저 파우스트가 나오는 건 아니고요. 여하튼, 돈 주고 사 봤지만, 누구 말마따나, 돈 줄 테니 읽으라고 해도 읽고 싶지 않은, 너무 지루한(-_-;;) 소설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이런 거 번역하신 역자님들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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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신이 될 수 있는가

- 괴테, <파우스트>

 

   

1. 괴테와 <파우스트>

 

괴테라는 이름에서 제일 먼저 연상되는 단어는 거인이다. 독일의 대문호이자 광물학, 식물학, 색채론 등을 연구한 과학자이자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을 지낸 정치 관료였으며, 평생 동안 뜨거운 열정과 지적 호기심을 불태웠던 인간. 83년에 걸친, 당시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거의 두 사람 몫에 가까울 만큼 길었던 그의 인생은 실로 빈틈없이 촘촘했다. 좀 과장하면 미처 늙을 틈도 없을 만큼 영원토록 생기로운 인간이었다고 할까. 그런 만큼 그를 둘러싸고 많은 연애담이 떠도는 것도 당연하다. 특히 칠순을 넘긴 나이에 십대 소녀에게 청혼한 일화가 유명하다. 하지만 이 경우조차도 주책이라는 말보다는 노쇠조차도 죽이지 못한 그의 열정과 평온한 자신감, 또 우아한 표현법(청혼!)이 더 돋보이는 것 같다. 말하자면 괴테만이 갖고 있는 아우라, 귀족스러움이다. 청년기의 질풍노도’(Sturm und Drang) 혹은 그의 표현법대로 낭만적인 것’(=병적인 것)에도 전혀 훼손되지 않는, 오히려 그것마저 포용하는 엄정함 같은 것(‘고전적인 것’) 말이다.

 

 

(젊은 괴테. 이 정도는 되어야 '젊은 베르테르(베르터)의 슬픔(고뇌)'도 쓰나 봅니다 ^^;)

 

 

하지만, 제법 역설적인데, 괴테는 뿌리 깊은 귀족 가문의 후예가 아니었다. 그의 증조부는 하층 시민계급(대장장이) 출신으로서 근면과 노력으로 부를 축적한 인물이다. 조부는 재단기술자에서 시작해 프랑크푸르트에서 고급 부티크와 일류 호텔 주인이 되었다. 한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괴테의 아버지는 당대의 전형적인 상류 교양 시민 계급의 삶을 영위했으며 교육열과 문화적 열망이 높았던 듯하다. 그 밑에서 괴테는 근면성실, 목표지향적인 생활, 노동과 휴식의 구분 등 시쳇말로 중산층의 생활 윤리를 몸으로 익히며 자랐다. 이런 그에게 문학이 왜 필요했을까.

 

괴테에게 있어 문학은 상승 욕망, 즉 일종의 야망 내지는 포부와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것은 괴테 개인의 욕망뿐만 아니라 당시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발전 속도가 더뎠던 독일의 민족적 열등감과 맞닿아 있다. 그의 성공은 곧 독일의 성공이다. 괴테 덕분에 독일문학이 비로소 영국문학의 셰익스피어와 같은 존재를 갖게 됐고 서유럽 문화의 중심에 나설 수 있었던 까닭이다.

 

 

 

 

 

 

 

 

 

 

 

 

 

 

 

 

 

괴테의 대표작인 <파우스트>는 그가 24세가 되던 해인 1773년에 시작하여 죽기 일 년 전인 1831년에 완성한 방대한 극작품이다. 아무래도 이 작품의 가장 큰 성취는 르네상스 이래 근대의 발전과 맞물려 진행된, 인간 중심의 신화 확립에서 찾을 수 있겠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한 노학자가 악마와 계약을 맺는 행위의 기저에 깔린 것은 신이 되고 싶은 인간 본연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생존했던 파우스트라는 인물은 반쯤은 신화나 전설처럼 인기를 몰았고 그 얘기를 다룬 문학 텍스트도 여러 편이 쓰였다. 그 중 유독 괴테의 <파우스트>만이 문학사의 냉엄한 심판을 거쳐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2. 학자-시인 비극: 파우스트는 왜 악마를 보는가

 

, 아치형 천장으로 둘러싸인 고딕식 방에서 파우스트 박사는 탄식한다. “! 나는 철학도, / 법학도, 의학도, 심지어 신학까지도 /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철저히 공부하였다. / 그러나, 지금 여기 서 있는 나는 가련한 바보. / 전보다 똑똑해진 것은 하나도 없구나!”(1, 29) 연금술까지 익혔으나 새로운 환멸을 안겨줄 뿐이다. 마법의 힘을 빌려 지령을 불러보지만 소용없다. 좌절한 파우스트는 음독자살을 시도한다. 때마침 들려오는 부활절 찬송가 소리에 입에서 잔을 떼긴 하지만 그의 우울증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비극: 1를 여는 이 노학자의 고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민음사 표지는 고전적이고, 문학동네 표지는 모던합니다^^;)

 

이 경우 파우스트는 현실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은유에 가깝다. 지식의 극점이나 미의 극점은, 설령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절대 손에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파우스트의 추구는 본질적으로 비극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그가 자살하지 않고 삶을 조금이라도 더 유예하려고 한다면 역시나 어둠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리얼리즘의 문법이라면 각종 정신병이나 광기가 나올 테지만(가령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반 카라마조프는 정신분열 상태에서 파우스트처럼 악마-분신을 만난다) <파우스트>에서는 악마가 작품 속의 실제 인물로서 등장한다. 더욱이 중세말의 분위기를 십분 반영하듯(‘악마에 대한 기독교의 강박적 불안의 산물이다) 악마의 형상은 무척 구체적이고 변신의 방식도 다채롭다.

 

 

 

 

 

 

 

 

 

 

 

 

 

 

 

(이반과 악마가 만나는(즉, 이반이 분열하는) 장면뿐만 아니라, 이 소설의 기저에 깔린 성경 텍스트 중 하나가 욥기라는 점도 <파우스트>를 연상시킵니다.)    

 

귀여운 검정 삽살개의 모습을 한 의뭉스러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고뇌하는 노학자 사이에 계약이 성립된다. 파우스트의 입장에서 요약해보면 이렇다. 나의 종이 되어 내가 원하는 것을 전부 하게 해 달라, 하지만 내가 어느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말하는 즉시, “어느 순간에 집착하는 즉시”(1, 96) 나의 영혼은 영원히 너의 것이 될 것이다, 라는 것. 파우스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면서까지 손에 넣고 싶은 것은 멈추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순간, 고통스러운 향락, 사랑에 눈먼 증오, 속이 후련해지는 분노와 같은 모종의 도취경”(1, 98)이다. 앞서 메피스토펠레스가 본 모습을 드러내기 직전, 그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느니라라는 성경 문구를 독일어로 번역하며 말씀때문에 고민한다. 결국 그는 , ‘, ‘도 아닌 행위를 가장 적합한 역어로 선택한다. ‘’(=논리=학문)에 대한 염증, 그와 나란히 행위’(=)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드디어 삶이, 더욱이 악마에게서 선사받는 삶이 펼쳐진다. 기대해봄직하다.

 

그러나 정작 파우스트의 모험은 악의 심연을 엿보고 싶은, 심지어 그 밑바닥까지 가보고 싶은 우리의 은밀한 욕망을 별로 만족시켜주지 못한다. 오히려 상징과 알레고리, 신화적인 요소의 범람, 집필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구성적 단절, 운문 장르의 특성상 불가피한 지나친 비약과 암시 등 일차적인 독해조차 어렵다. 실상 파우스트가 악마를 보는 까닭은 많은 부분 그가 신의 자리를 넘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욕망조차도 악마를 통해 그를 유혹해보고자 했던 신의 뜻에서 나온 것이라면? 과연 이 작품의 핵심은, 우리의 감미로운 기대와는 달리, 악마의 실체와 악의 향연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악마마저도 지배하는 신의 존재, 악마저도 포용하는 선의 힘을 강조하는 것, 이것이 문제이다. 이런 전제 하에 파우스트가 ()체험하는 삶을 살펴보자.

 

-- <신동아>

 

*

 

 

 

 

 

 

 

 

 

 

 

 

 

 

 

 

<파우스트>의 20세기 러시아(소비에트)소설 버전이라고 할 만큼 <파우스트>에 많은 빚을 진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입니다. 이렇게 번역본이 많음에도, 또 러시아 독자들은 무척 사랑하는 소설임에도, 우리 독자들에겐 말하자면 당신들의 천국(ㅠ.ㅠ)인데요, 한 번쯤 집중력을 발휘해볼 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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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 악마의 존재를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다

- 괴테, <파우스트>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하고서도 오히려 자살 충동을 느낄 만큼 우울과 환멸에 빠진 파우스트 박사. 그는 의뭉스러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나의 종이 되어 내가 원하는 것을 전부 하게 해 달라, 하지만 내가 어느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말하는 즉시, “어느 순간에 집착하는 즉시나의 영혼은 영원히 너의 것이 될 것이다, 라는 것. 정작 <파우스트>를 읽지 않아도 인간, 특히 지식의 극점에 도달한 인간과 악마의 계약은 늘 선악의 피안을 넘어 타락의 심연까지 가보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해 왔다. 하지만 이 작품의 핵심은 우리의 감미로운 기대와는 달리 악마 혹은 의 향연이 아니라 악마의 존재마저도 지배하는 신의 존재, ‘마저도 포용하는 의 힘을 보여주는 데 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처음 등장할 때부터 자신을 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창조해내는 힘의 일부분이라고 소개한다. 악마라는 신분상 부정(否定), , 파괴 등 악의 영역을 담당하나 그 역시 궁극적으로는 신에게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칙적으론신의 닮은꼴인 인간은 어떠한가? 파우스트는 제자 바그너 앞에서 다음과 같은 고뇌를 토로한다.

 

내 가슴 속엔 아아!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서 / 하나가 다른 하나와 떨어지려고 하네. / 하나는 음탕한 애욕에 빠져 / 현세에 매달려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고, / 다른 하나는 과감히 세속의 티끌을 떠나 / 숭고한 선인들의 영역에 오르려고 하네.”(1, 69)

 

그가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을 받아 ()체험하는 삶은 저 두 개의 영혼의 투쟁으로 점철돼 있다. 우선은 젊음을 되찾은 파우스트가 순결한 처녀 그레트헨(마르가레테)을 유혹하여 파멸시키는 시민 비극이 전개된다.(1) 결말인즉, 그레트헨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죽음을 택함으로써 오히려 구원받고 파우스트는 악마의 의도와는 달리 숭고한 사랑의 카타르시스를 맛본다.

 이어, 역사적 과거와 신화적 과거가 뒤범벅이 된 세계 속에서 맹활약을 펼치는 정치가 파우스트가 등장한다.(2) 트로이 전쟁이 괴테의 손으로 재창조되고 파리스의 연인이었던 헬레나가 파우스트의 아내가 되어 아들까지 낳는다. 이후 그는 또 다른 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가로 왕에게 하사받은 영토에 자신의 왕국을 만들고자 한다. 세속적인 권력욕이 숭고한 인류애로 승화되는 지점인 셈이다. 결국 파우스트는 수로를 건설하는 소리를 탐닉하며(실은 무덤을 파는 소리이다!)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외치고 사망한다. 득의만만한 메피스토펠레스가 계약에 따라 그의 영혼을 접수하려는 찰나, 신의 종인 천사들이 악마의 노획물을 채간다. 그는 구원받은 것이다.

 

 

 

 

 

 

 

 

 

 

 

 

 

 

 

 

이 도저한 기독교적 결말이 의미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파우스트>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천상의 서곡을 보자. 괴테는 구약의 욥기를 자기 식으로 풀어쓰면서 파우스트를 욥과 같은 하느님의 종으로 정의한다. 그를 유혹하여 타락시키겠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호언장담에 신은 상당히 여유만만하게 응수한다.

 

그의 영혼을 그 근원으로부터 끌어내어, / 만일 그것을 붙잡을 수 있다면, / 어디 너의 길로 유혹하여 이끌어보려무나 / 하지만 언젠가는 부끄러운 얼굴로 나타나 이렇게 고백하게 되리라. / 착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잘 알고 있더군요, 라고.”(1, 24)

 

요컨대 <파우스트>에서 악마의 장난과 인간의 방황은 신의 영역에 귀속되며 죄악은 역시나 신의 뜻에 따라 구원을 담보한다. 우리가 괴테의 기독교적 낙관론을 공유할 수만 있다면 물론 그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화해와 조화가 그토록 손쉽게 획득될 수 없다며 고집을 부린다면? 25, “파우스트의 불멸의 영혼을 인도하며천사들은 이렇게 말한다.

 

영들의 세계에서 고귀한 한 사람이 / 악으로부터 구원되었도다. /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 / 그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다. / 그에겐 천상으로부터 / 사랑의 은총이 내려졌으니, / 축복받은 무리가 그를 / 진심으로 환영하게 하라.”(2, 381)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 바로 이것이 두 개의 영혼의 투쟁으로 인해 고뇌하는 인간의 아름다운 실존이다. <파우스트>에서 그 인간이 구원받은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하느님의 종이었기 때문, 그 사실을 온순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만간 이러저러한 이유로 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반항아들이 등장할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속한 세계는 고답적인 상징과 알레고리가 아니라 적나라한 속악이 판치는 날 것의 현실이다. 결국, 모든 모순과 갈등을 신에게로 환원시킬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출구를 찾을 것인가, 라는 문제 앞에서 선택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어떤 경우든 분명한 것은, <파우스트>에서 웅장하고 대가적인 필치로 포착된 바, 인간은 두 개의 영혼을 지닌 존재이며 따라서 모종의 해법이, 적어도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 난해한 작품을 읽고 또 읽는 이유, 아무리 읽어도 좀처럼 정복의 쾌감을 얻지 못하는 원한을 풀어보려고 노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네이버캐스트

 

 

 

 

 

 

 

 

 

 

 

 

 

 

 

 

 

도무지 괴테는 쓴  책, 번역된 책이 너무 많아, 따라가기(즉, 읽어가기) 정말 벅찹니다. 소설은 그래도 대략 읽을 만합니다. <친화력>도 재밌고요. <파우스트>에 관해서는 좀 더 길게 쓴 글도 있는데, 워낙 어려운(그래서 동화되기도 여전히 ㅠ.ㅠ 힘들고) 작품임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는...@--@ 그럼에도  시즌별로(^^;) 꾸준히 읽어오고 있습니다. 십대 중반, 이십대 중반, 삼십대 중반... 흠, 사십대 중반쯤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지, 벌써부터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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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 문학으로의 초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1899-1977), <사형장으로의 초대>(1936)

 

 

법에 따라 친친나트 C에게 속삭이는 소리로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9) 그 즉시 그는 요새 감옥에 갇힌다. 간수(로디온)가 매일 아침 그의 감방에 나타나고(청소를 하고 거미에게 먹이를 준다) 감옥 소장(로드리그)과 변호사(로만)가 출몰하고 창백한 얼굴의 말없는 사서가 책자를 들고 드나든다. 공놀이를 즐기는, 소장의 열두 살짜리 (엠모치카)의 요사스러운 언행도 눈에 뜨인다. 이렇다 할 사건 없이, 혹은 어떤 사건도 사건으로 조명 받지 않는 채 지루한 반복과 사소한 변주가 지속되는 가운데 새로운 죄수(므슈 피에르)가 나타난다. 그는 친친나트를 구하려다가 체포되었다고 말하지만 실은 이 모든 상황을 지휘해온 사형 집행인으로 밝혀진다. 20, 친친나트는 사형장으로 이송되는데, 과연 피에르의 표현대로 싹둑-싹둑”(233)될 것인가.

 

 

<사형장의 초대>는 어떻든 사상범의 체포와 사형이라는 주제를 다룬 소설이다. 인간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풍자를 담은 환상적 알레고리로, 즉 자먀친이나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과 같은 부류로 읽어내고 싶은 유혹을 피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바로 이런 독법에 작가는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했다. 이 당혹스러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친친나트가 속한 세계는 극도로 조건적이다.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서 만들어놓은 것 같은 거대한 성채는 실제 감옥의 재현이라기보다는 그것의 도상적 축소판에 가깝다. 가짜 태양, 가짜 시계(비어 있는 숫자판에 30분마다 보초가 바늘을 새로 그려 넣고 시계 소리도 직접 낸다), 로디온의 거미 등 모든 것이 연극 소품 같고 이름이 비슷한(모두 R로 시작한다) 소장, 변호사, 간수는 일인이역을 맡은 한 두 명의 동일인처럼 보인다. ‘죄수 연기를 해야 하는 형리역을 맡은 무슈 피에르(Pierre의 첫 알파벳 P는 키릴 알파벳의 R과 모양이 같다)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친친나트와 대화를 나누며 커닝 쪽지를 힐끔힐끔 보기도 한다. 가구와 세간까지 몽땅 다 싸들고 친친나트를 면회 온 아내(마르핀카)와 처갓집 식구들은 통째로 인형극을 연상시킨다. 어머니(체칠리야 C)도 예외가 아니다. 생김새는 친친나트와 닮았으나, 폭풍우 속을 헤치고 온 듯 검은색 비옷에 방수 모자를 쓰고 있음에도 신발은 전혀 젖지 않았음이 강조된다. 그런 그녀를 향해 친친나트는 진짜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의 패러디라고 외친다.

 

각종 인형과 모조품 사이에서 친친나트는 전기, 즉 역사를 가진 유일한 인물이며 동시에 투명성에 지배되는 이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불투명한, 투시되지 않는 존재이다. 거듭된 체포와 석방에 이어 사형선고까지 받게 한 죄목인 그의 영지주의적 간악함은 유체이탈과 같은 형식으로 표현된다. “그는 (중략) 가발을 벗듯이 머리를 벗었고 벨트를 벗듯이 쇄골을 벗었고 갑옷을 벗듯이 흉곽을 벗었다. 엉덩이를 벗었고 다리를 벗었고 마치 장갑처럼 양팔을 벗어서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그에게서 남은 것들은 간신히 공기를 물들이면서 차츰차츰 흩어져 나갔다.”(32-33)

 

 

 

 

 

 

세계가 이원론적으로 구성된 만큼이나(연극적이면서도 속물적인 이 세계와 그것 너머에 존재한다고 상정되는 저 세계’) 그의 존재도 이분되어 있다. 사형이라는 꼭두각시놀음의 희생양 역을 맡은 친친나트, 그리고 그의 수명처럼 줄어가는 몽당연필을 갖고 뭔가를 끊임없이 써나가는 또 다른 친친나트. 두 세계의 경계에 놓인, 문자 그대로 옷을 벗고 단두대에 누워 참수의 순간을 기다리는 그의 최후 역시 독특한 방식으로 묘사된다. “한 명의 친친나트는 숫자를 세고 있었지만, 다른 친친나트는 점점 멀어져 가는, 쓸데없이 숫자 세는 소리에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았다. (중략) 내가 왜 여기 있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엎드려 있는 거지?”(250-251) 이렇게 자문한 다음 벌떡 일어난 그가 향하는 곳, “목소리들로 판단해 볼 때 그와 닮은 존재들이 서 있는 쪽”(252)이란 자유와 불멸의 저 세계를 암시하는 것이리라.

 

친친나트가 읽는 책 중 <참나무>는 주인공인 참나무가 자기가 경험한 일을 연대기처럼 기록한 소설로서 사진과 같은 엄정한 리얼리즘을 따른다. 그러나 친친나트가 주인공인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그런 평균적인 리얼리티혹은 낡은 리얼리티”(<강력한 견해들>)를 배반하며 실제 세계를 고의로 뒤집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또한 고의로 부각시킴으로써 새로운 리얼리티를 선보인다. 체칠리야가 말하는 네트카’(현실)와 굽은 거울(예술)의 관계(“부정의 부정은 긍정을 낳는다”)는 나보코프 문학의 한 측면을 설명해준다.

 

 

 

 

 

 

 

 

 

 

 

 

 

 

나보코프는 영어로 쓴 <롤리타> 덕분에 대중적인 명성을 얻게 됐지만 그 자신은 미국 작가이기에 앞서 러시아 문학의 토양에서 성장한 러시아 작가이기를 바랐다. 러시아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후예로 태어났으나 볼셰비키 혁명 때 영원히 조국을 떠나야 했던 그는 이후 유럽을 떠돌다 미국에 정착, 영어로 작품 활동을 하며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다. 그가 말년을 보내며 생을 마감한 곳은 스위스였다. 이렇게 유목민처럼 떠도는 삶, 잃어버린 낙원을 향한 노스탤지어는 그의 문학의 토대가 되었다.

 

그가 자기 식으로 문학사에 안치한 러시아 고전문학, 아니, 기존의 문학도 큰 의미를 지닌다. 친친나트가 만드는 봉제인형(가죽 외투를 입은 작고 털 많은 푸슈킨, 화려한 조끼를 입은 쥐를 닮은 고골, 농민 외투를 입은 두툼한 코의 늙은 톨스토이)은 그 상징처럼 보인다. 무대장치와 배우들이 소멸되는 가운데 홀로 미지의 세계로 이월하는 친친나트처럼 나보코프는 신화적인 19세기를 넘어서 소설 장르의 새로운 장을 연다.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작가 스스로 자신의 최고작이라고 격찬한 소설이다. 독서가 여전히 고도의 지적인 유희로 남기를 바라는 독자에게 권한다.

 

-- <책&>

 

--  도스토예프스키 수업 마지막 시간을 나보코프(특히, 그의 <절망>) 얘기로 끝냈습니다. 러시아문학자로서 도...키 이후 집중적으로 파보고 싶은 작가가 나보코프인데요, 그의 저 오만한 귀족주의(?)를 참아주기 힘들 때가 더러 있긴 합니다...-_-;;  

-- 이번 달에 실린 원고인데, 원래는 <롤리타>로 쓰려고 했어요. 한데 소재가 소재인 만큼 다른 작품을 고려해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나보코프의 러시아어 작품 중에서도 제일 난해한 걸로 여겨지는 이 작품이 됐지요. 더 나이 들면 (저작권도 소멸될 테고 ㅋㅋ) 번역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는 작품입니다. 

-- [롤리타] 때문에 생기는 편견과는 달리, 그의 결혼생활은 아주 원만했지요 ^^; 여러 모로 뼛속까지 귀족이었던 것 같아요...

 

나보코프도, 베라도 한 미모했지만(특히 베라는 유대인 특유의 우수가 돋보이죠), 늙어서도 여전히(!) 멋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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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꽃밭에 도착한 노인은 아이의 어머니를 보고 깜짝 놀랐다. , 역시! 그럼, 이 눈은 당신 것이었군. 강물에서 건져 올린 투명하고 아름다운 두 눈을 어머니에게 건넸다. 이제 어머니는 앞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노파가 일러준 대로 말했다. 우리 아이를 내놓으세요, 다른 꽃을 뽑아버릴 거예요. 그러고서 어머니는 빛바랜 보라색이 안쓰러워 보이는 제비꽃을 감쌌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꽃을 한 손으로 위협했다.

 

그것은 제비꽃보다 훨씬 더 초라한, 옅은 분홍색의 메꽃이었다. 그 역시 이제 막 꽃봉오리를 터뜨리려고 했지만 유리벽 안의 햇빛과 수분과 양분을 충분히 흡수하지 만큼 건강하지 못해 힘겨워하고 있었다. 노인은 말했다. 네 아이의 꽃이 뽑히면, 그래야만 저 메꽃은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아이의 어머니는 분노했다. , 왜 우리 아이만?! 그리고 어머니는 메꽃의 모가지를 향해 갑자기 늙어버린 추악하고 앙상한 손을 뻗었다. 노인은 전율했다.

 

여기까지 오자 소영이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 그럼 결국 메꽃을 뽑아버렸어?”

물론, 교훈을 주는 훌륭한 동화 속의 어머니였다면 뽑지 말았어야 했겠지. 또 다른 아이가, 그리고 그 아이의 어머니가 자기처럼 고통 받게 해서는 안 되니까. 하지만 이 어머니는 자기 아이를 되찾기 위해 자기가 겪은 고통이 너무 서러웠어. 아니, 자기 아이만 그렇게 추악한 병에 걸리고 또 그렇게 빨리 죽어야 한다는 게 너무 분했던 거야. 결국, 어머니는 메꽃을 뽑아버렸지.”

으악, 그럼 그 메꽃 아이는 어떡해? 그 엄마는?”

그러니까 그 다음 얘기는 더 슬픈 거야.”

 

그렇게 딸을 되찾았지만, 이미 죽음의 정원까지 들어왔던 딸은 이전보다 더 추악해져 악마의 몰골이 됐다. 온 몸이 점점 더 심하게 쭈글쭈글해지더니 조금씩 축소되어 갔다. 급기야는 둥그런 눈 알 두 개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어머니 역시도 원래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찾지 못했기에 더 이상 아이도 갖지 못하게 됐다. 하지만 두 눈은 여전히 빛을 발했다. 이것이 더 큰 불행이었다. 아이와 자기에게 닥친 불행을 두 눈으로 모두 봐야 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저주와 분노로 가득 찬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영혼이 피어 있는 꽃밭을 가꾸는 노파가 되었다. 수많은 세월 동안 속죄를 한 뒤 노파는 천국에 가게 됐다. 그곳에서 노파는 자기의 아이를 만났다. 아이는 태어날 때의 모습대로 작고 귀여운 엄지 공주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너무 늙어버린 자기 엄마를 알아보지 못했다.

 

에이, 그게 뭐야? 딸이 엄마를 못 알아보는 데 그게 또 무슨 천국이야?”

그러게 말이야. 어떡하면 좋을까, 소영아?”

제일 예쁠 때의 모습으로 만나게 해.”

역시 그게 좋겠지? 그럼, 아이를 본 순간 노파는 다시 원래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되찾았고 아이는 엄마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라고 끝낼까?”

소영이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을 나올 때는 키가 크는 약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복도 끝에서 문지기가 나타났다. 그는 예의 그 나긋나긋한 걸음으로 마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

 

동이 틀 무렵, 성탑 노파는 자연 상태로 돌아갔다. 나무 관 속에 누워 있는 노파는 인공적인 침대 위에 붙들려 있던 노파보다 훨씬 더 편안해보였다. 심지어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생명을 찾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관 뚜껑이 덮였다. 순간, ‘의 조합에 가까운 발음이 들려오는 성도 싶었다. 마녀는 흠칫했다. 문지기도 마찬가지였다.

 

날이 완전히 밝자 마녀의 집은 상갓집 분위기가 물씬 났다. 늘 꼭꼭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검은 상복에 자줏빛 할미꽃을 꽂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장례식장은 안팎으로 하얀 백합과 국화로 가득 찼다. 노파는 이제 액자 속에 갇힌 채 꽃과 향에 휩싸였다. 향로에서는 가느다란 짙은 초록색의 향이 역시나 실처럼 가는 연기를 뿜어내며 천천히 죽어갔다. 향냄새와 꽃향기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몽롱함이 또한 숙연함을 자아냈다.

 

맞은편에서는 시끌벅적한 잔치판이 펼쳐졌다. 군데군데 차려진 식탁 위에는 떡, 호박전, 부추 부침개, 양념을 옆에 곁들인 돼지고기 수육 등이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었다. 술과 음료수도 보였다. 문상객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앉아 있었다. 다들 나이가 지긋했지만 오구작작 떠드는 모양새는 어릴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집은 육개장이 아니네.”

육개장보다야 올갱이 해장국이 낫지. 국물 한 번 시원하다.”

얄궂어. 하필이면 그 집 손녀가 사라진 날이랑 똑같아.”

슬그머니 이 말을 내뱉은 남자는 주위를 살폈다.

왜 은주라고, 저어기 몸이 좀.”

그러자 동석한 사람들이 맞장구를 쳐주었다.

, 그 병신?”

 

하지만 또 다른 사람이 대화의 맥을 끊어버렸다.

에이, 거참! 여기요, 국 좀 더 줘요!”

국이 다 떨어졌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사람도 없어지고 국도 다 떨어졌군.”

그는 자못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딱히 국 때문이 아니라, 고인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좋지 않은 기억이 담긴 말을 들은 까닭이었다. 마침 그 곁에서 놀고 있던 소영이는 병신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어째 그것은 바보와도 다른 어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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