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기에 대한 경례도 부활했다. 때문에 수업시간은 물론이거니와 쉬는 시간에도 좀처럼 뛰어놀 수 없었다. 공을 차다가도 종소리가 들리면 얼음망치가 시작됐다. 다들 꽁꽁 얼어붙어 동작 그만을 해야 했다. 만화영화를 볼 시간도 없었다. 숙제의 양이 배로 불어났고 모의고사도 생겼다. 중고등학생이나 보는 줄 알았던 이 기괴한 시험을 준비하느라 아이들은 연일 교과서와 참고서를 붙들고 씨름해야 했다.

 

학부형들은 처음에는 당황했다. 하지만 점차 이 새로운 체계에 적응해 나갔다. 무엇보다도, 시내와 항구 주변의 명문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경쟁하려면 신임 교장의 지시를 열심히 따를 수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럴수록 그들이 교사에게 갖는 불만도 커졌다. 교사들은 못마땅한 듯 쑥덕대면서도 자기 반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를 전부 신임 교장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쓰레기 종량제처럼 외부에서 침입해온, 보이지 않는 시간의 폭력 같은 구석이 있었다. 물론 교장은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와 욕망의 소산이라고 믿었다. 이제 세계는 자신의 손아귀에 있으며 자기가 천지를 새로이 창조할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망상을 모두가 공유해야 했다.

 

신임 교장의 눈에 특수반이 예뻐 보일 리 없었다. 조만간 명문초등학교로 등극할 학교에 바보반이라니! 올해 입학한 아이들 중에도 바보가 있어 그는 신경이 바싹 곤두섰다. 통합 교육이라는 취지에는 동참하는 입장을 취하는 척하되, 바보들이 면학분위기를 해치지 않도록 해야 했다. 제일 먼저 처단해야 할 대상은 은학이였다. 이런 바보가 아직도 학교에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수치였다.

 

교장은 은학이에게서 일단 학생권’(이런 말이 가능하다면)을 박탈하기로 했다. 하지만 국민 정서를 감안하여 마냥 내쫓을 수는 없었다. 더욱이 은학이 아버지가 뒤에 버티고 있었다. 이제 그가 없으면 우물이 있는 학교 전체가 쓰레기 더미에 파묻힐 판이었다. 결국 교장은 민주주의학습 단지 건설 사업에 은학이의 노동력을 이용하기로 했다. 학급도 따로 배정해주지 않아 은학이는 아예 특수반으로 등교했다.

 

*

 

전국고사 준비를 하느라 학교 전체가 근엄한 침묵에 빠졌다. 때문에 민주주의학습 단지 건설현장에서 나는 소음이 더 크게 들렸다. 두툼한 장갑을 낀 은학이의 손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모르타르를 바르고 그것이 딱딱하게 굳어지기 전에 얼른 벽돌 한 장을 위에 얹었다. 모든 벽돌은 눈에 뜨일 듯 말 듯 비스듬하게 얹혔다. 그 옆이나 위에 쌓이는 벽들은 각도를 맞추느라 역시나 미세하게 비뚜름한 모양새가 되었다.

 

창턱까지 벽돌을 쌓자 은학이는 공사 현장에 쌓아 놓은 모래를 갖고 놀았다. 이곳은 아이들이 별로 드나들지 않는 곳이었다. 어쩌다 오는 아이들도 은학이를 놀리지 않았다. 은학이는 혼자 모래를 긁어모아 성을 쌓았다가 조심스레 허물어뜨리곤 했다. 간혹 소영이가 나타나, 한 쪽에 쪼그리고 앉아 있거나 그의 곁을 맴돌았다. 투정 섞인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에이, 오빠, 또 모래장난이야? 그렇게 허물어 버릴 거, 왜 자꾸 쌓는 거야?”

 

친근한 말투는 여전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소영이의 얼굴에도 서글픔이 깃들기 시작했다. 우물이 있는 학교에 처음 발을 디딜 때와 같은 촌스럽고 애처로운 성냥팔이 소녀의 모습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가방이 좀 더 커지고 물체 주머니와 스케치북 가방이 덤으로 붙었다. 그럼에도 소영이는 여전히 높임말을 쓸 줄 몰랐다. 그저 턱없이 커져 버린 몸, 느닷없이 붙어버린 나이와 학년이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구구단 암기는 은학이의 영원한 과제였다. 마의 7단을 넘는 데는 무려 네 번의 방학을 보내야 했다. 이제는 그야말로 고지가 저기였다. 스무 살을 넘겼을 때 은학이는 오직 9단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한데 이 9단이 문제였다. 초장부터 턱턱 막혔고, 절반도 가지 못하고 방학이 와 버렸다. 다음 학기엔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고, 방학과 더불어 모든 것이 망각되었다. 어쩌면 일부러 그러지도 몰랐다. 9단을 끝내면 정녕 학교를 떠나야 되니까.

 

선생님, 구구단에는 왜 10단이 없습니까?”

아참, 선생님, 1단은 외운 기억이 없죠?”

왜 항상 9까지 곱해야 되는 겁니까? 8까지만 곱하면 안 될까요?”

 

이런 질문들만 튀어나왔다. 특수교사는 피타고라스와 십진법의 연원까지 들먹이며 은학이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럴수록 9단 암기는 더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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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의 경계를 넘어서: 무모한 행동가? 노회한 독서광?

- 세르반테스(1547-1616), <돈 키호테>(1, 1605/ 2, 1615)

 

 

 

라 만차 지방에 알론소 키하노(()은 정확하지 않다)라는 사람이 살고 있는데, 골격은 튼튼하지만 몸과 얼굴은 비썩 마른, 쉰 살쯤 된 노인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농사일에 전념하고 사냥을 즐기던 그가 별안간 기사소설에 빠진다. 농지까지 팔아가며 소설책을 사들이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책만 읽더니 급기야는 머릿속 골수가 다 말라버려”(1, 45) 정신이 나간다. 방랑기사(편력기사)가 된 것, 아니, 그러기로 결심한 것이다. 몸소 투구를 장만하고 자신의 늙고 비루한 말을 로시난테로, 자신을 골 지방의 아마디스를 본 따 라 만차의 돈 키호테로 명명한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웃 마을의 어느 농사꾼 처녀는 졸지에 그가 연모하는 엘 토보소의 둘시네아로 바뀐다. 객줏집에서 기사서품식을 치른 그는 두 번째 출정에 앞서 불쌍한 촌사람하나를 꼬드겨 종자로 삼는다.

 

 

 

 

 

 

 

 

 

 

 

 

모든 것을 기사소설에 맞추어 새롭게 창조하려는 그의 옹골찬 몽상에 현실 역시 다부지게 맞선다. 중세 기사의 역을 자처한 배우는 문자 그대로 이빨이 빠진 노인, 기껏해야 불쌍한 몰골의 기사”(다른 번역으로는 슬픈 얼굴의 기사”)일 뿐이고 그가 구원하려는 세상은 더 이상 고답적인 영웅 서사시를 허용하지 않는 시공간이다. 어딜 가든 굶주린 배를 채워야 하고 잠을 자야 하고 무엇보다도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는 자신이 위대한 모험의 주체가 됐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말썽이나 일으키고 민폐만 끼치는 골치 아픈 늙은이일 뿐이다. 풍차를 거인으로, 여관집의 적포도주 가죽부대를 미코미코나 공주의 적으로 착각하여 공격하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그런데 돈 키호테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녕 몰랐을까? 그의 광기는 자기 최면의 산물, 즉 일종의 연기가 아니었을까? 시골 이발사의 세숫대야를 보고 맘브리노의 투구라고 주장하면서 돈 키호테는 마법을 운운한다. “그래서 자네에게 세숫대야로 보이는 그것도 나에게는 맘브리노 투구로 보이는 것이고, 또 딴사람에게는 다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1, 336.) 이 대목을 어떻게 해석하든 돈 키호테의 시대착오적인 작태와 노회한 자기기만(혹은 순진한 광기?)는 쉽사리 해석되지 않는다. 마냥 감동하기에는 너무 웃기고, 마냥 웃기에는 너무 처량하다.

 

 

이 소설이 숭고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희비극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세계 자체가 분열된 탓이다.(루카치) <돈 키호테>는 신 중심의 세계(중세)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르네상스)를 거쳐 근대의 문턱에 이른 순간에 태어났다. 영웅적이고 낭만적인 열광의 시대가 끝나고 권태와 환멸의 시대, 심지어 범속과 일상의 시대가 찾아온 이다. 돈 키호테는 기사소설에는 나오지 않는 정황과 마주하여 당혹스러워하고 수시로 낭패를 당한다. 그러나 그가 패배하는 횟수(스무 번)만큼 승리한다는 사실(나보코프, <돈 키호테 강의>)을 인지하는 독자는 드물다. <돈 키호테>에서 패배와 승리는 등가이다. 기사로서 돈 키호테의 형상이 망가질수록 그 미학적 가치는 높아진다. 숙박료 지불을 거부한 기사 때문에 종자가 여관집 주인한테 얻어맞고(117) 한뎃잠을 자던 기사가 종자의 배설물을 맡으며 인상을 쓸 때(120) 문학사의 새 페이지가 쓰이는 것이다.

 

돈 키호테가 길을 떠나는 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하지만 그의 존재와 편력은 광기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가 나는 이제 라 만차의 돈 키호테가 아니라 알론소 키하노일세.”(2, 822-823)라고 말하는 순간, 소설은 끝날 수밖에 없다. ‘기사병을 앓는 노망 든 영감에서 선량한 시골 귀족으로 돌아간 그가 기사소설을 모방했던 자신의 지난 삶을 반성한 다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유산 분배이다. 주인이 우울증으로 죽어간다며 원통해했음에도 자기 몫으로 떨어진 유산(비록 애초 약속 받은 섬은 얻지 못했으나!)에 대한 기쁨을 감추지 않는 산초 판사의 모습은 또한 얼마나 근대적인가.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의 마지막 장에 오직 나만을 위해 돈 키호테는 태어났고 나는 그를 위해 태어났다. 그는 행동할 줄 알았고 나는 그것을 적을 줄 알았다.”(2, 829)라고 썼다. 흥미롭게도, ‘행동의 대명사인 돈 키호테는 독서의 쾌감을 만끽하는 여유로운 촌부였던 반면 이 두툼한 책의 저자는 정규 교육도 거의 받지 못했을뿐더러 상이군인, 풀려난 포로, 누명 쓴 세금 징수관 등 여느 모험소설의 주인공 못지않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돈 키호테의 장황한 설교대로(137) ()과 무()는 이토록 상보적이다. 어쩌면 그렇기에 돈 키호테의 가족과 친구가 분서(焚書)’, 이른바 책 화형식에 앞서 진행하는 검열과 심판은 무척 엄격하다.(15장과 6)

 

 

(피카소가 그린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

 

대부분의 책이 불쏘시개 신세로 전락하는데 그 와중에도 <돈 키호테>가 패러디하는 원조 기사소설 <골 지방의 아마디스>, 세르반테스의 첫 소설 <라 갈라테아> 등은 살아남는다. 특히 후자와 그 작가에 대해 신부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보탠다. 실제로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 2권에서 산손 카르라스코가 전해주듯) 쉰 살이 훨씬 넘어 발표한 <돈 키호테>로 대단한 인기를 얻는다. 뿐더러, 당시 에스파냐 문학의 대부분이 번역물이던 상황에서 그는 에스파냐어로 소설을 쓴 첫 번째 작가”(<모범 소설> 서문)였다.

문학사는 그를 1616423일 같은 날 사망한 셰익스피어와 함께 근대문학의 맨 윗자리에 올려놓았다.

 

* 고유명사의 표기는 일반 독자에게 익숙한 격음으로 바꿨음.

 

-- <책&>

 

--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관한 글을 쓰던 중 너무 힘들어서(ㅠ.ㅠ), 그 못지않게 힘들었던 <돈 키호테>에 관한 저 글을 떠올려 봅니다. 힘내자, 라는 의미에서요 ^^:;

--  <돈 키호테>는 도...키의 <백치>에 모종의 전범을 제공한 소설이기도 하고, 소설 자체보다는 인물형으로서 러시아문학에 큰 영향을 끼치고 했고요.(투르게네프의 <햄릿과 돈 키호테>라는 에세이-논문이 유명합니다.)

-- 겸사겸사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의 이미지도 올려봅니다. (김현의 책이 아니라면, 아마도) 제일 처음 읽은, 그래서 애틋한 마음을 갖고 있는 소설 이론서입니다. 93년, 기숙사와 문학회 동아리 방을 오가며 읽었지 싶은데, 이쪽 저쪽 모두 재건축, 재개발되면서 다 사라졌지만, 책에 대한 기억은 '아.스.라.히.'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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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13-06-19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반 뚜르게네프의 햄릿과 돈키호테를 검색하다 들어왔습니다. 혹시 국내에 위의 서지가 아예 번역되어있지 않은가요? 국회도서관에도 도서검색을 해도 자료가 나오지 않네요 돈을 주고서라도 사서 볼 수 있다면 보고싶은데 ㅠㅠ

푸른괭이 2013-06-19 15:06   좋아요 0 | URL
제가 알기론 한국어 번역은 없답니다. 영어 번역은 쉽게 찾을 수 있을 텐데...ㅠ.ㅠ 사실 그 논문(에세이)의 내용 자체는 무척 단순한데(?) 워낙에 희소(?)해서 더 주목 받는 것 같습니다 ^^;;
 

 

아저씨, 다슬기 할매 보러 갈까?”

떡붕어 아저씨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소영이를 바라만 봤다. 소영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밝아졌다.

다슬기 할매도 이제 없구나. 그럼 강 보러 가자, ?”

 

강으로 가는 길에는 호텔과 음식점이 밀집해 있었다. 주차장까지 생겼다. 강가로 내려가는 언덕에는 생전 보지도 못한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그것은 꼭 수백 년 전부터 거기 있었던 양 의기양양, 자신만만했다. 소영이는 바리케이드 쪽으로 다가갔다. 갑자기 안내원이 다가왔다.

 

입장료 내셔야죠.”

그게 뭐야? 여긴 내 놀이터란 말이야. 내 마음대로 들어가도 돼.”

소영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안내원은 황당하다는 듯 말을 끊었다. 말투며 표정은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인데 몸집은 아무래도 중학생은 족히 된 것 같았다.

 

안내원은 떡붕어 아저씨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여기 따님인지 조카인지 하여간 초등학생이면 2500원이고요, 중학생이면 3000원입니다.”

떡붕어 아저씨는 그와 소영이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잠깐만요. 어쩔래? 들어가 볼래?”

미쳤어? 자기 놀이터에 돈 내고 들어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냥 집에 가!”

소영이는 다시 말이 많아졌다.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가고 발음도 또렷해졌다.

 

*

 

불과 이틀을 떠나 있었건만 그들이 발을 내디딘 섬은 완전히 딴판이 돼 있었다. J항 근처에는 거대한 조선소가 세워졌다. 그곳만이 아니었다. 이 섬의 주요 항구에는 모두 조선소가 들어섰다.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그 내부에도 크게 두 계급이 있었다. 하나, 한 시절 나름대로 꿈이 있었을 테지만 인생이 어찌 꼬여 그야말로 막장인 자들. ,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하고 발령을 받은, 삶이 꿈을 배반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는 자들.

 

이것에 맞추어 각기 다른 풍경의 주택가가 형성되었다. 항구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각종 편의시설이 들어왔다. 젊은 부부들이 그곳에 집을 얻었다. 아파트 단지 곳곳에는 정원이 조성되고 아이들은 그 주변의 학원을 오갔다. 조그맣지만 단정한 스포츠센터도 들어와 헬스, 요가, 스쿼시 등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반면, 거기서 멀리 떨어진 곳에는 새로 지은 원룸들이 기왕지사 있던 낡은 집들과 뒤섞이며 얄궂은 모습이 됐다. 그곳이 바로 우물이 있는 학교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우물이 있는 학교 근처에는 새로운 가게들이 많이 생겼다. 그들은 하나 같이 명동을 간판에 내걸고 수식어를 하나씩 붙였다. 명동 세탁소(명품 의류만 취급), 명동 만두분식(최고의 분식점), 명동 천원마트(없는 게 없습니다), 명동 두부(직접 만들어 팝니다), 장보고 명동(명동은 장보고가 접수한다), 명동 반찬(주문 요리 가능), 명동 어묵(직접 만들어 팝니다), 명동 수선(맞춘 옷처럼!), 명동 만화방(동네 유일의 휴식소), 명동 피시방(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피시방) 등등. 실제로 이들의 광고는 영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가령, 명동 세탁소는 진정 브랜드가 있는 의류만 취급했으며 나름 고소득 전문직을 자처하며 주말에는 어김없이 쉬었다. 명동 만두분식은 이 동네 최고의 분식점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유일했기 때문이다. 또 명동 천원마트에는 정말 없는 게 없어, 천원이 넘어가는 물건들도 수두룩했다. 명동 두부는 진정 손 두부로 유명하여, 후줄근한 삼 층짜리 주택을 두부 공장으로 개조하여 운영했다. 그 곁을 지날 때는 노란 콩을 삶거나 두부를 찌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 때문에 그 주변에는 항상 길고양이들이 포진해 있었고, 또 그 때문에 커다랗고 똑똑한 개 한 마리가 파수꾼 노릇을 했다.

 

명동 만화방과 명동 피시방은 정녕 최고의 휴식 공간이어서, 많은 노동자들이 이곳을 저렴한 숙박업소로 이용했다. 김치와 단무지를 곁들인 라면과 김밥도 팔았다. 때문에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할인된 티켓을 끊어놓고 이곳에서 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굶어죽는 일은 없었지만 오락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과로사하는 일은 더러 있었다.

 

인구가 많아지자 쓰레기의 양이 증가했다. 분리수거가 시작되면서 종량제 봉투도 나왔다. 쓰레기를 잘못 버려, 경고장을 받는 사람도 생겨났다. 혹자는 귤껍질을 전부 일반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리는 바람에 벌금 5만원을 내기도 했다. 우물이 있는 학교 옆에서 태어나 95년을 여기서 살아온 김점순 할머니는 울상이 됐다. 숨을 쉴 때마다 매 순간 생겨나는 자잘한 쓰레기를 세 종류로 분류해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내 평생 쓰레기도 맘대로 못 버리는 세상은 처음이야. 너무 오래 살았더니 별 꼴을 다 보네.”

쓰레기 분리수거가 몇 번의 난리보다도 더 큰 사건인 것 같았다.

내 이 놈 때문에 죽겠네, 죽겠어!”

이 말이 씨가 되었다.

 

김점순 할머니는 눈이 다소 멀긴 했지만 여전히 몹시 정정하여 새벽같이 일어나 밭일과 집안일을 했다. 그리고 그 부실한 시력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이 일대를 활보하는 위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업소용 쓰레기봉투에 발이 턱 걸려 그만 앞으로 고꾸라져버렸다. 하필이면 봉투 중간이 찢어져 있었고 그 틈으로 돼지 다리뼈가 삐져나와 있었다. 벽에 부딪친 봉투가 완전히 찢어지면서 쓰레기가 왕창 흘러나왔고, 할머니는 졸지에 쓰레기를 품에 안은 채 엎어진 형국이 됐다.

 

마침 우체부가 그곳을 지나가다가 할머니를 발견하여 병원으로 데려갔다. 다리가 완전히 부러져 버렸다. 그 길로 할머니는 몸져누웠다. 140센티미터의 몸을 빳빳이 세운 채 두 발로 걷는 행복은 영원히 끝난 것이다. 이 마을의 산 역사와 같았던 인물이 사라지자 정녕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 같았다.

 

우체부는 고인의 명복도 빌 겸 업종을 바꾸었다. 이제 그는 새벽 일찍 쓰레기봉투들을 거둬 트럭에 싣고 날랐다. 우편물은 점점 줄었지만 쓰레기의 양은 점점 더 늘어갔다. 그 와중에도 성이 예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성을 떠나 근처의 원룸이나 항구 근처의 아파트로 옮겨갔다. 덕택에 성에는 빈 방이 많아졌다. 그런데도 우편물이 끊이지 않았다. 우체부도 성에 들르는 일을 중단할 수 없었다. 수신인이 사라진 우편물을 게으른 문지기는 성 안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그것이 쓰레기가 될 무렵이면 우체부, 아니 청소부가 와서 그것을 싹 거두어갔다.

 

우물이 있는 학교에도 변화가 왔다.

새로 부임한 교장은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개혁 의지를 천명했다. 하루 25시간 근무, 8일제 근무는 그가 내세운 위대한 철칙이었다. “하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불가능은 없다”,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는 그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었다. 이른바 조례는 아침, 점심, 저녁 세 번에 걸쳐 있었고, 그때마다 교장은 저런 말을 남발하며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아이들은 열중쉬어도 아닌 차렷 자세로 꼿꼿이 서서 그 설교를 들어야 했다. 지금껏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안 되면 말자”, “불가능은 있다”, “꿈은 꾸는 것이 중요하다”(“고로 잠은 많이 자야한다”) 등을 무의식적인 가치관으로 익혀온 아이들로서는 여간 큰 혼란이 아니었다.

 

공문 형식으로 연일 쏟아지는 각종 지침들은 교사와 학생을 죄다 지치게 만들었다. 다들 새벽별을 보고 학교에 나와 저녁별을 보며 집으로 돌아갔다. 특수교사는 성 안의 농장을 가꾸며 동화를 만드는 일을 할 수 없었고, 젊은 여교사는 인터넷 쇼핑을 할 수 없었다. 중년 교사는 이듬해 신춘문예에 응모할 소설을 쓰다가, 또 노년 교사는 뭍에 사는 손자에게 편지를 쓰다가 들켜 교장에게 호된 징계를 먹었다. 이 모든 것이 학생들의 학력 증진이라는 숭고한 목표 달성에 저해 요소라는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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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인이 있던 날 성탑 주위를 두르고 있던 유리벽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찬바람이 몰아쳤고 꽃밭의 꽃들이 활짝 핀 채로 얼어붙었다. 사람들은 온 몸을 꽁꽁 싸맨 채로 밖으로 나왔다. 문지기는 우체부의 도움을 받아 노파의 관을 화장터로 가져갔다. 그곳은 성에서 좀 멀리 떨어진 숲속, 언젠가 우체부가 장작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벤 곳이었다. 우체부가 도끼를 휘둘렀다. 하지만 나무의 밑동이 벌어지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결국 은학이가 도끼를 받아 쥐었다. 겨울을 나는 동안 훌쩍 자라 이제는 아버지보다 더 컸다. 아버지가 한 쪽에 쭈그리고 앉아 어깨를 주무르는 동안 아들은 열심히 도끼질을 했다. 한참 뒤에야 나무가 거대한 진동을 내며 머리통을, 곧 이어 온 몸을 땅바닥에 쿵, 찍었다. 떡붕어 아저씨, 문지기, 한숨 돌린 우체부가 모두 달려들었다. 도끼질하는 소리가 숲 가득 울려 퍼졌다. 굵은 통나무가 장작으로 변하기까지 반나절은 족히 걸렸다.

 

드디어, 노파의 나무관이 시뻘건 장작불 위에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길을 보자 사람들은 허기를 느꼈다. 마녀는 성에서 챙겨온 각종 씨앗을 순식간에 키워 밥상을 차렸다. 장작과 노파의 관이 불에 녹아가며 뿜어내는 열기 때문에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밥을 먹는 동안 관이 다 녹아내리고 노파의 시체가 타 들어갔다. 그 곁에서 사람들은 디저트를 먹었다. 각기 다른 이유로 눈물을 흘렸고, 각기 디저트의 종류도 달랐다. 누구는 블랙커피에 치즈 케이크, 누구는 레몬과 설탕을 넣은 홍차에 초코쿠키를 먹었다. 누구는 그냥 카페라테만, 누구는 녹차를 마셨다. 하지만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입안으론 따뜻하고 달달한 먹을거리가 들어간다는 점에서는 똑같았다. 소영이는 죽은 할머니 생각도 나고 하여 그 누구보다도 많이 울었다. 때문에 배도 많이 고파져, 누구보다도 더 많이 먹었다. 다들 포만감에 젖었을 무렵 관이 거의 다 탔다. 우체부가 하얀 재와 굵직한 뼈를 긁어모아, 따로 갈지 않고 곧바로 유골함에 담았다. 그러곤 문지기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는 문지기는 유골함을 받아 품에 안았다. 금세 또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그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입에서는 진한 커피와 시나몬 향이 풍겨났다.

 

노파의 유골함은 성 바로 곁의 나무 밑에 묻혔다. 나무에는 노파의 이름과 생몰년도가 새겨졌다. 소영이는 떡붕어 아저씨의 등에 업힌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

 

성탑 노파 덕분에 봄이 왔다. 노파의 몸의 잔해를 빨아들이며 나무는 싹을 틔웠다. 그 기운이 주변으로 번져갔다. 연못을 덮었던 두툼한 얼음이 녹았다.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활개 치는 모습도 보였다. 순식간에 얼어붙었던 꽃들은 촉촉하고 검은 흙과 하나가 되었다가, 저절로 자연의 꽃밭을 만들었다. 쑥과 냉이와 씀바귀가 돋아나고 할미꽃, 제비꽃, 꽃다지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질경이와 토끼풀도 복작대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연못에서 튀어나온 개구리들이 산책을 즐겼다. 메뚜기와 방아깨비도 이 풀밭 겸 꽃밭의 어엿한 주인이었다. 잡초를 헤집으며 가늘고 굵은 뱀들이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우체부는 하루에도 두 번씩, 어떨 때는 세 번씩 성을 다녀갔다. 종잇장이 날아다녔고 종잇장 곳곳에 붉은 도장이 찍혔다. 성에 대대적인 봄맞이가 시작된 것이다.

 

모든 방에 방문과 창문이 다 열리고 해묵은 먼지들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문지기는 전에 없이 활기를 띠었다. 그는 나가는 사람을 배웅하고 들어오는 사람을 마중했다.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근육 하나 없는 여린 몸을 흐느적대며 이삿짐을 날라주었다. 사람과 가구가 빠져나간 빈 방을 완상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취미였다. 이 일이 끝나면 방안에 짙은 자줏빛 팥을 굵은 소금과 함께 팍팍 뿌렸다. 이때만은 어디서 솟는지 무척이나 힘이 넘쳐,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삼손 같았다. 넋 나간 듯 흐리멍덩한 눈에서도 웬일로 광채가 번득였다. 팥알과 소금이 널브러져 있는 방을 보며 뭔가 비장한 각오를 다지는 양 큰 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 다음에는 제 손으로 그것을 쓸어 쓰레받기에 담았다. 이 의식이 끝나면 역시나 제 손으로 도배를 하고 장판을 새로 깔았다. 방문, 욕실 문, 싱크대 서랍의 손잡이, 수도 등도 한 번씩 살펴보았다. 하지만 늘 관조하듯, 음미하듯 봤기 때문에 결함이 발견되는 일은 잘 없었다. 떡붕어 아저씨도 팔을 걷어붙이고 그를 도왔다. 소영이도 신이 나 짐을 날랐다.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성탑을 생각하지 않았다. 머리채 계단은 주인을 잃은 채 성벽 한 쪽에 매달려 있었다. 소영이는 매일 그곳에 들러 머리채 계단을 매만졌다. 그때마다 머리채의 끄트머리가 조금씩 마모되어갔다. 그것이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사라진 날, 소영이는 떡붕어 아저씨를 졸랐다. 구덩이 오막살이에 데려달라는 것이었다.

 

안 돼.”

?”

처음부터 안 된다고 했잖아.”

아저씨가 싫으면 관 둬! 이제는 나 혼자서도 갈 수 있어. , 이렇게 컸는걸.”

소영이는 두 손을 허리에 대고 몸을 쭉 펴며 자신감을 보였다.

휴우, 알았다. 하지만 울면 안 돼.”

내가 아직도 어린애인 줄 알아?”

 

다음날 아침 일찍, 둘은 먼 길을 떠났다. 소영이는 인생에서 두 번째로 배를 탔다. 이 섬에 들어올 때만 해도 그토록 까마득한 길이었는데, 이제는 풋잠을 즐길 겨를도 없이 P항에 도착해버렸다.

아저씨 뱃길이 달라졌어? 아님 배가 좋아진 거야?”

배는 더 낡았는걸.”

떡붕어 아저씨의 심드렁한 대답에 소영이는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열다섯 살이 된 소녀에겐 제법 잘 어울렸다.

 

둘은 P시의 항구 근처 해산물 시장을 지나갔다. 노점상이 즐비했던 곳에는 거대한 유리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시외버스터미널, 아니 고속버스터미널도 예전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매캐하고 역겨운 버스 냄새도, 삶은 계란과 귤이 담긴 그물망도 여전했지만 사람들의 옷차림과 건물의 모양새는 영 딴판이었다. 소영이도 이제는 멀미약을 먹지 않아도 됐다. 고속버스는 새로 닦은 도로를 유유자적하게 달렸다.

 

K군의 읍내.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유쾌한 오후였다. 둘은 시내버스터미널로 가기 위해 장터를 지나갔다. 사람들의 얼굴은 여전히 시커먼 구릿빛이었지만 어디에도 죽은 쥐의 꼬리를 빙빙 돌리며 깔깔대던 소년은 없었다. 육류는 모두 냉장고에 보관, 전시되어 있었다. 거대한 건물로 변한 장터에 시들어가는 과일과 야채를 파는 노점상이 있을 리도 없었다.

 

시내버스에 오른 뒤에도 소영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버스는 더 이상 덜컹거리지 않았다. 버스도 좋아졌지만 신작로와 시멘트 길 대신 아스팔트길이 생긴 탓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천의 풍경만은 오래 전 소영이의 뇌리에 새겨진 모습 그대로였다. 버스가 정차했다. 예전처럼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 아니라 바로 마을 어귀였다. 하지만 소영이의 구덩이 오막살이가 있던 마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저씨, 저건 뭐야?”

개발을 하는 거야.”

 

소영이 앞에는 움푹 파인 넓은 구덩이가 있고 그 위에 두툼한 철근이 격자 모양으로 깔려 있었다. 목이 긴 장화를 신은 인부들이 거기에 시멘트를 붓고 있었다. 일이 거의 다 끝나자 그 시멘트 늪을 힘겹게 빠져 나왔다.

 

아저씨, 여기야, 그치?”

 

떡붕어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옆의 건물까지 마저 허물어 부지를 확장한 것이 보였다. 구덩이 오막살이는 저 시멘트 늪의 5분의 1도 안 됐을 것이다. 저 넓은 늪 어딘가에 구덩이 오막살이의 꽃밭이 있으리라. 또 그 어딘가에 할머니가 묻혀 있으리라. 그러니까 그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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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악마의 존재를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다

 

파우스트가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외치자 메피스토펠레스는 그의 영혼을 접수하기 위해 핏방울 계약서를 챙긴다. 하지만 그때 천사들이 등장하여 야비하게(!) 악마의 노획물을 채간다. 악마의 몸은 욥의 몸처럼 종양과 옴 덩어리로 변하고, 파우스트는 천국으로 인도된다. 전형적인 권선징악에 덧붙여 도저하게 기독교적인 결말인데, 이는 작품의 도입부에서부터 이미 명시됐던 것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처음 등장할 때 자신을 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창조해내는 힘의 일부분”(1, 80)이라고 소개한다. “소생은 항상 부정(否定)을 일삼는 정령입니다! / () / 당신들이 죄라느니, 파괴라느니, / 요컨대 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 제 원래의 본성이랍니다.”(1, 80) , 악마라는 신분상 부정(否定), , 파괴 등 악의 영역을 담당하나 그 역시 궁극적으로는 신에게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구약의 욥기(16-12)를 괴테 나름으로 다시 풀어쓴 천상의 서곡은 대단히 노골적이다.

 

 

(이미지 검색하다 보니 이런 욥도 있네요. 여하튼 파우스트는 괴테 판 욥이죠.) 

 

 

메피스토펠레스가 신(주님) 앞에 나타나 불만을 토로하며 괜히 시비를 건다. 그러자 신은 파우스트를 가리키며 나의 종이니라!”(1, 23)라며 자랑한다. 그를 유혹하여 타락시키겠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호언장담에도 여유만만하게 응수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1, 24) 얼마든지 건드려보라는 것이다.

 

그의 영혼을 그 근원으로부터 끌어내어, / 만일 그것을 붙잡을 수 있다면, / 어디 너의 길로 유혹하여 이끌어보려무나 / 하지만 언젠가는 부끄러운 얼굴로 나타나 이렇게 고백하게 되리라. / 착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잘 알고 있더군요, 라고.”(1, 24)

 

요컨대 <파우스트>에서 악마의 장난과 인간의 방황은 신의 영역에 귀속되며 죄악 역시 신의 뜻에 따라 구원을 담보한다. 신과 계약을 맺고 떠나는 메피스토펠레스도 신의 전지전능함은 물론 무한한 포용력과 사랑에 탄복한다. “때때로 나는 저 노인네를 만나는 게 즐거워. / 그래서 사이가 나빠지지 않도록 조심을 하지. / 위대한 주님치곤 너무 인정이 많아. / 나 같은 악마까지도 인간적으로 대해주니 말이야.”(1, 25) 과연 파우스트의 시험은 메피스토펠레스의 패배로 끝나고 구원과 부활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괴테의 기독교적 낙관론이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실제로 세계와 인간의 모든 모순이 화해와 조화로 수렴된다는 믿음만큼 위안을 주는 것은 없다. 그러나 그런 믿음을 공유할 수 없다면?

 

 

(괴테 생전에 발간된 <파우스트> 표지, 라는군요.)

 

7. 인간 -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

 

파우스트의 몽상의 핵심은 신이 되고 싶은 욕망이다. 그의 절망은 아무리 버둥거려본들 결국엔 신이 될 수 없다는 깨달음의 산물이다.(“나는 신을 닮지 않았다! 그것을 뼈저리게 느낀다.”(1, 48)) 이런 딜레마가 생기는 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이중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악마와 계약을 맺기 전, 파우스트는 바그너를 앞에 두고 이렇게 말한다.

 

내 가슴 속엔 아아!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서 / 하나가 다른 하나와 떨어지려고 하네. / 하나는 음탕한 애욕에 빠져 / 현세에 매달려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고, / 다른 하나는 과감히 세속의 티끌을 떠나 / 숭고한 선인들의 영역에 오르려고 하네.”(1, 69)

 

상승의 욕망과 추락의 욕망, 신의 얼굴과 악마의 얼굴이 한 인간의 내부에 공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노력하는 만큼 방황하고 영원히 뭔가를 갈구하며 그것을 손에 넣고자 애쓴다.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2, 381) 바로 이것이 두 개의 영혼의 투쟁으로 인해 고뇌하는 인간의 아름다운 실존이며, 또 파우스트가 구원받은 근거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 그가 하느님의 종이길 거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 신이 될 수 없다는 절망에 빠져 악마와 결탁하기까지 했으나 그럼에도 그는 반항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삶과 세계 앞에서 경외감을 가졌다(“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대체로 괴테에게 있어서 신의 존재론적 지위는 절대적이다. 그의 자서전 <시와 진실>4부 제목대로 신을 제외하고는 신에 맞설 자가 없다.”

 

 

 

 

 

 

 

 

(<시와 진실>이 <파우스트>보다 훨씬 쉬웠던(?) 것 같습니다. 에커만이 쓴 책도 읽어볼 만 해요. '인간' 괴테의 그림을 잡는 데 좀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하지만 조만간 신의 절대성에 회의를 품거나 심지어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반항아들이 등장할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속한 세계는 고답적인 상징과 알레고리가 아니라 적나라한 속악이 판치는 날 것의 현실이다. 그때도 온갖 신화와 알레고리와 천사의 합창을 들으며 구원을 외칠 수 있을까. 결국, 인간과 세계의 모든 모순과 갈등을 신에게로 환원시킬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출구를 찾을 것인가, 라는 문제 앞에서 선택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열렬한 반항은 어딘가 위태롭고 그래서 매혹적이지만 반드시 파멸로 귀결된다(가령 크리스토퍼 말로의 파우스트가 그러하다). 반면 경건한 순종은 구원과 부활을 담보하지만 지루하고 밍밍하다.

 

 

 

 

 

 

 

(크리스토퍼 말로의 <파우스투스 박사>도, 고맙게도(!), 번역돼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분명한 것은 인간은 두 개의 영혼을 지닌 존재이며 따라서 모종의 해법이, 적어도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웅장하고 대가적인 필치로 포착한 핵심이다. 강조하건대, 괴테는 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괴테의 생애와 파우스트의 생애가 함께 어우러져 미묘한 울림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 인물과 작가의 죽음 역시 공명한다. 괴테가 파우스트에게 반쯤 억지로나마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외칠 수 있는 순간을 선사하고 또 그를 구원한 것은 결국, 스스로에게 선사한 마지막 선물이 아니었을까. 그가 임종의 침상에서 외쳤다는 한마디처럼. “좀 더 많은 빛을!”

 

 

**

 

-- "열렬한 반항은 어딘가 위태롭고 그래서 매혹적이지만 반드시 파멸로 귀결된다(...) 반면 경건한 순종은 구원과 부활을 담보하지만 지루하고 밍밍하다"라는 문장을 쓸 때 염두에 둔 작가는 물론 도..키이고, 그리고 이 사람입니다! ^^; <책세상>판 전집을 몽땅 갖고 있는데(보고만 있어서 흐뭇하다는 ㅋㅋ), 저작권 풀리면서 계속 많이 나오고 있네요, 좋은 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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