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콧물을 훌쩍이던 아이가 잠들자 조용히 방을 나와 냉장고에서 포도를 꺼냈다

어둠 속에서 포도알이 그렁그렁, 혓바닥 위에서 동글동글, 위장 안에서 사르르

저녁밥 먹고 깜박한 후식을 먹자 온 몸으로, 신경 끝까지 포도당이 퍼졌다 

꿀잠을 자리라는 단꿈에 젖고 내일 아침을 맞이할 용기를 얻었다 포도알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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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나방의 행복한 한살이

 

 

 

 

안녕하세요, 누에나방이랍니다!

저는 연수네 외갓집 안방에서 태어났어요

봄여름 연한 뽕잎 먹고 무럭무럭 5령 애벌레 되어 

내 몸에서 뽑아낸 하얀 실로 고치를 만들었어요

명주실이 될 것이냐, 누에나방이 될 것이냐?

운명의 간택 앞에 가슴이 두근거렸지요

 

어느 날 하얀 알을 깨고 나오는 저를 발견했어요 

뽀얀 분가루 묻은 축촉한 날개를 말리고 자, 날아볼까!

아, 색시야, 너는 못 날아, 날지 않아도 돼!

멋진 서방님이 나를 향해 걸어오더라고요

짝짓기를 끝낸 다음 오 백개가 넘는 알을 낳았어요 

낳기만 하면 끝, 돌볼 필요도 없답니다

 

아기들아, 귀여운 누에 되어 맛있는 뽕잎을 잔뜩 먹으렴

그리고 비단결보다 고운 비단 속에 영원히 살아 있으렴  

엄마는 그럼 이만, 왔던 곳으로 다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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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나무의 갸륵함

 

 

 

 

 

봄에는 뽕잎순을 나물로 무쳐 먹고 여름에는 자줏빛 감청빛 오디를 따 먹었다 

 

뽕잎 갉아 먹는 검은 꼬물이들이 점점 하얗고 통통해졌다가

앗, 어디로 갔지? 독한 회의에 사로잡혀 잠들었다 눈을 뜨면 

앙상한 나뭇가지마다 하얀 고치들이 전설처럼 매달려 있더라 

누에야, 뭐하니? 아직도 자고 있니? 

 

가을이면 누에들은 다섯번째 꿈을 꾸었고 어른들은 쭈글쭈글 번데기를 먹었다 

 


 

*

 

오디가 새카만 뽕나무를 사랑했다. 박목월.

 

 

https://m.blog.naver.com/007crr/80190028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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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의 블루베리

 

 

 

 

 

나는 올해도 가을을 보고 있다

 

*

 

원래 나는 먼 고향으로 떠날 계획이었다. 갑자기 두개골을 뚫고 뇌수에서 빨간 심장 하나가 태어났다. 저 먼 고향에는 나의 백골을 몰래 떠나 보냈다. 곧 따라갈게, 딱 하루만이야. 그 약속은 십년째 매일 지키지 못하고 있다.

 

*

 

늦가을 블루베리 열매는 감청색이다

맛은 결코 달지 않다, 시큼하다

가지는 갈색, 나뭇잎은 빨간색이다

심장 아기를 더 빨갛게 만들고 싶어

소의 선혈로 콩나물 선짓국을 끓였다

아기의 뇌수를 더 노랗게 만들고 싶어

타조알을 깨지 않고 노른자만 쏙 꺼냈다

 

*

 

나는 올해도 가을을 보고 있고

블루베리와 선짓국과 타조알을 먹고 

내년에도 봄을 볼 것이다, 보고 싶다

저 먼 고향이 아닌 여기, 이 고향에서

나의 심장 아기와 함께

저 먼 고향에는 나의 백골이 몰래 

 

 

___

 

- 지난 주 한 학생의 '미니픽션' <늦가을의 블루베리>를 읽고...

- 윤동주, <또 다른 고향>. 좀 전에 '백골'이 떠올라서 '분신'을 대체.

- 며칠째 윗층 어르신이 보이지 않고 이상 기류(?)가 감도는 것 같아, 떠오른 문장. 아, 할아버지가 올 가을을 못 보시는구나, 라는.  나는 7시부터 막 졸리고 지금은 거의 비몽사몽, 배도 고파오지만(허기인지 통증인지) 참으려고 한다. 나 역시 코로나 확찐자, 체중이 1-2킬로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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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

 

 

 

꼬리라면 얌전히 붙어라도 있지

마지못해 따라오기라도 하지

 

개구쟁이 내 동생 곱슬머리 내 동생

두 살이나 어린 녀석이 말도 안 듣고

또 어디로 튈까 축구공 같이 

 

게 섰거라, 요 녀석!

 

 

 

 

*

 

코로나 때문에 작년 같지는 않(았)지만, 등하굣길에 여전히 형제자매들을 본다. 1-2살 터울은 같이 다니는 경우가 많다. 성격의 차이도 있겠지만 보통 누나나 언니는 동생을 잘 챙기지만 오빠나 형은, 넘 귀여운데^^, 온 얼굴에, 온 몸에 불만이 가득하다. 마지못해 동생이랑 학교 가고 마지못해 같이 집에 가고. "빨리 안 와!" "야, 씨!" 한 패 퍽, 툭. 힝 ㅠㅠ 까불다가 형한테 맞았어 ㅠㅠ 아이 엄마 입장에서는 사실 저렇게 두살 안팎 터울로 두 아이를(기왕이면 누나 남동생이 좋지만 아무래도 좋아^^;) 키우는 엄마가 제일 부럽다, 거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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