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께끼 대저택 풀빛 그림 아이 18
마이클 갈랜드 글 그림, 김경연 옮김 / 풀빛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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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30개월인 딸아이에게 i spy류의 책은 아직 어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늬가 살아나요" 마지막 장에 대한 아이의 엄청난 집착에, 이제 슬슬 관련한 책을 찾아볼까 생각해보았다. 그러던중 우연히 선물받게 된 이 책.

컴퓨터 그래픽을 썩 좋아하지 않는 나로선 그림이 차갑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축 늘어진 눈썹, 두리번거리는 순한 눈동자, 뭘 찾아야하나 망설이는 약간은 멍청해보이는 표정, 멍하게 웃는 입술! 토미의 사랑스러운 얼굴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벽지와 바닥의 다채로운 칼라와 화려한 문양이라니. 작가의 실험정신은 충분히 성공했다.

찾기놀이만 즐길 수 있는 게 아니다. 곳곳에 숨어있는 동물을 찾아낼 때마다 그 동물이 거기서 뭘 하는지 죄다 이야기를 꾸며줘야 한다. 책속에 숨어있는 동물만 406마리니, 두쪽에 걸쳐 그림이 펼쳐지는 온실과 연못에 이를 때면 목소리가 갈라질 지경이다.

그뿐인가. 알파벳도 찾아야하고, 용이며 인어, 유니콘도 숨어있다. 심지어 아일랜드 말, 노르웨이 말, 이탈리아 말, 스페인 말, 프랑스 말, 라틴 말, 히브리 말, 독일 말까지 찾아야 하니 부모 입장엔 스트레스가 좀 쌓인다.

그렇다면 아이는? 숫자대로 모두 찾아야 한다는 생각도 없고, 모든 동물과 글자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도 없으니 제가 좋아하는 개구리와 쥐와 나비만 실컷 찾으면 그만이다. 게다가 딱 1권만 더 읽어줄께 라고 다짐할 때면 이 책을 빼오니, 엄마와 함께 책읽는 시간을 길게 늘일 수 있다는 것 역시 영악하게 파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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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4-08-06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집은 아예 도표를 그려서 찾은 곤충, 동물의 숫자랑 글자를 어디에서 찾았는지 기록해 가면서 찾아 보았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도 다 못 찾은듯...^^;;

soyo12 2004-08-06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요즘 아이 키우려면 정말 엄청난 지적 소양과 인내심이 요구되는군요.
보통 일이 아니네요.
그런데 숨어있는 동물 찾는 거 재미있어요?
저도 한번 해보고 싶은걸요. ^.~

내가없는 이 안 2004-08-07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딱 1권만 더 읽어줄게, 저란 비슷한 대사를 하십니다. 허허... 전 I spy류의 책은 제가 별로 즐기지 않아서... 워낙 인내심이 없는 게 이런 데서 티가 나는가 봅니다. ^^

비발~* 2004-08-10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숫자에 매달리는 건 어른들이고, 아이들은 찾는 행위 자체를 즐기고~^^ 그나저나 엄마들이 다 지쳐버리니 우얀대요?ㅜㅜ;;

수수께끼 2004-11-03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책 제목이 잘못되었습니다. 수수께끼는 대저택이 없으니까요.....
 
내 다리는 휠체어 저학년을 위한 꼬마도서관 20
프란츠 요제프 후아이니크 지음, 베레나 발하우스 그림, 김경연 옮김 / 주니어김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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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맞벌이부부가 아침 저녁으로 아이를 놀이방에 맡기다 보면 동네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이 아는 척 한다. 한없이 부드럽고 상냥한 표정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 불쌍해라. 어린 애가 아침 저녁으로 고생이네." 그럴 때마다 울컥거리는 심정을 가누지 못하면서 나 역시 비슷한 실수를 한 적이 있다.

앞에 걷던 시각장애인의 의사를 묻지 않고 덥석 팔짱을 낀 적이 있었다. 그 아저씨는 혼자서 집 근처 지하철 타고 내리는 것쯤은 할 수 있다고, 도와주지 말라고 버럭 역정을 내셨다. 무안하여 얼른 사과를 드리는데, 아저씨가 목소리를 깔며 지팡이로 땅을 두어번 치셨다. "정말 미안한가? 뭐가 미안한지 정말 알아?"

그제서야 내가 그분을 '마냥' 불쌍히 여기는 잘못을 저질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과연 우리중 타인의 삶을 송두리째 불쌍하다고 재단할 권능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저 다른 삶이라고 인정했을 때 훨씬 더 다양한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마르기트의 다리는 휠체어일 뿐이다. 보도에 턱이 있을 경우 불편한 것은 마르기트 뿐이 아니다. 유모차를 끄는 아기엄마도,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눈을 가릴 정도로 짐을 잔뜩 든 사람도 불편하다. 하기에 모두를 위해 턱을 없애야 하는 것이다. 세상엔 또한 뚱뚱한 사람도 있고, 빼빼 마른 사람도 있다. 운동이나 식이요법으로 체중을 변화시킬 수는 있지만, 체질적 요인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체중으로 인해 내 인생의 무게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므로, '지기는 뚱뚱해서 불쌍하다' 역시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마르기트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가 있는 것처럼 나 역시 도움을 받으며 사는 사회적 존재이다. 우리가 서로를 그저 별난 존재로 존중할 때, 세상은 더 조화로와질 것이고, 나 역시 보다 많이 신세지고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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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연엉가 2004-08-02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장애인의 날인가? 그땐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우릴 불쌍하게 바라보지 말라며 그저 조금 불편할 뿐이다는 말을요......그때 많이 느꼈어요. 이 책을 읽고 저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있네요.

sweetmagic 2004-08-02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그들을 불쌍하게 보는 자신의 시선이 불쌍한 거죠.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눈 왜 달고 다니는 지 몰라요. 차라리 보지를 말지 !!!
추천 ~!!!!!!!

(앗 흥분 했다 )
 
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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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 45분...
칼퇴근을 했는데도 놀이방에 도착해보면 벌써 이 시간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집에 가고, 마로 외에는 거의 없다. 가슴이 뭉클해져 와락 딸을 껴안는다. 더 자겠다는 애를 강제로 깨운 일, 기웃기웃 마냥 샛길로만 빠지려는 딸을 독하게 혼내며 잡아끌고 놀이방에 간 일 등 아침의 소동이 미안해, 마로가 하자는대로 느긋이 걷는다.

딸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이뻐라 이뻐라 쓰다듬어준다. "개미다 개미" 손뼉치며, 그 집까지 따라가 보기도 하고, "해바라기 꽃 있어요" 두 손 모아 감탄한다.
나는 자동차마다 멈춰서서 번호판 숫자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는 딸아이를 칭찬해주기도 하고, 떡집, 책방, 수퍼, 인테리어 가게 모두 들러보는 아이따라 덩달아 인사드린다. 그렇게 나는 딸아이로부터 느림의 덕을 배운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처음 읽었을 때는 정치적 주장으로만 받아들였다. 하루 4시간 노동이 과연 쟁취가능한 목표인가, 공동체적 건축이 실현되려면 사회제도가 어떻게 개혁되어야 하는가, 강력한 달러를 비판하며 차라리 금본위제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는 지금의 통화제도 비판에 비해, 당시 러셀의 금본위제 비판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인가.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단정한 표지가 마음에 들어 조심스레 다뤘던 책인데, 아끼는 만큼 여러 차례 손이 가니 어느새 손때와 구김으로 초라해져버렸다. 낡아가는 책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나는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아 키우고 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책에서 읽어지는 것은 삶을 보는 시각이다. 러셀은 남보다 걸음마가 느렸던 아이의 보폭을 따라 걸어보라며 권유한다. 아이의 속도, 아이의 눈높이에서 세상은 내게 더 많은 속내를 보여준다. 나는 이것이 키다리아저씨의 쥬디 애보트가 말했던 인생의 행복이 아닌가 새삼 감탄한다.

때로는 단지 나의 예각이 무뎌진 것은 아닌가 불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한숨돌리는 시간이야말로 만인의 여가를 위해 싸우는 힘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휴식의 맛을 모르면, 휴식을 위해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게으름을 찬양하기 위해 바지런해야 하는 오늘은 역설일 수도 있겠지만, 책 속에 꽂아둔 딸아이와 내 얼굴이 담긴 책갈피는 러셀의 지혜만큼이나 내게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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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짱 2004-08-02 0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체유심종. 모든 것은 사물을 관조하는 마음에 있다. 그런 말씀인가봐요.^^ 생각을 많이 하게 해주는 글이네요. 마로라는 이름도 참 귀엽네요. 제가 좋아하는 만화에도 마로라는 귀여운 꼬맹이가 등장하는데...('10대에 하지 않으면 안될 50가지 특명'이라는 만화)

마태우스 2004-08-02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전에 읽었었는데요 이사 과정에서 잃어버린 아픔이... 너무 멋진 리뷰라 추천하고 가요.

sweetmagic 2004-08-02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천요 ~ 전 아직 이거 못 읽었는데 꼭 읽을 거예요 ~ ^^

내가없는 이 안 2004-08-02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로를 와락 껴안으셨단 부분에서 저 역시 마로를 안아주고 싶군요... 가끔 자신의 예각이 무텨지는 걸 느껴진다면 그냥 받아들이는 것도 삶이겠지요... 삶에 대한 님의 열심, 배우고 갑니다. ^^

마냐 2004-08-03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러셀이 저런 책도 썼습니까? 정말 제목부터 끝내줍니다. 이안님 말씀처럼, 님도 참 열씨미 사십니다그려...^^

hanicare 2004-08-18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 '게으름에 대한 면피'로 제목을 속으로 바꿔 달며 혼자 흐뭇하게 보던 책이었지요.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수학에 대한 사랑으로 참았다는 러셀경이니 뭐 그리 게으르기야 했겠습니까만 유쾌하게 읽었던 기억과 역시 언급하신 쥬디 애보트양의 그 멘트.저도 그 멘트가 아주 인상적이었답니다.잘 읽고 갑니다.
 
소중한 나의 몸 엄마와 함께 보는 성교육 그림책 3
정지영, 정혜영 글.그림 / 비룡소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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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를 둔 엄마로서 흉흉한 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그럴 때면 애 아빠는 검도며, 태권도며, 합기도며, 적어도 합이 10단 이상을 만들어야겠다고 3살 짜리 붙잡아 발차기 연습을 시킵니다. 거울을 붙잡고 옆차기를 연습하는 딸아이의 모습은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한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 책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딸을 위해 사야겠다 마음먹고 보관함에 넣어둔 건 돌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너무 이른 게 아닌가 싶어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가 급작스레 구매한 건 얼마전 모 서재에서 본 이야기 때문이었습니다. 너무나 흔한 어린이 성폭력 문제에 우리 아이 또한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위기의식에 새삼 마음이 급해진 것이죠.

그러고 보면 학교 다닐 때 어린이 성폭력 통계조사를 하며 끔찍해했던 일을 참 오래 망각하고 살았던 거 같습니다. 여대였기 때문일까요? 정도의 차이가 있었으나 한 과의 1/3이 어린이 성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중 일부는 상습적인 희롱을 당했으며, 강간의 경험을 털어놓은 친구도 1명 있었습니다.

특히 후자의 친구는... 6살 때 자신이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대학에 들어와서야 자각을 했다고 합니다. 여중에서 받은 성교육은 출산비디오를 본 게 다였고, 여고의 성교육 시간은 입시교육에 밀려 혼자 밤늦게 다니지 말라는 등의 안전지침 복사물 1장 받은 게 다였다고 했습니다. 대학에 와서 처음으로 이성을 사귀게 되면서... 이상하게 불유쾌하고 아팠던 기억의 진실을 깨닫고... 그게 원인이 되어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지금은 상담을 받고 있다고 털어놓는 친구를 부둥켜안고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때는 내 평생을 성폭력과 매춘 문제에 바쳐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껏 내가 한 일이란 성희롱 예방교육 강좌 하나 제작한 게 다이니... 딸에게 부끄러울 뿐입니다.

이 책이 널리 읽힌다 해서 어린이 성폭력이 저절로 예방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딸아이가 자기 몸이 얼마나 소중한 지 알고, 나쁜 어른을 나쁘다라고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른이건 아이건 성폭력의 희생자가 자신을 자학하지 않고, 누구의 잘못인지를 명백히 인식하는 게 성폭력 대처의 첫출발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욕심을 부린다면, 잘못한 사람이 잘못한 것임을 일러줄 수 있도록 용감하게 맞설 수 있는 엄마와 딸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이 책에  무척이나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소중한 나의 몸에 대한 은폐와 부정은 성기에 대한 그릇된 지칭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어린이 성폭력 예방교육 지침서로 기획되어 나왔으면서도, '고추'와 '잠지'라는 표현을 태연히 쓰는 게 속이 상합니다. '보지'와 '자지'를 금기시할수록 성은 어둡고 비틀어진 것이 됩니다. 가능하면 출판사에서 새로 책을 펴낼 때 교정해주었으면 좋겠고, 하다못해 이 책을 사보시는 엄마, 아빠들이 견출지라도 붙여 '보지' '자지'로 수정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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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6-08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 마지막 말씀에 특히 더 동의합니다!

2004-06-20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6-20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7-06 2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등어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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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를 읽고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읽고선 표어로 삼았었다. 그리고... 고등어를 읽은 뒤... 공지영에게 실망했고, 인간에 대한 예의는... 한때 좋아했던 작가에 대한 예의로 읽었다. 결국 착한 여자를 마지막으로... 그녀의 책을 더 이상 사들이지 않게 되었고, 그녀의 책들은 책장 위로 분류되어 먼지만 쌓여갔다.

얼마전 더 이상 읽지 않는 책, 다시 읽지 않을 책을 골라 방출을 하면서, 문득 고등어를 다시 집어들었다. 아는 이에게 줄 책을 싸면서 가방이 무거워 읽던 책을 집에 놔두고 왔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매끄러운 문체를 따라 거침없이 읽다보니 어느새 마지막 책장을 덮게 되었고, 난 또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386세대의 일원임을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상기시키며, 역사는 끝났는가 끊임없이 자학하면서, 너희들도 변절했기에 아무도 날 손가락질할 수 없다고 항변하며, 어쨌든 이후 세대에 비해 자기는 정의로운 한때를 살았다고 위안한다.

오늘의 우리가 있기 위해 386세대의 피땀어린 희생과 눈물이 있었음을 알기에 그들을 존경하는 사람으로써, 공지영의 자위가 모독으로 여겨진다. 아니, 그녀의 눈에는 유행따라 흘러가는 90년대 이후 학번으로 비춰지는 게 더 치욕스럽다. 그녀는 진정 기득권자들이 말하듯 세상은 이미 변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더 이상 투쟁의 80년대가 아니라면, 입학 후 첫 등록금투쟁에서 맞아죽은 내 91학번 동기 경대는 어쩌란 말인가. 80년 광주항쟁 진상규명을 위해 최루탄에 콜록대며 담배를 배워야만 했던 봄날이 거짓이란 말인가. 함께 풍물을 치던 수석이가 죽고, 함께 회의를 하던 희정이가 죽은 게 96년이 아니었던가. 통일축전을 준비하다가 수십만의 전경들에 의해 연대에 갖힌 채 이적단체가 점거농성을 하고 있다고 매도당하며, 전대협동우회마저 '폭도'에게 지지를 보내줄 순 없다 등돌렸을 때 취재나왔던 기자가 불쌍하다고 던져준 초코파이 한쪽을 십여명이 갈라먹으며 하루의 양식으로 삼았던 게 꿈이었던 말인가. 참으로 맛나게도 라면을 끓여주던 준배형의 죽음은 5년여가 흐른 지금까지도 의문사로 남아있을 뿐인데, 이제 투쟁은 없다고? 아직 상반기도 안 지난 올해 분신하거나 살해당한 노동자가 몇 명인지 그녀는 과연 헤아리고 있을까?

그녀가 '잃어 버린 사람들, 그러나 빼앗기지 않았던 사람들, 그래서 스스로 잃어 버렸던 사람들, 잃어 버리고도 기뻤던 우리들'의 비망록을 끄적이고 있을 때도 언제나 이기기 위해 끝까지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그리고 지금도 싸우고 있음을 그녀가 알아주면 참 좋겠다. 밸없는 나는 그녀가 '지금도 수고하네' 한 마디만 던져주면 엉엉 울며 고맙다고, 정말 고맙다고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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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녀 2004-05-29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늘, 글 잘 쓰는 그녀가 참 얄미웠습니다. 그녀가 살아온 형태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적당히 잘 풀어먹고 사는 거 같아서...(제가 꼬였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얄미운데도 그녀의 책에는 자꾸만 손이 갑니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기도 하고, 적당히 고뇌하는 척하기에도 좋고...
딴소리> 더이상 아름답다고 할 만한 방황은 없다는 건가요, 아니면 이제 더이상은 아름다운 방황을 하지 않겠다는 건가요? 제목이 뜻하는 거요. 그때 읽고 나서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진/우맘 2004-05-29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으로 공지영을 읽은 것이 벌써 오년쯤 되었나? 스무살을 전후해서 참 많이 읽었는데 말이죠. 우물안 개구리 식으로 독서를 하던 저는, 공지영을 비판하는 글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하긴, 그 때는 워낙 베스트셀러 작가에 대한 찬양 일색이기도 했지만요. 읽으면서 매번 울고,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좋은 작가라고만 추앙했는데...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고, 리뷰를 쓰면서 서재지인 중 많은 분들이 공지영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조금 놀랐습니다. 우물밖으로 열심히 기어나가면서, 다시 한 번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있습니다.
인식의 일부분이 님의 리뷰를 읽고 전환되네요. 맞아요, 투쟁은 90년대에도 끝난 게 아닌데 말입니다.^^

밀키웨이 2004-05-31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도 진우맘님과 비슷한 기분입니다.
전 정말로 공지영에 대해 비판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뭐..서로 살기 바쁜 사람들끼리 이래저래 책비평하는 그런 기회가 많지 않았던 것도 있고
또 그럴 멍석이 깔린 적도 없었기에 그랬겠지요.
또 저처럼 나는 별로던데...하면서도 괜시리 그렇게 이야기했다가 혼자 찐빠맞을까봐 입 다물고 있었던 듯...합니다. 다들 너무너무 좋다고 하시는 그런 분위기에서 말입죠.

하여간 새로운 시각을 접하게 되어 머리가 션~~해지는 기분입니다.
이런 기분 자주자주 맛보게 해주세요 ^^

nemuko 2004-06-07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공지영을 읽으면서 느껴왔던 기분의 변화들을 님이 아주 적절하게 표현해주시네요. 이제는 그렇게 잊혀진 작가가 되는것 같습니다. 님의 글 추천하고 갑니다^^.

반딧불,, 2004-06-11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저도 공감합니다..
왜 제가 그녀를 싫어하는지..딱 잡아 말하지 못했고.
느낌표에서 봉순이언니가 선정되었을 때도 왜 그녀여야 하는가..
차라리...공선옥이나 하성란이라면 이해를 하겠다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너무나 가식적으로 느껴져서 싫습니다ㅠ.ㅠ

내가없는 이 안 2004-07-16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지영이란 작가 이야기, 너무 가슴에 와닿아서 몇자 써봅니다. 그런데 말이죠, 전 위악스럽다거나 가식적이란 느낌이 들면서도, 한때 그 길을 걸어온 작가로서 완전히 다른 배반적인 모습으로 두드러지게 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애정이 느껴져요. 고등어에서 '난 운전면허증도 못 따고 뭘 했나' 하는 작가의 고백에 어이가 없어하면서도 그럼에도 이문열 같은, 진중권 같은 이의 모습이 아니라 고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죠. 어쩌면 그는 묘하게 비껴서 있는지도 모르겠구요... 글쎄, 공지영이란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사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이를테면 임종석 씨가 임수경 씨에게 고맙다고 하는 것처럼, 고마울 것까진 없어도 그냥 애정은 남아 있네요...

sayonara 2004-08-31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합니다. 저도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건데...
막연한 거부감이 무엇때문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키타이프 2004-09-03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명쯤은 공지영 사수파가 나올법도 한데, 댓글들이 다들 안티 쪽이네요.
근데 어쩌나, 저도 그런 심정으로 이 글을 보면서 '글치, 글치'라면 동감을 표했는걸요.
고등어를 보는 내내 그 내용들이 그녀의 공치사인것 같아 쳇.쳇 거렸던 기억만 남아 있습니다.

지라르 매니아 2010-02-27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딱히 공지영에 대한 안티라기 보다는,
유명세라는 것이 원래, 너무 진지하면 안 되는 거란 생각이 듭니다.
베스트 셀러가 지녀야할 적당한 층,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고, 지나치게 진지하지도 않은
그런 감각이 공지영에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호랑녀 님의 지적에도 많이 공감합니다.

꼬리별 2010-02-27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공지영에 대한 비판글을 읽어 본 적이 없다는 분들이 오히려 놀랍네요. 공지영 작가 자신은 대중소설가라고 낙인찍혀서 진지한 문학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문단의 분위기에 매우 상처받았으며 그것을 극복하는 게 고통스럽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너무 잘 팔리는 것이 작가에겐 부담이 될 수도 있는 거죠. 저는 공지영작가와 일면식도 없지만 같은 학번으로 같은 세대를 그녀와 같은 고민을 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녀의 후일담소설들, 살아가면서 새롭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녀의 한계라면 중산층 출신의 운동권들이 가졌던 존재의 모순이 있다는 거죠. 같은 나이의 공선옥에겐 찾아 볼 수 없는 모순. 그러나 그런 존재의 모순이 오히려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바탕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녀는 무엇보다 솔직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진지하며, 열심히 사는 글쟁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