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17:11 보혈의 능력

삼국지를 보면 유비, 관우, 장비가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백마와 흑우의 피를 섞어서 나누어 마시고 향을 피우고 천제를 지내고 의형제를 맺습니다. 동양에서는 피를 나눠 마시면 형제가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뭐라 말씀할까요? 하나님의 말씀 레위기 17장 11절 말씀을 함께 봉독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아멘! 성경은 피를 신성시합니다. 성경은 피는 생명이고 생명은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피를 신성시합니다. 피가 생명이기 때문에 성경은 새나 짐승이나 무슨 피든지 먹지 말라고 말씀합니다.(레7:26) 동양에서는 피를 나눠 마시면 형제가 되지만 성경에서는 피를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합니다.(레7:27) 여러분은 피가 아무리 몸에 좋다고 하더라도 먹지 마십시오.

성경에서는 피를 마시면 안 되고 제단에 뿌려야 합니다. 피를 제단에 뿌리면 죄를 용서받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지으면 송아지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를 속죄 제물로 가져 왔습니다. 제사장은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여 그 사람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키고 짐승을 잡아 피를 손가락에 찍어 성소의 휘장 앞에 뿌리고 향단 뿔들에 바르고 나머지를 번제단 밑에 쏟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지으면 짐승의 피를 뿌려 죄를 용서받고 또 다시 죄를 짓고 짐승의 피를 뿌리고를 반복했습니다. 짐승의 피는 일시적이었고 반복적이었습니다. 만약 오늘날에도 죄를 짓고 짐승을 제물로 드려야 한다면 동물애호가들은 교회를 폭발시키려할 것이고 교인들은 죄를 큰 마대자루에 담아놨다가 한꺼번에 용서받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불편을 예수님이 해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짐승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9장 12절을 통해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 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짐승의 피는 그 죄만 용서하는 일시적인 피였지만 예수님의 피는 영원히 죄를 씻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므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었습니다./ 짐승의 피는 죄를 씻고 용서하고를 반복하는 피였지만 예수님의 피는 단번에 죄를 씻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할부처럼 여러 차례로 나눠서가 아니라 일시불처럼 단번에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피는 죄를 씻는 ‘속죄의 능력’이 있습니다. 짐승의 피도 속죄의 능력이 있는데 예수님의 피는 얼마나 속죄의 능력이 크겠습니까? 하나님은 히브리서 9장 13-14절을 통해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고 말씀합니다. 짐승의 피로도 우리 죄를 정결하게 씻었는데 하물며 예수님의 피로는 우리를 얼마나 깨끗하게 씻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죄가 있다면 주저하시 마시고 예수님의 피를 의지해서 용서를 받으십시오. 하나님은 히브리서 9장 22절을 통해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여러분의 죄를 씻어줍니다. 여러분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됩니다.(사1:18) 여러분의 죄가 깨끗하게 씻깁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죄를 씻는 능력도 있고 우리를 보호하는 능력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출애굽기 12장 13절 말씀을 함께 봉독합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00여 년간 종살이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국무총리인 요셉의 초청으로 애굽으로 이민을 갔지만 요셉을 모르는 다른 왕조가 들어서면서 종으로 전락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살이가 너무 힘겨워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모세를 지도자로 보내셨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바로는 터무니없다고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 땅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바로는 9번째 재앙까지는 버텼지만 10번째 재앙을 당하자 무릎을 꿇었습니다. 10번째 재앙은 장자의 죽음이었습니다. 사람의 장자는 물론이고 짐승의 첫 새끼도 죽는 재앙이었습니다.(출11:5)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흠 없고 일 년 된 숫양이나 숫염소를 잡아 그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고기를 불에 구워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의 사자를 보내서 장자를 치실 때에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피가 묻어 있으면 그 집을 넘어가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유월절을 영어로 Passover라고 하는데 Pass over는 '넘어가다'는 뜻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다가 피가 묻은 집은 그냥 넘어갔습니다. 짐승의 피도 보호의 능력이 있는데 예수님의 피는 얼마나 보호의 능력이 크겠습니까? 하나님은 요한일서 5장 18절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악한 자가 우리를 만지지도 못하게 지켜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보호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편 121편 5-6절을 통해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막이라 낮의 해도 사람을 상하게 하며 밤의 달도 사람을 해롭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늘이 되셔서 몸에 해로운 따가운 햇살과 환한 달빛을 가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이십니다. 짐승의 피로도 우리를 안전하게 지켰는데 하물며 예수님의 피로는 우리를 얼마나 안전하게 보호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세상이 두렵다면 주저하시 마시고 예수님의 피를 의지해서 보호를 받으십시오. 예수님의 피는 세콤보다도 더 안전하고 보디가드보다도 더 안전합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등교하는 자녀를 덮으십시오. 예수님의 보혈로 출근하는 남편을 덮으십시오. 보혈로 덮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이루신 구원사역을 수용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보혈로 덮으면 자녀가 그리고 남편이 안전하게 보호됩니다. 저는 운전하면서 우리 교인들 집을 지나칠 때마다 예수님의 보혈로 덮어달라고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귀가 가렵다면 제가 기도한 줄 아십시오.

지난번 사택에서 예배드릴 때 이연지 집사님이 교회 오다가 약간의 접촉사고가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날 저는 집에서 예배를 준비하다가 예감이 좋지 않아 설교문을 덮어놓고 우리 교인들이 안전하게 차를 몰고 예배 참석하도록 무릎 꿇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뭔가 불안하다면 모든 일손을 멈추고 예수님의 보혈로 덮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보혈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열어주시고 감당할 방법을 주십니다. 마귀는 우리를 천국에 가지 못하도록 혈안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주적이 마귀인 것을 알고, 예수님의 보혈로 자신과 가족을 덮고,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마귀는 예수님의 피 한 방울이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갑니다. 예수님은 피는 우리의 죄를 씻는 능력도 있고 우리를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여 승리하는 하루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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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19일(금) 해도1동 새마을금고에서 일억 오천만원을 대출받아 ICS 엔지니어링에 전달하고 새 교회당 열쇠를 넘겨받아 20일(토) 이사하고 21일(주일) 추수감사주일 예배와 입당 감사예배를 드리다. 그리고 오후 4시에 남선교회 헌신예배도 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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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7:11-19 엎드리어 감사하니

뜨거운 햇살아래서 일하던 농부가 호두나무 그늘아래서 땀을 닦았습니다. 농부는 호박넝쿨에 달린 호박을 보고 “하나님도 참, 왜 저렇게 무거운 호박을 약한 넝쿨에 매달리게 하셨담! 호박이 무거우니 땅에 닿을 것 같잖아.”하며 중얼거렸습니다. 농부는 그 자리에 누워 호두나무 가지에 달린 호두를 보고 “하나님도 참, 왜 저렇게 튼튼한 호두나무 가지에 조그만 호두가 달리게 하셨담! 하나님이 잘못 만드신 거 아냐?”하며 투덜거렸습니다. 그러다 농부는 스르르 잠들었습니다. “딱!” 호두 하나가 농부의 이마에 떨어졌습니다. 농부는 아픈 이마를 만지며 “아이쿠, 저 큰 호박이 나무에 매달렸다 떨어졌다면 큰일 났겠군! 하나님, 이 큰 호두나무에 작은 호두가 달리게 하신 것은 참 잘하신 일입니다.”하고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이 농부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알지 못해 불평합니다. 그러나 그 계획을 알게 된다면 결국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것은 불평이 아니라 감사입니다.

이 농부처럼 매사에 불평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병환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막이라 날은 더워 땀은 흐르지 물은 적어 자주 씻을 수 없다보니 피부병이 많이 생겼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자주 씻지 않아 종기가 많이 났잖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살갗에 부스럼이나 뾰루지나 얼룩이 생기면 혹시 나병인가 싶어 제사장에게 데려갔습니다. 제사장은 피부를 살펴보고 나병이 아니면 ‘정하다.’고 선언하고 나병이면 ‘부정하다.’고 선언했습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제사장이 검진하다 보니 악성피부병도 나병으로 판정하였고, 진짜 나병인 한센병도 나병으로 판정하였습니다. 나병으로 판정하면 입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헤쳤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손가락으로 코밑수염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소리쳤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마을에서 쫓겨났습니다. 나병환자는 병에 걸려 육체적으로도 고통 받았고, 친구들과 어울릴 수 없어 사회적으로도 소외당했고, 회당에도 갈 수 없어 종교적으로도 버림받았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마을 밖에서 집단생활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소록도에서 집단생활을 하였습니다. 영화 [벤허]를 보면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병에 걸려 집단생활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병은 암처럼 전염될 확률은 적었으나 신종플루처럼 격리되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자신들은 천벌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렇게 원망하던 나병환자들에게 희소식이 들렸습니다. 예수님이 병든 자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린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이 오시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다가 나병환자들이 사는 지역을 지나가셨습니다. 나병환자 10명은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습니다.(눅17:12-13)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기 때문에 멀리서 목이 터져라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눅7:14)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예수님은 누가복음 5장 13절을 통해 나병환자에게 병이 낫도록 안수 기도도 해주시고 병이 나았다고 선언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지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개떡같이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나병환자들은 찰떡같이 알아들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병이 나았으니 제사장들에게 가서 진단을 받아라.’로 이해하였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들에게 찾아갔습니다. 믿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은 믿음에서 출발해서 기도로 마무리됩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들에게 걸어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너무 기뻤습니다. 영화 [벤허]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고귀한 피가 빗물에 씻겨 내려와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적시는 순간 나병이 나았습니다. 벤허 가족은 다시 모여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가족들에게도 돌아가고, 친구들에게도 돌아가고, 회당에도 돌아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급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산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찾아 갔습니다.(레14:2-4) 제사장은 새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의 질그릇 안에서 잡고 피를 빼고 다른 새와 홍색 실과 백향목과 우슬초를 핏물에 찍어 나병환자에게 일곱 번 뿌리고 ‘정하다.’고 선언하고 새를 날려 보냈습니다. 나병환자 9명은 ‘정하다.’는 선언을 듣고 싶어 제사장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1명은 제사장에게 가지 않고 예수님에게 돌아갔습니다. 제사장에게 ‘정하다.’는 선언을 듣기보다 예수님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에게 돌아온 1명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제사장들에게 간 9명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 사람이 결혼해서 낳은 혼혈인입니다. 유대인은 혼혈인을 경멸했습니다. 혈통을 중요시하는 우리나라는 요즘도 국제결혼을 통해 낳은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은근히 차별하는데 민족주의가 강한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피가 섞인 사마리아인들을 얼마나 멸시하고 천대했겠습니까? 사마리아인은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았지만 예수님에게 감사하다 고 인사를 드리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감사를 잊은 유대인들이 안타까우셨습니다.(눅:17-18)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예수님은 감사하는 사마리아인이 기특하셨습니다.(눅17:19)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10명의 나병환자 중에서 9명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에게 가다가 육신의 질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그들에겐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1명의 사마리아인은 말씀을 믿고 육신도 고침 받았고 감사를 하여 영혼도 구원 받았습니다. 육신의 치유보다 영혼의 구원이 더 중요합니다. 9명의 유대인들은 작은 것은 얻었지만 1명의 사마리아인은 감사를 하여 큰 것도 얻었습니다. 황수관 박사에 따르면 감사하면 부교감 신경을 자극시켜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더군요. 감사는 우리의 육신과 영혼을 건강하게 만드는 비타민입니다. 우리가 건강하든 건강하지 않던 비타민을 먹듯이 감사는 감사한 일이 있든지 없든지 감사해야 합니다.

영국 국교회에 매튜 헨리 목사라는 유명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성경주석을 쓴 학자였습니다. 그가 쓴 주석은 30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팔리고 있습니다. 그가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매튜 헨리 목사는 ‘나같이 유명한 목사가 강도를 만나다니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이 분명해!’ 하고 불평하지 않고 그날 밤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다음의 것들에 감사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첫째, 전에는 한 번도 강도를 만나 적이 없는 것에 대해 둘째, 강도가 지갑을 빼앗아 갔을 뿐 목숨을 빼앗지 않은 것에 대해 셋째, 저의 전부를 빼앗아 갔지만 그것이 별로 많지 않은 것에 대해 넷째, 제가 강도질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강도를 당한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매튜 헨리 목사는 강도를 당했지만 그래도 감사할 거리를 찾았습니다. 우리는 감사할 거리가 있을 때 감사하지만 감사할 거리가 없어도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감사할 거리를 주십니다. 우리는 간구는 많이 하지만 감사는 적게 합니다. 간구와 감사는 보트를 젓는 두 개의 노입니다. 한쪽으로 기울면 앞으로 나가지 않고 제자리를 맴돕니다. 우리가 간구만 많이 하면 신앙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자라지 않습니다. 간구와 감사에 균형을 이뤄야 신앙이 전진합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계획을 모를지라도 감사부터 한다면 반드시 감사할 일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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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4:13-5:11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여러분 다미 선교회를 기억하십니까? 다미 선교회는 1992년 10월 28일 자정에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고 성도들은 하늘로 들림 받는다고 현혹하여 멀쩡한 사람들이 집을 팔거나 전세금을 빼서 바치고, 잘 다니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그만두고, 한참 공부할 학생들이 가출하여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다미 선교회가 얼마나 사회를 혼란스럽게 했는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까지 했는데 휴거가 불발하자 기자들은 코미디라며 허탈해 했고 성도들은 실망한 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서울지방 검찰청은 이장림을 사기 및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였고, 서울남부지방법원 항소심에서는 징역 1년과 2만 6천 달러 몰수 형을 선고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다미 선교회가 시한부 종말론자으로 국민들을 현혹했는데 오늘 본문을 통해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잘못된 종말론으로 흔들렸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신앙생활하다 죽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다 죽으면 영생을 얻지 못할까요? 그것은 아니죠?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를 궁금해 했습니다. 예수님은 다미 선교회가 말한 것처럼 어떤 특정한 날에 오실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질문을 받고 그 대답으로 데살로니가 전서를 썼습니다. 신약성경의 ‘서’가 들어간 성경은 교회에 보낸 편지이거나 사도가 보낸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 종말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신앙생활하다 죽으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사도 바울은 4장 13-14절을 통해 답변합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사도 바울은 ‘자는 자들’이라고 말씀했는데 자는 자들은 죽은 자들입니다. 성경은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합니다. 잠자는 사람은 다시 잠에서 깨어나듯이 교인들은 죽어도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영원한 이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통곡하지만 교인들은 죽음은 잠깐의 이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너무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얼마 전에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이 별세하셨는데 장례식이 아니라 천국환송예배를 드렸습니다. 교인들은 죽더라도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다시 살아나고 지금은 헤어지더라도 천국에서 다시 만나기 때문에 죽음을 너무 두려워하거나 너무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도 예수님과 우리를 갈라놓지 못합니다. 우리가 전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살아나게 하기 위해 그리고 다시 만나기 위해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를 궁금해 했는데 사도 바울은 5장 1-3절을 통해 답변합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사도 바울은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쓸 것이 없다.’고 말씀했는데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정확한 날짜와 시각을 알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실 지는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예수님 자신도 모르고 하나님 아버지만 아십니다.(마24:36) 예수님도 모르는데 사람이 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이단들의 요설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른다는 말씀을 ‘밤에 도둑 같이 온다.’고 비유합니다. 우리나라는 도둑이 낮에도 들어오지만 이스라엘은 밤에 흙벽을 뚫고 들어와 도둑질해 갔다고 합니다. 도둑은 괴도 루팽처럼 언제 도둑질하겠다고 통보하지 않고 갑자기 들어오듯이 예수님도 우리가 알지 못한 때에 갑자기 재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른다는 말씀을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이른다.’고 비유합니다. 요즘은 무통주사가 있어 산통을 거의 느끼지 않고도 출산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산통 때문에 초죽음을 당했습니다. 임산부가 아이를 낳으려면 반드시 산통을 겪어야 하듯이 예수님도 반드시 재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그리고 반드시 재림하시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5장 6절을 통해 대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사도 바울은 잠은 밤에 자고 낮에는 깨어 있어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그리고 반드시 재림하시기 때문에 집주인은 언제 도둑이 들어올지 몰라 언제나 집단속을 하듯이, 임신한 여자는 언제 아이를 낳을지 몰라 베넷 저고리를 비롯해 출산 준비물을 미리부터 준비해 놓듯이 우리는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갑자기 그리고 반드시 재림하시기 때문에 깨어 있어라 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깨어 있는 거고 어떻게 하면 자고 있는 걸까요? 깨어 있는 거는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이 맡겨주신 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겁니다.(마24:45) 맡겨주신 직분을 감당하는 겁니다. 주님이 갑자기 그리고 반드시 다시 오셔서 깨어 있는 성도를 보시면 어떠실까요? 흐뭇해하십니다. 주님은 깨어있는 성도를 칭찬하시고 더 많은 사명을 맡겨주십니다. 여러분이 사장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모처럼 간식을 사갔는데 직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사장의 마음이 흐뭇합니다. 그날 저녁 회식을 시켜주고 싶습니다. 깨어있는 것은 현재의 생활에 충실하면서 하늘나라 시민답게 사는 겁니다. 현재의 생활에 충실 하느라 하늘나라를 잊지도 말고 하늘나라를 생각하느라 생활을 외면하지도 말고 하늘과 땅을 조화시키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자고 있으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자고 있는 거는 악하고 어리석어서 주님이 더디 오려니 생각하고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지 않고 동료를 때리고 술친구들과 어울리는 겁니다. 동료를 때리는 것은 맡겨주신 사명은 감당하지 않으면서 성도를 비난하는 겁니다.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은 직분은 감당하지 않으면서 세상 친구들과 어울려 세월을 허송하는 겁니다. 주님은 생각지도 않은 날, 짐작도 못한 시간에 갑자기 그리고 반드시 다시 오셔서 자고 있는 성도를 꾸중하시고 벌을 내리십니다. 여러분이 기분이 좋아서 간식을 사갔는데 직원들이 농땡이를 치고 그제서 일하는 척 합니다. 사장의 마음이 탐탁지 않습니다. 봉급을 올려주고 싶은 마음이 달아납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깨어 있습니까? 아니면 자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목이 터져라 재림하신다고 말씀하시는데 혹시 재림불감증에 걸리지는 않았습니까? 재림불감증에 걸리면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지 않고(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동료를 때리고(성도를 비난하고)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십니다.(세상 친구들과 어울려 시간을 낭비합니다.) 옛날엔 열심히 봉사했는데, 재림불감증이 걸려 쉬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과거에 아무리 열심히 봉사했어도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놀고 있으면 허사입니다. 과거의 수고가 감안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은 사골 곰탕이 아닙니다. 사골 곰탕도 어지간히 우려야 국물 맛이 나지 너무 우리면 맹탕이 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맡겨주신 직분을 충성으로 감당합시다. 그리하여 하늘나라에서 이 땅에서보다 더 많은 상급을 받읍시다.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경각심을 갖게 하소서. 오실 때까지 직분을 감당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오실 때에 기쁘게 맞이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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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7일(주일) 이동초등학교 4학년 김정민 어린이(2010-24)가 서영우 어린이의 인도로 출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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