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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엄기호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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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회과학 서적은 앙상하다. 나는 개념으로 짜여 진 그 앙상한 느낌을 좋아한다. 저자 엄기호씨의 책은 사회과학 서적인데도 앙상하지 않다. 그의 글에는 촉감이 느껴진다. 살아있는 것 같다. 등장하는 사람들의 사례가, 그의 시선이 얽혀들어 분석되는 세상이 그렇다. 그는 학문과 생활이 따로 떨어져있지 않은 학자일 것이라 추측해본다. 이런 ‘지식인’이 아직있다는 것은 ‘위로’되는 일이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위로’를 가까스로 ‘박민규의 소설’에서 받았다는 본문 속 어느 학생의 예시처럼. 나는 그의 글에서 요즘 좀처럼 만나기 힘든 위로를 받았고 가능성을 보았다.

이 책은 촛불이 일어나기 전­ - 그러니까 박근혜정권의 통치 하에서 기획되고 집필되었을 것이다. 아주 먼 옛날의 일 같지만,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은 이야기다. 그 때의 우리는 암담했고, 무력했다. ‘싸그리 망해버려라‘ 많은 사람들의 정념을 엄기호는 ‘리셋‘이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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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망치는 것이건 창조하는 것이건, 그 힘으로부터 배제되어 자신은 그저 무기력하게 자기 자리에 앉아있기만 한다고 느끼는 세상이다. 이런 근원적인 무기력감은 세계를 다루고 싶은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그 방식은 가난과 전쟁의 폐허에서 나라를 다시 만드는 ‘재건‘이 아니다. 그렇게 재건한 국가가 부정의하고 불평등하기에 체제의 전환을 꿈꾸는 ‘변혁‘도 아니다.
세계 자체를 원점으로 날려버리려는 ‘리셋 reset‘인 것이다. … 그것이 현실적이어서가 아니라 유일하게 상상가능 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바꿀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아예 현실을 날려버리는 것만이 유일하고 ‘즐거운’ 상상이 된다. … 이렇듯 가장 허무주의적인 것만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이미 그 사회의 다른 모든 가능성이 봉쇄되었다는 뜻이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에 기인한 ‘과격한 무기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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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출간되지 마자 읽기 시작했고, 한번은 통독, 한번은 정리 분석하며 읽었고, 이 책만큼은 늦게라도 서평을 써야겠다 싶어 다시 읽었다. 처음에는 한국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여러 인간의 유형 분석에 공감했고, 두 번째 읽을 때는 우리사회에 남은 가능성에 대해 곱씹었고(그 때는 촛불 직후였으므로)- 세 번째 읽고 난 지금은 리셋만큼이나 아득한 과제들이 겁이 난다.

불가능할 것 같은 정권교체를 이뤄낸 이 후에도, 나를 둘러싼 존재들의 배열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저건 아니지 싶은 것이 박근혜에서 김기춘에 대한 판결로, 여혐살인으로, 장군 부인의 갑질로 바뀐것 외에는. 여전히 나의 하루는 기운이 없고, 생계는 언제나 위태로우며, 일상은 벌여놓은 일로 가득차 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리셋‘만큼이나 과격한 변화를 원했던 것은 - 거대한 세상을 포함한 나 자신의 일상이 변화하길 바랬기 때문이리라. 아직 변화가 부족했다면, 남은 에너지를 그러모아 ‘다음 싸움‘을 준비해야 하는 것일 게다. 다음의 싸움은 ‘멈춘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저자의 말대로 다시 ‘존엄‘과 ‘안전‘을 위한 투쟁, 그리고 투표소만을 넘어 모든 곳에서의 민주주의, 일상에서의 ‘존중‘과 ‘협력‘을 위한 각자의 결단과 노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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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6)
인간의 존엄이란 생물학적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존엄을 넘어 사회적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존엄을 의미한다. 사회적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존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이의 삶을 내 삶의 동반자로 여긴다는 말이다. 그의 존엄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를 삶의 동반자로서, 공동세계의 일원으로서 존중한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그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나와 함께 공동세계를 짓고 있는 그의 활동, 그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말이 된다. 그의 말을 묵살하고, 그의 활동을 파괴하는 것이야말로 ‘사이로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파괴행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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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중학교 윤리 교과서 이후로는 들춰보지 않았을 - 평등, 존엄, 협력 과 같은- 우리가 다시 되짚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개념‘들을 꺼내어 현실과 대입하며 친절하게 서술하고 있다. ‘방귀보다 못한 말‘만 듣고 보다 ‘개념의 핵‘이 명징한 말들을 읽다보니 고개가 끄덕여지고 생각할 것이 많아졌다. 막연히 걱정이 되었던 촛불 이후의 투쟁- 불투명했던 다음 싸움의 과제들도, 책이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어서 덮고 나니 무언가를 마음먹게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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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11-214)
1987년의 민주주의는 군사독재를 끝내고 정치적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삶의 민주화에는 실패했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교복 입은 동료시민’이기보다는 여전히 ‘잡아야 하는’ 학생이었다. 여성들은 사회 진출을 보장받은 것처럼 보였지만 경제 위기 국면에서는 여전히 가장 먼저 해고를 당했다. 학교와 가정, 공장과 사무실, 우리의 일상 공간 앞에서 1987년의 민주주의는 멈췄다.

민주주의가 멈춘 곳에서 혐오와 폭력, 차별이 독버섯처럼 자랐다. 투표소에서만 평등한 사회에서 사람들의 존엄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성폭력, 비정규직 노동자를 노예처럼 부려먹고 한계 너머로 밀어붙이는 노동 착취, 끊임없이 모욕을 강요당하는 소위 갑질과 감정노동 등. 이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을 평등한 동료 시민으로 대하지 않는 민주화의 실패를 뼈저리게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시작해야하는 지점이 여기다. 우리가 멈춘 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투표소에 표를 찍으러 갈 때만 ‘동료 시민’인 것이 아니다. 대의제 앞에서 멈춰버린 민주주의를 그 너머로 밀어붙여야 한다. 왕을 뽑고 그 왕에게 우리의 권리를 위임한 뒤 다시 삶의 자리에서는 노예로 내려오는 것이 민주주의가 아니다. 차라리 왕의 머리를 잘라버림으로써 왕의 부재 이후 발생하는 모든 정치적 책임을 지는 것이 민주주의다.

... 그러므로 박수는 일종의 서약이다. 내가 앞으로도 당신들의 말을 말로 인정하고 경청하겠다는 서약이 바로 박수다. 그 자리에서 청소년의 말이 들을 만하다고 박수를 친 사람이라면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길거리에서도 그들의 말을 역시 들을 만한 말로 대해야 한다. 그들을 ‘그날만’ 단지 동원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므로 박수를 친 자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앞으로도 내가 그들을 동료 시민으로 대할 것인지 아닌지 말이다.

만일 아니라면 그들을 동원의 대상, 즉 ‘쪽수’로만 여겼다는 것을 고백해야만 한다. 100만이라는 숫자를 채우는 하나의 ‘점’으로만 여겼다고 말이다. 내가 ‘점’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민주주의지만 상대가 나를 ‘점’으로 여기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파괴다. 민주주의는 동료 시민을 동원의 대상으로 여기는 순간부터 파괴되고 부패된다. 그것이 1987년 이후의 민주화가 우리에게 남긴 뼈아픈 교훈이다.

... 나는 우리 사회의 미래가 여기에 달려있다고 믿는다. 협력과 존엄. 광장에서 점이 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기꺼이 점으로 협력하자. 그러나 광장에서 나란히 점으로 있던 다른 이의 얼굴을 기억하자. 그 얼굴이 가진 나와 평등한 존엄, 나와 평등한 목소리의 힘을 기억하자. 삶의 전 영역에 드리워진 히드라처럼 증식하는 왕의 목을 치자. 만약 내가 왕이라면 기꺼이 내 목을 치자. 그래서 삶의 전 영역에서 ‘동료 시민’으로 서로 만나자. 민주주의가 실패한 곳에서 우리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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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는 세번 다 울컥했다.
실패한 곳에서 우리 다시 만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믿어야 한다‘는 저자의 목소리가 구원 같았고, 힘을 주었다. 사실, 변화의 시간을 감각하는 속도가 너무 짧아서 도저히 ‘역사’가 가능한 것 같지 않은 우리 세대에게, “멈춘 곳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그의 요청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저자는 ‘시간을 이기고 변화를 보라’지만, 좀 더 긴- 시간 감각을 갖는 다는 것이 어떤 말인지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철저히 파편화된 세계, 감정을 느낄 새도 없이 휘발되어버리는 SNS속 숱한 정보의 폭격 속에서 일상이 너무 피로하기도 하고. 사실 무엇보다 ‘평등과 존엄-존중‘이라는 관계에 대해 ‘원‘체험이 애초에 없기 때문에. 살아보지 않아봐서 살 수가 없는.

하지만 알고 있다. - 이 책이 주문하는 것은,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어떤 결단을 해야한다는 것.
내가 왕이라면 기꺼이 내 목을 치자. 엄기호씨가 요청하는 것은 그러한 결단이고, 나는 오랫동안 그 결단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기다려왔는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제서야 들리는 것일지도) 과연 나는 응답할 용기가 있는가? 꾸물꾸물 8개월이~~ 지나서야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잊어버리지나 말자 싶어서.

서평을 쓰면서 저자의 다음 책인 <공부공부>를 주문했다. 이 책에서 던진 과제들을 이행하는 데 개인이 어떤 노력을 기울 일 수 있는 가에 대한 대답을 주는 책이면 좋겠다.



나를 포함해 역사를 믿는다고 말하는 내 주변사람들을 보면 이들의 감정상태는 ‘조울증‘에 가깝다. 역사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이 보이면 몹시 환호하고 열광한다. 그러다 다시 그 역사가 뒤로가는 것 같은 모습을 보면 끝없이 절망한다. 자기가 역사의 주인 이라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역사의 변덕에 따라 자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끌려다닌다... 우리는 광장의 조증과 삶의 울증을 반복하고 있다. 삶의 울증이 심각할수록 현장을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광장의 조증을 갈망한다.... 역사를 믿는다는 것은 이 조울증에서 벗어나 평상심을 회복하는 일이다. 절망보다 좀 더 긴 시간 감각을 가지고 삶의 현장을 보는 것, 광장의 찰나에 흥분하기 보다 좀 더 긴 시간감각을 가지고 광장을 보는 것, 이것이 역사를 믿는 사람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 - P5

만능감에 젖은 존재가 모든 것을 자기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책하는 주체는 반대로 모든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돌린다. 유능한 신은 벌하고 무능한 신은 후회한다. 이 두주체에게는 도무지 ‘바깥‘이라는 것이 없다. 결국 모든 것을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만큼이나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를 자책하는 주체는 모든 것을 자기의 탓으로 돌린다. - P49

첫 번째로 냉소다. ... 실패가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 상처를 덜 받는다. 냉소는 더 이상 상처받지 않겠다는 단단한 결심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냉소하는 사람들일수록 다른 사람들에게는 냉소를 통해 큰 상처를 준다는 점이다... 이들의 냉소는 협력에 대한 거부다.. 냉소적 주체는 그저 ‘잉여’가 아니라 공동세계를 파괴하는 괴물이기도 한 셈이다. - P27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우리가 터득해야 했던 것이 내가 살아남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기술‘이었다면, 지금 현재 우리가 터득하고 있는 것은 외면을 넘어 ‘타자-세계를 파괴하는 기술‘이다. ... 자기만 사랑하라는 명령에 따라 살지만 자기가 될 수 없는 시대다. 자기(가 되고자 하는 것)에 대한 꿈이 무너지며 나타나는 이 무기력이 증오가 되어 타자와 세계를 파괴한다. 이 시대에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이 타자와 세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 P32

모욕과 무시가 만연하다보니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 존중의 경험이 없는 사회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무관심‘과 ‘무기력‘은 생존 전략이자 윤리적 선택이다. ... 왜이렇게 되었을까? 돌이켜보면 우리는 살아오면서 끔찍할 정도로 존중받아본 적이 없다. ... 존중에 대한 ‘원체험‘이 없다보니 무시를 당했을 때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방식도 잘 모른다.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세상이 원래 그렇다고 체념하면서 분노할 뿐이다. 대신 그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출구가 앞서말한 ‘소비자‘ 혹은 자신이 가진 조그마한 권력으로 온갖 방식을 동원해서 위세를 부리는 ‘갑질‘이다. ... 당연히 그것은 자신이 만나는 노동자의 존엄을 짓밟는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 P115

돈을 주고 그 내용과 흐름을 소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어떤 기술도 발생하지 않는다. 다만 이 놀이가 재밌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소비라로서의 평가만 가능하다. 어렸을 때부터 새로운 제안을 하는 협력의 기술이 아닌 평가, 즉 품형하는 기술만 늘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비자는 제안하는 존재가 아니라 상대의 제안에 품평하는 존재다. 제안과 관련해서 그는 완전히 무능하다.
그러므로 폐허가 되다시피한 이 사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똑똑한 소비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상대의 말을 새로운 제안으로 돌려줄줄 아는 ‘협력의 기술자‘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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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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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너무 일상적이라서 말로 꺼내는 것 조차 쑥스러웠던 가랑비 젖듯 젖어든 상처들. 소리내어 더듬더듬 말하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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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한 조력자 - 남을 돕는 이타적인 활동의 이면을 들여다보다
볼프강 슈미트바우어 지음, 채기화 옮김 / 궁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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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처럼 누군가를 위해 사는 삶에 길들여져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면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지금 와서 더듬거려 찾아봐도 잘 잡히지 않는다.


내 세계 속에서 ‘-을 위해 ~을 해.야.한.다’가 아닌 명제는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억지로 잘참고 하면 할수록, 스스로를 잘 속일수록, 이게 정말로 맞다고 고개를 끄덕일수록 ‘나는 가치 있게 살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는 거의 완벽하게 합리화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문득 내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모래처럼 느껴지지만 않았다면. 


쉬고 있는 데도 쉬고 싶은 날이 많아졌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몽땅 기를 쓰고 집에 와서는 무기력함에 허덕였다. 읽고 싶은 책은 사라졌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일부러 만나지 않았다.(힘들다고 말하는 순간 겉잡을 수 없이 약해질 것만 같았다. 나는 강한 모습이어야 했다)


해야 하는 일들에 열정이 생기지 않았고, 원래 어려운 일이었지 자조하거나 이게 뭐냐고 스스로를 자책했다. 기운이 없었다. 움켜쥐려고 할수록 더 새어나갔다. 필사적으로 손바닥에 남은 모래 몇 알 같은 에너지를 쥐어짜던 일상을 연명하던 날들이었다.



"나는 당신을 도와주지만 나 자신은 도움이 필요없어요!"


여름의 한 가운데서 ‘무력한 조력자’를 읽기 시작했다. 타임라인에 올라온 책소개를 봤고, 제목부터가 내 이야기임을 짐작했다. 


자신의 문제와 대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일에 전념하는 '조력자 증후군' 

지속되는 희생적 활동에 합당한 보상이 없어도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은 자신의 내적 필연성에 의해 '이상화된 조력자 상'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해칠 지경이 될 때 까지 다른 사람을 돕게된다.


‘-을 위해 ~을 해야한다’는 거대한 합리화의 세계 속에 철저하게 ‘나’라는 존재는 소외되어 있었다는 것.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 채로, 수년을 허덕이고 있었다는 것. 당시 내 상태에 병명을 붙일 수 있다면, 조력자증후군이 확실했다.



[조력자 증후군의 정리]


* 조력자 증후군은 자신의 발달을 희생하여 사회적 조력을 경직된 생활방식으로 삼는 독특한 성격 특성의 결합이다. 조력자 증후군이 있는 사람들의 근본문제는 높고 경직된 자아이상을 지향하는 사회적 외형이다. 자신의 약점과 결핍이 부정되며, 관계에서는 상호성과 친밀함이 제외된다. 조력자의 자기애적 욕구는 크지만 그 전체 또는 부분이 무의식적이다. 따라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도록 표현하는 데는 미숙하다. 쌓인 욕망은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어린 시절 자기애적 만족이 거절당하면, 부모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이 즉, 초자아와의 경직된 동일시가 아이에게는 유일한 선택지가 된다. 그 아이는 성장하여 자신이 그토록 원하고 그리워 했던 것을 자기 자신에게는 주지 못하고 ‘이타적’으로 다른 사람을 통해 실현하려 한다. 경직된 초자아는 직업적 책임을 강조하는 교육과정을 통해 더욱 강화되어 직업활동을 시작할 때는 이미 조력자증후군이 예비가 된 상태가 된다. 조력자증후군의 예방과 치료의 목표는 초자아 동일시를 통해 이타적 행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아의 활동으로 만드는 것이다.


(p. 24-27)

조력자증후군이 있는 이들의 내면 상태는 화려하고 강한 외형 뒤에 방치된 굶주린 아이의 그림으로 표현 될 수 있다.

“나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X교수님의 집 앞에 있었다. 우리는 이 집에 종을 달아야 했다. 내 앞에 석회암으로 둘러쳐진 높은 담을 올려다보았다. 종을 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장비와 밧줄 등이 더 필요해서 가까운 헛간으로 갔다. 그 때 헛간 안에서 숨죽인 울음소리가 새어나았다. 문을 열자 아주 끔찍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탈진한 깡마른 아이가 오물과 거미줄을 뒤집어 쓴 채 잡동사니 사이에 끼어 있었다.” (30세 의사의 꿈) 

… 조력자로 하여금 자기 내면의 아이를 어둡고 더러운 지하실에 가두도록 한 초기의 결핍이, 이 아이의 욕구를 원시적인 수준으로 보존시켰다. …미숙한 상태로 남아있는 자기애적 욕구에 대한 엄청난 허기는 그 홀로 자신의 외형의 도움으로 극복하고 있는 일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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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고 가장 충격적이었던 부분이다. 타인의 꿈이지만 직관적으로 내 모습임을 눈치 챘다. 오랫동안 방치된 굶주려 있는 어린아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의사의 꿈이 내 꿈처럼 눈에서 오락가락 거릴 때 마다, 나는 울면서 산책로를 뛰었다.


다른 이를 도와주는 것이 보람 있지만 때때로 너무 힘에 부쳤던 까닭은, 내가 허기져 있었기 때문이구나. 어렴풋이. 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구나. 

방치된 어린 나에게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살찌워야겠다. 보살펴야겠다. 안아줘야겠다. 사랑해줘야겠다. 부모가 해주지 않은 것이라면, 이제 내가 스스로에게 해주면 된다. 어느 덧 나는 다 자란 어른이다. 되뇌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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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3)[나는 당신을 도와주지만 나 자신은 도움이 필요 없어요] – 자비네

…그녀는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해야 하는 압력을 받을 때에만 자신을 느꼈다. 손님이 오면 그들을 잘 대접했다. 그러나 자신이 손님이 될 경우 그녀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배려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친구들의 불안과 어려움은 자비네의 문제이기도 하여, 그들의 얘기를 참을 성 있게 들으며 관심을 기울여 조언을 하고 돕는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불안과 우울은 고독한 산책을 통해 해소하려고 한다. … 도와줄 준비, 요구 없음, 어린동생에 대한 배려는 자비네가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 …즉, 그녀는 자신의 아이에게 관심을 가져서는 안되며, 맏이로서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만 했던 것처럼 환자들에게 온전한 사랑을 나눠주어야만 했다. …조력자에게는 자기애가 공급되는 주요 원천이 욕구 충족이나 상호적 사회관계가 아니라, 자신의 욕구충족을 가시적으로 단념함으로써 얻어진 감사이기 때문에, 그는 자주 클라이언트에게 심하게 의존한다. …자비네가 공격성을 표출하는 방식은 ‘제3자 변호’의 양상을 띤다. 예를 들어 그녀는 집단의 어느 구성원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이 감정을 다른 구성원을 변호하는 데 이용할 수 있을 때 까지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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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이로서 사랑받기 위해, 철저히 자기의 욕구를 억압하는 생존방식.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면 동기가 생기지 않는 삶의 방식. 요구가 늘어날수록, 지위가 올라갈수록 나는 더욱더 책임을 다하고자 애썼고,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없는 나날들이 많아지면서 천천히 질식되고 있었던 것 이다.



(p.112) “이웃을 사랑하라.”뒤에오는 “네몸처럼”은 종종 간과된다. 


성경의 사랑하라, 에는 ‘네 몸과 같이’라는 말이 따라 왔구나. 몰랐다. 아니, 알았지만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앞으로의 인생에서는 아니, 앞으로의 사랑에서는 ‘나’를 빠뜨리지 않으리라.



***



두 가지가 어려웠다. 책 자체의 번역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순간순간이 너무 괴로웠다는 것. 빼곡한 예시 속 곳곳에서 발견되는 나와 같은 이야기들. 역할 수록 꼭꼭씹어 삼켰다. 속상하고 속상해서 속상함에 내성이 생길 때 까지. 여름내내, 나는 몇 번 이고 반복해서 이 책을 읽었다.


서른 살, ‘무력한 조력자’를 읽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표현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은 고민을 앓던 지나간 3년의 일기처럼. 더 바쳐지지 않는 모습을 자책하면서 괴로워하기를 되풀이했을까.


여전히 스스로에게 온기를 주는 것은 서툴지만, 종종 잊혀지곤 하는 ‘나’에 대해 '내'가 독려할 수 있다면, 앞으로의 삶이 이전처럼 그렇게 어렵게만 느껴지지 않을 것 같다고. ‘초자아에서 자아가 되라’는 책의 처방을 곱씹으면서- 나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돈을 벌고, 또 충분히 쉬기로 마음먹었다.


여전히 나는 누군가를 돕는 것이 좋다. 

나의 능력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기쁘고 즐겁다. 그러나 ‘나’를 도외시하면서 살아가지는 않아야겠다. 그건 정말로 그 누구를 돕는 일도 아니며, 돕지 않았을 때 보다 더 서로에게 상처주고 끝난 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마지막으로, ‘무력감’은 나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일상의 권력 관계에서 거대한 한국사회의 구조에서 특히 세월호의 침몰을 보면서. 우리는 너무 무력했고, 그 무력함이 온몸에 젖어들어 숨이 막힐 정도였다. 모두가 그 구조적 무력감에서 헤어 나올 수는 없겠지만, 개인이 할 수 있는 범위안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식을 택해야한다. 그게 무엇이든 자신의 활동을 통해 조금씩 무력감을 극복한 한명 한명이 늘어 날 때, 사회 총량의 무력함이 – 무력의 구조가 – 타파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


타인을 해치지 않는, 타인을 위하기를 꺼리지 않는 많은 선량한 사람들.


그들이 ‘네 몸처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도록. 

나를 일으켜 남을 세우는 활동들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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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53 조력자 증후군의 결론)

내가 보기에 자신의 조력자증후군에 대한 현실적 접근은, 우선 조력을 초기 아동기에 입은 자기애 적 손상의 비교적 바람직한 해결로 받아들이는 데 있다. 그러면 방어로서의 조력과 자아에 조절된 활동으로서의 조력을 구분하게 된다. … 자아가 강조된 대답은 대략 다과 같을 것이다. “지금까지 제 인생의 기회를 너무 돕는 일에만 쏟아 부었어요. 그걸 넘어서서 이제 기회를 확장시켜볼 수 있어요. 제 문제를 발견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도록 절 도와주세요.” 초자아에서 자아가 되어야 한다. - 프로이트의 언설을 이렇게 변형하는 것이 조력자 증후군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변화 속에서 조력은 폄하되거나 조롱당하지 않으며, 그 자체가 창조적이고 만족감을 주고 자극과 성장의 기회가 풍부한 활동으로서 놓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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