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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평점 :
"(p.25) 새삼스런 이야기지만 가장 강력한 지배는 사람들에게 여행과 독서를 금지하거나 접근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독서 이전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 ‘갑’은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 잃을 것이 없는 사람, 덜 사랑하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권력이 두려워하는 인간은 분명하다. 세상이 넓다는 것,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된 사람이다."
앞으로 생각하고 뒤로 생각해도 말이 되지않는 이야기이지만, 고집세고 궁금한 게 많은 나에게 어떤 종류의 생각과 독서를 말리는 나를 (자신의 방식으로)아끼는 지인이 있었다. 더 놀랍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나는 그의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갸웃하고 난색을 표하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그가 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더는 복잡해지지 않기로 했다.
나는 옮겨적고, 받아적었다. 토론 중에 생각이 달라지면 죄책감이 들었다. 생각이 달라지지 않고 싶어서_ 그가 추천하는 책 말고는 책을 읽지 않았다. 표면 그대로 생각하고, 판단도 그 기준으로 했다.
책을 읽지 않는 시간동안 나의 언어는 메말라갔다.
언어의 부족. 서사의 부족. 삶의 부족. 그리고 성찰의 부족.
어느 날 문득, 버석버석하게 말라가는 ‘나’ 라는 인간이 보였다.
생기없는 스스로의 못남이 견딜 수 없어졌을 때, 사람들에게 ‘나 자신’에 대해서 할 말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몇 년치의 노트와 SNS를 뒤적이기 시작했고 - 지겹도록 똑같은 질문을 다양한 단어로 변주한 내 글들을 읽었다.
나는. 멈춰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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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있는 모든 것을 멈춰야 했다. 가장 먼저 하던 일을 멈추기로 했다. 쉬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 (어느 순간 간절했던 쉬고 싶음은 ㅡ 사실 계속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마음의 브레이크였나보다.)
하던 일을 멈추니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더라.
그리고, 알았다.
더 이상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구나.
꿈에서 깬 것처럼 관계가 재구성되었다.
나를 아낀다면서 하는 ‘충고’가 내게 얼마나 큰 ‘독’이었는 지. 멈추고 나니 알았다. 입맛이 썻다. 많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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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그 사람. 그는 왜 그랬을까를 오랫동안 더듬어 물었다.
"세상이 넓다는 것,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걸까. 그 세계를 만나면, 내가 달아날것 같았나? 아니면 그저 다른 시각으로 이야기하는 타인을 버텨낼 재간이 없는 사람이었던걸까.
막연한 생각 끝의 결론은 ˝그에게는 어떤 의도가 없었다˝는 것. 그냥 그는 자신의 삶의 방식 그대로 살았을 뿐이고, 많은 이들이 그렇 듯 ‘성장‘을 중요하 게 여기는 부류의 사람이었고, 자기 스타일의 조언을 아끼지 않은 거고.. 존경의 대상이 필요했던 취약한 내가 그의 말을 곧이 곧대로만 받아들이려 한 게 뒤틀린 관계의 시작이었겠거니.
나의 성장을 그가 제멋대로 재단했다는 것에 오랜시간 분노했었다.
‘성장’이라는 전제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인 ‘나 자신‘에 대한 화 였을 테지만.. 그땐, 화낼 대상이 필요했다.
나는, 나란 인간은. 아- 얼마나 의존하고 싶은 나약한 고집쟁이였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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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다양하고 풍부하게 사람들을 만났어야했다. 다른 시각의 말들을 듣고, 진한 이야기를 나누고, 미묘한 관계의 긴장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고치고 변주하면서 살아야 했다. 판단은 내가 하는 것이었고, 삶도 스스로가 사는 것이었다.
개인의 평가나 충고에 그토록 깊게 침식당하면 안되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충고와 다가섬을 덕지덕지 온몸에 묻혀가면서, 그렇게 내 세계를 주조해 나갔어야 했다. 그런데, 난. 왜 그토록.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따르려 했던 걸까.
같아지려 애썼던 걸까.
다른 것을 견뎌내지 못했던 걸까.
그렇게 분리되고 싶지않아 발버둥 쳤던 걸까.
그러니까,
스스로를 믿지 못했던 걸까.
"(p.257) 한때 나를 구원했던 것(사람,생각,조직...)이 나를 억압하는 시기가 온다. 이것은 나의 성장 때문일 수도 있고 대상의 변질이나 상실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그것들과 헤어지거나 최소한의 거리를 두어야 생존할 수 있다. 내게 이 이야기는 분리의 어려움에 대한 비유였다. 20년된 관계, 30년된 생각, 사라진 이들과 헤어져야 한다."
<정희진처럼 읽기>의 마지막은 이별을 권했다. 꼭 그녀의 이별 권유가 계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사랑했던 많은 것들과 헤어지는 중이다. 언젠가 다시 돌아갈 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여전히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별로 없다. 일을 멈추고 나니까 더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요즘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을 지경이다. 지금 상황이 스스로에게 납득 되지 않을 때는 울컥울컥 속에서 무언가가 치민다. 무언가를 도모하지 않고 멈춰있는, 진공의 시간이 참기 힘들다. 그렇지만 노력한다. 언제까지나 불안을 질료로 삶을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혼자 있지 못해서, 너무 많은 마음을 허락하는 거.. 그렇게 계속 힘을 들여가며 내면을 응시하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거.. 이제 그만 둬야지. 이 가만히 있는 시간이 주는 불안감은, 일중독으로 좇아 버려야 할 것이 아닌,더 적극적으로 가만히 들여다 보아야 할 내 안의 _어떤_ 신호.달라짐을 자책하지 말자. 분리가 두려워, 나를 해치지는 말자.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나를 억압하는 것들로부터 - 이별하자. 다만, 살아있기 위해서. 스스로를 믿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