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끝내는 개인사업자 절세 공부 - 기초 세법부터 사업자등록, 세금 신고·납부까지 1인 사장님을 위한 맞춤 세금 가이드북
한지온 지음, 홍유연 그림 / 길벗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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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개인사업자가 알아야하는 그냥 딱 세금 개괄. 절세 내용은 딱히 없고.. 세무사 도움없이 종합소득세 신고하고 싶은 저같은 사람에게는 비추천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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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3 10: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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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3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3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3 1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해지고 싶다. 세상에서 쉽게 소구하는 강인함과는 다른 의미로.
비감상적이고 분석적이고 냉소적인 건 타고난 성향이라면, 따뜻하고 동정적인 것에 어쩌지 못해함은 배운 것이고 습득된 것이며 양육된 방식이고 놓지 못하는 것이다. 이분법은 아니다. 이것들은 따로 떼어져 나눌 수 없이 섞여있는 채로 나를 구성하고 있고, 이 두가지 모두를 다 포기하고 가장 딱딱한 상태로 스스로를 구축했을 때 (내가 가장 견고하다 믿었지만 동시에 견고하지 못함을 가장 감추고 싶어했을 때) 역으로 나는 가장 취약했었다.


터프한 그녀들을 따라 읽을 것이다. 감응, 공감, 정서적 반응과 지지를 멈추겠다는 것이 아니다. 고통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이것은 당연한 반응 아닐까) 그 것에 공감했다는 사실만으로 슬며시 안도해버리고(합리화 섞인 환상일지도) 그것만으로 할 일을 다 한 것인 듯 사유를 멈추어버리지는 않겠다는의미다. (어쩌면 사유란 기실 노동이고 나를 볶아채는 것일지 모르는 습벽일테지만) 

감상적이지 않으면서도 결코 비정하지 않았던 그녀들을 배우고 싶고 따라서 살고 싶다.



이 여성 작가들은 직접적이고 선명한 시각으로 위로도 보상도 없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는 과업을 자발적으로 떠맡았기 때문에 터프하다. 이들 모두가 "감상적이지 않다"는 비평을 받은 적이 있다. (중략) 이렇게 감정적 스타일이 젠더화된다면, 결과적으로 감상주의를 배제하겠다는 선택을 하고 끝까지 사유를 밀어붙이고 한계를 시험하고 구체적 목적을 위해 이런 선택을 한 것이라 설명되는 이 여성 작가들은 예외적으로 비범하게 생각이 깊었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정도가 부적절하거나 진지하지 못한 감정적 표현과는 거리가 먼 비감상성은 이들 작가/예술가들이 평생에 걸쳐 추구한 기획으로, 엄청난 자의식으로만 추진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들 사상 모두에서 그의 성정이나 삶의 경험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자전적 요소는 출발점에 불과하다. 그들이 무엇을 썼는지, 어떻게 썼는지, 어떻게 그들의 실천을 상상하고 방어하고 옹호했는지가 비감상성과 그 윤리학을 활용가능하게 만든다. - P15

감정의 전시를 아예 배제하거나 최소화하면서도 수난에 대해 진지하고 참여적이며 고통스럽게 다가가는 태도다. 포화와 부정 사이에 자리한 이 협소한 영역에서 글을 쓰는 이들은 시대와 어긋난 것처럼 보인다. 고통을 성역화하지도 않고 고통에 무관심하지도 않았던 한편, 비정과 냉정으로 오해받은 대안적 전통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실제로 이 대안적 전통은 전혀 다른 자질이며, 나는 그 자질을 터프함이라 부르고 싶다. 이 여성 작가들은 탐구의 대상으로 고통에 이끌렸지만, 고통의 매혹을 끝까지 매우 미심쩍어했다. 이들의 ‘터프함’은 무관심이나 냉담과 혼동하기 쉽지만 그러면 이들의 프로젝트를 곡해하게 된다. 이 작가들은 고통으로부터 위안을 찾은 게 아니라 소위 "현실"에 대한 고양된 감수성을 추구했다. 도착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나, 친근함, 공감과 유대감에서 고통의 위안을 찾는 것은 ‘마취 효과’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고통의 인내, 심지어 고통이 ‘평범’하다고 주장한 것 역시 이 작가들이 지닌 기벽의 일부이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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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렇게 비판적이고 해박하면서도 낙관할 수 있는지. 1985년에 이런 글을 썼다고? 40년을 먼저가신 분.
내가 주목하는 것은 언제나 태도이고 어떻게 이다.
해러웨이는 급진적이면서도 따뜻하다. 있는 그대로를 보면서(중요)도 실망하기 보다는 탈탈 털어낸 그것들에서 가능성을 발견하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항상 실눈뜨고 째려보기 바쁜 염세주의자는 이런 저자의 사상과 태도가 경이롭다. 일단 경이로워만하고 이해는 못하고 있으니 먼저 초벌구이 독서하고 다른 책 경위해서 (ㅋㅋ 말장난) 다시 읽겠음.
왜 도나도나 하는지 알겠네요… 진짜 도나 해러웨이 💕😭



페미니즘 관점의 영구적 부분성은 정치 조직과 참여의 형식에 대한 우리의 기대치에 영향을 미쳐왔다. 총체성이 있을 때만 잘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완벽하게 진실한 언어를 향한꿈, 경험을 완벽히 충실하게 명명하는 가능성을 향한 모든 꿈과 마찬가지로 공통 언어를 향한 페미니스트의 꿈은 전체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인 꿈이다. 모순을 해결하려 하는 변증법 역시 그런 의미에서 꿈의 언어다.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동물 및 기계와의 융합을 통해 서구 로고스의 체현인 (남성)인간이 되지않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학기술의 사회관계를통해 불가피해진, 강력하고 금기시되는 융합에서 체험하는감에 주목하면 페미니즘 과학이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른다. - P69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 및 모니크 위티그와 같은 프랑스페미니스트들은 서로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몸에 관해쓰는 to write the body 방법을 알고 있으며 체현의 이미지, 그리고 특히 위티그의 경우에는 몸의 파편화와 재구성의 이미지로부터에로티시즘과 우주론, 정치를 직조해내는 방법을 안다. 수전그리핀Susan Grifin, 오드리 로드Audre Lorde, 에이드리엔 리치AdriennaRich 같은 미국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에깊은 영향을 주었다. 한편으로는 이들의 영향 때문에 우리가 친근한 신체적·정치적 언어로 허용할 수 있는 언어의 범위가 지나치게 제한된 것 같기도 하다. 이들은 유기체적인 것을 옹호하면서 기술적인 것과 대립시킨다. 하지만 그들의 상징체계 및 그와 연관된 생태여성주의 및 페미니스트 이교 신앙paganism 속에넘쳐나는 유기체주의는, 20세기 후반에 적합한 ‘대립 이념‘이라는 샌도벌의 용어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들은 기계나후기 자본주의 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만들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사이보그 세계의 일부다.
하지만 유기체와 기계의 구분을 비롯해 서구적 자아의 구조를만드는 *깔끔한 구분선이 무너지면서 출현하는 독특한 가능성을단호히 포용할 때, 페미니즘은 엄청난 자원을 얻게* 된다. 붕괴의 동시성은 지배의 기반에 균열을 내면서 기하급수적인 가능성을 연다.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기술적" 오염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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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이별이나 상실을 경험하면 정희진을 읽는다. 내게는 그만한 진통제가 없다. 진통제라니…취소취소. 내겐 그만한 긁어팜이 없다. 헤어짐을 헤집어서 똑똑히 노려본다. 다시는 너한테 당하지 않을거야라고 잘봐둬 잘봐둬 하는 데 성공한 적은 없다. 각각의 이별은 이별자체만의 고유한 특성이 있지만, 결국 잘봐둬 잘봐둬 하면서 내가 알게 되는 건 이별(혹은 분리) 자체를 거부한 댓가라는 씁쓸한 인식? 언제나 철을 모르고 때를 모르는 건 나고 그건 좀 스스로에겐 애석하지만. 철과 때를 아시는 분 신밖에 없지 않나.

만나고 영향을 미치고 헤어지는 건 계절이 바뀌는 것 처럼 자명한 것. 당하다니 무엇을? 모두 겪었어야 할 일들이다. 거기에 피해자와 가해자는 없다. 보이지 않는/ 의식되지 않은 채의 공모가 있을 뿐. 그래도 나는 자주 해명하고 싶어했었다. 아니 늘상 그랬다. 세상에는 그런 관계가 있다. 악의 없이 질문하고 최선을 다해 대답하고 그것이 관계로 굳어져서 교정을 목적으로 심문하고, 관심과 사랑이 필요해서 의미없는 질문을 끌어안은 채 끝없이 자신을 설명하려드는 그런 관계. 나를 설명하거나 해명하려드는 것이 어쩌면 약자의 태도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알게 된 것은 정희진의 글 덕분이다.

힘빠지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해명하려는 노력을 멈추었을 때, 나를 규정하려드는 질문 혹은 단정의 언어들을 마음으로 제법 튕겨낼 수 있었을 때, 그때 우리의 관계 역시 끝나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사이의 그것은 어떤 게임같은 거였을까.

어쨌든 꽤 오랜 시간 이어지고 지속된 나를 설명하려드는 어떤 관계 속의 상황은 이제와 생각해보니 굉장히 수고롭고 고통스러운 노동이었다. 알고나서도 잘 도망쳐지지 않았고, 끊어내려 할 때 마다 빈번히 죄책감이 올라왔었다. 어찌저찌 관계를 끝내는 그 순간까지도 끝내는 이유를 최대한 잘 설명하고 싶어하는 나를 느꼈을 때. 얼마나 치떨리게 스스로가 싫었는지 모른다.


“(26) 나는 누구인가. 모든 사람이 이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물음은 내 경험과 사회의 시선이 일치하지 않을 때, 타인이 멋대로 나를 규정할 때 솟아난다.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넌 누구냐?”라는 심문(審問)에 대한 일차적 반응이다. 식민자는 피식민자가 나는 누구인가를 스스로 상기하게끔 끊임없이 몰아붙인다. 이 질문은 면벽 수도의 자기 탐구처럼 보이지만 실은 전면적인 폭력의 시작이다. 누구나 삶의 특정 시기에 이 물음이 요구되는 순간이 있다. 어떤 이들은 평생 이 질문과 씨름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강요하는 저들에게 어떻게 맞설 것인가. 어떤 방어 태세를 취하면서 무엇을 확보해 나갈 것인가. 가장 흔한 답, 가장 쉬운 답, 그러나 불가능한 현실은 진정한 자아 찾기(나를 잘 설명하기)다. 이는 ‘우리’를 기존의 사고에 묶어 둠으로써 현실을 고착시키려는 식민자의 논리에 부응하여 “저들의 계통”을 강화한다. 상대가 이미 나를 정의하는 권력을 쥐고 있는, 속수(束手)의 상태에서 무슨 말을 하랴.”



그렇다. 어떤 것/누군가/무언가와 헤어지고 정희진의 글을 읽다보면 내가 저지른 오류들이 보인다. 나의 오만함과 무지가 보이고,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것들이 겪었어야할 필연들이라는 사실에 괴로워하면서도 안도하게 된다.

묻지 않았더라면 느리고 묵직한 고통 속에서 오랜시간 허우적 거려야 했을 것이고 묻기 시작하면 집중적으로 날카롭게 창끝에 찔려 창을 돌려 후벼파는 듯한 고통을 단번에 몰아서 느껴야 한다.

나는 후자다. 언제나 후자다. 매를 먼저 맞는 편이고 (때로는 벌어서 맞기도) 호되게 앓아본 경험적 자산으로 내 시간이 소중한 걸 안다. 재빨리 털어낼 수는 없는 상실이라면 공을 들여 괴롭게 압축적으로 응시하고 싶어 정희진을 읽으면서 자괴감을 곰곰하게 씹어 삼킨다. 별 수 없다. 살아야하니까. 그냥 좀 남는 시간이나마 편하게 있고 싶으니까. 읽는다.

읽다보면 안다. 아. 나는 그럴 수 밖에 없었겠구나. 나는 또 최선을 다해 버린 것이다. 그 만큼을 알았고, 이 만큼을 몰랐다. 한계를 인정하게 되면 합리화할 필요도 없어진다. 체념. 잘 정리하고 탈탈 털어 글로써서 어딘가에 봉인. 혹은 (이 글처럼) 전시. 이 과정을 ‘내 무능력에 대한 인식’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만큼 이별 후 정희진 읽기는 어떤 의식이 된 것도 같다.

이번의 애도 기간에 내 눈에 꽂힌 단어는 이 것. 


태클.

“(24) 흔히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다고 하는데, 이는 정확한 말이 아니다. ‘끝’은 원래 끝이 없다. 그리고 아무리 금수저라도 모든 욕구를 다 채우며 살 수는 없다. 문제는 선을 모를 때 생긴다. 적정선을 인식하려면 자신과 인간관계, 사회를 알아야 한다. 모든 인간에게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흙수저는 선을 밟거나 넘으면 바로 태클이 들어오기 때문에 경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좌절’이다. 아니,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처지에서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금수저는 이 정치학에 무지하다. 분간이 없다.”


내가 ‘내 무능력에 대한 인식’이라고 표현하고 종종 여기까지가 나의 최대이구나, 아 이걸 또 몰랐구나 하며 물러서는 그 지점, 어떤 체념 앞에ㅡ 먼저 앞서는 것은 무수한 태클이었던 것일지도. 태클에 너무 익숙해서 태클이 태클로도 안느껴진 건가? 난 그래서 한계, 무능력, 스스로의 약점을 잘 아는 것, 뭐 그런 담론들이 수월하게 들리고 끌렸던가? 선을 잘 아는 것. 선을 넘지 않는 것. 그것은 자원으로도 작용하지만 저주처럼도 느껴져 내가 나에게 미리 앞서서 포기를 주문 한 것은 아닌가하는. 그럼 어디까지가 나를 보호하는 것이고 어디까지가 나의 가능성을 믿고 독려하는 건가. 뭐 그런 질문들.

사족을 더해 조금 재밌는 것은, 이 끝없는 중얼거림(하지만 말해지지 않은 말하지 않은 영역이 더욱 압도적인) … 자아에 초점을 맞추는 것 (필리스 체슬러를 내 방식대로 전유해서)… 그 것말이다. 나는 오늘처럼 이걸 하고 있는 내가 새삼 놀랍다. 나 자신으로 가득차서 뭔가를 끝없이 적고 있을 때. 이처럼 내가 나를 심문해 보는 것 역시 태클에 대한 생존 전략일지도? 그걸 다루는 건 즐겁다. (여분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24) 금수저의 가장 큰 약점은 상대방에 대한 무시가 아니다. 무지다. 흙수저가 이 사실을 간파한다면, 무지한 그들을 이길 수 있다. … 자녀 세대에서는 계급도 세습되지만 동시에 앎의 위치성도 승계된다. 흙수저의 유일한 자산은 *한계선 자각에서 오는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이고, 금수저의 운명은 무지다.* 이것은 계급 투쟁이 일방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황과 전선을 아는 것. 상대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 자의 대결이라면 누구에게 승산이 있겠는가? ”


적정 선을 잘 지키고 의외로 낄끼빠빠 잘한다는 일전 직장 사수의 칭찬은 결국 태클의 반작용으로 내가 체득한 무엇이었고, 곧 나의 자원이었다. (이건 나 스스로가 안다) 하지만 모든 곳에 같은 원리를 작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회생활이 아닌 일상적 관계에서 혹은 사람에게… 친구에게… 연인에게… 가족에게 나는 어떠했나. 


난 어떤 소통을 원했다. 아주 찰나지만 가끔씩은 가능했던 깊숙한 공감을 원했다. 본질에 다가가는 대화를 무의식을 탐색하는 이야기를 원했다. 그리고 빈번히 실패했고(태클), 또 체념하면서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건가하고 생각했다.

내가 잘못된 건 아니었지만, 분명 어떤 사람들은 나를 부담스러워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날은 창피해서 숨고 싶었고, 다시는 마음 열지 않을거야 남모르게 이악물었다. 그리고 또 다시 그리워져서 마음을 열고, 영감을 얻고, 힘을 내고, 또 그러다 조금 더 원하게 되고, 나의 욕심을 탓하게 되고… 그런 상황의 반복. 20대 초반을 생각하면… 관계에서 정당한 권리조차 말하는 걸 그토록 힘들어했던 나였으니 이만큼 온 것도 장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갈 마음을 먹는 것은 또 어쩌면 나 자신의 한계를 더듬어 보는 일이라서… 요 얼마간의 나는 겁이 났던 걸까.

“(11) *나는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다는 것, 더구나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를 알게 되는 것은, 무지로 인해 보호받아 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 사회에 대한 분노, 소통의 절망 때문에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봐.
그 사람이 쓴 글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봐.

이 말은 누가 나에게 해준 말이 아니고 20대의 내가 누군가들에게 자주 하곤 했던 말이다. 우습게도 이 말을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가장 허약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 삼십대 중반 지금의 나다. 내 말이 나를 배반하는 일은 너무도 흔하지만, 이번 거는 배반이 아니라 풍자의 대상이 되어도 할말이 없는 수준의 처참한 자기직면을 가져왔다. 나는 내가 쓴 글이 나였으면 했던가, 감히?

내가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배우겠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겪어내지 않는 동안 내가 키워낸 나 스스로와 내가 안다고 믿었던(!) 관계들은 정말로는 어떤 단단한 믿음의 토대 안에 구축된 그런 종류의 것일까. 글쎄. 그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하지만 요 몇년간의 내게 중요한 관계들은 대부분이 글과 말뿐인 데이터를 삭제하면 사라질지도 모르는 그런 종류의 무엇이었다. 어쨌든 여기서 얻어낸 어떤 부스러기들을 또 잘 그러모아서… 슬슬 사람들을 만나야하는 시점이 오고 있는 것 같다고 요즘 긴박하게 느끼는 중이다. (아…조금만 더 머물러주면 안될까? 팬데믹이여…)


결국 안다는 것은 … 읽는다는 것, 본다는 것, 머리를 굴려서 해석한다는 것과는 다르다는 생각이다. 지식도 그렇지만 특히 사람이 그렇다. 큰일이군. 지금에 너무 익숙해져버렸다. 정말로 어쩌면 나는 소설을 좀 더 읽어야겠다. 아니다. 어쩌면 나는 좀 사람을 더 만나야 하겠다. 아… 아니다. 역시 소설을 좀 더 읽고 사람을 만나야하는 데 왜 소설을 못읽니…. (슬프군)


*

사실은 몇 주 전에 어떤 사람을 떠나보냈다. 
마음 속에서는 떠나 보낸지 오래된 사람인데 한번 더 보냈다.

그를 알고 나를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애도하고 추억했다.
나만 알고 나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은 어떤 관계는 애도도 필요없고 잊어버려도 된다고 말했고, 또 그의 존재 여부와 상관 없이 계속해서 더 미워해도 된다고도 말해주었다.
그를 알긴 하지만 나를 좀 더 많이 아는 사람은 그에 대해서도 나에 대해서도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길게 가로로 놓인 아무런 이야기하지 않음에 조금 오래 머물러있었다.

그와 잘지냈던 시간 보다 힘들어했던 시간들이 더 길고 모두 다 잊어버리기엔 좋았던 기억들이 있지만 나는 그때의 내가 아직도 밉다. 그가 미운 것이 아니라 그때의 내가 불쑥불쑥 견딜 수 없이 밉다.

내 안의 어떤 광막한 황폐함을 마주했을 때. 자주 오는 건 아닌 데, 그냥 좀 삶이 무겁고 힘들 때.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내가 생겨먹기를 이런 모양이라는 걸 턱하니 그냥 척하니 바로보게 될 때. 누군가을 탓하고 싶은데 탓할 사람이 없으니까 그냥 그때의 나를 탓하는 거다. 그만하고 싶은데 잘 안된다.

무튼 이걸 다 쓰고 나면 나는 좀 미안해져서… 그를 애도랄까 비슷하게 떠나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그냥… 다썼는데… 지금의 내 질문들만 주절주절 늘어놓았다네.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그도 알고 나도 아는 사람들을.
내가 그를 애도하고 추억할 수 있을 때까지는. 
안만나고 싶다는 것.

그냥 지금이 좀 덜 힘들면 좋겠다. 그러면 그때의 나를 좀 덜 미워하고 여유있게 추억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러려면 이제 사람을 좀 만나야하는 데… 새로운 사람들을… 나는 나 자신이 좀 변한 건지 장담을 할 수가 없고.
그래. 결국엔 또 이런 결론을 내고 오늘의 글이 끝나지는 구나….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 다르게 생각하기가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식 정보화 사회의 ‘진정한’ 의미는, 언어/사유의 힘이 중대해졌다는 사실, 그리고 사회적 약자가 자기 언어를 갖지 않으면 존재 양식을 잃는 시대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돈이나 물리력이 없다. *절대 다수인 사회적 약자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자원은 윤리와 언어뿐이다.*
- 언제나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윤리와 언어 뿐. (낯선 시선 중에서)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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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4-28 17:2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니 잠깐 쏠로라더니 언제 만나고 언제 헤어짐? 요즘 연애하느라 바빴긔? (아니 낚인 거 같아 얼른 끝까지 읽어보자)

공쟝쟝 2022-04-28 17:27   좋아요 5 | URL
그런거 아녜요 ㅠㅠ 이 바보야!!

잠자냥 2022-04-28 17:29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 응 그렇다라귴ㅋㅋㅋㅋㅋㅋㅋㅋ

2022-04-28 1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28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28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28 1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28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28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28 1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persona 2022-04-28 20:1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빈 자리를 마주할 수 있을 때까지 무탈하시고요, 모쪼록 존버 파이팅입니다. 사람 만나는 것도 만나질 때 하세요. 윤석이가 짜장면 먹을 때처럼 자연스럽게! 쟝쟝님 마음의 여유와 평안과 씩씩함을 응원합니다. ㅎㅎㅎ

공쟝쟝 2022-04-28 21:15   좋아요 3 | URL
네. 그러려구요. 막상 만나면 너무 막 들떠버리곤 해가지고 (-_-;;;) 일단은 사이버 상으로만 만나는 데... 오랜만에 하루에 몰아서 만나려니 벅차네요? (북플러의 하루...) 그러고 보면 제가 알고보니 메타버스 형 인간인가 봅니다. 그래도 가끔 진짜 사람의 눈빛과 목소리가 그리워용... 흐흐...

커피소년 2022-04-29 1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 공장 돌리시는건가요? 공장장님

커피소년 2022-05-05 1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는 님이 너무 부럽습니다. 행복해보여요.

독서괭 2022-05-06 00: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힘든 일이 있으셨군요, 쟝쟝님.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쟝쟝님의 심정이 전해져 오는 듯 합니다. 힘내라는 말은 함부로 못하겠고,, 이제 슬슬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하시니, 만나서 새우깡 뜯을 날이 다가오나요? ㅎㅎ

공쟝쟝 2022-05-06 10:43   좋아요 4 | URL
네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잘 흘려보낸 것 같아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괭님 새우깡을 뜯으시면 전 옆에서 깡소주를…* 헤헤^^

새파랑 2022-05-07 08: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쟝쟝님 또 축하드립니다. 이번주말에는 깡소쥬 대신 위스키로 ^^

thkang1001 2022-05-07 19: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공쟝쟝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2-05-07 17: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2022-05-10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0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0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훌륭한 책 스멜이 바로 느껴져벌임… 열독하겠음…😤



질문은 단순하다. 여성들의 성매매 참여를 만들어내는 경제적 요인의 구체적 형식은 무엇이며, 이것은 성매매 산업에서 어떻게 구성되어 작동하는가? 이 같은 질문은 기존 여성학이 성매매에서의 노동, 부채, 폭력, 자립 등을 이해한 방식과 실제 여성이 겪는 경험 간의 괴리를 드러냄으로써 현대 한국의 사회경제, 혹은 성의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 of sexuality에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질문은 이 시대 경제에 대한 "일반적 조명general illumination"(Marx, 2007[2005]: 78)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구조 안에 숨겨진 여성에 대한 착취와 폭력의 내적 관련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여성주의적 신념에 근거한다. 궁극적으로는 그간의 여성운동의 방향성을 점검하고 성매매 문제를 금융화된 자본주의 시대의 여성문제로 적극적으로 구성하기 위한 하나의 시각을 제안하는 것이이 책의 목표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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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4-19 1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 가는거얏, 고고씽!! 궈궈!!

공쟝쟝 2022-04-19 16:57   좋아요 0 | URL
아 대중교통 독서 최고네요 ㅋㅋㅋㅋ 오랜만에 집중 했어요ㅋㅋㅋ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