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219장 ‘주의 음성을 내
[가정 예배] 흰옷을 입은 자
[기타] 2002년 05월 23일 (목) 10:24
가 들으니’

예배에로의 부름:시편 49;1∼2

신앙고백:사도신경

기도:가족 중에서

본문:요한계시록 3;4∼6

요절:“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 3:4)

말씀:사데 교회는 형식화되고 가식화되어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그런데 그런 중에도 주님의 커다란 격려의 말씀이 있는데 이것을 우리가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 3:4)

그렇게 타락한 사데 교회 속에서도 사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지키고 신앙을 지키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를 계승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일제시대 정치세력에 야합하고 세속화되는 교회를 걱정하며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의 ‘오종목 나의 기도’라는 설교가 있습니다.

“아,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평양아!평양아!예의 동방의 내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모란봉아,통곡하라.대동강아 천백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드리리다.드리리다.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이다.‘누가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죽고 죽어 열백 번 다시 죽어도 주님 향한 대의 정절(大義貞節)변치 아니하오리다.여러분 예수는 살아계십니다.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으사이다”

디모데전서 4장 10절에는 바울의 기막힌 간증이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무너져가는 고려를 붙잡고 눈물 흘리던 충신 정몽주의 시가 있습니다.“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신앙의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신앙의 옷을 더럽히지 맙시다.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견디고 꼭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주님,성도들이 믿음과 거룩의 정절을 지키어 옷을 더럽히지 않고 주님 앞에 서게 하옵소서.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주기도문

이창준 목사(천안갈릴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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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와 그림으로 만나는 위대한 신앙인 42명..'나를 부르는 소리' 출간
2002년 12월 18일 (수) 17:45
시와 그림,일화로 기독교사에 빛나는 신앙인물 42명을 조명한 책이 나왔다.

월간 "새벗"의 김영진 발행인이 쓴 "나를 부르는 소리"(성서원,1만2천원)이다.

사막의 수도자 성 안토니우스,작은 예수 성 프란체스코 등 세계의 신앙 인물 25명과 이승훈 이상재 안창호 등 한국의 신앙인물 17명을 다뤘다.

"조국은 죽음보다 강하여라/애국심과 신앙심으로 무장한 채/오늘도 적진 속으로용감하게 뛰어드는/한 마리 불사조여/열아홉 꽃봉오리여"

저자는 미카엘 대천사의 음성에 이끌려 열 일곱의 어린 나이에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돼 나를 구한 잔 다르크를 이렇게 노래한다.

또 종교개혁의 영웅 마르틴 루터에 대해서는 "그가 울린 개혁의 종소리는/잠든중세 유럽의 하늘을 일깨웠고/그가 올린 개혁의 횃불은/어둔 세상에 복음의 참빛을 비춰 주었네"라고 찬양했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 신앙을 전한 탐험가요 의사인 리빙스턴은 "진정 아프리카의 친구"라 했고,마더 테레사 수녀는 "아기를 낳지 않은 처녀였지만 수많은 생명을 다시 태어나게 한 위대한 어머니"라고 기렸다.

또 도산 안창호 선생은 소나무에 비유해 "소나무의 깊은 뿌리/영원토록 푸르고푸르러라"고 노래했으며 목숨을 걸고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주기철 목사에게는"이 땅에 오신 작은 예수"라는 제목의 시를 바쳤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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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이 뿌린 복음의 씨앗 평화·통일로 열매맺길…”
[기타] 2003년 03월 02일 (일) 20:03
3월1일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 금식기도회’에는 특별한 손님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순교자 가족대표로 참석한 주광조 장로,손동희 권사,이사례 권사는 과거 선친의 신앙의 유산을 되새기며 남북평화와 민족 복음화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만세삼창을 주도했다.

극동방송 상임고문이면서 영락교회 원로장로인 주광조 장로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막내아들(4남)이다. 주장로의 기억 속에는 일제에 의해 아버지가 공중에 거꾸로 매달려 매질을 당하고 고춧가루 물에 괴로워하며 모진 고문을 당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밝혔다.

1944년 3월31일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모습을 본 주장로는 푸른 수의를 입고 자신을 향해 함박웃음을 지어보였던 아버지의 그 표정을 잊을 수 없다며 그날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아버지”라고 부른 뒤 큰 절을 올렸다고 회상했다. 주장로는 “이후 한달여 뒤 아버지는 싸늘한 시체가 돼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다”면서 “이후 일본인만 보면 피가 역류했지만 어머니의 ‘원수 사랑’ 실천을 보면서 오히려 일본을 더 아끼게 됐다”고 고백했다.

이사례 권사는 ‘관용 백인 겸손’의 세가지 덕목을 가르쳤던 이기풍 목사의 유일한 생존 혈육이다. 4남2녀중 막내인 이권사는 이목사가 57세 때 얻은 딸이다. 1908년 제주도 첫 선교사이면서 첫 개신교회인 성내교회를 세운 이기풍 목사 역시 1938년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일제의 고문으로 42년 순교했다. 이목사는 성도 가정이나 교회,노회에서 싸움이 일어날 때마다 모든 분쟁을 해결했으며 선교정신의 상징으로 불리운다.

손동희 권사는 6·25때 순교한 손양원 목사의 장녀다. 전남 여천 애양원교회에서 시무하던 손목사는 퇴각하던 공산당을 전도하다 그들의 총탄공격을 받아 순교했다. 이에 앞서 손권사의 두 오빠도 믿음의 절개를 지키다 좌익 학생들의 총에 맞아 순교했다.

손목사는 꽃다운 나이에 먼저 천국으로 떠나보낸 두 아들의 장례를 치른 뒤 사건의 주동자로 체포된 범인을 양아들로 삼아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쳤다. 그는 ‘가난을 애처로 삼고 괴로움을 선생으로 삼고’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 손권사는 “이들 순교자들의 신앙의 헌신이 헛되지 않도록 나라와 민족을 위해 더욱 열심히 깨어 기도하는 강한 우리 민족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자의 후예들이 3·1절 84주년을 맞아 여의도에 함께 모여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이땅의 1200만 기독교인들을 향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촉구하는 간절한 외침이었다.

노희경기자 hk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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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순교 유적지 탐방] 죽음으로 지킨 신앙… 한국교회 부흥 씨앗
[기타] 2003년 03월 14일 (금) 15:44
길을 떠나려면 늘 마음이 설렌다.그 설렘을 안고 길에 서면 문득 ‘이 길은 예전에 누가 걸었던 길일까’란 질문이 밀려든다.

한(恨). 길에서 ‘한’을 느끼는 건 질곡으로 가득했던 우리네 삶 때문일 게다. 옛길 옆으로 새 길을 넓게 뚫고 역사와 숨결을 담은 흙을 포장재로 덮어놨지만 그 길을 걸었던 수많은 이의 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다.

군홧발 소리와 포성,말발굽 소리,민중의 아우성. 그 속에서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이들의 외침도 작지 않은 크기로 들려온다. 이들의 외침은 곧 한을 숙연함으로 바꿔놓는다. 내 신앙을 되돌아보게 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만든다.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02-766-6319) 이사들과 함께 최근 순교 유적지를 찾았다. 사무총장 이응삼 목사와 김철수 목사 등이 여정을 인도했다. 순교자기념사업회는 당일,1박2일,2박3일 일정으로 전국의 순교유적지를 찾아볼 수 있도록 성도들을 돕고 있다.

여정의 첫 시작은 전남 여천군 성산교회. 애양원 교회로 알려진 곳이다. 6?25때 공산군에게 목숨을 잃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손목사는 1939년 36세의 젊은 나이로 애양원교회 2대 목사로 부임했다.

애양원은 1909년 광주 광혜원장 윌슨 선교사에 의해 시작됐다. 목포에서 활동하던 포사이드 의료 선교사가 광주로 가던 길에서 발견한 한센씨병 환자를 치료해줬던 것에 자극을 받았던 것. 그러다가 1925년 여천군으로 이전했다.

손목사는 이곳에서 한센병 환자들의 피고름을 입으로 직접 빨기도 하고 환자의 목을 끌어안고 기도하고 음식을 나누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다. 그는 1948년 여순반란사건으로 두 아들을 잃었다. 손목사는 두 아들을 죽인 당사자를 양아들로 삼았다. 또 1만원의 감사헌금을 하기도 했다. 당시 손목사의 월급은 80원이었다. 사랑을 실천하던 손목사는 1950년 9월13일 퇴각하는 공산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순교의 발자취를 찾는 걸음은 전남 영광군 염산면 야월교회와 염산교회로 이어졌다. 공산군에 의해 각각 65명과 77명의 성도들이 목숨을 잃었다. 야월교회의 경우 가족을 포함한 65명의 성도 전원이 순교했다. 야월교회는 1908년 유진 벨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회. 6?25 직전 후방 교란을 목적으로 남파된 게릴라들은 염산면으로 침투했다. 인민재판 등으로 마을을 유린하려 했지만 기독교인들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공산 게릴라들은 성도들을 염전에 판 웅덩이에 묻어 죽였다. 예장통합 광주노회는 이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0년 11월 순교기념탑을 교회 뜰에 세웠다.

인근 염산교회도 같은 경우. 신앙을 지키려던 성도들을 공산군은 죽창으로 찔러 죽이거나 목에 돌을 매달아 수장시켰다. 칼로 목을 베기도 했다. 성도들은 물에 빠져 죽으면서도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라고 찬송을 부르며 죽어갔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H B 헐버트)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아펜젤러)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언더우드)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젠슨)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켄드릭)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나라에 왔다가 이곳을 조국으로 삼은 이들의 목소리는 서울 합정동 서울외국인묘지공원에서 들을 수 있다. 공원에는 종교계 언론계 교육계에서 활동했던 외국인 인사 500여명이 묻혀 있다. 아펜젤러와 에비슨 선교사,대한매일신보의 토머스 베델, 조선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헐버트 박사 등 선교사 75명과 그 가족 36명도 함께 있다.

마지막 여정인 경기도 용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은 돌비 성구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순교자기념관은 구한말 혼란기와 일제의 잔악한 탄압,냉전 이데올로기 속에서 신앙을 지킨 순교자 200여명의 사진과 유품이 전시돼 있다. 기념관 돌비에 적힌 주기철 목사의 일기 한 편이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주님을 위하여/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주님을 대하오리까/주님을 위하여/이제 당하는 수옥(囚獄)을 내가 피하였다가/이 다음 주님이/‘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주님을 위하여/오는 십자가를 내가 지금 피하였다가/이 다음 주님이/‘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용인?여수·영광=전재우기자 jw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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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10명중 9명, 혼전 성관계 `가능'>
[속보, 지역] 2001년 06월 17일 (일) 08:30
(대구=연합뉴스) 이재혁기자= 대구지역 대학생 10명 가운데 9명이 혼전 성관계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등 개방적인 성의식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경북대 신문방송학과가 최근 대구지역 4개 대학생 420명을 대상으로 성의식 실태를 조사한 결과 혼전 성관계에 대해 `절대로 안된다'는 응답은 11.8%에 불과했다.

조사 대상자 가운데 54.2%는 `사랑한다면 가능하다', 17.7%는 `결혼할 사이면가능하다'고 응답했고 `사랑없이도 가능하다'는 응답도 10.3%나 됐다.

또 대상자의 48.2%가 혼전 동거에 찬성했으며 그 이유로 `상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기 위해'(58.1%), `결혼보다 자유로운 생활 가능'(19.4%), `결혼을 더욱 신중하게 선택하기 위해'(14.5%), `경제적 효율성'(3.2%) 등을 꼽았다.

성관계를 가진 상대와의 결혼에 대해서는 `안해도 된다'는 응답이 64%나 됐고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응답은 12.1%에 그쳤다.

이밖에 결혼 상대자의 성관계 경험에 대한 질문에는 5.9%만이 `용납할 수 없다'고 응답했고 조사 대상자의 27%가 성관계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yij@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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