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각오 (一死覺悟)

 

                            요한복음 11: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동무에게 말하되 우리도 또한 가서 같이 죽자 하더라』


요한복음 11장 16절은 나사로의 부생장으로 읽게 되다. 예수님 전도의 시기는 점점 끝나게 되고 십자가는 차차 가까워 오는 때 마침 사랑하는 친구 베다니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 그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급히 오시어 병고쳐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이틀이나 지체하는 중 나사로는 그만 죽었다. 예루살렘에는 예수를 죽이려는 무리들이 기회를 노리고 있는 형세이다. 그러나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베다니를 향하여 한 걸음 두 걸음 올라가시었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라 위험한 곳에 전진하는 제자들은 위구(危懼)한 생각이 깊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에 도마가 동무에게 이르되 우리들도 또한 가서 같이 죽자고 부르짖었나니 이는 솔직한 도마가 위험 직전에 일사를 각오하는 말이다.

비판의 사람 도마도 사선(死線)을 넘어선 이상 창검이 족히 두려울 바 없는지라 후일의 도마는 과연 피사와 인도에서 선교하다가 인도인의 창에 피를 뿌려 순교하므로 인도 교회의 터를 개척하였다. 그래서 7월 1일은 도마의 순교일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도마와 같이 일사 각오가 있어야 한다.


1. 예수를 따라서의 일사각오


이제 위험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를 따라가려면 생명을 아끼고는 따라갈 수 없다. 도마의 생각에 금번 행차에는 위기를 벗어난다 하더라도 수난의 최기(最嗜)는 멀지 않은 장래에 닥쳐올 것을 직감(直感)하였던 것이다. 예수를 버리고 사느냐? 예수를 따라 죽느냐?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죽는 것이오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은 정말 사는 것이다.

그래서 솔직한 도마는 「우리도 또한 같이 죽자」고 일사를 각오한 것이다.

예수를 환영하던 한 때도 지금 지나가고 수난의 때는 박도하였나니 물러갈 자는 물러가고 따라갈 자는 일사를 각오하고 나서라.

『무릇 나에게 오는 자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의 생명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또 누구든지 저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

『그리스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들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신지라』(벧전2:21) 이 천지간 머리 둘 곳 없는 곤궁의 자취 사람들에게 쓸어버리우는 고독의 자취를 우리도 밟아야 하고 병자와 가난한 자를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의 자취, 도처에 핍박하던 곤고의 자취를 우리도 따라 나가야 한다. 망하여가는 예루살렘 성 하에 눈물의 자취! 겟세마네 동산의 피땀의 자취! 우리도 일보 이보 눈물과 땀방울의 자취 걸어야 하고 골고다의 흘리신 피의 자취, 우리도 이 피자취에 엎디어 이몸을 십자가의 제단에 드려야 한다.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 질까 십자가 각기 있으니 내게도 있도다. 성 도마의 일사 각오 인도 도상(印度途上)에 뿌리는 피!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를 따라 일사각오!


2. 남을 위하여의 일사각오


주님의 이번 베다니 행차는 한 사람 친구 나사로를 위한 모험이오, 마르다와 마리아의 간구에 응하여 수고하시는 것이니 남을 위한 모험이다. 이 예수를 따라가는 제자의 일행도 남을 위한 수고라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도 또한 가서 함께 죽자』는 도마의 결심은 남을 위한 일사각오다.

예수의 일생은 순전히 남을 위한 일생이니 이 세상에 탄강하심도 남을 위하심이오 십자가에 죽으심도 죄인을 위하심이었나니이 예수를 믿는 자의 행위도 또한 남을 위한 희생이라야 한다. 세상 사람은 남을 희생하여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지만 예수교는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구원하는 것이다.

살신애인(殺身愛人) 그 얼마나 숭고한 정신이며 그 얼마나 거룩한 행위이냐! 감리교 제 일대 선교사 아펜셀라 목사는 조선 감리교의 기초석이오 배제와 이화학교의 아버지다. 이보다 저의 최후는 더욱 고귀하였나니 마지막 전도 여행에 수증기선으로 남행하다가 그 배는 불행히 파선하였다. 자기는 일등실(一等室) 손님으로 구조를 받아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행자인 조선인 여학생을 건지려다가그만 죽어버렸다. 오! 이 얼마나 거룩한 죽음이냐! 남을 위하여, 일개 외국인 여학생을 위하여 만리 타국에 그 생명을 버리는 그 정신은 우리 조선 교회 역사상에 살아있고 그 영혼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빛나리로다. 더구나 그 아들 그 딸도 조선을 위하여 선교를 계속하고 있지 아니한가?

흑노 해방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아브라함 링컨의 아름다운 일생, 아프리카 개척을 위하여 몸을 드린 선교사 리빙스톤의 장열한 일생! 이는 다 남을 위한 제물이다. 남양군도와 인도와 중국의 선교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자 백이요 천이다. 이들은 다 예수의 정신을 계승한 희생이다. 당년 나사로를 위하여 일사를 각오한 도마는 후일 억만의 인도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었도다! 숭고할거나! 도마의 일사각오! 오늘 우리에게도 남을 위한 일사각오.


3. 부활 진리를 위하여 일사각오


주님 이번 베다니 행차는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기 위하여서의 모험이다. 주님이 베다니에 도착한 때는 벌써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애곡의 베다니었나니 주님은 사랑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인생의 비극을 눈물뿌려 곡하시었다. 기도와 함께 『나사로야 나오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응하여 천지도 놀라는 듯 나사로는 부생하였다. 아! 부활! 할렐루야! 영광일세.

나사로의 부생은 이적중 최대의 이적일 뿐 아니라 부활의 최대 교리를 산 사실로 보여주는 이적이오 또한 장래에 예수의 부활을 알려주는 사실이다. 그래서 『너희들을 위하여 기뻐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믿게 함이라』(요11:15)고. 『이 말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사 람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함이라』(요11:42)고 예고한 대로 나사로는 부활하였다. 이는 주님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을 믿게 하는 큰 이적이다.

도마가 이번에 예수를 배종(陪從)하여 부활의 사실을 목도하게 되었으니 『우리도 또한 가서 같이 죽자』함은 미리 안 것은 아니나 부활의 목도할 수 있는 일사의 각오라 할 수 있다. 후일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고 대오철저(大悟徹底)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라』고 증거하였다. 그런즉 도마는 나사로의 부생을 통하여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는 동시에 신자의 부활을 확신하였다. 그래서 도마는 이 부활의 복음을 파사와 인도에 전하였다.

인류에게 유익을 주는 진리의 발명은 모두 희생의 결과 아닌 것이 없다. 아메리카 대륙이 인간의 복지되기까지 콜럼버스 이래허다한 항해자의 수고가 있었고 전기등이 우리 앞에 밝아지기까지에는 에디슨 같은 과학자들의 뇌고가 쌓였던 것이다. 陷之(함지) 死地面後生(사지면후생) 유사이생(有死而生) 죽음이 있는 뒤에 삶이 있다. 한신(韓信)의 배수진(背水陣)도 일사각오다. 일사각오 한 뒤에 승리가 있고 발명이 있고 살 길이 있다. 하물며 천래의 진리 부활의 진리라오. 내세를 부인하는 공산당 무리도 그 주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늘 영생을 믿고 부활을 소망하는 신자들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느냐?

부활의 복음이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피로써 전지 우전하여 나려오는것이다. 로마제국의 박해하에 오십만 성도의 피가 흐르고 참 복음을 위하여 로마교 법왕 악형하에 백만 신자의 피가 흘렀다. 바디칸 궁중에 봉쇄된 성경을 개방하여 만민의 성경이 되기 위하여는 위크리프의 백골이 불에 타지고 틴달의 몸이 재가 되지 않았는가? 신학생 여러분, 제군의 읽는 성경은 피의 기록! 피의 전달이다. 신학을 말하므로 제군의 사명이 다 되는 것인가. 피로써 전하여 온 부활의 복음을 우리 또한 피로 지키고 피로 전하시이다. 일사각오 도마는 부활의 복음을 위하여 인도도상에 피를 뿌리었소. 오! 오늘 우리에게도 부활의 복음을 위한 일사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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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9:3-7
당신은 살아 있는 사람입니까?


(산 자는 참예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이산가족이 50년만에 그리던 혈육을 만나는 광경을 보고 세계가 울었습니다.
혈육은 강하고 뜨거운 것임을 생생하게 보여준 드라마와 같은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50년만에 이루어지는 상봉을 불과 이틀 앞두고 별세하셔서 참예하지 못한 분도 있고, 꿈에도 그리던 얼굴을 만나겠다고 비행기를 타고 평양을 방문했지만 이미 돌아 가신 분을 만나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남한은 텔레비전이 이산가족확인에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온 국민들에게 보급되어 있는 텔레비전을 통하여 북한에서 남한에 있는 가족을 찾는 자들의 명단이 발표되면서 상봉절차가 매끄럽게 진행되었습니다만 북한에서는 110세의 오마니가 살아계신다는 소식에 천만이산가족들의 부러움을 샀던 분이 상봉날짜 불과 사흘 전에 이미 40년전에 돌아가셨다는 것이 확인되어서 온국민들을 안타깝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번에 가족을 만난 이들은 세계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는데 중요한 것은 살아있었기 때문에 참예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앞으로도 남북이산가족 상봉은 계속될 것이라고 합니다만 이것은 살아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남한을 방문한 사람들 중에는 혹 부모님을 만난 경우가 있습니다만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고, 북한을 방문한 사람 중에 의사자격으로 참여한 한 분 외는 부모님을 만난 경우가 없었습니다. 이 세대가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시간은 우리가 붙들어 맬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살아 있습니까? 세상만사는 아무리 좋은 것이 있다고 하여도 산 자만이 참예할 수 있고, 비록 하찮은 것이지만 죽은 자는 참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살아 있다고 한다면 산 자의 특권을 행사하십시오. 기독교 신앙은 산 자의 것입니다. 산자만이 참예할 수 있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산 자만이 죽을줄을압니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남은 죽을줄 알면서 자기가 죽는줄은 모릅니다.
살아 있는 자는 죽을줄을 알아야 합니다. 죽을줄 모르는 사람은 그 인생을 참되게 살 수 없습니다.
죽는줄 아는자만이 죽음을 예비할 수 있습니다.

시편 116:15에서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고 하십니다.
왜 성도의 죽음을 귀중히 여기십니까? 그 이유가 시편 116:12-14에 말씀하십니다.
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13)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14)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성도는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하겠느냐는 마음으로 여호와의이름을 부르며 서원을 갚으며 하나님 앞에서의 삶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2:16이하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한 해 농사를 열심히 지었습니다. 그 해에 곡식을 쌓아둘 곳이 부족할 정도로 소출이 풍성하였습니다.
그는 이것이 다 자기가 열심히 일한 대가라고 생각하며 곡간을 더 크게 지어서 곡식을 쌓고 말합니다.
"내 영혼아 곡간에 곡식이 풍성하니 이제 먹고 마시며 즐기자"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보시고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죽기로 각오
하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주기철목사님은 일본형사들이 그렇게 회유하고 괴롭힐 때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무릎꿇었지만 그는 일사각오로 살아?ㅆ기 때문에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죽은 자는 죽는 것을 모릅니다. 말 없이 누워 있습니다. 요즘 한 일 년 동안 가보지를 못했습니다만 지난 여름까지만해도 그저 일년에 몇 번 공동묘지를 가봅니다. 무슨 사연이 있어서가 아니라 공동묘지에 가면 인생을 생각할 수 있고 죽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수많은 묘에 누워있는 자들이 일어날 것같습니다. 그래서 이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심정으로 소리를 처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이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분을 위해 충성합시다. 할렐루야!!!'
아멘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막 일어나서 목사님 우리 목사님 할 것 같은데도 아멘하며 일어서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아하, 여기가 공동묘지구나는 생각이 들면 괜히 무서워서 걸음아 날살려라 하고 쫓아 내려오기도 합니다.

산 자의 특권은 자신의 죽음을 알고 예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펄전목사님의 "지금 하십시오"라는 시가 있습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하십시오
오늘 하늘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는지 모릅니다.
,,,
불러야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엔 너무나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산 자만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피조물 중에 웃을줄 아는 것은 인간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웃을 수 있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산 자만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세상을 사는데는 낙을 누리는 방법이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이는 막가는 인생을 살면서 그것을 낙으로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 안에서 낙을 누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에 보면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습니다. 짐승도 종류대로 수 많은 짐승을 만드셨습니다. 새도 그 종류도 수 많은 새를 만드셨고, 물고기도 그 종류대로 수 많은 물고기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보실 때마다 좋았더라 고 하십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기사는 이 두가지 면에서 다른 피조물과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은 종류대로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사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창조하시고는 심히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이는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피조물은 같은 과에서 혼합생명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른 그 무엇과도 혼합인간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는 그 종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 저녁에 말씀드린대로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습니다. 사실 원문은 천사가 아니라 엘로힘 즉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우리가 어찌 인생을 그렇게 막 살 수 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 속에서 낙을 누리는 즐거운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창립 칠주년을 맞이 하였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므로 칠 년을 수일처럼 여기며 봉사하였습니다. 야곱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주님의 사업에 협력하고 봉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새천년 가을에 내가 살아 있음을 알고 주의 나라와 그 역사에 감사와 기쁨으로 참예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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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윈도우]일사각오 주기철 목사


게재일 : 1999-4-28    분류 : 평신도    기자 : 김은홍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신사참배에 저항했던 주기철 목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55년이 지났다.

교회는 그를 면직하기도 했으며 사면하기도 했다. 그의 신앙의 절개를 꺾으려고 유혹하기도 했으며 그의 신앙을 본받자며 소리지르기도 했다. 그의 삶과 죽음을 깎아 내리기도 했으며 추켜세우기도 했다.

그를 면직하고 그의 신앙의 절개를 꺾으려 했고 그의 삶과 죽음을 깎아 내린 것이 한 시대의 대세였다면, 그를 사면하고 그의 신앙의 절개를 본받자 떠들고 그의 삶과 죽음을 추겨세운 것 역시 한 시대의 추세를 따른 것뿐이었다. 그래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우리는 부끄럽다. 시대를 거역하며 진리를 위해 투쟁할 수 있었던 그 앞에서 우리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극에 치닫고 있던 1935년 5월 금강산에서 열린 총회 주최 목사수양회에서 주기철 목사는 설교를 한다. 『예언자의 권위』가 그날의 설교 제목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일제의 강압과 회유에 신사참배 수용 쪽으로 굴절되어 가는 교회 앞에서, 엘리야와 예레미야와 세례요한을 이야기했다.

저들은 누구인가? 바알 우상에 굴복하고 나봇의 포도원을 늑탈한 아합 왕을 엄책한 이가 엘리야였다. 시대와 대중에 아부하지 않고 시대가 태평성대를 노래할 때 망국을 외친 「매국도」, 대중이 절망의 구릉에 빠져있을 때는 소망을 노래한 이가 예레미야였다. 동생의 아내를 빼앗은 헤롯왕의 죄를 고발한 이가 세례 요한이었다. 저들은 한결같이 절대 권력에도 대중에도 영합하지 않은 이들이었다.

주기철은 엘리야와 예레미야와 세례 요한을 얘기함은 신사참배에 굴복하는 지금을 문제 삼기 위함이었다. 『여러분도 엘리야의 신앙, 엘리야의 기도가 있으면 엘리야의 권능, 예언자의 권위가 설 것이다. 오늘 목사의 권위는 서는가, 못 서는가?』 『여러분! 오늘 우리도 예레미야의 입장에 서있지 않은가? 대중과 시대에 아부하는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외치는가?』 『생살여탈의 대권을 잡은 임금 앞에서 그 죄를 책망하는 세례 요한도 일사각오였고, 나단이나 녹스도 일사각오했던 것이요, 루터도 물론 일사각오였다. 일사각오 연후에 예언하는 것이요, 일사각오 연후에 예언자의 권위가 서는 것이다. 여러분 몰라서말 못하는가! 왜 벙어리 개가 되었는가? 오늘 목사도 일사각오 연후에 할 말을 하고 목사의 권위, 예언자의 권위가 서는 것이다. 그런데 일개 경찰관 앞에서 쩔쩔 매고서야….』 결국 여기서 일본 경찰은 주기철 목사의 설교를 중단시켰다.

그리고, 1944년 4월 21일 주기철 목사는 평양형무소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9년 전 일제는 주기철 목사의 설교를 중단시켰다. 그러나 그의 예언자적 삶은 가로막을 수 없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라며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그리고 총회 후에 총회 「수뇌부들」은 평양신사에 참배했다. 양심의 가시, 주기철 목사가 없는 자리에서(총회 직전 일제는 주기철 목사를 수감하는 사전 공작을 했다) 그들은 일제가 제공한 타협안에 좇아 신앙 양심을 저버렸다. 그들에게 주기철의 고집은 헛된 것이었다.

그의 신사참배 거부와 죽음을 「헛된 죽음」 「자기 학대」 「계율주의」 「독선」 「가련한 보수주의」로 폄하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 역시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라 국민의례에 불과하다는, 주기철을 죽이고 조선 교회를 농락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그 논리를 충실히 따랐다.

한편 그렇다. 「신사참배는 국민의례」, 맞는 말이다. 일제는 그들의 「천황」을 「현신인」(顯神人)이라 했다. 「살아있는 신」 천황과 그 조상을 숭배하는 국가신도(國家神道)의 나라, 일본에서 국가는 곧 절대자 그 자체였다. 「천황」과 「국가」라는 절대자에 절하는 사람들의 의식이었다. 신사참배는 국민의례이자 국가종교의 종교의식이었던 것이다.

또 더러는 주기철 목사를 민족주의자로 칭송하기도 한다. 신사참배 거부는 곧 일제에 대한 항거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황과 일본에게 절하지 않은 주기철은 조선 민족도 숭배하지 않았음에 조심해야 한다.

우상숭배와 사치향락에 빠진 유대인들에게 『나라가 망한다』고 외쳤으며 심지어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극언했던, 그래서 「매국노」라 불렸으며 끝내는 유대 민족주의자들에게 돌맞아 죽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설교하고 따르려 했던 이가 바로 주기철이었다. 해방 후 북한 정권이 「반일투사」에 대한 감사와 기념의 표시로 금일봉을 주려하자 오정모 사모는 그것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못 받습니다. 우리 주목사님은 항일 투사가 아닙니다. 일본에 항거한 것이 아니라, 다만 성경진리를 보수하기 위해서 마귀를 배격한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가 민족주의적 열정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면, 신사참배하도록 조선의 기독교 지도자를 설득하기 위해 왔다가 주기철 목사와 밤새 격론을 벌였던 일본기독교회대회 의장 도미다와 별다를 바 없다.

민족주의는 상대적이다. 주기철 목사는 민족을 초월한 절대 진리를 위해 싸운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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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목사 순교와 그 가족의 삶…일본인에 ‘원수사랑’ 본보기 실천
[기타] 2001년 07월 21일 (토) 12:37
1944년 3월 31일,평양형무소-.

비장한 표정의 40대 여인과 열세살 소년이 면회실에 들어섰다.“아버지가 널 보고싶어 하신다.내가 문을 열어줄테니 그때 인사를 올리거라.어쩌면 오늘이 마지막…”

여인은 아들의 손을 잡고 면회실로 들어섰다.어린이에게는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문을 여는 그 틈새를 노린 것이다.드디어 푸른 수의를 입은 중년의 남자가 나타났다.여인은 잽싸게 허리를 굽혀 두 사람의 시야를 열어주었다.납처럼 핼쓱한 표정의 남자는 소년을 보자 만면에 함박웃음을 지었다.소년은 신음처럼 ‘아-버-지’라고 부른 후 큰절을 올렸다.

“이게 무슨 짓인가”

일본인 교도관의 고함-.소년이 고개를 들었을 때,이미 면회실 문은 닫혀 있었다.부자간의 마지막 상봉은 이렇게 끝났다.중년의 남성은 그로부터 21일후인 4월 21일,싸늘한 시체가 돼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주기철목사와 그의 4남 주광조장로(70·영락교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주목사는 신사참배 반대로 7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결국 옥사한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다.일본 형사들은 어머니 조재선,아내 오정모,아들 주광조가 지켜보는 앞에서 고문을 가한 적도 있다.공중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고춧가루물을 붓거나 몸을 밧줄로 묶어 그네에 태운 후 매질을 가했다.이유는 한 가지,신사참배 반대였다.

1945년 8월 15일.해방이 되자 만주에서 내려온 수천명의 일본인들이 평양 숭실대학교에 진을 쳤다.그들의 삶은 비참했다.아침마다 수십구의 시체가 손수레에 실려나갔다.그런데 어느날,주목사의 집에 일본인 여성 셋이 찾아왔다.

“저희를 좀 살려주세요.사흘을 굶었어요” 주광조는 ‘일본인’을 보자 피가 역류했다. “아버지를 죽인 나라의 백성들.이제 너희들도 좀 당해봐라” 그때 어머니가 만류했다. “광조야,손님들을 방으로 모셔라”

어머니는 일본 여인들에게 밥을 먹였다.그리고 쌀도 퍼주었다.이튿날부터 대문 앞에 일본인들이 줄을 섰다.융숭한 대접을 받은 일본 여인들이 ‘주기철목사’의 집에 가면 밥과 쌀을 준다는 소문을 낸 것이다.오정모사모는 남편을 죽인 일본인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원수사랑’의 본을 보여주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순교자 주기철목사와 그를 죽인 일본인들에게 사랑을 베푼 후예들의 가슴에 다시한번 대못을 박는 만행이다.

/임한창기자


[기타] 2001년 07월 21일 (토) 12:37
1944년 3월 31일,평양형무소-.

비장한 표정의 40대 여인과 열세살 소년이 면회실에 들어섰다.“아버지가 널 보고싶어 하신다.내가 문을 열어줄테니 그때 인사를 올리거라.어쩌면 오늘이 마지막…”

여인은 아들의 손을 잡고 면회실로 들어섰다.어린이에게는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문을 여는 그 틈새를 노린 것이다.드디어 푸른 수의를 입은 중년의 남자가 나타났다.여인은 잽싸게 허리를 굽혀 두 사람의 시야를 열어주었다.납처럼 핼쓱한 표정의 남자는 소년을 보자 만면에 함박웃음을 지었다.소년은 신음처럼 ‘아-버-지’라고 부른 후 큰절을 올렸다.

“이게 무슨 짓인가”

일본인 교도관의 고함-.소년이 고개를 들었을 때,이미 면회실 문은 닫혀 있었다.부자간의 마지막 상봉은 이렇게 끝났다.중년의 남성은 그로부터 21일후인 4월 21일,싸늘한 시체가 돼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주기철목사와 그의 4남 주광조장로(70·영락교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주목사는 신사참배 반대로 7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결국 옥사한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다.일본 형사들은 어머니 조재선,아내 오정모,아들 주광조가 지켜보는 앞에서 고문을 가한 적도 있다.공중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고춧가루물을 붓거나 몸을 밧줄로 묶어 그네에 태운 후 매질을 가했다.이유는 한 가지,신사참배 반대였다.

1945년 8월 15일.해방이 되자 만주에서 내려온 수천명의 일본인들이 평양 숭실대학교에 진을 쳤다.그들의 삶은 비참했다.아침마다 수십구의 시체가 손수레에 실려나갔다.그런데 어느날,주목사의 집에 일본인 여성 셋이 찾아왔다.

“저희를 좀 살려주세요.사흘을 굶었어요” 주광조는 ‘일본인’을 보자 피가 역류했다. “아버지를 죽인 나라의 백성들.이제 너희들도 좀 당해봐라” 그때 어머니가 만류했다. “광조야,손님들을 방으로 모셔라”

어머니는 일본 여인들에게 밥을 먹였다.그리고 쌀도 퍼주었다.이튿날부터 대문 앞에 일본인들이 줄을 섰다.융숭한 대접을 받은 일본 여인들이 ‘주기철목사’의 집에 가면 밥과 쌀을 준다는 소문을 낸 것이다.오정모사모는 남편을 죽인 일본인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원수사랑’의 본을 보여주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순교자 주기철목사와 그를 죽인 일본인들에게 사랑을 베푼 후예들의 가슴에 다시한번 대못을 박는 만행이다.

/임한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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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만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기타] 2002년 04월 29일 (월) 10:35
찬송:246장 ‘내 주의 나라와’

예배에로의 부름:시편 96;7∼8

신앙고백:사도신경

기도:가족 중에서

본문:사무엘상 22;1∼2

요절:“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의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삼상 22:2)

말씀:아둘람 굴이란 환난의 대명사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다윗은 블레셋의 골리앗을 이긴 후 사울 왕의 눈에 들어 왕궁으로 들어오게 됩니다.그렇지만 그때부터 다윗은 모진 고생을 겪게 됩니다.

이는 다윗에 대한 백성들의 인기가 “사울의 죽인 자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 식으로 상승하고 사울 왕의 인기는 줄어들자 위협을 느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잡기 위해 전 군대를 동원하기도 했습니다.이런 위기에서 다윗이 도망하여 숨었던 굴이 아둘람입니다.이 굴에는 환난 당한 자,빚진 자,마음이 원통한 자가 모였는데 400명 가량이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다윗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특별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니이다”(삼상 26:24)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의 손을 피하고 피했습니다.오히려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에게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그때마다 고백한 신앙이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이러한 고백이 7번이나 나옵니다(삼하 1:14·16·4:10,삼상 24:6·12·26:9·11·23).

이것은 한 인간 사울을 향한 애정이나 두려움이 아닙니다.하나님의 권위를 두려워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하나님 중심입니다.하나님의 기름부음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예요,하나님의 권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도,내가 받은 직분을 귀하게 여기는 것도,주일을 성수하는 것도 하나님의 권위를 존경하는 것입니다.내가 집사 혹은 권사 혹은 목사일 때 하나님 말씀을 따라 거룩하고 신실하게 인생을 사는 것도 하나님의 권위를 존경하는 것입니다.

조만식 장로님과 주기철 목사님과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이들은 평양 오산학교 사제지간입니다.1915년 주목사님이 학생이었을 때 조장로님은 교장이었습니다.이 분들은 1930년대에 평양읍 산정현교회에서 담임목사와 장로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부산에 계시던 목사님을 청빙하러 내려갔던 분이 바로 스승인 조장로님이었습니다.

그 후 어느 날 목사님은 예배시간에 늦은 장로님을 꾸중했습니다.그때 학교의 스승이셨던 조장로님은 눈물을 흘리며 목사님과 성도들께 사과를 드렸습니다.한국 역사에서 커다란 획을 그을 만한 훌륭한 인물들이었음을 입증하는 좋은 일화입니다.

한국교회가 세속화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습니다.하나님의 거룩함과 권위는 과연 누가 지켜야 하고 세워나가야 할까요?

기도:주여,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름부음받은 하나님의 종을 귀하게 여기게 하소서.그리고 주의 이름이 기록된 직분도 건물도 사역도 귀하게 여기게 하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주기도문

이창준 목사(천안갈릴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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