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짐을 꾸려서 동해로 떠났다.
입은 옷차림 그대로 세면도구, 아이들 여벌 옷... 그리고 냉장고를 뒤져나온 과일과 군것질거리, 김밥 몇줄 사고 차에 올라 교문을 나오는 아이들과 조카까지 꿰어차고 고속도로에 올라섰다. 차 뒷자리에 팽겨쳐진 가방사이로 교과서가 삐죽 고개를 내밀어 즐겁운 소란과 가벼운 폭력과 스낵 부스러기가 오가는 차 뒷자리의 방만함에 한 몫하고 있다. 여주까지 4차선으로 넓혀진 고속도로덕분인지 학교를 파하고 떠났는데도 토요일 오후 5시에 속초 앞 바다에서 아이들은 운동화와 바지를 적시며 깔깔거린다. 웃음소리... 바다. 지평선에 잠시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은 하얀 포말때문이겠지.
저녁 식사를 한 후 파장 분위기의 속초중앙시장 활어전에 가서 커다란 게 한마리를 사고 뱃살이 토실하게 오른 광어 한마리를 회로 떠서 숙소로 왔다. 몇년전 토요일 이맘 때의 속초시장은 활기찼고 시끌벅쩍 했었는데... 서툰 솜씨로 쓰여진 대형할인매장의 입점을 반대하는 흰 현수막이 재래시장의 을씨년스러움을 더하는 것 같다. 하기사 우리 손에 들려있는 이 커다란 게도 동해산이 아닌 러시아산 킹크랩인걸...
집에서 못해본 호사를 누리는 아이들이 정신없이 게살을 탐사하는 동안 우리는 술잔을 기울이며 잠시 말이 없다. 갑작스러운 이사, 전학과 입학, 비좁은 엘리베이터, 출퇴근 전쟁, 시험... 1년 동안 우리를 숨가쁘게 몰아붙혔던 것들에서 잠시 벗어나 비로소 우리를 돌아본다.
건강하고 바쁜 한 해를 허락해준 모든 것들에게 경배하는 마음으로 술잔을 든다. 너무 이른 송년파티지만 동해 바다는 모든 것을 허락해 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