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결혼하고 나서부터 그간 집안사정으로 작은 아버님 댁에서 모셨던 제사를 모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날이 바로 시할머님 제사였지요. 그때부터 제사 지내는 것도 잘 보지 못하고 자라온 저의 봉제사 하드트레이닝이 시작되었습니다. 삼대조를 모시느라 한달에 한번 꼴로 돌아오는 제삿날은 그야말로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일하시느라 살림에 익숙하지 않으셨던 어머님이 아무것도 모르는 제게 전적으로 의지를 하셨기에 더욱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한주 전부터 장을 보기 시작하여서 시골에서 올라오시는 일가어른들의 접대까지 너무 낯설고 어려운 것 뿐 이었습니다. 제사 당일 퇴근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시작하여서 제사를 모신 후 식사에 술상에 12시가 넘겨서 겨우 설거지를 끝낼 수 있었고 주무시고 가시는 시골 친척 분들의 새벽 같은 아침거리까지 마쳐야 겨우 하루가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도 할 일은 남아서 며칠 동안 청소며 그릇정리며 산더미 같은 일거리에다가 어머니와 저, 이렇게 두 며느리가 동동걸음치고 장만한 제사 음식과 손님 접대 음식은 남기 일쑤여서 버리기도 그렇다고 먹기도 힘겨운 지경이었습니다. 해가 거듭될수록 제 머릿속에는 한번도 뵙지 못한 증조 , 고조 선대 분들의 제사를 제가 지내야 하는 이유가 떠오르지 않고 단지 결혼이라는 것으로 얽매이게 되는 굴레라는 생각만 가득하였습니다.
장손 외며느리를 맞이하여 의욕차게 시작된 삼대봉사는 어른들께서 3년 째 되는 해부터는 할아버님과 할머님외의 윗분들은 사당에 모시기로 결정을 하시어 그 후부터는 설날, 추석의 차례와 할아버지, 할머님 기일만 제사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그것만 해도 다행이다 싶었는데 제사를 십년쯤 모시게 되니까 저도 슬슬 꾀가 나서 장보기를 설렁설렁하기도 하였습니다. 수입산 고사리를 사기도 하고 쇠고기 값이 치솟은 어느 해인가는 어른들 몰래 수입쇠고기로 산적을 하기도 하였지요.(딱 한번 그렇게 하고 이후는 마음에 찔려서 하지 못하였습니다만). 설날이나 추석이 되면 웬 조기 값은 그렇게 비싸던지... 제철이 아니어서 과일이 금값인데도 무조건 제일 크고 좋은 것만 고르는 남편과 지갑사정을 감안한 저의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하면서 제사는 하나의 의례 이상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지겨운 시집의 대소사로 치부되었습니다.
저의 이런 반항은 13년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저희가 어찌어찌하여 분가를 하였거든요. 제가 직장 다니고 살림하느라 바쁘다고 저를 많이 봐주신 어머님은 이제 손수 제사준비를 하십니다. 저는 명절동안 손님접대용이나 가족들용 먹거리만 준비하여서 설이나 추석 전날 가는 입장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사 준비는 제가 도착하면서 시작되긴 하지만 주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보조가 되다보니 남편이 이렇게 놀리기도 합니다. ‘결혼 13년 만에 ○○의 팔자가 폈구나.’ 제가 생각해도 팔자가 핀 것 같습니다. 이렇게 편할 수 가 없습니다. 저도 명절증후군이란 걸 톡톡히 겪었거든요. 설날, 추석 휴일의 빨간 글자가 길면 그건 휴식이 아니라 긴 노역의 의미로만 생각되었었는데 이제는 명절 다음날의 계획을 짤 수 있으니 즐겁기까지 합니다.
엊그제는 시할아버님 제사였습니다. 토요일이어서 점심 무렵에 시댁에 도착하여서 준비를 하였는데 막내고모님이 이것저것 준비를 해 오셔서 저는 전만 준비하여 부치면 되었습니다. 밤이 되고 제상의 촛불이 켜지고 시댁 어른들과 우리 막동이까지 재배를 하고 술잔을 번갈아 올리고 하는 뒷모습을 지켜보고 서있노라니 우리식구들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 것이 저 옛날 빛바랜 사진 속에서 굽어보고 계시는(이제는 제게도 친근해진) 선량한 얼굴의 할아버지 할머니 덕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몇 년 후면 점차 기력이 쇠하실 어머님을 대신하여 제가 다시 본격적으로 제사를 모셔야겠지요. 그리고 별 일이 없다면 아마도 제가 살아있는 날까지는 제사를 지내겠지요. 저의 아들은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아버님은 당신께서 끔찍하게 귀히 여기시는 손자가 당연히 제사를 지내주리라 생각하시겠지만 세상이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으니 그건 그 때 가봐야 알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