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둘의 차이가 아니라 공통점이다. 부끄럽다는 것. 몽규와 동주는 서로 다른 이유를 말하며 함께 부끄럽다고 말한다. 둘 사이의 거리는 다시 아주 가까워진다. 투사건 시인이건, 식민지의 청년들은 그렇게 부끄러워하며 죽어갔다.
(중략)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울지 않았다는 것 말이다. (중략) 그 한가지 답은 '흑백'에 있었다. 역사적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사용했을 흑백이 오히려 나에게는 이 영화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효과를 발휘했다는 것. 이 영화의 흑백에는 묘한 인공성이 있다. 이 흑백은 깨끗했고 아련했으며 그래서 아름다웠다. 이 사실이 뜻하는 바는 단순하지 않다. 어쩌면 <동주>의 흥행 성공이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이 영화에서 동주는 제 삶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부합하는 것인지를 진지하게 성찰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삶의 형식이 사회적으로도 가치 있는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내내 괴로워한다. '진정성'에 대한, 즉(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진실한 삶에 대한 이 고민은 '속물성'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점점 잃어가고/잊어가고 있는 것이라는 진단이 내려진 지도 오래됐는데
(중략)
그러나 그러기에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가 우리에게서 너무 멀다. 그 시대는 공간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역사적 유적지다. 나는 이 영화의 깨끗하고 아련했던 '흑백'이, 제작진의 의도와는 다르게, 마치 액자처럼 윤동주를 과거의 시간 속에서 방부처리하는 데 기여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대의 고통으로부터는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안심하고 감동받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102~105쪽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 아닌데 이준익 감독의 영화를 제법 많이 본것에 새삼 놀랐다. 그의 장점중 하나는 껄끄러운 주제를 관객이 외면할 정도의 불편함은 주지 않고 풀 수 있다는 것이리라. 신형철 작가의 영화 동주에 대한 평의 이부분이 좋아 옮겨둔다.
오늘도 크고 작은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는 소심한 내가 싫고, 다른 한편으론 점점 무심한 어른이 되어갈까봐 두렵다.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