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을 하고 집에 와 책을 읽는 내 모습은 여유롭다기보다는 시간강박증 환자 같다.
밥상에 책과 필기도구를 가지런히 두고, 시계를 풀어 잘 보이게 둔다.
오늘은 열시까지 한 쳅터 라고 결정하고 옷도 갈아입지 않고 읽기 시작한다.
모르는 부분이 있어도 끝까지 읽어내는 것이 목표다.
길고 긴 노동시간은 쥐꼬리만한 나의 개인시간을 쬐끔이라도 길게 사용해보려는 이런 발버둥을 낳는다.
10시까지 책읽고, 11시까지 정리하고, 12시까지 씻고 도시락 등 출근 준비, 잠, 6시 기상.
마침 오늘 읽은 대목은 우리가 어떻게 이런 형편없는 삶의 질로 내몰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대목이라, 다 읽기 전이지만 주목해 본다.
자본론 1권에 언급되어있듯 초기 자본주의 노동자들은 실재 필요한 돈을 벌 만큼만 일했고, 자본가들은 긴 시간 노동자들을 일하게 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가내수공업을 망하게 한 것은 물론(생산수단을 앗아버리는 것) 생산단위당 급료를 줄임으로서, '충분한 것'을 얻기위해 더 일하도록 강제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삼중 박탈 즉 노동자로 부터 노동의 도구, 노동의 생산물, 노동 자체를 분리 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는 노동자들이 느끼는 필요와 욕망,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들이 투입하는 노력의 강도, 그 노력의 지속시간과 질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이다. (64쪽)
마르크스님의 따르면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하면 자기규제에 따라 자유는 '필요' 혹은 연합된 생산자들이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망의 범위, '펼침직하다고 판단하는 노력의 정도' 사이에서 적절히 결정될 것이란다. 이 판단은 체험된 공통의 규범에 기초해 예를 들면 생산성은 좀 줄더라도 더 편안하고 적당한 보수가 있는 방식으로 일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자본주의 사회처럼 최대 수익 추구가 아닌 '충분한 것'의 규범이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60~61쪽)
우리 모두가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만 일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다니, 아 이 대목이 너무 아름답다.
산업의 생산수단이 애초에 연합된 생산자들에 의해 발전했다면 이 미친 경쟁 속에 인간의 필요가 아닌 자본의 수익성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필요와 욕망에 의한 터무니 없이 엄청나고 불필요한 생산, 엄청난 노동강도와 소외된 노동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발전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조금 덜 산업화되었지만, 조금 더 편안한 삶의 기회가 거기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현대의 개인은 자본에 의해 강요된 노동자와 소비자의 삶의 양식만을 가질 뿐이다. 자본에 의해 매개되는('월급쟁이'와 '고객') 실존외에 어떤 사회적 공적인 실존도 없다. 비노동의 시간은 '사적인' 오락과 휴식, 휴가의 시간만 허용된다.
자, 우리 사회는 이렇게 발전해 왔다. 우리 대다수는 월급쟁이로 고객으로 살아가고 있다. 덜 일하고 덜 소비하는 쪽을 선택하는 좀 더 자유로운 삶의 전망을 우리는 완전히 버려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한번 모든 합리성 위에 경제학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이 미친 시스템을 선택하면 스스로 자멸할 때까지 벼랑끝으로 몰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저자는 이 대목에서 이것을 생태사회적 정치의 영역으로 본다. 딱 짤라 말하면 이 미친듯이 달려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정치적 규범으로 브레이크를 걸어야한다는 것이다. '충분한 것'의 규범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경제적 합리성에 삶의 모든 가치들이 매몰되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삶의 가치들에 경제학이 종속되는 세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쓰고 보니 질문이 많은 페이퍼가 되었다. 모두가 황당한 체제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 쪽에는 과로사가 있고, 한쪽에는 실업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저 '안정된 삶'을 바라고 찍은 선거의 결과가 '우리 삶의 기반을 더 철저하게 파괴'하게 된 지금의 정치시스템을 어떻게 우리가 바라는 목표와 요구사항들이 정치에 반영되게 할 수 있을까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마저 깊어지게 한다.
거대한 이야기나 균열은 다른 삶은 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나누는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 돈이 기준이 아닌 삶은 가능하고 가능해져야 한다고 말이다. 오늘도 월급쟁이는 퇴근후에 꿈을 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