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 사회자


올해 지역에서 세번째로 열리는 컨퍼런스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동추진위원장을 맡았다. 작년부터 느끼고 있었는데, 지역의 선배 활동가 그룹에서 점점 내게 더 많은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가끔 선배들이 중간그룹이 없다고 한탄하면서, 그 역할을 내게 요구하는 경우가 있었다. 더 얘기하자면 복잡한데, 암튼 어쩌다 보니 중책을 맡았고, 그래서 작년에 비해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재작년과 작년에 열렸던 컨퍼런스 평가 과정에서 내가 주장했던 내용을을 반영해서 좀 더 잘 해보고 싶었던 욕심도 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올해는 컨퍼런스 준비에 좀 더 신경을 썼다.


해마다 컨퍼런스를 마치고 그 논의 내용을 모아 보고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책임 편집(내용 정리 및 교정교열) 역할을 계속 맡아 왔다. 한 번에 30여개의 개별 테이블이 열리고, 각 테이블 주최 단위로부터 보고서와 관련 자료들을 받아 정리하고 책으로 만드는 작업이 쉬운 일이 아니라 무척 힘들지만, 출판사에서 책임편집을 해본 경험 덕에 어떻게든 해내고 있고, 한 번 작업하고 나면 그 해 컨퍼런스 내용 전체를 대체로 이해할 수 있기에 만족감도 있었다. 또 그를 통해 큰 돈은 아니지만 부수입을 얻을 수 있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당장 지역에서 그 역할을 해낼 활동가가 없기도 했다. 만약 준비 단계에서 함께 참여하지 않고,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외주를 맡기면, 보고서의 퀄리티는 훨씬 떨어질 것이 뻔했다. 1회와 2회 컨퍼런스를 마치고 낸 보고서가 좋은 평가를 받고, 지역의 선후배 활동가들이 나를 인정하는 것은 그래도 보고서를 썩 괜찮게 만들었기 때문이리라. 올해도 보고서 제작에 대해서는 그냥 나에게 일임하는 분위기다.


그렇게 작년까지는 컨퍼런스를 마친 이후 보고서 제작 과정에서 전권을 맡긴 했지만, 행사 준비와 진행 과정에서는 최소한의 기여만 하고, 큰 역할을 맡지는 않았다. 올해는 준비 단계에서 기획운영회의에 매주 참여해야 했고, 보고서 준비를 위한 기록팀도 따로 꾸려야 했다. 암튼 실제 행사에서는 여는 마당에서 대표자 인사를 내가 맡았고, 전체 행사 중간쯤에 3개 협동조합이 공동으로 기획한 토론회 진행과 발제를 맡았고, 또 다른 토론회의 토론자 역할도 맡았으며, 마지막 닫는 마당에서 여성 활동가 한 분과 공동 진행도 맡았다. 사실 닫는 마당 진행은 2년 전 첫 컨퍼런스 때도 맡을 사람이 없어서 그냥 내가 맡았는데, 그때는 지금과는 약간 성격이 달라서 훨씬 규모도 작았고, 컨퍼런스를 준비했던 단위 활동가들의 뒤풀이 같은 행사였다. 물론 당시에도 부담은 꽤 있었지만, 막상 닥쳐서는 생각보다 분위기가 괜찮았던 걸로 기억한다.


이번에는 공동추진위원장을 나이대별로 추천해서 선정했는데, 나는 40대 대표로 올랐고, 나와 같이 닫는 마당 진행을 맡은 여성 활동가는 30대 대표로 나왔다. 여는 마당 인사말은 조금 고민을 하긴 했지만, 막판에 시간에 쫓겨서 원고를 썼고, 큰 무리 없이 잘 하고 내려왔다. 이번 컨퍼런스는 지역 언론사가 SNS 생중계도 했는데, 나중에 SNS 상에 남아있는 동영상을 통해 내 발언을 지켜보니 좀 신기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버릇과 손버릇 등도 알 수 있었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긴장하면 저렇게 행동하는 구나 하는 것도 느꼈다.


발제와 토론도 평소 고민했던 내용들을 풀어냈고, 이런저런 행사 준비와 진행은 이 바닥 활동 경력이 20년이 가까운데 뭐 평소 실력으로 커버했는데, 마지막 닫는 마당 공동 사회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혼자 하는 거라면, 그냥 알아서 준비하면 되는데, 아직 그리 친하지 않은 다른 활동가와 함께 호흡을 맞춰야 하는 점이 부담스러웠다. 


그와는 이 전부터 종종 얼굴을 보긴 했지만, 이번 컨퍼런스 준비 전까지 잘 알지 못했던 사이였는데, 평소 이런저런 회의 자리에서 분위기도 잘 맞추고, 활발하게 발언하는 모습을 보아 내공이 상당해 보였다. 역시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던 게, 준비 과정에서 꼼꼼하게 챙기는 모습과 2시간 짜리 행사 사회자 대본을 짧은 시간 안에 뚝딱 만들어냈다! 다만 그가 준비한 부분은 전체 진행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이고, 나는 그 안에서 핵심 프로그램 진행 대본을 만들어야 했는데, 그 핵심 프로그램은 컨퍼런스 전체 프로그램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였다. 각 프로그램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고, 각 추진 단위의 협조가 필수였다. 


어차피 나는 컨퍼런스 종료 후 보고서 제작 단계에서 각 프로그램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야 하기 때문에 미리 소통할 생각으로 이 역할을 맡았는데, 행사가 진행중인 짧은 시간 안에 내가 필요한 내용을 다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날 하루 전까지도 그 핵심 프로그램에 대한 대본을 완성하지 못했고, 공동 사회자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행사 당일 아침 일찍부터 열일 다 제쳐놓고, 대본을 완성했고, 결국 닫는 마당 1시간을 남겨두고 그가 쓴 전체 대본과 내가 쓴 대본을 합쳐서 공동 사회자 대본이 완성되었다. 서로 맞춰보기 위해 구석에서 잠시 연습했는데, 그도 이런 경험이 적지 않은 듯 했고, 나도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되겠지 싶어 연습을 많이 하진 않았다. 사실 막상 무대에 서면 어떻게든 하겠는데, 사전에 그와 단둘이 따로 연습하려니까 정말 어색했다. 그도 그랬는지 서로 분위기를 어쩌지 못하고 급하게 연습을 마쳤다.


착각일 수 있겠지만, 가끔 무대 체질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시작 전에는 긴장도 하고, 어떻게 하나 싶기도 하지만, 막상 사람들 앞에 나서면 의외로 여유를 되찾아 내가 준비한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해내곤 했다. 그게 약간 관성이 되어서 나중에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준비를 덜 하는 나쁜 방식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암튼 그런 역할을 맡을 때 상대적으로 쉽게 수락하는 이유다.


근데 이번에 둘이 공동 사회를 보니,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어색해서 자꾸만 실수하게 되더라. 속으로 어! 나 왜 이러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곧 다시 수습하곤 했지만, 내 기대만큼 여유있는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근데 내 파트너는 나보다 훨씬 더 여유있었다. 임기응변도 어찌나 좋은지. 대본에 없던 말들도 술술 잘 했다.


이 공동 사회는 그가 다 살렸다. 그가 그렇게 잘 하는 모습르 보면서 나도 곧 여유를 찾았다. 재밌었다.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보겠나? 그리고 참여자들의 호응이 좋았기에 또 한편 힘이 났다.


행사를 마치고 둘이 환상 콤비였다거나, 전문 사회자 뺨 친다거나, 둘이 케미가 장난 아니다거나 이런 저런 칭찬을 많이 받았다. 나는 그때마다 모두 다 그 여성 활동가의 공으로 다 돌렸다. 난 아무것도 한 것 없고, 그가 다 살렸다고 했다.


옷이 날개


작년부터 점점 외부활동이 많아지고 있다. 그 외부활동 대부분은 공무원들을 만나거나, 좀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가 많았다. 평소 목이 늘어난 허름한 반팔 티셔츠에 낡은 반 바지를 입고, 맨발로 아쿠아슈즈 신고 다니는데, 그런 자리가 있는 날에만 정장은 아니더라도 가다마이라고 부르는 걸 입고 나간다. 이거 우리 말로는 뭐라 불러야 할까? 암튼 그렇게 입고 외부 활동을 주로 하다보니 지역의 선후배들은 나의 그런 차림을 자주 보지는 못한다.


이번 컨퍼런스에 공식적으로 앞에 나서야 하는 일이 많다보니 옷차림에 신경을 안 쓸수 없었다. 특히 닫는 마당 사회를 보기 위해 아끼는 여름용 가다마이를 입고 갔는데, 그야말로 보는 사람마다 반응이 장난 아니었다. 한 젊잖은 여성 선배는 놀란 표정으로 오늘 너무 멋져요! 라고 큰 소리를 냈는데, 그 분이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 내게는 더 놀라운 일이었다.


행사가 끝나고 친한 형과 술을 마시다가 그 형이 요새도 계속 운동하냐고 묻길래, 못한지 오래라고 말했다. 작년 가을 어깨를 다친 후로 꽤 오랫동안 간단한 운동 외에 시도를 못 했고, 다시 본격적으로 운동을 해보려고 하던 와중에 다시 무릎을 다쳤다. 최근엔 거의 아무런 운동도 시도하지 못했다. 그렇게 설명했더니, 그래도 넌 운동했던 '가다'가 있어서 '가다마이'가 잘 어울린다고 말하더라. 뭐 옷이 날개란 말이 틀린 말은 아닌가보다. 다들 어쩌니 한마디씩 해대던지.


뛰고 싶다.


무릎은 8월 말경 처음 다친 지 3주쯤 지난 후부터 빠르게 회복해서 평지는 거의 정상처럼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오르막도 괜찮은데, 내리막길과 계단을 내려가는 일은 여전히 부자연스러웠고 힘들었다. 그리고 아직 무릎을 완전히 굽힐 수 없어서 씻을 때와 옷 입고 양말 신을 때 힘들다. 우리 사무실 열쇠구멍은 바닥에 있다. 완전히 쪼그리고 앉거나, 엉거주춤한 자세로 허리를 완전히 꺾어야 손이 열쇠구멍에 닿는다. 예전에 그 위치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제 내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사무실 문을 열고 잠그는 일이 되었다.


평소 걷는 것 보다는 뛰는 걸 좋아한다. 가까운 곳을 가더라도 거의 뛰어다니는데, 벌써 한달 반 이상을 뛰지 못하고 살고 있다. 어느 날 너무 뛰고 싶어서, 뜀박질을 잠시라도 해보고 싶어 시도했다가. 무릎 통증에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슬슬 회복이 되는 것 같아서 무릎에 무리가 안 가는 자세로 스퀏을 좀 해봤는데, 다음날 무릎이 아파 죽는 것 같았다. 아직 역기를 드는 건 꿈도 못 꿀 일이다. 가끔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와 딥스 그리고 레그레이즈 등을 줌심으로 운동했는데, 이것도 정상이 아닌 몸이다보니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뛰고 싶고, 역기를 들고 싶다. 그런 걸로 스트레슬 좀 날려야 하는데, 대신 자주 술을 마셨다. 술과 안주 덕분에 재작년부터 간신히 공복일 때 복근이 드러나는 몸을 만들었음에도 금방 몸매가 망가졌다. 빨리 다시 뛰고 싶다. 역기도 들고, 케틀벨도 들고, 철봉에 매달려 다양한 운동을 해보고 싶다.


책 읽자



 아는 형이 낸 책이라 동네서점에 깔리자 마자 가서 샀다. 근데 아직 손도 못 대고 한참 지났다. 이번 연휴에 읽어야겠다. 같이 산 책이 3권이나 되는데, 이것들 언제 다 읽으려나.











 동네서점에서 사자마자 큰 아이에게 읽으라고 줬다. 아이가 다 읽고 나면 내가 읽어야지. 그리고 작은 아이가 좀 더 자라면 그때 읽어줘야지.









 이 책은 사자마자 야금야금 읽고 있다. 재밌다. 이런 책이 점점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또 한 권의 책은 제목이 뭐였더라? 기억이 안 나네. 흠 나중에 집에 들어가면 찾아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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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가끔 주말에 잠을 몰아서 자고 나면 일요일 밤에 쉬 잠들지 못한다. 주말에 아이들이 오니 한동안은 좀 피곤해도 참고 애들이랑 놀러 다녔는데, 요 몇 주는 정말 너무너무 피곤해 낮잠을 잘 수 밖에 없었다. 이젠 정말 늙었구나. 이런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날들.

암튼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을 꼼짝 않고 집에서 애들과 뒹굴거렸다. 물론 그 와중에 큰 아이는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며 낮에 나갔지만, 작은 아이는 쭉 나와 함께 집에 있었다.

특히 일요일은 아이와 잠시 놀다가 마치 기절하듯이 잠들기를 여러차례. 늦은 오후에나 온전히 잠에서 깨어, 작은 아이를 데리러 온 애들엄마에게 아이를 보냈다.

그 이후로도 한동안 누워서 폰으로 SNS를 보거나, 잠시 책을 뒤적였는데, 일찍 자려고 초저녁에 불을 끄고 잠들었다가, 자정이 막 지났을 무렵 깨버렸다. 그때부터 자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다시 잠들지 못했다. 게다가 그 밤에 배가 고파졌다. 있던 음식은 주말동안 애들과 다 먹어치우고, 남은 건 라면 밖에 없는데, 그 새벽에 배가 고프면 어쩌란 말이냐?

결국 이불을 뒤집어쓰고, 베개를 얼굴 위에 놓고 억지로 잠을 청하기를 2시간쯤 되어 도저히 못 참고 일어나 라면을 끓였다. 라면에 소주를 마시면 잠이 오려나 생각했는데 집에 술이 없었다. 항상 하는 후회를 또 해본다. 왜 미리 술을 사두지 않았던가? 그리고 또 같은 변명을 반복한다. 술을 사두면 항상 바로 먹어 치워버려서 미리 사둘 수가 없었잖아.

다행이 음식 할 때 쓰고 남은 소주가 한잔 반 가량 남아있었다. 그걸 먹어봐야 아무 소용도 없을 걸 알았지만, 그래서 꽤 고민했지만, 라면을 다 끓이고 결국 조금 남은 소주를 잔에 따랐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날 때는 라면 먹고 잠시 소화시키고 잘 생각이었지만, 라면 먹으며 노트북을 켜고 뭔가 찾아보기 시작했던게, 라면을 벌써 다 먹고도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뒤늦게 상을 치우고도 잠은 오지 않았고, 이런저런 잡 생각에 술 생각만 더 간절해졌다. 그 한 잔 반을 먹지 말았어야 했는데.

결국 해뜰 무렵까지 뜬 눈으로 지내다가 이제와선 잠들면 오히려 큰 일이라 아예 영화를 하나 틀었다. 영화에선 등장인물들이 자꾸 뭘 먹고 마셔서 더욱 술 생각이 간절해지게 만들었지만, 어차피 아침이 가까워지는 시간이라 유혹을 떨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아침을 맞아 씻고 집을 나섰다. 근데 생각보다 머리는 맑다. 몸은 피곤하지만 머리는 맑은 아침이다.

노래(플레이리스트를 바꿔야해)

아침에 회의를 위해 버스로 이동하면서 늘 그렇듯 노래를 들었다. 문득 나오는 노래들이 죄다 처지고 슬픈 노래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상쾌한 아침을 맞아 신나고 활기찬 노래를 듣도 싶었는데, 리스트를 쭈욱 내려봐도 그런 노래가 없다. 지지리도 궁상맞은 노래들. 나중에 시간 되면 꼭 플레이리스트를 바꿔야겠다.

이상 아침 출근길과 회의를 위해 오가면서 느낀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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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연습


살면서 가끔 정상인으로서 바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가를 깨달을 때가 있다. 군대에 있을 때 무릎 인대가 완전히 나가서 거의 두세달을 제대로 걷지 못하고 불편하게 지냈을 때, 제대하고도 가끔 무릎에 무리가 가서 며칠 혹은 한 달 동안 잘 걷지 못했을 때, 한 십여년 전에는 허리 통증으로 고통을 받았고, 또 7년쯤 전에는 골반 통증으로 또 세달 가량을 절뚝거리며 걸어야 했고, 이번에 또 무릎 인대가 늘어나서 한 달 가량 불편을 겪고 있다. 


평지를 걷는 건 조금 절뚝거리긴 하지만 큰 불편은 없고, 계단을 오르거나 오르막길도 그럭저럭 걸을만한데, 계단을 내려가는 일과 내리막길은 정말 힘들고 어렵고 또 무섭다. 지하철을 타고 회의하러 가야 하는데, 기나긴 계단 앞에서 막막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그때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장애인들이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일시적으로 늘어난 인대가 회복될때까지만 약간의 이동 장애를 가질 예정인 나에 비해 그 분들은 평생을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고 사셨고 또 살아가실텐데, 그 감정이 어떨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어제 6호선의 기나긴 계단을 내려가며 생각했다. 난 이제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다. 최대한 관절과 몸에 무리를 주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자세를 익혀야한다. 정상인처럼 걸을 수 없으니, 무릎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효과적으로 걸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걷기 연습을 해야 했다.


7년 전쯤 골반 통증이 장기화 되어 두어달째 걷기가 힘들었을 때, [그 남자의 몸 만들기] 라는 책을 읽다가 운동과 생활 전반에 대한 저자의 생각 등을 읽으며 느낀 점이 많았고, 특히 걷는 것도 단순히 걸음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단전이 이동한다고 생각하라는 저자의 말에 그렇게 움직여보니 정말 걸음이 달라졌다. 이후 꾸준한 스트레칭 등으로 골반 통증이 많이 나아졌다. 한때 '대퇴골두무혈성 괴사'가 아닌가 걱정까지 했었는데, 병원에선 엑스레이 사진만으로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고 무조건 MRI 부터 찍자고 했고, 다행히 지인 중 해당 질병을 어려서 부터 앓았던 분이 내 엑스레이 사진을 보시더니 무조건 괜찮다고, 내 대퇴골두가 아주 깨끗해서 절대 무혈성괴사 일리 없다고 확인 해준 덕분에 돈 낭비를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말한 것처럼 걸음을 걷는 태도가 변했다. 단순히 한 발 움직여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발가락 끝부터 척추를 거쳐 머리에 이르기까지 내 몸의 뼈마디 하나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느끼며 걷기 시작했다. 핵심은 위에도 언급한 책의 문구처럼 내 몸의 중심인 단전이 어떻게 움직이는 가를 느끼며 걷는 것이었다. 


이번에 무릎이 다 나으면 어쩌면 다시 제대로 걷는 법을 또 배우고 익혀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 소망은 빨리 무릎 인대를 회복하고 비틀거리나거 절뚝거리지 않고 잘 걷고 싶다는 것이다. 남들에겐 아무렇지도 않을 걸음이 누군가에겐 소망이 될 수 도 있다.


과학은 어려워


돌이켜보면 학창시절 가장 어렵고 싫어했던 과목은 수학과 과학이었다. 수학은 이미 초등학교 때 포기했고, 중고등학교 무렵엔 거의 바닥을 헤매었다. 전교 등수로 따지면 국어는 거의 항상 전교 1등, 영어는 대개 상위권 이었지만, 수학은 전교 꼴찌 수준이었다. 과학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땐 미처 몰랐다. 나중에 내 인생에서 과학이 중요한 순간이 오리라는 사실을. 학교를 졸업하면 평생 수학과 과학 따위 마주칠일은 없을 줄 알았다. 한 10여년 전부터 일 때문에 늘 과학책을 읽어야 했다. 교양 과학에 머무는 간단한 지식도 내겐 어려웠다. 기초가 전혀 없었기에 그랬다.


근데 신기하게도 어려서 그렇게 어려워했던 과학이 나이 들어서 공부하니 재밌었다. 뭔지 잘 모르지만 그 모르는 걸 하나씩 찾아내서 알아가는 게 더 재밌었다. 요즘은 책과 몇몇 유튜브 채널을 통해 관심분야를 조금씩 넓혀가는 중이다.


이 땅에 과학 지식을 쉽고 재밌게 잘 전달하는 선생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래도 몇몇 믿고 보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 분들 중 한 분의 책이 새로 나왔다. 페이스북을 통해 이 책을 낸 출판사 대표의 재밌는 홍보글을 보았다. 요건 꼭 사야해! 여름 휴가 때 지출이 커서 당분간 긴축재정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 먹어놓고도 계속 실천을 못 했는데, 알라딘에 들어와보니 또 사고 싶은 책이 잔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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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8-22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병원은 다녀오신건가요? 정형외과나 한의원에 다녀와야 하는 거 아닐까요?

감은빛 2018-08-22 19:57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한의원 다녀왔습니다. 침도 맞고, 약도 먹었고, 일정 기간동안 물리치료도 받았습니다.

덕분에 인대 부상 치고는 회복이 빠른 것 같아요. 이제 무릎을 (완전히는 못 하지만) 어느 정도 굽힐 수 있고, 걸음도 많이 자연스러워졌어요. (초기에 비해서)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두운 조명 아래 빈 술잔이 반짝 빛났다. 재즈 음악이 흘렀다. 바스툴에 걸터 앉은 나는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받친 자세로 오른손을 움직여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바 너머에서 바텐더가 다가와 지포 라이터를 열고 불을 켜서 내 입을 향해 내밀었다. 담배를 물고 그가 켜준 불을 빨아당겼다. 어두운 조명 아래 담배 연기 한 줄기가 위로 솟아올랐다.


"나 한 잔 더 해도 되죠?" 지포 라이터를 닫아 내려놓은 그는 내 귀에 가까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이번에는 목소리 톤을 높여 묻는다. "오빠도 잔 비었네. 한 잔 더 드려야죠?" 그러나 답은 기다리지 않고, 내 잔을 먼저 삼분의 일쯤 채운다. 이어 자신의 잔에도 같은 양을 따른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얼음 통을 꺼내고 내 잔에 얼음 세알을, 자신의 잔에도 얼음 세 알을 넣었다. 익숙한 솜씨다. 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그가 하루에 몇 잔이나 술을 따를까? 몇 개의 스트레이트와 몇 개의 온더락스 잔을 채울까? 그는 자신도 담배 한 개비를 꺼내더니 아까 내려놓은 지포 라이터를 열어 불을 붙였다. 어두운 조명 아래로 두 가닥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내가 깊이 들이마셨다가 훅 내뱉은 연기와 그가 길게 내뱉은 연기가 만나 섞였다.


"그래서 오빠, 그 다음에 어떻게 됐어요?" 머리 위에서 들린 질문에 머리를 괴고 있던 왼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단정하게 빗어 뒤로 묶은 머리칼이, 반듯하게 다림질이 된 검은 셔츠자락이, 그 셔츠 가슴 주머니에 달린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세련된 글씨체로 적힌 글씨를 읽었다. 류민. 그리고 가게 이름 대신 작게 그려진 검은 고양이 그림 실루엣을 보았다. 그는 내 눈을 향해 눈웃음을 지으며 잠시 기다린다. 난 대답 대신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를 쥔 손으로 잔을 들어올려 두어차례 흔들었다. 짤랑짤랑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술 한 모금을 넘기자, 뜨거운 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아, 미안.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짜릿한 감각이 뇌를 때리는 듯한 기분을 느낀 후 입을 열었다. 내가 들어도 멍한 말투, 어디 나사 하나가 빠져 동작이 부자연스런 장난감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머! 오빠. 벌써 취했나봐." 그가 내 어깨를 툭 치고는 눈을 흘긴다. 입을 삐쭉 내밀었다가 손에 든 담배를 깊이 빨아들인 후 연기를 길게 내뱉으며 담배를 재떨이에 떨어뜨렸다. 물에 젖은 티슈 위에서 담뱃불이 취이익 소리를 내며 꺼졌다. 빨간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삐죽 내민 빨간 입술이 화면을 가득 채운 영화관 스크린처럼 내 마음에 들어왔다.


"경찰에 쫓겨 골목으로 도망쳤다면서요.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어요?" 그는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입에 물고 잠시 머금었다가 마치 약을 털어넣고 삼키듯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며, 입에 머금은 술을 단번에 삼켰다. 그 동작이 재밌어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를 빤히 보는 시선을 느끼고 살짝 고개를 떨구며 거의 다 타들어간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재떨이에 던졌다. 길게 내뱉는 담배 연기 사이로 문득 소음이 들렸다. 시위대가 저마다 지리는 외침과 비명들, 전경들의 구령과 군화발 소리 그리고 방패를 땅에 부딪히는 소리.


"즉시 자리를 벗어나 해산하십시오! 다시 한번 알립니다. 여러분은 현재 불법 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즉시 해산하십시오!" 그 차분한 목소리와 달리 담긴 내용이 꽤나 우습다고 여겼다. 문득 저 방송차량에 탄 여성의 얼굴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와중에도 드는 생각은 저 목소리 제법 매력적이라는 생각. 언제나 독특한 목소리에 끌렸던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너무나 섹시했던 누군가와 독특한 발음과 울림에 끌렸던 누군가와 톤이 높은 목소리가 설레게 했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뒤로 빠져!", "왼쪽으로 들어온다!", "조심해!" 빠르게 울리는 군화발 소리가 가까워지며, 여기저기서 소리가 들렸고, 대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쪽에서 방패와 곤봉을 휘두르며 전경들이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마치 바퀴벌레 떼를 보는 것 같았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흩어져 뒤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나도 슬슬 뒷걸음질을 치다가 전경 하나가 날선 방패를 휘둘러 손을 올려 막으려는 자세를 취한 사람의 손을 튕겨내고 그대로 머리를 때리는 모습을 보고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순간 피가 튄 장면이 머리속에 각인되었다. 한참을 뛰었다. 뒤에서 울리는 군화발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갑자기 앞에서 뛰던 여성이 넘어졌다. 옆에서 뛰던 다른 여성이 그를 일으키려 했지만, 바로 일어나진 못했다. 나도 다가가 일으키려 했다. 두 명이 양쪽에서 부축해 간신히 일으키긴 했지만, 이대로는 더는 도망칠 수 없었다. 가까워지는 군화발 울림을 들으며 몸을 돌렸다. 맨 앞에서 달려오던 전경의 곤봉을 든 오른손이 위로 올라갔다. 반사적으로 부축을 풀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곤봉을 휘두르려는 그 전경의 방패를 어깨로 부딪혀 뒤로 밀어내고, 곧바로 몸을 틀었다. 왼쪽에서 누군가 뭔가를 휘두르는 것을 깨닫고 뒤로 펄쩍 뛰며 피했다. 곤봉이 아슬아슬하게 내 눈앞을 지나쳤다. 다음 순간 내가 어깨로 밀어냈던 그 전경이 다시 곤봉을 휘둘렀고, 그 다음엔 왼쪽 전경이 또 곤봉을 휘둘렀다. 동작이 큰 두 명의 곤봉을 연속으로 피하며 뒷걸음질 치면서 슬쩍 아까 넘어진 여성을 봤다. 시간을 버는 동안 어딘가 구석으로 숨어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두 사람은 어느새 다른 방향에서 온 전경들에게 잡혀 연행되고 있었다. 


잠시 한 눈 판 사이에 이번엔 오른쪽에서 뭔가가 휙 튀어나왔다. 순간 배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몸의 균형을 잃었다. 배를 감싸쥐고 앞으로 넘어지려는 찰나 목과 등에 통증을 느꼈다. 아까 두 명이 격렬하게 곤봉을 내리쳤다. 눈앞에서 번개가 치는 것처럼 순간 시력을 잃은 느낌이었다. 다음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치 아르마딜로처럼 몸을 둥글고 만 자세로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모르겠으나 팔다리가 마치 내 몸이 아닌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온 몸에 힘을 줄 수 없었다. 소리를 들으니 군화발들의 뜀박질은 이제 제법 멀어져있었다. 비명 소리와 무언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들이 멀리서 들렸다.


계속 몸을 움직여 여기서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손가락을 움직이려 집중했다. 간신히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곧 몸 여기저기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다 고개를 들어보니, 가까이에 전경 하나가 쓰러진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아직 다리 근육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잠시 더 누운 상태로 팔 다리의 각 근육 상태를 살폈다. 소리를 잘 들어보니 근처에서 쓰러진 사람들을 한쪽으로 모으는 전경들이 한 둘이 아닌 듯했다. 주변 눈치를 살피다가 몸을 일으켜 뛰기 시작했다. 전력질주였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다리가 무척 빨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뒤에서 전경이 하나 따라오는 듯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뛰었다. 


한참을 뛰어 어느 골목으로 뛰어들어갔는데, 갑자기 진압복을 입고 헬멧을 쓴 경찰을 만났다. 복장이 달랐다. 전경이 아닌 경찰이었다. 헬멧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이가 제법 들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뒤에서도 전경이 쫓아오고 있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달리던 탄력 그대로 그 경찰을 향해 돌진했다. 경찰은 방패를 앞세웠고, 나는 그대로 방패를 발로 밀어차고 멈췄다. 살짝 뒤로 밀렸던 그는 곤봉을 쥔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순간 선택해야했다. 어떤 동작을 취할 것인가? 어디로 피할 것인가? 다음 순간 반격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디로 도망갈 것인가? 경찰이 휘두른 곤봉을 아슬아슬하게 빗겨 피하고 반사적으로 원투 펀치를 옆구리와 가슴에 꽂아넣고 연결동작으로 어퍼컷을 턱에 꽂았다. 하지만 진압복과 헬멧 덕분에 주먹질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내 손에서 통증만 느껴졌다.


다음 순간 경찰은 다시 곤봉을 휘둘렀고, 내 오른쪽 어깨에 맞았으나, 내가 몸쪽에 바짝 붙어있었으므로 위력은 별로 없었다. 주먹으로 타격을 주지 못하니 발을 쓰꺼나 쓰러뜨려야 했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순식간에 빗당겨치기와 비슷한 동작으로 경찰을 바닥에 쓰러뜨리고, 발로 헬멧을 걷어찼다. 헬멧 덕에 머리에 충격은 없었어도 목뼈에는 충격이 갔으리라. 곤봉을 뺏어서 도망가려 했으나, 넘어져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손아귀에 힘을 꽉 주고 곤봉을 놓기 않았다. 빨리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에 곤봉을 포기하고 다시 한번 헬멧에 발길질을 해주고, 뜀박질을 시작했다.


한참을 뛰어 어느 대형서점에 들어갔고, 화장실에서 확인한 몰골은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왼쪽 소매가 찢어졌고, 복부도 날카로운 방패에 옷과 피부가 찢겨있었다. 게다가 뒷 목쪽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옷은 완전히 먼지 투성이였다. 


"오빠, 잠은 집에가서 주무셔야죠. 아깐 멀쩡하더니 언제 취하셨대?"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살피고 있었다. 내가 눈을 뜨고 왼손으로 이마를 짚자, "정신 차리셔요. 오늘 그만 드셔야겠네." 라고 말하며 잔에 남은 술을 비웠다. 빈 잔에는 녹다 말은 얼음 한 조각이 남아있었다. 난 여전히 왼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로 오른손으로 내 잔을 가져다 입에 털어넣었다. 타는 듯이 뜨거운 느낌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짜릿한 쾌감이 뇌를 자극했다. 내 잔에도 이젠 녹다남은 얼음 조각 하나가 남았다.


그가 고개를 내 귓가에 대고 "사실 난 오늘 좀 더 땡기는데" 라고 말꼬리를 흐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난 이마를 짚은 손을 떼고 고개를 빳빳하게 들어보려고 애썼지만, 맘처럼 잘 되진 않았다. 이번엔 그가 내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와 눈을 마주쳤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날 살피며 입은 웃고 있었다. "응? 오빠 한 잔 더해도 돼?" 눈웃음과 함께 고개를 돌린 그는 술병을 꺼내 자신의 잔을 채웠다. 이번에도 정확히 삼분의 일을 채우고 얼음 세 알을 넣었다. "오빠는 여기 술 깨는 약을 드셔요." 라고 하더니 허리를 숙여 작은 플라스틱 병을 꺼내 뚜껑을 따고 내밀었다.


그가 내민 병을 받아들고 잘 세워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바로 세우고 그의 눈을 보았다. 생글생글 눈웃음을 짓는 눈이 나를 마주 보았다. "바텐더 류민씨, 마지막으로 노 노래 하나 듣고 갑시.......다.", "네, 무슨 노래 들려드릴까요? 말씀하세요." 그는 무슨 곡인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다시 눈을 둥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음 그게 무슨 노래였더라. 분명 방금전까지만 해도 제목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막상 말하려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있잖아 저기 사막에서 음 작은 가게에...... 어, 그 영화 주제곡이 진짜 유명한데." 여기까지 말하고 머리가 아파 양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다. 모르겠다. 그냥 담배 한 대 피우고 갈게." 담배 한 개비를 꺼내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줬다. 그리고 내가 물고 있던 담배는 자신의 입에 물고, 또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내 입에 물리며, 다시 불을 붙였다. 조용한 실내에 담배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나는 동시에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길게 내뿜은 연기는 서로 섞였다.


그는 잠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몸을 돌려 몇 발짝 걸어갔다. 난 그제서야 그가 건넨 술 깨는 음료를 마셨다. 음료를 다 마시고 내려놓을 때쯤 음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A desert road from vegas to nowhere

some place better than where you're been

A coffee machine that needs some fixing

In a little cafe just around the bend

I am calling you

Can't you hear me

I am calling you


눈을 감고 음악을 듣다가 문득 눈을 떠보니 그가 내 눈앞에 담배 연기를 훅 내뿜고 꽁초를 재떨이에 던졌다. 꽁초에는 빨갛게 립스틱 자국이 남아있었다. 내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자 그는 빨간 입술을 모아 내밀었다. 그리고 입으로 쪽 하고 소리를 냈다. 카드를 받아들고 몸을 돌려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가게 안 곳곳에 그려진 검은 고양이 실루엣을 본다.


그날 밤 꿈 속에 검은 고양이가 조용이 눈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고, 이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이 빨간 아름다운 여성이 나타났다가 허스키한 목소리의 누군가가 귓가에 "불법 시위 중이니 나가줄래?" 라고 물었다가, 가늘고 흰 손이 담배를 내 입에 물리고 불을 붙여줬고, 이어서 차분하고 딱딱한 말투의 여경이 방송차에서 "오빠, 한 잔 더 해도 되지?" 라고 방송했고, 마지막으로 거대한 빨간 입술이 입술을 모아 쪽 하고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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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더운 날을 견뎠던 것은 휴가 덕분이었다. 올해 여름은 평창과 부산에서 재밌게 놀다 올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휴가를 이틀 앞두고 역기를 들다가 무릎을 다쳤다. 스내치 동작 중에 균형이 흐트러지며 무릎에 통증이 왔다. 


덕분에 부상자 신세로 휴가를 떠나 일주일을 지냈다. 일상이었다면 뭐 그리 특별한 경험이 아닐 수 있겠지만, 휴가라서 매우 독특한 경험이 되었다. 다행히 나는 일시적으로 잠시 몸이 불편한 상태로 여행을 다녀왔지만, 평생 그 불편을 안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휴가나 여행이 얼마나 힘든 경험일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흔치 않은 경험을 잊지 않기 위해 자판을 두드려 본다. 


전날 밤


휴가 가기 전날 밤엔 일찍 잠들었다가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해야지 생각했건만, 더위 때문에 새벽 세시쯤까지 잠들지 못했다. 분명 일찍 자려고 누웠건만, 자꾸만 땀으로 젖는 베개를 돌려 베고, 젖은 깔개를 벗어나 마른 곳으로 옮겨다니다 보니 그 시간이었다. 선풍기 두 대를 교차로 켜 놓아도 그랬다. 도무지 참지 못해서 찬 물로 샤워도 두 번이나 했다. 


아, 더위 더하기 아픈 무릎 때문에도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무심결에 조금 움직이다가 무릎 통증을 느껴 고통을 참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밤새 얼음팩을 번갈아 냉동실에서 꺼내와 무릎에 대놓고 있었다. 처음엔 수건을 깔고 그 위에 댔는데, 하나도 차갑지 않더라. 그래서 맨 살에 바로 대고 수건으로 대강 고정시켜놓고 잤는데, 처음엔 살갖이 시려웠지만, 나중엔 아무렇지 않더라.


아니 생각해보니 잠시 졸다가 깨긴 했다. 그 주 내내 더위와 슬픔과 쌓여있는 일들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느라 제 정신이 아니었고, 잠을 잘 자지 못해 늘 피곤한 상태였으니까. 그래도 계속 깼고, 결국 세 시가 넘어서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고 컵에 얼음을 반쯤 채워왔다. 술이라도 마셔야 잠이 올 것 같아서였다. 다시 냉장고를 열어봐도 마땅한 안주는 없었다. 휴가 가기 전에 집에 음식을 남겨두지 않으려고 음식을 사지 않았고, 있던 음식들은 이삼일 동안 다 먹어치웠다. 라면이 두 개 남아있었는데, 끓여 먹기가 끔찍하게 싫었다. 그 더위에 가스불을 켜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그냥 생라면을 부셔서 안주로 삼았다.


아마 얼음물을 탄 소주는 잘 넘어갔다. 한 병을 다 비우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 병을 다 비우고도 생라면이 남아서 술병을 치우고도 남은 라면을 오독오독 씹어먹느라 시간이 좀 더 걸렸다. 마침내 라면을 다 먹어치우고 잠시 고민했다. 아픈 무릎을 부여잡고 팔 힘으로 몸을 지탱하며 힘들게 몸을 일으키며, 순간적으로 무릎에 느껴지는 통증을 견디며, 화장실로 가서 이를 닦고 돌아와서 드러누울까, 아니면 지금 앉은 자세에서 그냥 뒤로 드러누울까. 아주 잠시 머리속에서 고민하긴 했지만, 답은 뻔했다. 되도록이면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라는 생각을 하며 양치 하지 않고 누운 행위를 스스로 정당화했다. 아까 그 아픈 무릎으로 소주도 꺼내오고, 얼음도 꺼내오고, 라면도 가져왔으면서 말이다.


잠들기 전에 계속 생각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씻은 듯이 무릎이 나아서 즐거운 마음으로 휴가를 떠났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난 종교를 믿지 않으니 기도 따위 하진 않았지만, 그날 만큼은 아마 기도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첫날 아침


혹시 늦게 일어날까봐 알람을 여러개 맞춰놓고 잠들었는데, 첫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깼다. 이 더위에 늦게 일어날 걱정 따위는 필요도 없었다. 다만 눈도 뜨고 정신도 들긴 했는데, 몸을 움직이기가 너무도 싫었다. 혹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살짝 다리를 움직여봤다가 무릎 뼈와 인대 사이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에 이를 악 물고 신음을 흘려야 했다. 수건으로 대충 고정시켜 둔 얼음팩이 다 녹아 흐물거리는 상태로 무릎에 붙어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하루 밤 얼음 찜질을 한다고 늘어난 인대가 다 나을 리는 없었다. 부상 당한 그 순간 느꼈다. 어쩌면 한 달 이상, 심하면 두어달 고생하겠구나. 근데 하루만에 낫길 바라다니. 근데 이 다리로 진짜 휴가를 가긴 갈 수 있는 걸까?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아니 일어나는 것 조차 너무나도 힘들고 옷을 입는 일만 해도 꽉 깨문 잇몸 사이로 신음을 흘리며 간신히 해내는 상태인데, 어떻게 휴가를 갈 수 있지? 머리는 절로 혹시라도 있을 불상사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내가 함께 들어가지 못하고, 아이들만 계곡에 들어가서 놀다가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이 무릎으로 뛰어가지도 못할텐데. 불길한 생각은 한 번 들기 시작하면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이번엔 작은 아이가 혼자 신나서 뛰어가는데, 나는 무릎 때문에 쫓아가지 못하고,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자동차가 아이를 치어버리는 상상이라던가, 크고 작은 바위를 오르내리며 계곡을 지나는데, 큰 바위 위에서 작은 아이가 무서워하며 움직이지 못하는데, 나는 무릎 때문에 아이를 잡아주거나 안아서 내려주지 못하고, 순간 몸을 휘청한 아이가 바위에서 떨어져 다치는 상상이라던가.


암튼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혼자 땀을 뻘뻘 흘리며 불길한 상상들만 하다가 시간을 제법 보내다가 이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어서야, 신음 소리와 함께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어제 생각엔 이 무릎 상태에도 불구하고 내가 먼저 아이들을 데리러 가서 아이들의 준비 상태를 챙긴 후에 함께 여행갈 가족을 만나러 걸어가려 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한 발짝, 두 발짝 집안에서 씻고, 짐을 챙기느라 움직이면서 그 생각은 싹 지워버렸다. 이 무릎으로 아이들을 데리러 갈 수 없었다. 우리를 태워가기로 한, 같이 여행갈 가족의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무릎 부상으로 움직이기 힘들어요. 죄송하지만, 저희 집으로 데리러 와주시면 같이 애들 만나러 가야겠어요. 라고 쓰고 집 주소를 덧붙였다.


그리고 싸놓은 짐을 점검하다 보니, 수영복을 빠뜨렸다. 무릎이 아프니 무의식적으로 수영복을 챙기지 않았던 것인가. 가져가도 쓸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걸까? 그래도 아무리 무릎이 이래도 애들만 계곡과 바다에 넣어둘 수는 없으니, 수영복은 꼭 필요했다. 근데 어디있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이사 후 수영복을 어디다 정리해뒀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여기저기 수영복이 있을만한 공간들을 다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없었다. 여기도, 저기도, 저 구석에도, 이 구석에도 없었다. 결국 나를 데리러 집 근처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을 때까지도 수영복을 찾지 못했다. 포기하고 그냥 가야하나 생각하다가 문득 떠올랐다. 작은 방 저 구석에 처박힌 잡동사니가 담긴 종이가방에 있을 것 같았다. 그 종이가방을 찾기 위해 한참을 뒤져서 간신히 그 안에서 수영복이 담긴 비닐봉지를 발견했다.


차를 세워두고 기다리던 이는 내 절뚝거리는 걸음을 보더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나는 비탈길을 최대한 빨리 걸어내려가려고 애썼건만, 뒤뚱뒤뚱 절뚝절뚝 걸음은 자꾸만 나를 붙잡았다. 차에 타는 것도 문제였다. 차에 타려면 반드시 무릎을 굽혀야 했고, 그 순간 뭔가 날카로운 것이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것 같은 통증이 왔다. 그리고 뒤이어 기분 나쁘기 길게 이어지는 둔중한 통증을 느꼈다. 집에서 계단을 내려와 비탈길을 걸어서 차에 타기까지 그 짧은 길이 마치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도 된 듯 길게 느껴졌고, 그 여정 끝네 털썩 앞 좌석에 몸을 묻은 나는 마치 올림픽 경기장에서 100미터 달리기 결승전이라도 뛴 것처럼 피곤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휴가는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가 아팠다.


운전 교대


몇 년 전까지 아이들과 함께 살았던 집으로 가면서 큰 아이에게 전화했다. 짐 다 챙겼으면 준비해서 집 앞으로 나와있으라고 했다. 그렇게 말했지만, 결국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신발도 신지 않고 있으리라고 예상했다. 역시 그랬다. 우린 집 앞에 도착해서 한참 기다렸다. 다리가 괜찮았다면 내가 올라가서 애들을 데리고 내려왔겠지만, 차에서 내렸다가 다시 탈때 느낄 그 고통을 떠올리니 여기서 꼼짝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가방을 하나씩 메고 내려왔다. 나는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고 손짓으로 애들을 불렀다. 아이들은 뒷 좌석에, 함께 여행가는 가족 3형제 중에 유일한 딸인 둘째 옆에 차례로 탔다. 애들은 서로 인사를 했고, 나는 운적석에 앉은 이에게 길을 알려주며 간접적으로 출발을 명했다.


평창까지는 생각보다 먼 길이라 도중에 운전을 교대해 줄 생각이었다. 가다가 적당히 휴게소에서 어른들은 커피를 한 잔씩 하고, 애들은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씩 물려주고 잠시 쉬다가 다시 출발할 때는 내가 운전할 생각이었다. 가능하려나? 이 다리로. 생각해보니 안 될 것도 없었다. 나는 무릎을 굽힐 때 통증을 느끼지만, 어차피 브레이크와 엑셀을 밟기 위해 오른발은 편 상태로 있어야 하고, 운전을 하는 행위에는 큰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운전대를 잡은 이는 시간이 흐를 수록 길이 막히니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서 쉬던가 밥을 먹자 했다. 가는 도중에 다른 차로 이동중인 이 가족의 아내와 아들들은 점심을 어떻게 할 건지, 따로 각자 먹을지, 아니면 어느 지점을 정해놓고 만나서 함께 먹을지 문자로 물었다. 운전중일테니 일부러 전화를 걸지는 않았다. 한참 후에 답이 왔는데, 쿨하게 각자 먹자고 했다. 우린 평창에 들어와서 목적지인 계곡 입구까지 들어와서 식당을 찾아 주차했다. 차에 타는 일보다 차에서 내리는 일은 생각보다 덜 힘들었다. 차문을 완전히 끝까지 열어젖히고, 무릎을 편 상태로 오른발을 콤파스 돌리듯 돌려 차 밖으로 뻗고, 왼발에 힘을 줘서 엉덩이를 들면 일어날 수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그제서야 아빠가 무릎을 다쳤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했다. 큰 아이는 걱정스러운지 절뚝이는 내 곁으로 와서 부축하려고 했다. 작은 아이는 평소처럼 내 옆에서 손을 붙잡았다. 그 순간부터 아이들은 휴가기간 내내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주었다. 다친 아빠를 돌보는 기특한 아이들.


긴 시간 운전한 이는 이 동네 막거리를 마시고 싶어했다. 내가 운전할테니 걱정말고 마시라고 했다. 나는 맛만 보려고 반 잔만 마셨다. 두 집의 딸들은 입맛이 완전히 달랐다. 저쪽집 딸은 동태찌게를 시켜 맛있게 먹었고, 우리집 딸들은 감자전으로 배를 채웠다. 음식은 맛있었다. 특히 도토리묵이 정말 맛있었고, 막걸리도 맛있었다. 운전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반 잔 밖에 못 마신 것이 살짝 아쉽긴 했으나, 그날 밤에 많이 마실 예정이었으니 괜찮았다.


약속대로 운전대를 잡고 출발했는데, 예상했던 대로 별 어려움은 없었다. 차가 낯설어서 차에 익숙해지는 데 조금 시간이 필요했을 뿐. 무사히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만 계곡을 오르는 외길은 좁았고, 시간이 점심 무렵이라 내려오는 차들이 많았고, 좁은 길을 양쪽 차들이 간신히 지나는 일이 좀 무서웠다. 특히 남의 차를 몰고 있는 입장에서 이 차의 너비를 눈대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계곡


숙소에 도착해 다른 차를 몰고 온 그 집 식구들과 합류하고, 아직 방을 청소중이라고 해서 먼저 계곡을 향했다. 그 계곡으로 자갈과 바위로 된 험한 길을 내려갈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갈 수 있겠지, 설마 못 가겠나 싶었다. 나중에 막상 가보니 진짜 못 내려가겠더라. 그래도 애들이 계곡에서 놀려면 내가 함께 내려가야 하니 억지로 고통을 참으며 내려갔는데, 정말 아프고 힘들었다.


그래도 계곡 물에 발 담그고 평상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기분은 진짜 짜릿했다. 아이들도 신나게 잘 놀았다. 정말 시원했다. 서울에서 느꼈던 그 끔찍한 더위는 남의 나라 얘기 같았다. 그 고통을 참고 힘들게 내려오길 잘했다 싶었다. 하지만 앉아 있는 내내 무릎이 욱씬욱씬 아팠다. 그때까지만해도 압박붕대를 구하지 못해 맨 무릎으로 다녔다. 만약 압박붕대를 처음부터 구했으면 그렇게까지 악화되지 않았을텐데, 처음 집을 나설 때는 그 생각을 못했고, 나중에 생각이 난 후에는 살 곳을 찾지 못했다.


오후 늦게 이제는 올라가려고 하는데, 그때부터 다리를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무릎 통증 만이 아니라 무릎 주위 근육들이 다 무리를 해서 더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 내 다리인데도 내 맘대로 움직일 수 없고 감각도 점점 없어지고 있었다. 큰 아이가 내 상태를 보더니 다가와 부축했다. 하지만 그 오르막길은 누가 누굴 부축해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다행히 내 무릎은 내려가는 계단과 내리막길이 힘들지, 올라가는 계단과 오르막길은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었다. 비록 울퉁불퉁 불규칙한 바위를 요리조리 잘 밟고 올라야 했지만. 어쨌든 아이를 안심시켜 먼저 올려보내고, 나도 뒤따라 힘겹게 올라갔다.


압박붕대


저녁이 되어 함께 온 가족의 남편은 숯불에 고기를 구울 준비를 했고, 아내는 밥과 야채와 애들 먹을 거리들을 챙겼다. 나는 뭐하나 도와주지 못하고 내 말을 듣지 않는 내 다리를 원망하고 있었다. 무리해서 계곡을 다녀온 덕분에 이제 걸음을 걷는 것 조차 쉽지 않았다. 도중에 장을 보러 나간 이에게 압박붕대를 구해달라 했건만, 파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결국 붕대를 구하지 못한 채로 고기를 먹으로 방을 나섰다. 하필 숙소가 2층이라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큰 아이는 이것저것 음식과 그릇과 수저 등을 나르느라 바빴고, 한 발 한 발 다리를 질질 끌며 고기를 먹으러 계단으르 내려가는 나와 옆에서 뭐라도 도와주려고 걱정스런 눈빛으로 지켜보는 작은 아이를 펜션을 운영하는 선배님이 보셨다. 아까 낮에 마주쳤을 때도 다친 다리를 보고 걱정하셨는데, 이제 잘 걷지도 못하는 날 보고는 뭐가 필요냐고, 지팡이를 줄까 물으신다. 압박붕대가 필요하다 했더니, 구해보겠다고 인근 펜션 사장님들에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하셨다.  


마침내 함께 온 두 가족 8명이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저쪽 집 남편은 열심히 고기를 구웠고, 아내는 애들 밥을 챙겨먹였다. 나는 그집 남편을 도으려 불판 앞에 섰으나, 별 도움은 못 되고 그냥 시늉만 하며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고기도 거의 다 구워서 맥주를 마시며 고기를 먹고 있는데, 펜션 선배님이 오셔서 압박붕대를 내밀었다. 마침 근처 한 군데서 있다고 해서 가지러 다녀오신 듯하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그자리에서 붕대를 감았다. 무릎 때문에 고생한 시간이 길어서 붕대를 감는 건 너무나도 익숙했다. 잠시 후에 선배님이 소주를 두 병 갖고 오셨다. 우리도 소주를 사오긴 했는데, 냉장고에서 꺼내오질 않고 맥주만 홀짝이고 있었다. 아마 내가 무릎이 아프지 않았다면 제일 먼저 소주부터 가지러 갔을텐데, 누구 심부름 시키기도 미안해서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는데, 선배님이 구원자였다. 그때부터 우리 자리에 합석한 선배님과 어른 3명은 늦은 시간까지 웃고 떠들며 술을 마셨다.


술. 술. 술


유쾌한 시간이었고, 서로 많은 얘길 나누며 교감도 많이 했다. 그날 신기하게도 술이 잘 들어갔다.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 술을 마셨다. 이상하게 엄청나게 많이 마셨는데도 취하지 않았다. 선배님은 가져온 소주병이 비면 금방 또 창고로 가서 서너병을 가져오셨다. 아이들은 금새 방으로 올라갔고, 어른들만 남았는데, 그 가족의 아내는 술을 입에 대지 않고 대화만 나눴고, 남자 셋이서 소주를 마셨는데, 주로 선배님과 내가 잔을 비우는 속도가 빨랐다. 암튼 셋이서 몇 병이나 마셨던가? 나중에 세보니 놀란만한 숫자였다. 


늦은 시간 선배님은 조금 취하셔서 주무시러 가시고, 우린 먹은 자리를 대강 정리하고 방으로 올라가서 더 마셨다. 그 집 남편은 좀 마시다가 먼저 자러 갔다. 특이하게 본인이 코를 매우 심하게 곤다고, 특히 술 마신 날엔 장난 아니라고 말하며 방에서 자지 않고, 혼자 차에서 자겠다고 나갔다. 복층 구조라 그 집 아이들 셋과 아내는 계단 위 다락방처럼 생긴 공간에 누웠다. 덕분에 나와 우리 애들이 아랫층을 다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나는 이미 술을 제법 마셨음에도, 평소였으면 벌써 뻗어버렸을 양이었는데 너무 멀쩡한 게 신기했다. 그래서 더 마셨다. 애들은 내 양 옆에서 안주를 주워먹으며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어차피 휴가라 애들이 늦은 시간까지 안 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원하는대로 하도록 두었다.


나는 우리가 사온 소주를 다 마시고, 냉장고를 뒤져 막걸리도 큰 통을 하나 다 비우고서야 상을 대강 치우고 누웠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날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게 술의 힘으로 다리의 통증을 잊으려는 무의식 때문이 아닐까. 아니 뭐 나는 늘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이니 그런 이유를 붙이는 게 우습긴 하다. 다음날 아침에 다락방에서 잤던 그집 아내의 말을 들으니 새벽에 내가 통증 때문에 신음소리를 여러번 냈다고 했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간단히 정리만 하는 정도로 쓸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쓰다간 둘째날부터 마지막날까지 다 쓰면 하루종일 걸려도 모자랄 것 같으니, 간단히 요약만 해야겠다. 우린 평창에서 2박3일을 놀았다. 압박붕대를 감고 나서는 한결 움직이기가 수월했다. 푹 잔 덕분에 근육 피로도 조금은 풀렸다. 둘째날은 계곡에서 놀고, 셋째날은 짐을 싸서 강릉으로 갔다. 강릉에도 송정해수욕장이 있던데, 거기서 저쪽집 식구들은 바다에 들어가 놀았고, 우리 식구들은 곧 부산가는 버스를 타야해서 바닷물에는 발만 담갔다가 말리고, 해송이 만든 그늘에서 쉬었다. 그리고 부산행 버스를 탔다.


다른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간 일은 처음이었다. 결혼 생활을 할 때도 아내 친구가 동행한 적은 있었지만, 가족 단위로 함께 움직인 적은 없었다. 다치지 않았다면 훨씬 더 재밌게 잘 놀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재밌게 잘 지내다 왔다. 그 집 부부가 많이 도와주고 배려해준 덕분이다. 그집 남편은 묵묵히 잘 챙겨주고 도와주었고, 그 집 아내 역시 내내 먹을 것들을 챙겨주고 사소한 것들까지 잘 배려해줬다. 함께였기에 여행을 할 수 었었다. 고마웠다!


부산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여동생은 다친 무릎을 보고 난리가 났다. 이 무릎으로 휴가를 왔냐고 타박하고, 애들 데리고 놀러가려고 하면, 다리도 성치 않은 놈이 애들 데리고 어떻게 다닐 거냐고 난리쳐서 제대로 놀지도 못했다. 우리 애들과 조카들까지 5명을 데리고 해수욕장을 가려고 했는데, 하도 식구들이 난리를 쳐서 간신히 설득했다. 아버지가 동행해서 해수욕장을 한 번 겨우 다녀왔다. 해마다 휴가로 부산에 오면 적어도 두세번 이상 바다에 다녀왔는데, 아니 애초에 그러려고 휴가를 오는 건데. 아까운 시간만 실내에 에어컨 켜고 보냈다. 그 며칠간 내내 시끄러운 조카들의 싸우는 소리, 노는 소리를 들으며 지냈다. 조카들은 예전처럼 놀아달라 하는데, 다리가 아프니 예전처럼 놀아주지 못하고 나는 내내 잠만 잤다. 어차피 나가 놀지도 못하니 회복이라도 확실히 하자 싶었다.


어머니의 성화로 한의원에 한 번 다녀왔다가 원장의 어이없는 행동에 질려서 다시는 안 가겠다고 선언했고, 아버지 차를 몰고 근처 마트를 한 번 다녀왔다. 토요일엔 주말 부부인 매제가 돌아와서 온 식구가 아버지 생신을 축하하러 외식을 했다. 엄청 고급스러워 보이는 해변 근처의 큰 식당이었는데 층별로 취급하는 요리가 달랐다. 우린 오리고기를 먹었는데, 고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일하는 직원들의 태도는 나빴고, 가격은 더 나빴다.


평창에서도 부산에서도 내내 짐만 되는 내 처지가 한심해서 설겆이와 청소 등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최대한 하려고 노력했다. 다들 다리도 성치 않은데 그냥 두라고 했지만, 걷는 게 힘들지 가만히 서 있는 건 괜찮으니 서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다 괜찮다. 오히려 의자 없이 바닥에 앉거나 누워 있는 일이 내게는 더 힘든 일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후 이삼일 지나자 무릎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아직 완전히 정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혀 굽히지 못하던 무릎을 살짝 굽힐 수 있게 되었고, 통증은 거의 사라졌다. 혹시 실수로 무릎이 접히며 다시 부상을 당할까봐 여전히 압박붕대는 감고 다니지만, 붕대가 없어도 걷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예상보다 회복 속도가 더 빠른 것 같다. 부산에서 어머니가 계속 전자침이라는 뾰족한 침이 네 귀퉁에 각각 달린 네모난 플라스틱으로 계속 무릎을 찔렀는데, 그 덕분일 것이다. 또 조그만 크기의 저주파 자극기를 하루에 이삼십분씩 하고 앉아 있었는데, 그것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그 두 가지가 억지로 움직이느라 혹사당한 무릎 주변 근육들을 풀어주고, 회복시키는데 도움을 주었겠지만, 정작 다친 부위인 인대에는 크게 도움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인대는 저 뼈 안쪽 깊숙한 곳에 있어서 직접 맛사지하거나 치료할 수 없으니까.


이젠 더이상 혼자 누워있다가 일어서는 일이 무섭거나 고통스럽지 않고, 내려가는 계단과 내리막길이 그리 공포스럽지 않다. 물론 혹시라도 발을 잘못디뎌 악화될까봐 조심하기는 한다. 조심조심 잘 회복하고 남은 여름을 잘 버텨야겠다.


마지막은 역시 책 이야기












페이스북에서 이 책 소개를 봤다. 우리 딸들에게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애들엄마가 사줄 수도 있겠지만, 그전에 내가 먼저 사줘야겠다. 알라딘에 주문하기 보다는 동네서점에 애들이랑 놀러가서 사주는 것이 더 좋겠지. 주말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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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8-09 01: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생많으셨네요....
군대에서 10km 마라톤 참가 했다가 무릎 인댄지 뭔지 나가가지고 석 달을 절뚝이며 생활했던 기억이 납니다..... 계단 오르는 것보다 내려갈 때 지옥이었습니다만,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더라고요 ㅋㅋㅋㅋㅋ 개자식들.....

감은빛 2018-08-22 10:28   좋아요 0 | URL
군대에서 마란톤에 참여했군요.

저는 신병교육대 행군 때, 혹한기 훈련 때 이렇게 두 번 훈련 중에 무릎을 다쳤어요.
무릎을 아예 접지 못하고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건만 병원에 제대로 보내주지 않았어요.
나중에 연대 의무대와 사단 의무대를 거쳐 육군병원에 갔는데,
군의관이란 작자가 자긴 왜 이런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던 표정이 기억나네요.

책읽는나무 2018-08-09 0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동하다가 다치는 사람들이 많다던데....저도 운동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지만 운동만 하고 오면 요즘 발목,무릎,손목같은 관절쪽이 시큰하더라구요.그래서 좀 주의깊게 읽었더랬습니다.
더운 여름날 그것도 휴가까지 가야했던 상황에서 힘드셨겠습니다.
빨리 완쾌되시길요.^^

감은빛 2018-08-22 10:36   좋아요 0 | URL
네, 운동은 늘 부상의 위험을 안고 있죠.
특히 관절은 항상 조심해야 하는데, 그게 맘처럼 되질 않네요.
마음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책읽는나무님도 운동할 때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

2018-08-09 1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22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8-09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릎이 아픈 와중에 소주를 마신 감은빛님 모습을 보니 저도 그런 비슷한 행동을 한 적이 있어요.

무릎에 통풍이 왔는데 입맛이 없어서 감자칩을 안주로 삼아 맥주를 마셨어요. 그때는 무릎 통증의 원인을 모르고 있었어요. 다음 날에도 통증이 남아 있어서 병원에 가봤는데, 그때 통풍 진단을 받았어요.. 의사 선생이 전날에 먹은 음식을 묻길래, 술 마셨다고 하니까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어요.. ㅎㅎㅎ

감은빛 2018-08-22 10:38   좋아요 0 | URL
제 경우엔 염증이 생기거나 한 건 아니라서
술이 별로 문제될 건 없었어요.
통풍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통풍에 맥주는 진짜 문제 인거 아닌가 싶네요.

암튼 그래도 먹고 싶을 땐 먹고, 마시고 싶을 땐 마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뭐 얼마나 살지도 모르는 인생 술 정도는 마셔도 되는거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

페크pek0501 2018-08-16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나아지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래도 여행을 가지 않은 것보다 간 것이 낫다는 생각입니다. 집에만 있으면 무릎 통증에만 집중하게 되니까요. 그럴 땐 정신 분산을 위해서라도 밖에 나가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좀 힘들어서 그렇지만.

딸들을 위한 아빠의 수고... 잊혀지지 않을 여행을 하셨다고 생각드네요.
완쾌되시길 바랍니다.

감은빛 2018-08-22 10:40   좋아요 0 | URL
네, 페크님. 염려해주신 덕분에 꾸준히 나아가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남들은 그 무릎으로 무슨 휴가냐? 여행이냐? 했지만,
저는 정말 너무나도 당연하게 가야하는 거였어요.
말씀처럼 혼자 그 더운 여름에 찜통같은 방에 갇혀 있었다면
아마 미쳐버렸거나 쪄죽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