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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 여름 휴가 때 난생 처음으로 배를 타고 멀리 바다 낚시를 갔었다. 그 날 태양은 작렬했고, 바람이 한 점 없어 파도도 잔잔했다. 이런 날 고기잡이를 나가면 물고기가 많이 잡힌다고. 그래서였을까. 배멀미를 약간하는 와중에도 갯지렁이를 미끼로 놀래미를 세 마리나 잡았다. 고기를 낚은 기쁨으로 배속의 울렁느글함이 눈 녹듯 사라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이후로 꼬박 1년을 별렀다. 팽팽한 낚시줄에서 고기가 입질을 할 때 느껴지는 손맛을 잊을 수 없었고. 그래서 올 여름에도 배를 타고 바다낚시를 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배를 타게 될 대망의 날 몇일 전부터 날은 흐렸고, 바람은 남서풍이 계속 불어왔다. 서해에서 출어를 나갈 때 남서풍이 불면 배가 뜨기 어렵다고 한다. 맞바람과 높은 파도를 무릅쓰고 항해를 해야 하니까,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던 당일은 여전히 하늘은 구름을 잔뜩 끼고 앉아 있었지만, 남서풍은 좀 자자들어 갔다. 다시 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배를 띄워보자는 말이 나왔고, 기어이 배를 타고 바다 낚시를 나갔다.
그런데 파도가 그렇게 무섭다는 것을 난생 처음 겪었다. 그동안 나를 물로만 보았냐고 시위라도 하는 것 같았다. 배가 심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파도를 따라 2미터도 더 되게 올라갔다가 떨어졌다가를 반복했다. 같이 탔던 다른 가족들은 바이킹이라도 탄 기분이었는지 환호성 비슷한 소리를 질러댔고, 나는 경악의 비명을 질러댔다. 작은 섬 주변에 고기가 많다고 해서, 배가 멀리까지 나아갔다. 정말 공포스러웠다. 육지와 멀어지는 것이... 그 이후로는 말하지 않으련다. 다른 이들이 고기를 잡기 위해 낚시줄을 드리우고 줄의 감촉을 느끼고 있을 때, 나는 배 한 켠에서 배타기 세 시간 전에 챙겨 먹은 아침밥을 위장에서부터 뿜어 바다 속 물고기들에게 밑밥으로 나누어주느라 정신을 잃고 있었으니까. 내가 멀미를 심하게 하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탓에 출항한 지 채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입항했다.
다시는 바다낚시 간다고 설칠 일이 없을 것 같은데, 또 모르겠다....
새로운 세상의 꿈을 품고 캐나다로 이민길에 나아갔지만 배가 표류하고 하루아침에 부모형제 모든 것을 잃은 파이가 느끼는 슬픔과 고통, 아니다 그보다 무서운 건 두려움이었겠지.
상냥한 네가 공포를 만나다니 이건 맞지 않는 일이야. 네가 그대로 죽었다면 차라리 나았을걸. 너를 보니 얼마나 가슴 아리도록반가운지.
때론 성난 듯, 때론 한없이 잔잔한 무섭도록 막막한 망망대해가 배경이다. 그리고 구명보트안에서 위풍도 당당한 뱅골 호랑이 리차드 파크와 지내며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파이에게 남은 숙제다. 이것은 파이가 호랑이 리차드 파크보다 그야말로 심리적으로 우세한 위치에 놓여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싸움이다. 그밖에 악조건이 널렸지만, 일단은 급한 것이 한 배를 탄 호랑이를 견제하는 일. 파이가 이 싸움에서 지는 순간, 귀머거리에 장님 후각을 잃은 살덩어리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다.
공포심에 대해 천착하게 되었다. 공포심, 그것 공포심만이 생명을 패배시킬 수 있다. 그것은 명민하고 배반 잘하는 적이다. 관대함도 없고, 법이나 관습을 존중하지도 않으며, 자비심을 보이지도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에 접근해, 쉽게 약점을 찾아낸다. 공포심은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언제나 우리는 잠시 차분하고 안정되고 행복을 느낀다. 그러다가 가벼운 의심으로 변장한 공포심이 스파이처럼 어물쩍 마음에 들어선다.
공포심에 대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성? 이성은 최신 병기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뛰어난 기술과 부인할 수 없는 여러 번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이성은 나자빠진다. 우리의 힘이 빠지고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초조감에 끔찍해진다.
인상에 불과한 공포심이 드디어 승리를 거둔다.
이것은 말로 옮기기가 어렵다. 근본을 흔드는 공포, 생명의 끝에 다가서서 느끼는 그것에 대한 말까지도 썩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힘껏 싸워야 한다. 거기에 말의 빛이 비추도록 열심히 싸워야 한다. 공포는 욕창처럼 기억에 둥지를 튼다. 그것은 모든 것을 썩게 한다.
절망은 호랑이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 아닌가. 파이가 아직도 살 의지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리처드 파커 덕분이었다.
파이는 말한다. “멍청하거나 못생긴 동물과 끝을 맞이해야 했다면 어땠을까? 멧돼지나 타조, 칠면조 떼와 생을 마감했다면”
파이는 그렇게 생을 마감하지 않았다.
난 죽지 않아. 죽음을 거부할 거야. 이 악몽을 헤쳐나갈 거야. 아무리 큰 난관이라도 물리칠 거야. 지금까지 기적처럼 살아났어. 이제 기적을 당연한 일로 만들테야. 매일 놀라운 일이 일어날 거야. 힘들어도 필요하다면 뭐든 할 테야.
그 이후 파이는 어떻게 되었나. 궁금하신 분은 책을 보십시오. 이 책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