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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입니다.
  날도 무척 찌는데, 오늘은 학교에 일찍 출근했습니다. 8시 30분쯤에 학교에 와서 컴퓨터를 켜고, 교무실 곳곳을 돌아다니며 창문을 열었습니다. 오늘은 에어컨 없이 하루를 지내 볼 생각입니다.
  좀 지나니까 아이들이 까불락거리며 올라왔습니다. 모두 다 까맣게 탄 얼굴인 거 있죠! 저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서로 생글거리면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물어봤습니다. 역시 저나 아이들 모두 학교-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를 벗어나고 보니 한결 여유도 있고,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 같습니다. 학교가 저나 우리 아이들에게 꿈을 주고 있는지 정말 의심스럽다는 생각이 새삼 듭니다.
  모처럼 만난 얼굴들과 반가운 인사를 하고, 청소를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공간만 나눠서 청소를 하는데, 여학생이 한 명이라 여직원화장실 청소가 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조금 툴툴거리더니만 곧잘 하고 내려갑니다.
  아이들이 청소할 때 저도 자동판매기를 청소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기 중에는 매일 운영을 해야 하니까 그냥 재료를 넣고, 물을 받아서 채우고, 겉이나 컵이 나오는 입구를 중점적으로 청소하는데, 방학이기 때문에 전원을 끄고 자판기 속을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자판기엔 커피와 프림, 그리고 설탕이 각각의 통에서 한 곳으로 모이는 깔때기 같은 곳이 있고, 거기에서 섞여 다시 물과 만나게 되는 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열기와 불순물을 빨아들이는 흡입관도 있더군요.
  각각을 떼어 내어 교무실 세면대에 담가서 엉겨붙어서 굳어있는 커피 가루를 씻어냈습니다. 그러나 워낙 딱딱하게 굳어져 있던 것이라 잘 풀리지 않더군요. 처음에는 딱딱한 물건의 모서리에 탁탁 쳐서 그 충격으로 딱지들이 떨어지도록 했습니다. 어떤 것은 쉽게 떨어지지만 그래도 효과는 적었습니다. 그래서 건조기에 굴러다니는 젓가락을 이용해서 커피가루가 굳어진 딱지를 떼기도 했는데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냥 물에 담가두었다가 나중에 보면 자연스럽게 녹겠구나'는 생각이 든 건 한참 후였습니다. 그 물이 따뜻하면 더 잘 딱지를 떼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덩달아 들었습니다. 딱지가 떼 지는 게 아니라 어쩌면 흔적도 없이 자연스럽게 녹아버릴 수 있겠죠. 정수기의 물을 받아 세면대에 부속품을 놓고 돌아서는 순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상처도 따뜻한 물과 시간이 필요한 것이구나! 하는 평범한 사실을 말입니다. 제가, 오랜 세월동안 상처받은 우리 아이들의 상처 딱지를 강제로 떼어 깨끗하게 만들려고 모서리를 치고 젓가락을 휘둘렀던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판기 부품들이 충분히 담길 수 있는 물처럼 저나 어른들이 자연스럽게 아이들 주변의 삶과 생활에 관심을 가진다면, 충분히 그 아이들이 바람직하게 행동할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아이들의 상처도 스스로 녹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물에 자연스럽게 풀려버리는 커피가루처럼, 넉넉하고 지속적인 그런 관심과 애정이 아이들의 응어리진 상처들을 흔적을 남기지 않고 고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물이 차갑지 않고 따뜻하면 더욱 좋은 것처럼, 우리가 쏟는 관심이나 애정이 따뜻하면서도 아이들에게 적당한 눈높이라면 더욱 좋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평범하지만-누구나 다 머리 속으로 알고 있지만- 결코 쉽지 않은-실천하기 정말 어려운- 사실을 오늘 또 한 번 깨우친 날입니다. 이렇게 날마다 깨우치고 마음을 다잡아 가면 언젠가는 나아지겠지요.
  정도가 없는 여행길에 오른 느낌입니다. 날마다 깨우치는 보람으로 아이들과 함께 이 길을 가고 싶습니다.                              

        2002년 8월 첫날에 / 느티나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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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3-11-24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지난 번에 근무한 공고에서 방학 중에 일직을 하면서 쓴 글입니다. 누구에게도 사랑 받아 본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 너무 안쓰럽고, 안타까웠는데 제 딴에는 잘 한다고 하는 게 아마도 아이들에게 상처 준 것은 아니었을까 새삼 되돌아 보게 됩니다. 그 녀석들 잘 있는지 모르겠네요!

2003-11-25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음...이번 학예전은 나에게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다. 내가 준비하기로 한 골든벨이 약간 어설프게 끝나서 그랬지만, 학예전 기간 내내 살아있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무척 좋았다. 아! 이렇게 살아있는 표정을 감추고 있었다니~! 나에게는 모든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아이들이 애써 준비한 공연, 전시를 둘러 보고는 기분이 좋아서 싱글벙글! 더구나 오늘 서재에 들어오니 나와 우리 학교 애들을 겨냥한 것만 같은-방명록을 주인의 글로 도배를 해 버렸으니- 새로운 알라딘의 서비스!

내일부터 또다른 일상이 시작된다. 열심히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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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꽃 2003-11-24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글로 굉장히 길게 썼었는데... 저장버튼을 누르니까 오류페이지가 뜨네요.
한순간에 사라져버렸어요. 아, 허무해-
인생은 원래 이렇게 허무한 것일까요?

느티나무 2003-11-24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샘은 요즘 수업하기가 싫어~! 물론 너희들 때문이 아니고, 누구 때문이지! 미치겠다! 실명을 거론하기는 곤란하고... 답답하다.

느티나무 2003-11-24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근데 이 마이페이퍼는 우리를 겨냥한 상품인 거 같지 않냐? 아무래도 그런 느낌이... 어딜 가도 방명록을 일기장으로, 낙서장으로, 기록장으로 쓰는 서재는 없던데...ㅋ
 

[가을, 금정산을 오르다]

   지난 가을 어느 날, 금정산에 올랐다.  늘 수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금정산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못하는 조용한 곳이 있는 것 같다. 아무리 많은 친구와 함께 있어도 마음 한 구석에는 그 누구도 닿지 못하는 어디가 있는 것처럼. 그 날 산을 오르는 동안, 정작 상계봉과 파류봉에선 사람 한 명 보지 못 했다. 모처럼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 같은, 누나 같은, 동지 같은  정순영선생님(사실은, '같은'이란 말은 모두 빼야 하지만 ^^)과 가을산을 올랐다. 세상이 이만큼이라도 살만한 곳으로 굴러가고 있는 것은 바로 정순영선생님 같은 분이 열심히 애쓰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도 정순영선생님께서 찍으셨다. 상계봉으로 해가 지는 장면을 멋지게 남겨주셨다. 우뚝한 상계봉 너머로 아스라히 낙동강은 보이고. 모든 것이 허상인듯. 흐릿한 세상 속이다. 사진 속이든, 사진 밖이든,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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