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밤은 지리산의 세석대피소(산장)에서 잠이 들겠지.

   오전엔 거림골로 해서 느긋하게 세석까지 오르고, 오후엔 세석평원 주변의 봉우리에 올라야지. 저녁이 되면 간단하게 밥을 해 먹고, 다시 또 언제 볼 지 모르는 밤하늘의 수 많은 별 무리를 볼거야. 잠은 아마도 좀 일찍 잘거야. 도시처럼 할 게 많지는 않을 거니까.

   다음날 아침은 얼른 챙겨 먹고, 장터목으로 가겠지. 1시간이면 닿을 거리인 천왕봉은 어쩌지? 꼭 정상에 올라야 하는 건 아니니까 거긴 생략! 바로 백무동 계곡으로 내려올거야. 백무동으로 나오면 마천면으로 가서 맛난 점심을 먹거나 함양읍으로 바로 갈 수도 있어. 읍내야 뭐 손바닥만 하겠지..한동안은 나른할 동네를 어슬렁거리고 싶다. 기웃거리다가 오래되고 허름한 식당이 있으면 엉거주춤 들어가서 밥 한 그릇 달라고 할지도 모르지. 달게 한 그릇 먹고 나와서 느릿느릿 터미널로 가서 내가 탈 시외버스를 기다리면서, 옆 동무와 시덥잖은 얘기도 주고 받으면서 시간을 보낼거야. 몹시 덥다면 쭈쭈바라도 하나 빨지, 뭐!

   약간 늦게 온 시외버스에선 나도 모르게 잠이 들거야. 가끔 깰 때도 있지만, 온전히 잠에서 깼을 때는 거의 부산에 다 올 때쯤이겠지. 그러면 새삼 몸이 뻐근한 것도 알게 될 것이고... 터미널 근처에서 동무와 헤어지고 나는 버스를 탈까 봐! 아마 혼자서 싱글싱글 웃으면서 창 밖을 내다 보겠지.

   집에 오면 아내와 진복이가 반겨줄 것이고.. 나는 다녀온 얘기를 좀 꺼내 놓고는 몹시 피곤하다며 푹신하고 편한 자리가 무척 오랜만인 양 얼른 자려고 할 거야.

   음, 며칠 동안은 몸에 담아온 지리산의 바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거야,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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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금요일도 보충 수업 때문에 학교에 있었다. 그런데, 마침 2학기 인사이동이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 학교 교감 선생님이 모 중학교 교장으로 발령이 났고, 중학교에서 근무하시던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새로 교감으로 오신다고 하셨다.

   그런데 새로 오신다는 그 분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내가 아는 분이셨다. 벌써 20년이나 된 기억인데, 어쩌면 그게 단박에 떠오를까, 신기할 뿐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수학 선생님이셨다. 사실 별다른 기억은 없고, 눈매가 날카롭고 무척 무서웠다는 것만 기억에 남아 있다.(우리 학교에서 젤 무서운 선생님이라고 소문이 나서 3학년에 올라갈 때 제발 그 선생님 반만 안 되기를 모든 학생이 빌었다.)

   다음날 아침 여러 가지로 생각이 복잡했다. 일단 새로 오시는 교감샘과 '사제'관계로 묶이는 게 싫었다. 우선 개인적으로는 공적인 조직 관계에 사적인 관계가 얽히는 것 자체를 아주 싫어하고, 교감이라는 직책상 교사와 갈등 요소가 많을 수 밖에 없으며, 내가 20년 전에 배웠다는 것만으로 아직도 나를 지금 자기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처럼 생각하는 어처구니 없는 경험도 있었기에, 씁쓸한 것이 사실이다. 뭐, 그래도 나름대로 경험이 있으니까 잘 정리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도 동시에 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직접 겪어볼 밖에. 첫날에 가서 먼저 인사를 드리고 사실대로 밝혀야겠다.

   그런데 이 사실이 내 머리 속에서는 엉뚱한 방향을 진화하여 며칠동안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교감선생님이 지금 오십대 초반이라고 하시니까 20년 전에는 삼십대 초반이셨을거다. 그러면 그 당시엔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왔으면 교직 경력이 별로 많지는 않았을 '초보 교사'였을텐데...그 선생님이 우리에게 남긴 게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 봤다.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봐도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했을지도 모르지만(젊은 남자였으니까), 무지막지한 체벌과 긴장된 분위기의 수업 시간 때문에 항상 그 선생님 앞에서는 움츠러들었던 기억 밖에 없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젊은 교사라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시도해 볼만한 다양한 교육 활동, 새롭고도 신선한 발상으로 학생들에게 다가서는 마인드... 교육 경력이 짧은 교사들에게 기대하는 교직에 대한 열정과 함께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든다. 삼십대 초반은 이미 지났는데, 이제는 면피할 수 있는 초보교사 딱지도 다 떨어져 가는데, 삽십대 초반에 나를 만났던 아이들은 20년 후에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누구처럼 내가 무엇이 안 되어 있을까봐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의 기억 속에 내 좋은 모습이 하나도 없을까봐 진짜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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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 금요일이었나? 100분 토론을 봤다. 보통은 채널을 돌려가며 대충 보는데, 이날은 진중권이 나왔길래 흥미진진하게 봤다.(사실, 개그 프로그램 보면서 잘 안 웃는데 진중권 교수의 말을 듣고 있으면 아주 재미있다. 이날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더군.) 토론이 끝날 때쯤에는 '낼 인터넷이 한바탕 난리나겠군'하고 생각했는데, 다음날부터 역시 그랬다.

   디 워야, 나랑 상관 없는 영화니까, 지금도 관심은 없지만, '디 워를 둘러 싼 상황'은 100분 토론 이후에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으니까, 그 현상에 관심이 많다. 아니, 최소한 말은 해야 한다는 의무감, 비슷한 감정이 든다.

   나는 지식인도 아니고, 뭐 잘난 무엇도 아닌 평범한 소시민이지만 이번 디 워라는 영화를 둘러싼 여러 상황들을 내 판단 기준으로 볼 때, 이번에는 진중권이 옳다, 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아울러 개인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헌법적인 권리에 부당하게 도전하며 집단적인 언어 폭력을 가하는 일부 몰지각한 누리꾼들이야말로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를 그 기초부터 허물고 있는 우중(愚衆)일 뿐이다.

   아울러 인터넷이라는 매체의 속성상 걸러지지 않은 감정적이고 비이성적 내용을 그대로 담아내서 누리꾼들의 비이성적인 행태를 오히려 부추기는 듯한 일부 언론들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지금도 마녀 사냥처럼 벌어지는 이 사태에 대해서도 어느 언론도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고 있다. 우리 언론은 지난 황우석 사태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나는 이번 논란에서는 전적으로 진중권이 옳다고 생각한다. 진중권은 우리 사회의 파시즘적인 광풍에 분명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파시즘이라는 말은 훨씬 엄밀하게 다뤄져야 하겠지만...) 나는 이 페이퍼를 통해 진중권을 공격하는 일부(?) 누리꾼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며, 관심이 없거나 침묵하는 다수 누리꾼들과도 생각이 다름을 분명히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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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삼십도 

  영하 이십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오도 영상 십삼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 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커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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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7-07-31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충수업 시간에 함께 읽은(?) 시^^ 아이들에게 문제 풀라고 해놓고, 이 시를 읽었을 때 내 느낌을 설명해 줄까 말까 망설이다가 관뒀다! 음, 찡했는데...애들도 알겠지?ㅋ
 

    드디어, 오늘이 방학입니다. 언제나 아이들은 예쁘고 사랑스러울 때가 많지만, 힘주어 ‘드디어’라고 말하는 것은 아이들이나 저나 이번 학기는 자기 인생에서 나름대로 무척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학부모님, 안녕하십니까? 이제 1학기 마지막 편지를 씁니다. 우선, 그간 우리 반 아이들에게 베풀어주신 애정과 관심에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 6월 27일에서 30일까지 4일 동안 1학기말 고사가 있었습니다. 대입 내신 성적에 중요한 시험인지라 모두 열심히 준비했었습니다. 능력에 따라 모두의 결과가 다르겠지만, 준비 과정에 최선을 다한 모습도 잊지 않으시고 결과를 확인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결과는 동봉해 드리는 성적통지표를 확인해 보시면 됩니다.]

  지난 토요일에는 바쁜 중에 잠깐 틈을 내서 우리 반 대청소를 했습니다. 책걸상을 모두 밖으로 내놓고, 사물함도 다 치우고, 바닥을 세제로 문지르고, 물을 부어 씻어내니까 교실뿐만 아니라 마음의 묵은 때와 쌓인 먼지도 함께 씻겨나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후로는 교실에 먼지도 좀 덜 날리는 거 같고 기분도 아주 상쾌해졌습니다.

  7월 12일부터 7월 20일까지는 일부 대학의 수시 1학기 모집기간입니다. 소위 말하는 주요 대학은 1학기 모집을 실시하지 않고, 전문대학을 중심으로 1학기 신입생을 모집합니다. 우리 반에서도 대략 7-8명 정도가 지원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진로 탐색 과정을 탄탄하게 준비해 온 학생이 많아서 대학이나 학과를 선택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은 없습니다. 학부모님께서 한 번 더 학생들과 의논해 보시고, 1학기 수시 모집의 응시 여부를 확인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늘부터 방학입니다만, 아쉽게도 3학년은 방학 내내 학교에 나오게 됩니다.[물론 본인이 원하지 않고, 학부모님께서 허락하신 경우는 예외로 했습니다.] 방학생활에 필요한 정보는  함께 보내 드리는 가정통신문을 꼭 읽어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아울러 학생들의 방학생활이 원래의 리듬을 잃지 않도록 함께 챙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학교에서는 3학년 학생들이 언제든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정독실과 일부 교실을 개방(밤 11시까지)해놓고, 저녁식사도 신청하면 급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이제 마지막 고비입니다. 앞으로 한 달 보름 남짓의 여름방학이 무척 중요합니다. 특히나, 평소보다 학생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무척 많기 때문에, 방학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이후의 학생 성적에 큰 편차가 있을 것입니다. 그 결과는 9월에 있을 2차 수능모의평가에 바로 나타날 것이고, 본 시험인 수능에도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학부모님께서도 이제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방학 끝까지 신경 써 주시면 좋겠습니다.

  2학기 중간고사는 개학하자마자 9월 1일에서 5일까지(중간에 휴일이 있습니다.)입니다. 2학기말고사는 10월 중순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대학교에 고등학교의 생활기록부(성적표)를 보내야하는데, 그 기한이 10월말경이라서 2학기 시험일정이 빠릅니다.] 9월 6일에는 평가원에서 주관하는 2차 수능모의평가가 있습니다. 9월 시험에 실수를 해서 성적이 낮으면 학생이 불안해할 수 있습니다. 최대한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그 즈음에는 가정에서도 격려와 배려를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학기에는 보충 수업이 1시간 줄어들고 자율학습 시간이 1시간 더 많아질 예정입니다.(그래도 마치는 시간은 10시입니다.) 수능이 두 달 정도 남은 상황에서 새로운 내용을 추가해서 배우기보다는, 지금까지 자기가 익힌 내용을 스스로 정리하고 체계를 잡아나가야 하는 시기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름날 뜨거운 땡볕을 다 받아들이고 속으로 묵묵히 미래를 준비해 온 열매들만이 가을에 온전한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그 때서야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주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 반 아이들도 모두 이 한여름 태양빛을 묵묵히 견뎌내기를, 그래서 올곧게 커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07년 7월 18일, OO고 3학년 O반 담임 느티나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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