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란 무엇인가-부석(浮石)에서 내면으로의 여행
어느 시인은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고 노래한 적이 있지만, 나는 늘 그 구절을 읽을 때마다 그 기차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디로 가는 것이 가장 좋을까, 를 생각한다. 사는 게 힘들고 막막할 때, 그래서 눈물이 터져 나올 때, 나를 태우고 떠난 기차가 닿을 곳으로 어디가 좋을까를 생각해 본다. 지금껏 내가 다녀 온 여러 곳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워지고, 다시 떠오르기를 수없이 반복하다가 점점 한 곳의 이미지가 선명해진다. 그것이 바로 내륙 깊숙한 소백산 한 자락에 자리 잡고 아름답게 늙어가는 부석사다. 그렇다, 나는 살다가 눈물이 나면 이제 부석사로 가겠다.
부석으로 가는 길에는 삶에 대한 치열한 열정을 보여주는 자연이 있고, 부석사 앞에서 그 절처럼 곱게 늙어가는 아름다운 사람이 살고 있다. 또 부석사 무량수전에 올라서서는 사는 게 막막해도 막막함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듯 기막힌 반전이 펼쳐지고, 마당 한 곳에는 보는 이들을 숙연하게 하는 집념의 증거가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니 누구든 부석사에 닿으면 어느새 눈물은 마르고,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을 되뇌게 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에 스산한 찬바람이 불어온다면 주저 없이 부석사에 다녀오기를…….
가을, 부석으로 가는 길은 온통 사과 천지다. 어느 곳으로 눈을 돌려봐도 선명한 핏방울 같은 사과를 힘겹게 떠받치고 있는 사과나무들. 나무는 이른 봄부터 지금까지 제 몸으로 빨아들인 물과 빛과 바람을 오직, 제 몸에 달릴 사과를 더 크게, 더 붉게 키우기 위해서만 사용한 것 같다. 지금, 사과나무에서는 사과 말고 다른 군더더기란 찾아볼 수 없다. 왜소한 사과나무는 비틀린 자세로, 축 처진 구부정한 어깨로, 그것이 마치 숙명인 것처럼, 사과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사과나무를 보며 생겨난 엉성한 상념에 사로잡혀 구불구불한 길을 내처 달리다보면 제법 멀찍이 물러나 있던 소백산 자락의 산들이 어느새 성큼 길옆으로 다가와 선다. 딱 어릴 때 친구들과 하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술래가 된 기분이라고 할까. 앞을 보고 달리다가 잠시 고개를 돌려 보면 어느 새 산이 나를 점점 둘러싸고 있다. 이제 더는 빠져 나갈 길이 없다는 듯이 산들은 좁다란 고갯길 하나만 남겨놓고 내가 지나온 길을 덮어버린다. 길은 오직 부석으로 가는 길, 밖에 없다. 그리고 그 길의 끄트머리에 절집, 부석(浮石)이 있다.
우선 여기도 버스 종점 앞은 여느 절집처럼 좀 낡은, 대개는 늙수그레한 가게 주인을 닮아 쇄락한 가게들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다. 부석사로 오르는 가게 조금 위쪽 길옆으로는 앞의 가게들만큼이나 오랜 세월을 지켰을 좌판들이 옹색하게 펼쳐져 있다. 산에서 뜯은 산나물과 여기선 흔하디흔한 사과 몇 알을 놓고 할매들은 절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멀뚱멀뚱 쳐다본다. 무뚝뚝하고 투박한 경상도 할매들의 꾸미지 않은 성정(性情) 그대로다. 경상도에서 나고 자란 나는 장사꾼의 사근사근함보다 오히려 그런 할매들의 모습이 더 정겹고 편하다. 아울러 저 할매들의 주름진 얼굴과 거친 손 덕분에 세상의 누구는 먹고, 입고, 공부하고, 또, 어른이 됐을 테니 장성한 자식들의 어머니인, 저 할매들을 보면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에만 헌신하는 사과나무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부석으로 가는 길옆은 붉은 등이 달렸지만, 부석사 입구는 이제 노란 카펫이 깔렸다. 일주문부터 금강문까지 이어진 오르막길은 황금 비단길이다. 이 비단길을 가볍게 밟으면 어느 순간 부석사 깊숙이 빨려 들어간다. 부석사는 산자락 아래 지어진 절이라 건물이 들어설 평평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여러 단의 축대를 쌓아 올렸는데, 부석사로 들어가는 길은 그 축대를 차례차례 올라가야 하는 길이다. 이 길은 가팔라서 온 신경을 걷는데 집중해야 하는 길도 아니고, 평탄해서 방심하고 느긋하게 걸을 수 있는 길도 아니다. 적당히 긴장하면서 사방을 두루 살피면서 걸어야 하는 길이다. 여행이란 바로 이런 상태가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 적당히 긴장하면서 낯선 상황을 두루 살피는 일! 어쩌면 여행은 호기심과 피곤함이 공존하는 일과라고 말해도 좋을 듯싶다.
그러다 마침내 그 축대 위 맨 마지막 계단을 오르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은 세 번의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이 세 번의 감탄사 중 먼저 첫 번째는 무량수전 앞마당을 볼 때 나온다. 밑에서부터 조금씩 오르막길을 올라와 이제는 가파른 산자락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올라선 곳에서 뜻밖에 탁 트인 넓은 공간이 나타나는 것에 대한 놀라움에서 나오는 감탄사이다. 점점 좁은 골목을 지나 막다른 골목이라 생각하고 돌아섰는데 갑자기 앞이 뻥 뚫린 광장으로 빠져나왔을 때의 시원함과 안도감이 느껴지는 것처럼 무량수전 앞마당이 바로 그런 느낌이다.
둘째는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에서 나오는 감탄사이다. 앞마당에서 무량수전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건물 구조의 완벽한 비례와 균형감, 소박하지만 군더더기 없이 꼭 필요한 것만을 갖춘 장식, 겉에서 볼 때보다 더 웅장한 내부, 날아갈 듯 부드러운 추녀와 지붕…… 사실, 이 모든 걸 따로따로 살피지 않아도, 미술이나 건축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그냥 척 보면 아름다운 건축물임을 안다. 사실, 미인은 그냥 척 보면 아는 것 아닌가?
무량수전을 보고 있으면 ‘날아갈 듯 부드러운 추녀는 결코 굽은 나무로 지어진 것이 아니다, 한평생 곧은 나무들의 자태라야 가장 부드럽게 앉을 수 있다’, 던 눈 밝은 시인의 말이 생각난다. 곧은 나무라야 부드럽게 앉을 수 있다는 말 앞에 나 자신을 살펴보면 늘 부끄러울 따름이다.
세 번째 감탄사는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바로 걸어올라 온 길로 몸을 돌리거나,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에 기대서면 터져 나온다. 그리 높이 올라온 것 같지 않은데 내가 서 있는 곳 앞에는 내 눈에 걸리는 게 아무 것도 없다. 발을 디딘 곳이 높은 절벽 위인 듯 오직 저 멀리 태백산맥의 산줄기들만이 장쾌하게 뻗어나가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기막힌 반전이 숨어 있다. 점점 좁고 가파른 길을 올라서야 너른 마당이 나오고, 곧은 나무라야 날아갈 듯 부드러운 집을 만들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야 일망무제의 상쾌함을 맛볼 수 있다. 나 혼자서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다 보니 어쩐지 이 부석사가 눈물의 강을 건너야 웃음의 바다에도 닿을 수 있다는 우리 삶의 한 모습을 묵묵히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다.
부석사 무량수전 한쪽 모퉁이에는 이 절집의 이름이 된 부석(浮石)이라는 돌이 있다. 말 그대로 ‘떠 있는 돌’인데, 기록에 의하면 이 돌 아래로 실을 넣어 당기면 실이 거침없이 돌 아래로 드나든다고 한다. 이 부석은 선묘라는 중국 여자가 변한 것인데, 신라의 승려인 의상대사를 사랑한 선묘가 의상대사의 설법을 전할 곳으로 이곳 부석사를 선택하자 이미 이곳에 있던 사교(邪敎)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떠있는 돌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나는 선묘라는 아가씨의 마음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정념? 집념? 집착? 신념?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간에, 나는 무량수전 뒷마당에서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놀랍고, 무섭고, 대단한 것인가를 다시금 생각한다. 한 사람의 마음은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저 육중한 돌을 공중에 띄우고 있지 않은가? 부석, 앞에 선 나 자신에게 묻는다. 너는 어떤 돌을 공중에 띄우려고 하는가? 어쩌면 영원히 풀리지 않을 이 질문을 담고 나는 절을 천천히 내려선다.
이렇게 쓰고 보니 결국 눈물이 나서 떠나려던 여행은 어딘가로 떠나는 게 아닌 듯 같다. 여행이란 바빠서, 혹은 게을러서 들여다 볼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또, 일상에 치여서 마주하지 못했던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치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여행이 점점 힘들어 진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나는 이 여행을 언제까지나 멈추지 않을 것이다. 생각하는 인간에게 주어진 여행의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건 인간다움에 대한 포기일 테니까 말이다.
2013.01.08. 느티나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