蝴蝶之夢

   장자가 어느날 꿈을 꾸었다. 자신은 꽃과 꽃 사이를 훨훨 날아다니는 즐거운 나비 그 자체였다. 그러나 문득 깨어 보니 자기는 분명 장주(莊周)가 아닌가. 이는 대체 장주(莊周)인 자기가 꿈 속에서 나비가 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자기는 나비이고 나비인 자기가 꿈 속에서 장주(莊周)가 된 것일까.

   꿈이 현실인가, 현실이 꿈인가. 그 사이에 도대체 어떤 구별이 있는 것인가? 추구해 나가면 인생 그 자체가 하나의 꿈이 아닌가. <장자>

   경주임업연구소 안에 꽃과 함께 살고 있는 나비. 꽃과 나비가 정겹기만 하다. 더 없이 평화로운 '自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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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와 동행해 주실 거죠?

   불볕 더위에 건강하십니까? 이렇게 한더위마다 길을 나서 힘들게 걸어가는 것은 제 팔자가 늘어진 탓인가요? 아니면 남들처럼 편안함을 즐기지 못하는 제 못된 성격 탓인가요? 어느 것이든 상관없이 다시 길 위에 섰습니다. 작년 여름, 남도횡단을 마치고 마음먹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힘들어도 앞으로 힘차게 걸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저와 동행해 주실 거죠?

   이제 저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겁니다. 어쩌면 마음 졸이시고, 한참을 걱정하시면서 먼저 간 제 길을 뒤따라오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다니면서 힘들었던 일, 답답한 일을 모두 마음에 담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가끔 가다 만나는 운 좋은 경험도 나눌 겁니다. 앞으로 얼마가 될지 모르는 시간이지만 저와 함께 한 해 주시는 시간을 소중하게 기억하며 살도록 하겠습니다.

   떠나는 날 아침이 좀 늦었습니다. 2002년 8월 3일 아침 8시 40분. 동행자를 만나 아침을 먹는 것으로 여행을 시작합니다. 편의점에 들러 김밥을 말없이 먹으며 가벼운 마음을 먹도록 애를 씁니다. 좋아서 떠나는 길이지만, 이렇게 가볍게 맘을 먹도록 애를 써야 하는 쉽지 않은 길이란 생각이 듭니다.

   저에겐 낯익은 덕천교차로를 지나 똑같은 아파트만 늘어선 화명동을 지납니다. 벌써 땀이 나고 다리와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아마도 제 눈에 익숙한 마을을 보는 것은 여기가 마지막이겠지요. 한참을 걸어 도시 같지 않게-어쩌면 도시 변두리의 일반적인 모습일지도 모르지만- 잡초들이 도로 옆 인도까지 점령하고 나선 금곡동을 지났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은 한껏 멋을 낸 2호선 지하철 역사(驛舍)와 우리와는 반대로 편안하게 내려가는 낙동강 줄기를 건너다 보는 것이 즐겁습니다.

   호포역에서 잠시 쉬었다가 이제 번잡한 국도를 버리고 양산시 물금읍으로 난 갓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경부선 철길을 건너니 이내 도시와는 전혀 다른 곡식들의 세계가 나타납니다. 땡볕에도 씩씩하게, 믿음직하게 자라는 벼, 키만 멀쑥하게 컸지 아직 알은 성긴 옥수수, 하얀색 꽃을 뽑아 올린 참깨, 수더분하고 낯익은 콩, 고추, 땅속에 보물을 감추고 시치미를 뚝 떼고 땅을 기는 고구마, 양산을 쓴 것 같은 연과 토란. 모두가 제 각각의 모양으로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곡식과 채소들의 은혜의 원천인 태양이 저도 함께 키우려는 하는 것인지 열을 내뿜습니다. 이 햇볕을 안으며 걸어가는 길이 끝날 때쯤이면 조금 더 단단해져 있을까요?

  1시간 30분을 더 걸어 물금읍에 도착했습니다. 물금읍은 제 어릴 적 기억이 많이 남은 곳입니다. 외가(外家)가 있어 외할머니가 계실 땐 방학마다 며칠씩 묵었다가 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로 외갓집에 대한 기억은 멈췄지만, 더 보탤 추억이 없는 옛 기억은 더 아련하게 다가오는가 봅니다.
   몇 년 전부터는 낙동강이 바로 보이는 마을 입구 쉼터에 수 백년을 지키고 선 나무 밑에 서서 강물을 보는 버릇도 생겼습니다.(밤에 가끔 차를 몰고 갔다 온 길입니다) 이곳은 여러 가지로 제 삶에 무척 소중하고 아픈 기억들이 담겨진 곳입니다.

   점심을 먹고, 쉴 곳을 찾아 근처 초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물금초등학교. 작은 시골마을 학교가 대부분 그렇듯이 아름드리 나무가 학교를 감싸고 있습니다. 이 큰 나무는 언제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까요? 운동장 옆 의자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저는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그 때는 아마 제법 이 시골 초등학교도 아이들로 복작거렸을 겁니다. 운동장을 뛰어 놀던 그 아이들 틈으로 자그마하지만 참하게 생긴 여학생이 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여학생은 아마도 또래 아이들과 재잘거리며 신나게 학교를 다녔겠지요? 그 여학생이 학교 담을 대신해서 심어진 작은 묘목이 학교의 역사를 말해주는 아름드리 나무로 자란 것처럼 한 가정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셨답니다. 바로 저를 낳아준 분이십니다.
   문득 잠에서 깨어 나무에 가만 손을 갖다 대어 봅니다. 그 때는 어렸겠지만 이 나무에도 우리 어머니의 손자국이 남아있을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나무도 그 시절의 수줍고 마음 여린 여학생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지난 학기 내내 운동장에서 신나게 뛰어 놀았을 우리 학교 학생들도 언젠가는 누구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되겠죠. 그보다 더 세월이 한참 지난다면 또 누군가가 지금의 나처럼 우리 학교 운동장에서 자기의 부모님을 떠올리며 저와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요. 지금의 우리 학교가 학생들에게 응어리진 상처를 남기지 않고,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학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시 40분. 만만한(?) 물금읍파출소에서 물을 받아 원동으로 가는 지방도(1022번)에 섰습니다. 좁은 갓길에다 차는 많고-특히, 시멘트 공장이 근처에 있어서 대형트럭이 많습니다.- 또 날도 무더워서 힘들었지만, 그래도 딱 하나! 오르막을 올라선 덕분에 고갯마루에서 본 유장하게 흘러가는 낙동강의 해질 무렵의 풍경이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는 힘이 됩니다. 

   해는 설핏 지는데, 바다를 향해 내려온 수 백 리를 흘러온 강물은 잔잔하게 흐르고, 지는 햇빛을 받아 강은 은색 비늘이 반짝거리기도 하고, 점점 해가 져서 강물에 검붉은 염색이 점점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덩달아 저희들의 발걸음도 느려집니다. 그러나 저러나 우린 강으로 치자면 아직 발원지를 벗어나지도 못한 물인데- 부지런히 가야할 듯 합니다.

  작년 편지에 제가 길은 참 정직하다고 말씀드린 기억이 납니다. 길의 정직함을 믿어야 하는데. 사람의 마음은 그리 심지가 굳지 못한가 봅니다. 지치고 힘들어서 고갯마루를 올라서면 사람을 붙잡고 원동까지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 기어이 물어보고야 맙니다. 오늘도 물론 속았지만요.(?) 아저씨께서 재미있는 표현을 하셨는데 ‘30분이면 뒤집어쓴다’고 하시더군요. 우린 ‘그 30분이면 뒤집어 쓸’ 그 길을 1시간 30분을 걸었습니다.

   원동은 생각보다 훨씬 멀었습니다. 어쩌면 앞으로의 모든 길이 생각보다 훨씬 멀지 모릅니다. 제 머리 속엔 있는 생각은 항상 ‘차’를 기준으로 한 거리일 테니까 말입니다. 원동에 도착해서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배내골 입구 마을인 원동은 여느 관광지처럼 시끌벅적합니다. 이런 곳일수록 자는 데 돈이 많이 드는데. 운 좋게도 ‘오늘 여관을 인수한’ 주인 내외를 만나 정신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잠자리를 구했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다리가 벌써 작년의 기억을 잊어버린 듯 합니다. 발목과 발바닥이 시큰거리고, 종아리 근육이 약간 뭉친 것 같습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다리도 다시 옛 기억을 떠올리겠죠. 아마 튼튼하게 잘 갈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오늘은 작년과는 달리 발가락에 물집은 잡히지 않았으니 다행입니다.

   동행자와 라면과 김밥으로 저녁을 먹는 것으로 하루를 정리합니다. 중간에 먹은 간식과 비싼 숙박비로 예산을 초과한 탓에 약간 부실한 듯 했지만 예산도 빠듯한데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벌써부터 가지고 온 책이 걱정입니다. 겨우 두 쪽밖에 못 읽었습니다. 작년에는 한 권을 가지고 와서 반 밖에 읽지 못해서 이번에는 열심히 읽으려고 굳게 다짐했는데.

  떠나기 전에 말씀드린 대로 길을 걸을 때 피하지 않고 제 속에서 건네 오는 많은 목소리들과 이야기를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이제는 진정으로 제 자신과도 화해하고 싶습니다. 아마도 이런 다짐으로 다른 사람들도 걷는지, 길을 걷는다는 것을 결국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이라고 하는 것인가 봅니다.

   제 메일을 받으시면 가끔 지도책을 펴놓고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한 마디도 안 되는 짧은 길을 온 천지에 가득한 햇볕을 받아 종일 기진맥진해서 걸어가는 두 청년을 생각하시고, 이 무더위와 함께 하셨으면 합니다. - 너무 염치없는 부탁입니까?

   다시 한 번, 저와 동행해 주실 거죠? 건강하시고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2002년 8월 4일
 느티나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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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실에 올라가자마자 수업 준비가 안 된 아이들을 보며 벌컥 화를 내고 말았다. 요즘 들어서 수업이 약간 더 어려워진 4반이어서 신경이 여간 쓰이는 게 아니다. 얼마 전에도 따끔하게 야단친 적이 있었는데, 오늘 또 그러고 말았다. 교실을 나온 지금 생각해 보니, 내 진심이 얼마나 전달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약간 강하게 이야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된다.

    지난 화요일에도 운동화를 신고 복도를 뛰어가는 녀석들에게 웃으면서 '신발 벗고 내려 가거라.'고 했는데, 내가 보는 앞에서 대답만 냉큼 하고 도망가는 걸 화가 나서 뛰어가 교무실로 불러들인 적도 있었다. 근데 교무실에 불려온 이 녀석들의 태도가 가관이었다. 내 눈을 전혀 쳐다보지도 않고, 어긋하게 서서 '할 말 있으면 빨리 하시고 보내 주세요'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아이들과 소통하는 것이 쉽지 않다. 서로 마음을 열고 서로를 내보인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내 마음이 먼저 닫혀있는지도 모르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 가 생각해 보자. 너무 늦기 전에!

   요즘 우리반 녀석들은 1학년이 곧 끝나간다는 게 아쉬운 것 같다. 날적이를 읽을 때마다 그런 느낌이 많이 든다. (방금도 우리반 날적이를 읽었다.) 무지 착한 녀석들인데, 좀 까불락거린다. 그렇지만, 무슨 행사든지 참여하는 걸 아주 싫어한다. 학교 안팎의 행사에 스스로 참여한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담임인 나와는 전혀 반대의 스타일이다. 난 애들이랑 장난치고 노는 것을 유치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유도 없이 때리고 도망가면, 맞은 애는 잡으러 가고...하는 놀이(?)는 아마 초등학교 때가 끝인 것 같다. 근데 우리반 녀석들은 그런 놀이를 아직도 좋아하는 것 같던데...

   나도 우리반 아이들과 더불어 지난 1년 동안, 좀 더 자랐을까? 앞으로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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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내 꿈은' 듣기

 

어릴 때 내 꿈은

                                         도 종 환

 

어릴 때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 였어요

나뭇잎 냄새나는 계집애들과

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녀석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며

창밖의 햇살이 언제나 교실 안에도 가득한

그런 학교 선생님이 되는거 였어요

플라타너스 아래앉아 시들지 않는 아이들의 얘기도 들으며

하모니카 소리에 봉숭아꽃 한잎씩 열리는

그런 시골학교 선생님이 되는 거 였어요

 

나는 자라서 내 꿈대로 선생이 되었어요

그러나 하루종일 아이들에게 침묵과 순종을 강요하는

그런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밤 늦게까지 아이들을 묶어놓고 험한 얼굴로 소리치며

재미 없는 시험문제만 풀어주는

선생이 되려던 것은 아니였어요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그럴 듯하게 아이들을 속여 넘기는

그런 선생이 되고자 했던 것은 정말 아니였어요

아이들이 저렇게 목숨 끊으며 거부하는데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편이 되지 못하고

억압하고 짓누르는 자의 편에 선 선생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아직도 내꿈은 아이들의 좋은 선생님이 되는 거예요

물을 건너지 못하는 아이들 징검다리 되고 싶어요

길을 묻는 아이들 지팡이 되고 싶어요

헐벗은 아이들 언 살을 싸 안은 옷 한자락 되고 싶어요

푸른 보리처럼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동안

가슴에 거름을 얹고 따뜻하게 썩어가는 봄흙이 되고 싶어요.

 

   작년 참교육실천 보고대회에서 학급운영모임 '모두아름다운아이들' 선생님들과 함께 불렀던 노래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詩기도 하지만 참교육실천 보고대회를 준비하며 함께 배운 노래이기도 하다. 오늘 문득 이 시와 노래가 생각난 것은 왜일까? 이 시와 노래를 마주 하고 있는 밤. 스스로에게 한없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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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아드 2003-11-30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가사랑 시랑 많이다르다 =_=;;ㅋ

해콩 2004-11-21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 때 내 꿈은... 눈물이 울컥..
 

남도횡단 도보여행 8-9일째

광양에서 벌교까지


    광양 시장통 근처 여관을 나서는데 곧 비가 올 태세였습니다. 하늘이 낮게 깔리고 곧 비가 쏟아지는데...준비해 간 비옷을 꺼내 입고 좀 걷다가 가까운 슈퍼에 들러 아침을 먹었습니다. 오늘도 빵과 우유, 복숭아 통조림 한 개.

   곧 시내를 오른쪽으로 끼고 외곽으로 나왔습니다. 계속 4차선 도로는 이어지고, 빗방울은 점점 더 굵어졌습니다. 순천까지는 비교적 쉽게 넘어왔습니다. 광양에서 2시간 정도 더 걸으니까 순천 외곽으로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비도 피하고, 점심도 먹을 겸해서 쉴만한 곳을 찾다가 순천시 여성회관으로 들어갔고, 사무실에서 신문지를 빌려다 깔고 그냥 길바닥에다 누웠습니다. 저는 다리가 무척 아파서 더 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고, 더구나 오늘은 비도 제법 많이 내렸습니다. 한참을 쉬다 근처 분식집을 찾아 대충 점심을 때웠습니다. 그리고 또 비가 온다는 핑계로 미적미적~ 피시방에 들러서 1시간을 더 보내고 2시에 벌교로 출발했습니다. 비는 계속 오다 그치다를 반복하고, 차들은 쌩쌩 달리면서 바닥에서도 빗방울이 마구 튀어 올라 걷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미화원아저씨께 순천 가는 길을 여쭤보니 벌교간다니까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드시네요. 거기서 벌교까지는 23킬로미터. 비가 오락가락하는 토요일 오후에 우리는 쉼없이 걸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가는지도,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 채 오로지 길을 따라 앞만 보며 걸었습니다. 그 벌교까지의 길이 어찌나 멀던지...지금 다시 그 길을 걸어오라면 당장 그만두겠다고 얘기할 것 같습니다.

   벌교에 도착한 것은 저녁 8시쯤. 그래도 열심히 걸은 덕분에 예상보다 1시간은 일찍 왔습니다. 시내에서 숙소 정한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닌 덕분에 싸고 깔끔한 방을 잡았습니다. 저는 발가락의 물집 때문에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어서 약국에서 약으로 치료를 좀 했습니다. (약사님께서 그만두고 집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김밥을 맛있게 먹으니 벌교가 어떤 곳인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태백산맥의 주무대잖아요. (벌교 들어가기 전에 친절한(?) 아저씨께서 벌교엔 양아치들이 유명하니 밤에 돌아다니지 않은 게 좋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소설에서 뿜어져 나온 분위기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시내를 자꾸 기웃거리게 되었습니다. 마침 숙소도 벌교 양아치들 비슷한 사람들이 하는 것 같기도 해서 괜히 어떤 사람들일까 상상도 해 보니 실실 웃음도 나오고...발가락이 무척 아픈 것 빼고는 유쾌하고 즐거운 하룹니다. 오늘 걸은 거리는 약 100리.

  9일째 아침은 벌교읍내 중심가 농협에서 빵과 우유로 아침을 먹었습니다. 오늘도 괜히 말을 붙이고 싶어서 역 근처에서 복숭아 2개도 샀습니다. 오늘은 어제에 비해서는 짧은 28킬로미터만 가면 보성읍내가 나옵니다. 역시나 날씨는 흐리고, 비가 올 것 같습니다. 사실 3일 전부터 비가 많이 온다고 해서 계속 걱정했는데 하루 빼고는 걷기에 적당한 비만 왔습니다. 오전엔 무척 열심히 걸어서 보성군 조성리라는 마을에 들어가서 잠시 쉬었고, 예당이라는 마을로 들어가다가 우리를 불러 세우시는 할아버지를 따라 가게로 갔더니 음료수를 2개 건네셨습니다. 점심도 원래 5천원인데 4천원으로 깎았고, 근처 고등학교에 가서 2시간 동안 푹 쉬었습니다. 4시에 출발해서 길 따라 열심히 걷는데 도로변으로 차가 서더니 먹고 힘내서 가라며 주먹밥을 건네주었습니다. 어느새 비는 내리고, 우리는 주먹밥을 손에 쥐고 멀리 보이는 읍내를 향해 걸었습니다.
   오늘 저녁엔 김의주선생님을 응원하러 멀리 부산에서 후배 2명이 왔습니다. 내일 그 주유소 광고에 나오는 그 길(보성다원)을 저희와 함께 걸어갔다가 밤기차로 부산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덕분에 저도 힘이 더 나서 즐거운 저녁을 같이 먹었고 얘기 좀 하다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오늘 저녁은 무척 시원하네요. 바람 속에서 맛있고 시원한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습니다. 낯선 보성읍내를 어슬렁거립니다. 여긴 정말 녹차가 유명한가 봅니다. 다원도 많고, 녹차냉면, 녹돈(녹차먹인 돼지)집-삼겹살-도 많네요...

   광양, 벌교, 보성으로 넘어오면서 빠른 세상과 담을 쌓고도 사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분들에게 빠른 것은 어떤 의미일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곱게 차려입으시고 읍내로 가는 버스가 서는 정류장을 느릿느릿 걸어가시는 할머니, 비 오는 잠시를 이용해서 논두렁길에 심어 논 콩밭을 김매시는 할머니, 대낮에도 막걸리 한 잔으로 얼굴이 불콰해도 지나가는 사람 하나 놓치지 않으시고 챙겨주시는 할아버지, 해저녁 자전거를 타지도 않고, 끌면서 터덜터덜 걸어가시는 아저씨, 바쁜 농사일 짬에도 우리가 건네는 인사가 무안하지 않게 허리를 펴고 어디로 가는지 물으시는 분들....사실 바쁜 건 아직도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더 많은 젊은 사람들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서는 시간이 무척 천천히 흐르는 것 같습니다. 아니 어떤 마을은 너무나 천천히 흘러서 나른하기도 했습니다. 도시와 똑같이 하루는 24시간일텐데요. 그래도 비교적 바쁜 건 젊은이들인 것 같습니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네요. 이젠 자러 가야겠습니다.

보성읍에서 이주형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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