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12월 초는 약간 바쁠 것 같다. 여러가지 일이 겹쳐서 부지런해야 할 듯! 정신 바짝 차리고, 바빠도 여유있게 즐겁게 살아 보자.

   마르코스의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를 읽다가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것 같아 접었다. 그 다음으로 잡은 책이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 음...편지의 내용으로만 본다면 서준식의 옥중서한이 훨씬 더 나았던 것 같다. 서준식의 옥중서한은 치열한 삶의 고민과 엄혹한 감옥의 현실, 가족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더 깊이 배어나는 편지글이다. 그람시의 글은 좀 밋밋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은 전지구적 변환을 읽고 있다. 이제 앞부분을 시작하지만 재미있는 책인 것 같다. 번역도 깔끔하고... 근데 세계화가 아니라 지구화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것이 좀 흥미롭다. 지구화에 대한 논의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라니까 열심히 읽어둬야지!

   11월 30일 오늘, 최옥선생님의 결혼식을 다녀왔다. 그냥 참석한 것이 아니라 어제 밤늦게까지 연습한 축가(신부에게)까지 부르고 왔다. 예식장에서 반가운 얼굴들 보고, 함께 점심 먹고 돌아왔더니 무척 피곤한데도 짬짬이 누워서 잤더니 지금 잠은 안 온다. 그래도 내일을 위해서 자야겠다. 너무 늦었다. 내일은 야자감독도 하니까.

   그리고 최현옥선생님의 결혼식을 기억하기 위해 한 마디 해 둔다.

   아! 최현옥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사실은 제가 축가 중간에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을 신부로 맞이한 신랑님께 먼저 축하를 드립니다. 그리고, 최현옥선생님! 지금까지 잘 살아 오신 것처럼 앞으로도 두 분이서 함께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가시리라고 믿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라고 말하려고 준비해 갔었는데, 제가 너무 긴장해서 말씀 못 드렸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축하드리구요.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플레이아드 2003-12-01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축가// 신부에게 ^ㅁ^// 멋있군요^^

느티나무 2003-12-01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습은 열심히 했는데, 정작 예식장에선 잘 못 불러서 미안했어요. 연습도 많이 안 했지만, 그래도 연습한 만큼도 못 부른 것 같아서 속상했지요, 뭐! 시험도 그런가요? 준비한 만큼 결과가 나와주지 않는 거? ㅋ

2015-11-10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풍경 1

   학교는 학급자치시간에 아이들을 강당에 모아 놓고 어떤 정신교육을 시키려는지, 또 두발검사, 복장검사, 손톱검사, 이름표검사, 양말검사, 뱃지검사를 하는가 보다. 지각하지 마라, 수업시간에 자지 마라, 비속어 쓰지 마라, 떠들지 마라는 소리를 학급별로 줄을 세워 놓고 했는가 보다. (올라가 보지는 않았고, 계획표를 보니 그랬을 것 같다.) 나도 물론 아이들에게 '하지 마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담임이긴 하지만, 모두가 학급자치 시간을 빼서 '정신교육'이라는 이름을 걸고 할 수 있는 일인지. 교육적으로 어떤 효과가 있을 것인지. 효과만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 의문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지 모를 때, 스스로가 이유를 알지 못할 때 선생으로서 괴롭다. 텅 빈 교무실에서 스스로에게 묻는다-너는 왜 강당으로 가지 않았냐고?

풍경 2

   학급에 자장면이 오기로 한 시간이 13시 20분. 예상보다 한 5분 정도 늦게 왔으나 아이들의 즐거움은 엄청났다. 자장면 40그릇과 서비스로 나온 요구르트와 귤을 앞에 두니 모두 신나는 얼굴들이다. 며칠 전에 학급 모두가 교과서 옮기기를 한 댓가로 연말에 지급될 교과서 분배 경비를 사비로 미리 써 자장면을 주문했다. 거짓말처럼 자장면을 비우는 녀석들이 무지 귀엽다. 단무지 하나를 두고 다투는 녀석들이니 덩치만 컸지 아직 어린애들이다.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자장면을 보고 있으니, 또 자장을 잔뜩 묻힌 입으로 나를 보며 씩 웃는 그 녀석들이 참 예쁘다. 애들은 내가 정색하고 질문을 하면 무섭다고 한다. 너희들이 내 마음을 어찌 아랴? 난 너희들에게 무서운 사람이고 싶지 않다. 너희들이 학교에서 행복했으면 하는 아주 단순한 희망 밖에 없는 사람이다.

풍경 3

   2교시가 끝나고 잠깐 내려간 교무실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김기수-육군 상병이다. 휴가를 나온 모양이다. 늘 휴가 때면 잊지 않고 나를 찾는 고마운 녀석인데, 오늘은 내가 수업이 많아서 쉬는 시간에 잠깐 얼굴만 보고 보내야했다. 돈도 없는 군인 녀석이 늘 음료수를 사들고 찾아온다. 다행스럽게도 아픈 곳 없이 건강한 얼굴을 보니 무척 반갑다. 이제 얼마남지 않은 군생활에 대해, 이제는 후임병들이 네 이름을 소원수리함에 써 넣는 것만 조심하면 된다고 후임병들에게 잘 하라고 농담처럼 이야기해 주었다. 후딱 왔다가 선걸음에 발길을 되돌리는 녀석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짠하다. 다음에 보면 꼭 더운 밥 한끼라도 먹여야겠다.

풍경 4

  오늘은 수능칠 때 우연히 만난 언아를 보기로 한 날이다. 약속은 저녁 6시. 동네에 도착하니 OO, 수진, 혜선이가 나왔다. 모두가 졸업하고 처음보는 얼굴들이다. 2년 동안 모두 씩씩하게 산 얼굴들이다. 모두가 예뻐진 것 같다. 

   OO는 이번이 삼수째. 올해는 성적이 기대만큼 안 나왔는데 교대든 사범대든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곳에는 어디든 가겠다는 생각이었다. 수진이는 전문대를 졸업하게 되는데 취직이 쉽지 않아 걱정이었다. 혜선이는 인테리어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는데, 학교다닐 때부터 얌전하고 성실한 녀석이었던지라 오늘도 새로 산 책을 한 보따리 들었다. 조용한 곳에서 함께 저녁을 먹으며 고등학교 때 이야기, 요즘 사는 이야기, 주변의 친구 이야기,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느라 늦게야 일어서게 되었다.

   중간에 군대가 있는 영선이한테서 전화가 왔었다. 어색한 군인 말투에 약간 당황했지만, 며칠 후면 휴가 나오는데 그 때 꼭 찾아오겠다고 해서 '아, 이놈이 내가 가르친 영선이가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너희들의 이야기 들어 주고, 술 한 잔 받아 주고, 힘들 때 왔다가 잠시 쉬어갈 여유를 마련해 주는 것이 내 몫이 아니더냐.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세상에 나왔지만 당당하게 제 몫을 해내고 있는 서부산공고 졸업생들! 힘내고 언제나 너희들에게 좋은 일들이 가득하기를 빈다. 건강해라!!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3-11-30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잡초의 힘!

   안동시내 한 복판의 여관에서 잠이 깨자 창 밖부터 봅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은-아니, 아직은- 비가 오지 않습니다. 서둘러 짐을 꾸려 아직 잠이 덜 깬 안동시내를 걸어나옵니다. 여전히 아침은 빵과 우유입니다.

   오늘 걷기로 한 길은 안동에서 북쪽으로 난 35번 국도를 따라 도산서원까지입니다. 오늘은 아마도 거대한 안동호가 우리와 함께 걸을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안동호는 흙탕물을 뒤집어 쓴 채로 숨을 고르고 있겠지요. 징그러울 수도 있고, 안쓰러울 수도 있을 겁니다. 그 게걸스러움에 돌을 던질까요? 그 넉넉함에 푸근히 잠겨볼까요?

   안동시내를 벗어나 서원으로 가는 길 입구는 참 예쁘게 나 있습니다. 안동 북쪽은 전형적인 시골길입니다. 예쁜 길 주변으로는 엄청난 비에도 꿋꿋하게 자라고 있는 벼와 포도, 호박, 고추, 수박들이 보입니다. 다들 이제는 비가 그만 와도 괜찮다는 표정들입니다.

   단조롭고, 긴장감이 별로 들지 않는 길을 걸으니 무엇이든 자세하게 보려는 버릇이 생기는 가 봅니다. 주의할 게 적은 길에서는 마음도 풀어져서 한눈도 팔게 되고, 콧노래도 부르고, 도로 주변을 왔다갔다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문득 오늘은 아스팔트 가장자리에 시선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눈은 아스팔트 주변으로 고정되고, 절로 감탄사가 나옵니다.  이야~! 정말 대단하다!  그곳에는 잡초들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습니다. 조금의 틈도 용납하지 않는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와서 말입니다. 땅을 숨막히게 덮고 있는 아스팔트 위로 올라와서는 참았던 숨을 내쉬듯 싱싱하게 잡초들이 자랍니다.

   아스팔트를 뚫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잡초 뿐인가 봅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온 다른 것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아스팔트를 뚫은 잡초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요? 정말 그 힘이 대단함과 신기함을 넘어 두려운 생각까지도 들게 합니다. 사실, 잡초는 제가 보는 풍경의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보는 식물의 대부분이 이름을 얻지 못한 잡초들입니다. 우리는 포도, 사과, 고추, 호박, 수박을 보고는 감탄하지만, 흔하디 흔한 잡초에게 눈길을 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잡초를 보며 '우리 모두'의 삶이 저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냥 이름을 얻지 못한 채 열심히 제 몫을 하며 사는 것! 누군가가 알아주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고 해야할 일을 하는 것! 자존감(自尊感)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서는 것! 잘난 사람들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세상의 허한 구석을 채워야 할 운명 같은 것!(도무지 잡초를 빼고 생각하면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

   한적한 시골길을 걷는 중간 중간에 일하시는 분들께 이것저것 여쭙습니다. 일하시는 분들께는 죄송한 마음도 들지만 이 분들의 말씀마다 수줍은 듯이 ‘했니껴’로 끝나는 이 지역 말투가 너무도 순박하고, 정겹게 느껴집니다. 그 말씀을 듣고 있으면 가야할 길을 잊은 것처럼 마냥 퍼질러 앉고 싶은 마음입니다.

   오늘 점심은 아주 특별합니다. 옛날에 살던 마을이 안동호가 만들어지면서 수몰되어 집단으로 이사온 마을에 들렀습니다. 우연히 들른 식당이  나그네식당 이랍니다. 이 식당에 들고 보니 하나하나가 다 신기합니다. 허름한 간판하며, 가격표하며, 해 주시는 음식하며...이렇게도 장사를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지역에서는 메밀묵을 '메물묵'이라고 하신 답니다. 그리고 노란색 조가 많이 섞인 밥을 내 주시면서 묵밥을 만들어 주십니다. 덤으로 할머니의 구수한 말씀이 곁들여져 아주 오래 기억에 남을 점심을 먹습니다.

   도산서원은 그냥 지나칩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요. 한참을 더 북쪽에 있는 토계면에 숙소를 정하기로 하고, 면사무소에 들러 쉬면서 잠 잘 곳을 여쭈니 이 마을엔 여관이 없다고 합니다. 좀 전에 일하시는 아주머니께 여쭈었을 땐 분명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말입니다. 다시 안동까지 돌아가서 자야할 것 같아서 난감합니다. 그래서 서둘러서 마을로 내려가다 보니, 바로 앞에 숙소가 보입니다. 황당해서 헛웃음만 나옵니다.

   바로 숙소에서 짐을 풀고, 다시 길을 걷습니다. 왜냐면 내일 걸어야 할 거리가 만만찮은 까닭에 오늘 조금이라도 더 걸어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6km를 더 걸어서 갔다가 옵니다.

   이 곳은 떠나와서 처음으로 pc방이 없는 조용한 시골 마을입니다. 오는 길 내내 그 흔한 '여관' 하나 없는 그런 곳입니다. (요즘 국도를 가시다가 큰집을 짓고 있으면 십중팔구는 '러브호텔'이더군요.)

   저번 편지에 안동의 힘! 말씀을 드렸지요? 안동의 힘은 곳곳에 자리잡은 고택이나 문화재가 아니라 아직은 저질 소비문화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선 논과 밭에서-아직은 러브호텔로 변하지 않은 논과 밭에서, 그리고 그 밭에서 정직하게 땀흘리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인가 봅니다. 바로 그것이 잡초의 힘이겠지요. 안동의 힘이기도 하구요.

   밤하늘에 별이 총총한 그 날이 왔으면 참 좋겠습니다. 건강 조심하시고, 늘 함께 해 주시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2002년 8월 11일

경북 안동시 토계면에서 느티나무 올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길 위에서 행복 찾기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를 시작할 땐 날씨 얘기를 하는가 봅니다. 더우면 더운 대로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오늘 문득 어쩌면 날씨가 우리들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적당하면 아무도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니까요. 우리를 요즘처럼 불편하게 하면 그제야 다들 날씨 얘기를 호들갑스럽게 하게 됩니다. 이렇게 날씨 얘기를 쓰고 보니까 우리 아이들이 생각납니다. 다시 한 번, 직업병이 도지는 걸 허락하신다면 저도 우리 아이들이 투정을 부리기 전에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이 금방 여름 땡볕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아이들의 변화를 읽어내지 못하면 곧 아이들 때문에 근심해야 할 때가 올 것 같습니다. 론 제가 편하자고 그러는 건 아니지만요.

   저도 날씨 얘기부터 하자면 오늘은 약간 흐리면서도 바람이 조금씩 부는, 걷기엔 더 없이 좋은 날입니다. 그러나 비가 많이 온 곳도 있나 봅니다. 쪼그만 나라-걸어다녀 보면 이런 말 절대로 안 나오지만-에서도 이렇게 날씨가 다르니-방금 서울에 계신 한 선생님께서 전화가 왔는데, 비 오지 않았냐며 걱정하셨습니다-신기합니다.

   오늘은 밀양시내에 있는 밀양교에서 영남루를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밀양시내를 한바퀴 돌아 나와, 밀양 긴늪이라는 곳까지 걸어 청도쪽으로 방향을 잡고 상동면까지 와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꼬박 12킬로미터를 오전에 걸었습니다.

   날씨가 좋아서 점심 먹고, 잠시 쉬었다가 청도 방면으로 계속 걸었습니다. 오늘은 청도군까지 와서 숙소를 잡고 경산 쪽으로 좀 더 걸어갈 예정이었습니다. 큰 고개도 없었고, 밀양강 상류를 좇아 계속 걸어가는, 강을 끼고 도는 길이 으레 그렇듯이, 이 길도 너무 예쁩니다.

   다른 얘기지만 오늘은 도보여행의 매력에 대해서 든 잡다한 생각을 잠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본질적인 부분은 첫날에 잠깐 말씀을 드렸기에, 오늘은 여행길에서 소박하게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걸어다니니까 무척 아픕니다. 처음 겪는 일도 아니지만, 우선은 너무 다리가 아픕니다. 종아리 근육은 뭉쳐 있고, 발가락에 물집은 잡혀서 걸을 때마다 따끔거립니다. 발목도 너무 많이 걸으면 시큰거립니다. 또 큰 배낭을 지고 가니까 허리도 아픕니다.

   날씨가 너무 더운 날은 피부가 햇볕을 그대로 받아서 저녁이면 벌겋게 달아오릅니다. 옷은 입은 지 30분이면 땀에 흥건하게 젖습니다. 축축하게 젖은 채로 하루를 계속 입고 다녀야 합니다.

   잠자리도 영 불편합니다. 물론 돈을 많이 내면 좋은 숙소를 구할 수 있겠지만, 그럴 수 없는 형편이라 우리가 내는 돈으로 선뜻 방을 내주는 곳이 오히려 고마울 지경입니다. 그러니까 피로가 점점 쌓이는 것 같습니다.

   부끄럽지만 집에선 부모님이 해 주시는 많은 일들이 힘들어도 직접 해야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편한 것에 너무 익숙해서 잘 몰랐던 일이 제 일로 다가오는 것도 무척 힘듭니다. 그러니 하루 일과가 아무리 빨라도 11시쯤에야 겨우 납니다.

   그래도 이 모든 불편을 이기는 도보여행의 재미도 쏠쏠합니다. 길가 아무 곳에나 쓰러져 쉴 때 받게 되는 뜻하지 않은 환대는 그간의 힘든 고통을 모두 잊게 합니다. 오늘도 밀양시 상동면사무소와 우체국에서 받은 호의-매실냉차와 커피 한 잔이지만-에 무척 행복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쉬고 싶으면 쉬고, 개울이 나오면 발을 담글 수 있는 것도 멋진 일입니다. 오늘 걸은 길은 낙동강의 지류인 밀양강을 거슬러 오르는 길이었습니다. 새로 고속도로를 만든다며 산의 곳곳을 헤집어 놓았지만, 그래도 강물만은 넉넉하게 제 갈 길을 가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얘긴지 잘 모르겠지만, 유천 부근의 밀양강에 배낭을 풀고 강에 발을 담글 때의 기분은 걸어다니는 사람의 특권이리라 믿습니다. 물 속엔 피라미들이 저희들만의 세상을 만들고 살더군요. 완전히 자기들만의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을 뒤집어 은빛 비늘을 보이기도 하고, 물살을 거슬러 오르기도 하며, 물에 담긴 제 발을 스치기도 했습니다.(이런! 세상에~! 고기가 제 발을 치고 갑니다.) 그네들의 행복한 모습은 무언의 압력으로 제게 '제발 이대로 내버려두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수 만년을 이곳에서 살아온 이 생물들을 몰아내고... 또 그곳에다 우리가 만들려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아무튼 오늘 그 공간에서 잠시나마 생각할 수 있는 것도 도보여행의 좋은 기억인 거 같습니다.

   길을 가다가 가끔씩 놀라게 될 때도 무척 행복합니다. 오늘 도로를 걸으며 길옆으로 서 있는 과실수를 보며, 이 많은 과일을 누가 다 먹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지천으로 널린 복숭아나무...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복숭아를 본 것은 아마 오늘이 처음이지 싶습니다. 맨 가장자리는 감나무가 심겨지고, 다름으로 복숭아나무, 그리고 저 안쪽으로는 파란빛의 사과가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겐 많은 분들의 도움이나 격려가 큰 힘이 됩니다. 정말 저 혼자 다니는 거 같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과(더구나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동행하고 있다는 느낌은 이 여행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오늘 드디어 제 친구 가락중학교 장준호샘이 중국 실크로드 여행을 마치고 귀국해서 전화를 해 왔습니다. 반가운 목소리를 듣고 나니까 몇 킬로미터는 거뜬해 집니다.

   또 내일 아침엔 위로방문을 오시겠다는 전화도 저를 너무 기쁘게 합니다. 길 위를 걸어가는 두 청년이 안쓰러워 같이 걸으시면서 도움을 주시려는 분들의 마음씀씀이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막막해지기부터 합니다.

   이제 그만 쓰고 씻고 자야겠습니다. 별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괜한 말씀만 드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메일을 보내고 나서 꼭 후회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은 길을 걷는 제가 실을 꿰고 가는 바늘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걷는 걸음이 바늘이 실을 매달고 지나가면 한 뼘 한 뼘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처럼 느껴집니다. 어떤 옷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옷이 만들어지는 날까지 열심히 걸어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무더위에도 좋은 꿈꾸시며 행복하시기를 뵙니다.

2002년 8월 5일

경북 청도에서 느티나무 드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감은사터 3층 석탑

 

   해지는 감은사터에 앉아서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논두렁 너머로 보라색으로 물들어가는 노을을 보지 못한 사람은, 그 노을에 넋을 빼앗기지 않은 사람은, 그 노을을 보며 시린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사람은...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