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땅-제주!
올해도 기어이 떠나왔습니다. 작년까지는 김의주선생님이 훌륭한 동행자가 되어 주었지만, 중요한 연극 공연을 앞둔 탓에 저 혼자만 달랑 떠나왔습니다. 아침 9시 제주도에 도착해서 저녁 7시에 숙소를 구했습니다. 여기는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입니다.
저는 떠나기 전날에 꼭 잠을 설치는 징크스가 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 새벽에 깜빡 졸았습니다. 다행이 김의주선생님이 배웅해 주신다고 해서 아주 편하게 김해공항에 갔습니다. 의주샘이 약간 아쉬워하면서도 평소대로 담담하게 잘 다녀오라고 했답니다. 자기 일도 아닌데 새벽 같이 일어나 저를 챙기는 모습이 고마웠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갚아야겠죠?
마침 제가 배정받은 비행기 좌석이 비상구 옆이라 승무원과 마주 앉게 되어 좀 어색했습니다. 어색함을 푸느라 평소에 비행기 승무원에 대해 궁금했던 것을 '인터뷰'식으로 꼼꼼하게 물었는데 대답을 무척 잘 해 줬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가니까 제주도에 금방 닿았습니다.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제주해안과 군데군데 구름에 가린 한라산을 사진기로 열심히 담았습니다.
오늘은 이 두 가지 일로 출발이 무척 순조로운 느낌입니다. 역시 사람에게 받은 배려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가 봅니다. 기분이 무척 좋습니다. 이번 여행 끝까지 아무런 걱정없이 제주도와 잘 엉키다가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제주공항을 나서자마자 제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약간 멍해졌습니다. 날씨는 생각보다 훨씬 덮고, 도로에 차들은 너무 쌩쌩 달리고. 사람은 안 보이고... 겨우 근처 상점에서 나눠주는 부실한 지도 한 장을 얻어 방향만 잡아서 무작정 걸었습니다.
갑자기 혼자 떠나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머리 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내가 왜 걷고 있지?', '내년에 같이 올 걸!', '날씨는 또 왜 이렇게 더울까?', '오늘은 어디서 잘까?', '다 돌아보는 데 며칠이나 걸릴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생각이 많아지다 보니 눈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나 봅니다. 길가에 핀 잡풀의 날카로운 가시에 손등 부분을 긁히고 말았습니다. 한눈 팔고 있거나, 제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꼭 이렇습니다. 긁힌 부분이 무척 쓰리고 따가운데 누구에게 하소연할 사람도 없고, 하소연한다고 제 아픔이 덜어지는 것도 아니고... 제가 지금 살고 있는 모습도 이런 일과 꼭 같지 싶습니다. 늘 정신을 딴 곳에다 쏟고, 그러다 상처 받고, 또 그 상처를 삭히느라 혼자서 끙끙대고..
어느덧 제 발걸음은 제주도의 북서쪽 일주도로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제가 걷는 왼쪽은 아직도 구름에 가린 한라산이 계속 보이고, 오른쪽은 짙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습니다. 도로 옆에는 때 이르게 핀 코스모스 천지고, 최근에 예쁘장하게 지은 펜션도 바닷가 전망 좋은 곳에 듬성듬성 보입니다.
3시간을 꼬박 걷고서야 식당을 찾았습니다. 아주머니와 이러저런 이야기를 해 가며 점심을 먹고 나서는 근처 초등학교에 자리를 잡고 낮잠을 잤답니다. 어제 밤에 잠을 못 잔 탓인지, 천성이 게으른 탓인지 모르겠으나 조금만 더 자고 싶은 그 유혹을 떨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오후부터는 머리 속에서 잡념이 없어지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직 오늘 가야할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 뿐!
열심히 걸었습니다. 이제 왼쪽으로 까마득하게 보이던 한라산 정상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고, 한라산 너른 품에 기대서 살고 있는 이 땅 사람들의 삶터이자 일터인 밭들이 야트막한 돌담에 둘러싸여 드문드문 드러납니다. 제가 오늘 제주에서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이 바로 이 돌담이었습니다. 제주도에 많은 것 중의 하나라는 말은 익히 들었지만 이렇게 돌을 쌓아두고 사는 줄은 몰랐습니다. 집 둘레도 그렇고, 밭 주변에도 어김없이 주변에 흔하디 흔한 돌을 그냥 쌓아다가 돌담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돌담 너머, 돌담, 돌담......
처음엔 '야~! 신기하네?'라고만 생각하다가 점차 '어? 저렇게 허술한데 어떻게 무너지지 않지?'하는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저렇게도 생각해 보다가, '아! 저 엉성한 돌틈 사이 구멍으로 바람을 통과시켜서 그렇구나!'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제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옛말에도 강하면 부러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시멘트로 꽉 막아둔 담장은 바람이 빠져나갈 틈이 없어 무너져도, 강한 바람이 불어올 때 듬성듬성 쌓아 놓은 돌틈으로 바람이 다 빠져나가니 아무리 센 바람이 불어도 돌담은 끄떡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세상사 거친 바람에 그냥 맥없이 무너져 내리는 시멘트 담장이 되지 않으려면, 허허롭게 비워두고 서 있는 저 돌담처럼 서 있어야겠다는 다짐도 해 봅니다. 정작 '담'의 역할을 제대로 해 내려면 현명하게 판단해서 행동해야 함을, 오늘 저 제주 돌담을 보고 느꼈습니다.
오늘은 북제주군을 걸어왔습니다. 이곳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입니다. 이 곳 사람들은 옛날에는 콩, 보리를 주로 심었지만, 요즘은 주로 참깨, 마늘, 감귤 같은 특용 작물을 재배하며 살고 있습니다. 토질과 기후가 감귤의 당도를 그렇게 높이지 못한다고 하네요. 그래서 이 곳 사람들이 더 부지런한가 봅니다. 상대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도 없어 조용하고 한적한 농촌 마을들이 이어진 길을 걸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이런 모습이 일상이지만 제주도도 이렇다는 게 약간 이상합니다. 제주도 하면 온통 '관광'하는 사람들 뿐인 줄 알거든요. 덕분에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친절하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제주 사투리를 하는 염색을 예쁘게 한 청년들의 순박함이 더 돋보이는 곳입니다.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늘 행복하셔요.
2003년 8월 21일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에서 느티나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