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류장에서 잠들다 

   오늘은 편지가 좀 이르지요? 조금 더 가야하는데 성산봉 앞이라 그냥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내일 걸어야 할 길을 생각하면 마음은 조금 급하지만 내일 우도에 들어가 볼 거라면 역시 여기(성산읍)서 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음과는 달리 오늘도 늦게 일어나 '시간아, 네 마음대로 흘러봐라!'는 듯이 느릿느릿 챙겨서 숙소를 나왔습니다. 서귀포 시내 중심가-그래봐야 200m 정도지만-가 월요일이라 약간 활기찹니다. 우유, 음료수와 과자를 사서 버스를 탔습니다. 어제 걸었던 곳까지 가는데 40분 정도 걸렸습니다. 저는 그런 길을 하루 종일 걸었으니 미련스럽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제주군 남원읍 신흥리에서 11시부터 오늘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날은 잔뜩 흐려서 곧 비가 내릴 듯했지만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걷기에 무척 편했습니다. 오늘은 유난히 자전거 여행팀을 많이 보았습니다. 오르막길을 자전거를 끌고 힘겹게 올라가는 일행들에게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건냈습니다. 별 것도 아닌 건데 무척 고마워하기에 '다른 여행자에게 꼭 갚으시면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이 아이스크림이 다시 저에게 돌아올 수 있을까요?

   도로는 다시 전형적인 농촌마을들을 연결하며 지나갑니다. 덕분에 이것저것 구경할 것들이 많습니다. 감귤 농사가 여전히 대부분이고 파인애플도 좀 재배하고, 여러 종류의 밭들도 많이 보입니다. 해안 마을에서는 양식업과 낚싯배로 살아가시는데 어딜가나 '살기 힘들다'는 하소연을 많이 하십니다.(외지인에게 너무 엄살부리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2시간을 걸어 표선해수욕장이 유명한 표선면에 들어와 자장면으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모처럼 곱배기를 먹었는데, 아주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또 하나 입에 물고 길을 나섰습니다. 한라산 쪽에서 내려온 구름은 점점 더 짙어지고 낮게 내려와서 이제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합니다. 곧이어 장대 같은 비가 조용한 도로의 정적을 깨우며 엄청나게 퍼붓습니다. 달리 피할 곳도 없어 목소리만 더 키워 노래만 불러대며 걸었습니다.

   한참을 걷다가 버스정류장에서 잠시 비를 피하기 위해 앉았습니다. 조금 후에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자전거 여행팀(2명)이 비를 피하려고 정류장으로 들어왔습니다. 얼굴과 몸 전체가 완전히 새까맣게 탄 걸 보니 집을 나선 지 오래되었나 봅니다. 

   제가 들고 있던 과자를 건네면서 '어떻게 여행오셨냐'고 물으니까 인천에서 '술장사'를 하다가 1억여원을 날리고 상심한 나머지 자전거를 끌고 완도까지 왔다가 배를 타고 제주도로 들어왔답니다. 자전거로 이곳 저곳을 다니시면서 마음을 추스리고 있는 중이랍니다. 비는 더 퍼부어 대고 엄청난 번개와 천둥(정류장 바로 옆에 번개가 내리쳐 죽는 줄 알았습니다)때문에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서 1시간 동안이나 그분들과 이야기를 하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습니다.

   자전거팀은 빗줄기가 가늘어지자 서둘러 떠났고, 전 날이 갤 것 같아서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왜 이번엔 비오는 거에 대한 준비를 아무 것도 안 해 온 것인지... 비는 조금 있다가 그쳤고, 날이 개자 기분이 상쾌해졌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신나게 잘 걸었습니다. 어제 붙인 밴드가 별로 효과가 없었지만 그래도 덥지가 않아서 제가 아는 노래를 메들리로 쭉 불러가며 걷는 동안 무척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비가 쏟아지고 가늘어졌다가 다시 폭우...이렇게 반복되는 상황이라 비를 피하기도 어렵고, 이미 옷은 다 젖었고 비를 맞고 걸어도 이젠 별로 손해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작정 걸었습니다. 한 두어 시간을 갔을까? 또 어느 버스정류장에서 비도 피할 겸 다리도 쉴 겸해서 앉았습니다. 갑자기 쏟아지는 잠을 이겨낼 수가 없어서 온 몸이 뻐근하게 아프다는 걸 느끼면서도 얼핏 선잠이 들었나 봅니다. 그 때 갑자기 "안녕하세요?"하는 목소리. 아까 본 그 자전거팀이 민속마을에 들렀다가 내려온 길이라면 반갑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계면쩍게 웃고, 여러가지 정보도 물어보고,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겠다고 생각하며 헤어졌습니다.

   저는 멍하니 그 정류장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갑자기 왜 왔을까?' 왜 내가 여기 앉아서 이렇게 졸고 있지?하는 생각이 들어서 좀 서글펐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오면서는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등받침대도 없는 간이 의자에 앉아서 졸고 난 다음 마음이 허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걸어오는 내내 노래만 불렀습니다. 내가 가사를 알고 있는 노래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비는 더 세차게 오고, 제 발걸음도 더 힘차게 내디뎠습니다.

   저녁 6시. 성산읍에 닿았습니다. 오늘은 맛난 저녁을 먹기로 하고 해물 뚝배기를 먹었는데, 우리 동네 해물탕이랑 똑 같더군요. 뉴스를 보니 오늘 비가 80mm가 내렸다네요. 성산읍에서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아무래도 내일 우도로 들어가려면 항구쪽이 좋을 것 같아서 지금은 2km 정도 더 걸어서 성산포에 들어와 있습니다.

   오늘이야 말로 일찍 자야 내일 일출-날이 맑으면-을 보고 우도-배가 뜨면-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제주 오름의 여왕이라는 '다랑쉬 오름'과 '비자림'도 둘러보고 싶은데 시간이 어떨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덕분에 건강하게 잘 걷고 있습니다. 내일 다시 소식 전하겠습니다.

 

2003년 8월 25일

제주도 성산포항구에서 느티나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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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아드 2003-12-04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헛+_+ 오타발견 !!//어딘지 말은안해드림 (*__)ㅋ
근데 아이스크림은 어떻게 사서 나눠주시는건지 =ㅋㅋ

느티나무 2003-12-05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이아드님, 열심히 읽어주니 고맙네요. 아이스크림은 제가 시골 가게 앞에서 쉬고 있을 때 자전거 여행팀이 지나가고 있기에 불러서 건네줬답니다. ^^ 너무 고마워하던데요. 이제 시험문제 완전히 정리하고 자렵니다. 낼 퉁퉁 부어 있겠네요. 걱정~!
 

   객관적 인식 대상인 사람 속에는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마치 식물의 씨앗 속에 전체 식물이 될 가능성이 놓여 있듯이 주어졌다. 식물은 자체내 들어있는 객관적 법칙성으로 말이암아 성장, 변화한다.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 자신 속에 놓여있는 변화 요소를 끄집어내어서 자신의 힘으로 변화시키지 않는 한 불완전한 상태로 남을 수 밖에 없다. 자연은 사람을 단순히 자연 존재로, 사회는 법에 맞게 행동하는 존재로 만든다. 그러나 자유로운 존재로 만드는 것은 오직 사람 스스로 할 수 있다.

   자연은 사람을 어느 특정 단계의 발달에서 그 구속을 풀어준다. 그리고 사회는 이런한 발달을 어느 단계까지 조금 더 이끌어준다. 그러나 마지막 손질은 오직 사람 스스로 자신에게 가할 수 밖에 없다.

루돌프 슈타이너의 '자유의 철학'(1894) / 변종인 譯

 

   제3회 참교육실천 보고대회가 있는 날이다. 늘 고민한 성과들을 내놓은 선생님들의 용기와 노력이 부럽고, 존경스럽다. 그리고 해마다 공짜로 받아 먹기만 하려고 드는 내가 좀 밉살스럽기도 하다. 앞으로는 좀 나아지도록 노력해보자. 늘 누군가와 나누려는 마음은 가득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보고대회의 기조 강연은 독일의 대안학교인 '슈타이너학교의 감성 교육에 대한 이해' 정도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인 것 같고, 너무 높은 꿈은-당장 현실로 바꿀 수 없는- 막막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상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야할 지표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학생 자치영역의 분과토론은 약간 충격적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 두 명이 발표자였는데-그러나, 어제의 발표가 참교육실천 보고대회라는 큰 영역에 포함될 수 있을까?- 학교 밖 동아리 활동을 하는 학생의 동아리 활동 과정에 대한 소개와 모 고등학교 학생회장으로 학생들의 권리 찾기를 시도한 사례들을 발제로 해서 토론이 이어졌다. 첫 번 째 토론은 학교 밖 동아리 활동이 학교 활동과 연계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이고 두 번째는 학생자치 활동을 위해 교사가 해야할 역활은 무엇인가?를 두고 활발한 의견들이 나왔다.

   학생 자치라... 아직도 학생 자치 활동을 불온한 시각으로 보고, 학생들에게 공부만 강요하는 엉터리 학교에서 그런 아이들이 자라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내가 학생 자치 활동을 위해 같이 고민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도 짚어보게 된 것이 얻은 것이라면 얻은 것이다. 오늘에야 다시 생각해 보니 내 마음 한 켠에서도 '저러면 공부는 언제 하누?'하는 생각을 참 떨치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학생 자치는 학생에 대한, 아니 한 인간에 대한 믿음이다. 학교라는 상황이 아니라면 '자치'에 대한 논란 자체가 없을 것이다. 학생 자치는 '공부를 잘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다른 무엇에 우선할 수 없는 기본적인 권리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이 당연한 권리가 '당연히' 무시된다. 내가 외면하고 체념하고 침묵하는 동안 이 권리는 학생들의 손에 가 닿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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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의 물질 문화는 급속히 변하지만, 정신 문화는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 유교적 전통이 강한 사회로, 미혼 남녀의 순결 여부가 여전히 개인적, 사회적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전통적 순결의 규범을 버리고 미혼의 남녀에게 완전한 성의 자유를 허용해야 하는가, 아니면 순결은 남성들이 여성을 지배하고 예속시키는 성차별적인 규범으로서 떨쳐버려야 할 과거의 인습(因襲)인가?하는 문제를 두고, 순결은 이제 더 이상 미덕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히고자 한다. 

   성적인 권리는 인간의 아주 기본적이며 보편적인 인권이다. 여성에게 순결이 강요되던 시대와 장소는 여성이 한 인간으로서 남성과 같은 권리를 누리지 못하던 사회였다. 이런 사회의 여성들은 단지 남성들의 성적인 소유물로만, 아니면 종족 번식의 매개자로만 인식되었다. 그렇지만, 현대 사회는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인간적, 정치적, 사회적 권리가 제한 받지는 않는다.(형식상 그렇다) 따라서 여성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순결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미혼 남녀의 순결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행동을 결정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는 성인이라면, 공동 사회가 편견으로 대하는 것은 부당하다. 개인의 행동이 최소한의 사회적 약속인 법에 위반되거나, 윤리적 규범에 반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 구성원들의 선택을  사회집단이 규제할 수는 없다. 이러한 성인 남녀의 순결 문제가 간통죄와 같은 사회의 다른 법률적, 윤리적 판단과 별개라면 이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일부에서는 미혼 남녀에게 완전한 성의 자유를 허용한다면(사실 누구에게나 성의 자유는 보장되어 있지 않은가?) 미혼모의 증가, 성병의 전파, 성범죄의 증가 등의 사회 문제와 가정의 결속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이혼의 급격한 증가를 가져올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물론 이런 성과 관련된 문제가 순결 의식이 약해진 현재 날로 증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현상이 순결 의식의 약화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다고 볼 수는 없다. 이것은 순결 의식의 약화가 가져온 문제가 아니라, 올바른 성교육의 부재와 음성적이고 삐뚤어진 성문화, 아직도 유교적 전통이 강한 가부장적인 가족 제도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낳은 사회 문제이다. 이런 다양한 원인이 낳은 문제를 단순히 개인에게 순결 의식을 강요함으로 해서 해결하려 한다면 이는 문제의 본질을 바르게 파악하지 못한 것이 된다. 따라서 순결 의식을 개인에게 강요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미혼 남녀의 순결 의식을 지켜야 할 미덕인지, 버려야할 인습인지를 문제로 해서, 이러한 순결 의식은 현재의 시대 상황과 맞지 않고, 개인의 주체적인 선택으로 인정해야 하며, 현재 많은 사회 문제와 가족 제도의 결속력 약화 등의 원인이 순결 의식의 약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므로 여성에게 강요되어 왔던 순결 의식은 이제 더 이상 미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 강요된 순결 의식은 이제 없어져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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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3-12-03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갑자기?... 이 글은 논술 연수를 받을 때 내가 쓴 숙제였다. 우연히 학교의 내컴퓨터를 뒤지다 보니 별별 게 다 나와서 ^^ 논설문이든, 생활문이든 내가 직접 쓰는 것은 쉽지 않다. 아이들에게도 함부로 이야기해선 안 되겠다.
 

사람 사는 땅-제주!

   올해도 기어이 떠나왔습니다. 작년까지는 김의주선생님이 훌륭한 동행자가 되어 주었지만, 중요한 연극 공연을 앞둔 탓에 저 혼자만 달랑 떠나왔습니다. 아침 9시 제주도에 도착해서 저녁 7시에 숙소를 구했습니다. 여기는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입니다.

   저는 떠나기 전날에 꼭 잠을 설치는 징크스가 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 새벽에 깜빡 졸았습니다. 다행이 김의주선생님이 배웅해 주신다고 해서 아주 편하게 김해공항에 갔습니다. 의주샘이 약간 아쉬워하면서도 평소대로 담담하게 잘 다녀오라고 했답니다. 자기 일도 아닌데 새벽 같이 일어나 저를 챙기는 모습이 고마웠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갚아야겠죠?

   마침 제가 배정받은 비행기 좌석이 비상구 옆이라 승무원과 마주 앉게 되어 좀 어색했습니다. 어색함을 푸느라 평소에 비행기 승무원에 대해 궁금했던 것을 '인터뷰'식으로 꼼꼼하게 물었는데 대답을 무척 잘 해 줬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가니까 제주도에 금방 닿았습니다.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제주해안과 군데군데 구름에 가린 한라산을 사진기로 열심히 담았습니다.

   오늘은 이 두 가지 일로 출발이 무척 순조로운 느낌입니다. 역시 사람에게 받은 배려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가 봅니다. 기분이 무척 좋습니다. 이번 여행 끝까지 아무런 걱정없이 제주도와 잘 엉키다가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제주공항을 나서자마자 제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약간 멍해졌습니다. 날씨는 생각보다 훨씬 덮고, 도로에 차들은 너무 쌩쌩 달리고. 사람은 안 보이고... 겨우 근처 상점에서 나눠주는 부실한 지도 한 장을 얻어 방향만 잡아서 무작정 걸었습니다.

   갑자기 혼자 떠나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머리 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내가 왜 걷고 있지?', '내년에 같이 올 걸!', '날씨는 또 왜 이렇게 더울까?', '오늘은 어디서 잘까?', '다 돌아보는 데 며칠이나 걸릴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생각이 많아지다 보니 눈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나 봅니다. 길가에 핀 잡풀의 날카로운 가시에 손등 부분을 긁히고 말았습니다. 한눈 팔고 있거나, 제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꼭 이렇습니다. 긁힌 부분이 무척 쓰리고 따가운데 누구에게 하소연할 사람도 없고, 하소연한다고 제 아픔이 덜어지는 것도 아니고...  제가 지금 살고 있는 모습도 이런 일과 꼭 같지 싶습니다. 늘 정신을 딴 곳에다 쏟고, 그러다 상처 받고, 또 그 상처를 삭히느라 혼자서 끙끙대고..

   어느덧 제 발걸음은 제주도의 북서쪽 일주도로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제가 걷는 왼쪽은 아직도 구름에 가린 한라산이 계속 보이고, 오른쪽은 짙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습니다. 도로 옆에는 때 이르게 핀 코스모스 천지고, 최근에 예쁘장하게 지은 펜션도 바닷가 전망 좋은 곳에 듬성듬성 보입니다.

   3시간을 꼬박 걷고서야 식당을 찾았습니다. 아주머니와 이러저런 이야기를 해 가며 점심을 먹고 나서는 근처 초등학교에 자리를 잡고 낮잠을 잤답니다. 어제 밤에 잠을 못 잔 탓인지, 천성이 게으른 탓인지 모르겠으나 조금만 더 자고 싶은 그 유혹을 떨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오후부터는 머리 속에서 잡념이 없어지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직 오늘 가야할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 뿐!

    열심히 걸었습니다. 이제 왼쪽으로 까마득하게 보이던 한라산 정상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고, 한라산 너른 품에 기대서 살고 있는 이 땅 사람들의 삶터이자 일터인 밭들이  야트막한 돌담에 둘러싸여 드문드문 드러납니다. 제가 오늘 제주에서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이 바로 이 돌담이었습니다. 제주도에 많은 것 중의 하나라는 말은 익히 들었지만 이렇게 돌을 쌓아두고 사는 줄은 몰랐습니다. 집 둘레도 그렇고, 밭 주변에도 어김없이 주변에 흔하디 흔한 돌을 그냥 쌓아다가 돌담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돌담 너머, 돌담, 돌담......

   처음엔 '야~! 신기하네?'라고만 생각하다가 점차 '어? 저렇게 허술한데 어떻게 무너지지 않지?'하는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저렇게도 생각해 보다가, '아! 저 엉성한 돌틈 사이 구멍으로 바람을 통과시켜서 그렇구나!'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제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옛말에도 강하면 부러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시멘트로 꽉 막아둔 담장은 바람이 빠져나갈 틈이 없어 무너져도, 강한 바람이 불어올 때 듬성듬성 쌓아 놓은 돌틈으로 바람이 다 빠져나가니 아무리 센 바람이 불어도 돌담은 끄떡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세상사 거친 바람에 그냥 맥없이 무너져 내리는 시멘트 담장이 되지 않으려면, 허허롭게 비워두고 서 있는 저 돌담처럼 서 있어야겠다는 다짐도 해 봅니다. 정작 '담'의 역할을 제대로 해 내려면 현명하게 판단해서 행동해야 함을, 오늘 저 제주 돌담을 보고 느꼈습니다.

   오늘은 북제주군을 걸어왔습니다. 이곳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입니다. 이 곳 사람들은 옛날에는 콩, 보리를 주로 심었지만, 요즘은 주로 참깨, 마늘, 감귤 같은 특용 작물을 재배하며 살고 있습니다. 토질과 기후가 감귤의 당도를 그렇게 높이지 못한다고 하네요. 그래서 이 곳 사람들이 더 부지런한가 봅니다. 상대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도 없어 조용하고 한적한 농촌 마을들이 이어진 길을 걸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이런 모습이 일상이지만 제주도도 이렇다는 게 약간 이상합니다. 제주도 하면 온통 '관광'하는 사람들 뿐인 줄 알거든요. 덕분에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친절하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제주 사투리를 하는 염색을 예쁘게 한 청년들의 순박함이 더 돋보이는 곳입니다.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늘 행복하셔요.

  2003년 8월 21일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에서 느티나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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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3-12-02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3년 여름에는 제주도를 다녀왔습니다. 이번에는 혼자 떠난 여행이었지요. 내년에도 여행을 해 볼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살면서 아주 소중한 경험을 얻게 된 기간이었습니다. 아껴주신 분 모두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네요. 오랫동안 잊지 않고 갚아 나가겠습니다.
 

만남

   어젠 쪽방에서 늦게야 잠들었지만, 편하게 잘 잤습니다. 우리가 잠든 방은 어제 말씀드렸 듯이 씻을 곳이 없는 방이라 아침 세수를 복도 끝에 있는 싱크대에서 조심조심 합니다.(다른 사람이 깰까 봐서요.) 기분이 묘하더군요. 자꾸 주변을 살피게 되고-돈이 없다는 건 이렇게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인가?하는 생각도 잠깐 해 봅니다.-, 여행을 떠나 와 처음으로 제대로 씻지 못한 날이지 싶습니다. 오늘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숙소를 나오고 나서는 마음이 가볍습니다. 오늘 걸어야 할 거리가 평소보다 약간 짧고, 날씨도 해가 슬금슬금 고개를 내밀었다, 숨었다 하는 터라 걷기에 적당할 것 같아서 입니다. 숙소 근처에서 빵과 우유로 아침을 먹으며, 주문진 읍내를 돌아서 나옵니다. 일요일 아침, 밤새 들뜬 모습으로 북적대던 관광지가 푹 잠이 들어 있습니다.

   도로에 올라서니 어제처럼 차가 씽씽 달립니다. 차들이 무서워 갓길에 바짝 붙어서 조심스럽게 걸어갑니다. 상황이 어제와 꼭 같습니다. 저에게는 이제 차가 정말 공포스러운 '흉기'로 느껴집니다. 저도 돌아가면 운전하고 다니겠지만, 이전과는 느낌이 좀 달라져 있을 것 같습니다.

   도로 오른쪽으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바다입니다. 어제처럼 날이 흐리지 않아서 코발트빛 바다 색깔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사람의 마음을 서늘하게 하는 그 빛깔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건 오직 아득한 저 수평선과 그 선에서 밀려올수록 점점 선명해 지는 바닷물, 그리고 하얀색 파도...사진기로 찍어서 보내드려야 하는데, 걸어가는 동안 저는 아무 것도 하기가 싫습니다.

   도로 왼쪽은 야트막한 야산들이고, 저 아득히 먼 곳으로는 구름이 가득 퍼져 있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누가 보지 않아도 제 멋대로 만들어 내는 구름 모양을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초록색 들판이 이어지기도 하고, 한가로이 '왜가리'같은 새들이 논에서 쉽니다. (오직 차만 너무 바쁘게 씩씩거리네요!)

   걸어가다 보니 도로 공기가 이상합니다. 바다에서는 서늘하고 차가운 공기가 언덕쪽으로 퍼지고, 언덕 쪽에서는 후끈한 공기가 밀려와 딱 도로중간에서 만납니다. 몸의 반쪽은 차갑고, 반대쪽은 후끈거립니다. 걸어가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점심은 현남면에서 먹습니다. 값싸게 먹을 수 있고, 만만한 게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라서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아직 선뜻 고기를 먹고 싶다는 생각은 안 납니다-결국 된장찌개로 점심을 먹습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면사무소로 옮겨 짐을 풀고 앉습니다.

   일직하시는 분-두 아이의 어머니-이 두 아이를 데리고 면사무소를 지키고 있습니다. 의주샘은 바로 옆 건물인 '주민정보화교육장'으로 가고, 전 움직이는 게 성가셔서 그 두 아이랑 놉니다. 큰 녀석은 유치원에 다니는 여자아인데 너무 귀엽습니다. 저랑 같이 그림도 그리고, 숫자 놀이도 하고, 곰인형을 가지고 노는데 정말 재미있네요. 제 수준이 딱 맞는 거 있죠? 아마 며칠 동안은 오늘 놀았던 그 생각을 하면 흐뭇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재미있게 노는 동안 잠시 '강원일보'를 슬쩍 보니, 도교육청에서 '특기/적성교육과 자율학습'을 학교 자율로 시행하도록 했다는 기사가 크게 나오더군요. 얼마 전까지는 일정한 시간을 두어 제한했는데, 이번에 그 시간제한을 없앴답니다. 그게 학교 자율이라는군요. 정말 좀 제대로 잘 할 수는 없는지 답답합니다. 휴~! '해인(6살)'이와 '해찬(4살)'-같이 논 그 녀석들-이가 중학교에 갈 때쯤이면 좀 나아질까요?

   오후엔 휴게소에서 처음으로 도보여행자를 만나기도 합니다. 춘천에서 3일 동안 걸어서 양양까지 왔다는 대학생 3명이 너무 멋져 보입니다. 잠도 교회에서 얻어 자고, 돈도 거의 안 가지고 나왔답니다. 시커멓게 탄 온 몸을 보며,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어 아이스크림을 사서 내밉니다. 연신 고맙다며 수줍어하네요.

   다시 길을 나서 한참을 걷습니다. 처음엔 1km가 짧은 게 아주 크게 느껴졌는데, 25km나 30km가 별다른 차이가 없이 느껴집니다. 저녁쯤엔 다리 근육이 항상 뭉쳐집니다. 오늘은 중간에 적당하게 쉴만한 곳이 없어 계속 걷습니다. 한참을 걸어도 적당한 곳이 나오지 않아서, 도로 옆 인도에 짐을 풀고 잠깐 눕는다는 것이 아마 잠이 들었나 봅니다. 제법 시간이 많이 갔는지, 일어나니 다리 근육이 많이 풀려 있습니다. 이제 다시 힘차게 걸을 수 있겠습니다.

   7시 20분. 평소보다 약간 빠르게 양양에서 숙소를 구합니다. 값도 싸고, 괜찮은 곳입니다. 어제 못한 빨래를 다 하고, 맛있는 저녁을 먹습니다.

   지나온 날, 밤마다 지도를 펴놓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지도보다 왜 걷느냐에 대한 질문을 제 스스로에게 해야할 것 같습니다. 싱겁겠지만 '즐기기 위해서'라는 답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누구나 즐기는 자기만의 방법이 있겠지요?

2002년 8월 18일, 강원도 양양에서

느티나무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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