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한 지 이틀 지났다. 올해는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번 해에는 담임이 없다. 수업만 고등학교 3학년 16시간, 1학년 2시간. 그리고 내 담당업무는 작년에 맡았던 교과서와 학습자료 준비는 그대로 가져오고, 도서실 운영이 추가되었다.
남들이 보면 무난하다고 하고, 담임 없어서 편하겠다고도 할 것인데 나는 담임을 맡지 않은 건 약간 서운하다. 밀려난 느낌도 들고... 자충수를 둔 점도 있고... 사실은 작년 1학년 담임을 맡았으면 아이들과 같이 2학년 담임과 수업을 맡는 것이 자연스러웠으나, 2학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입시 준비를 시작해야 할 것 같아서 국어 수업이 더 재미없을 것 같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1학년 담임을 희망한다고 구두로 이야기했더니, 담임 없는 대신 3학년 수업을 전담해서 맡아 달라는 부탁도 들어오고-아마 2학년을 희망했으면 이런 부탁을 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어찌어찌 하다가 결국 담임은 없는 것으로 정해져 버렸다.
지난 2월 27일에서 3월 1일 오전까지 여행하는 동안 '번개 안 하냐고? 애들이 눈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문자메세지를 받았다. 사실은 종업식 하는 날(2월 21일), 아이들에게 내가 누군가에게 메세지로 번개 날짜와 시간을 보내면-그 연락을 받은 학생은 또 다른 사람에게 연락하고 해서- 시간되는 사람 모두 모이자고 말해 둔 터였다. 그래서 여행 중에 이미 3월 1일 12시에 번개하기로 정해 두었고, 문자메세지로 알렸다.
나는 번개하는 날 아이들에게 줄 책 한 권씩을 선물로 준비했다. 알라딘에서 44 종류의 책을 미리 주문해서 책은 벌써 학교에 도착해 있었다. 나도 서둘러 여행을 급하게 마무리하고, 3월 1일 11시에 바로 학교로 도착했다. 그 다음엔 아이들에게 점심으로 줄 자장면을 주문하는 일. 그러나 실제로 몇 명이나 올 수 있을까? 짐작조차 어려웠다. 12시는 점점 가까워지고 아이들이 하나 둘 교실로 모이기 시작했다. 학교에 맨날 지각하던 녀석들은 그날도 역시 지각이었다. '자장면 20그릇이요' 하고 전화를 끊고나니 한 명 두 명 더 늘어나 전화하기를 다시 여러 번. 결국 서른 두 그릇의 자장면을 주문해 놓고는 1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우리반은 모두 40명이다)
책을 미리 교실 책상에 한 권씩 펼쳐 놓았고, 마음 속으로 가지고 싶은 책을 점찍어 두라고 일렀다. 배달된 포장 상자 안에 각자의 소지품을 한 개씩 내면, 내가 추첨을 통해서 책 고르는 순서를 정했다. 자기의 소지품이 내 손에 들려지면 나와서 책을 고르는데, 대충 아무거나 집어드는 녀석, 신중하게 살피는 녀석, 내용을 뒤적거려 보는 녀석, 가격부터 살피는 녀석, 아는 책부터 찾는 녀석, 만화책이 있냐고 묻는 녀석... 모두 다 제각각이다. 그래도 1시간 동안 자기가 가지고 싶은 책들 한 권씩은 손에 들게 되었다. 신기한 듯 모두 책을 만지작거리며 교실이 왁자지껄하다.
나머지 책-번개에 못 온 녀석들, 그 날 저녁에 문자메세지가 2명한테서 왔었다, 못 와서 죄송하다고 ㅋㅋ-은 개학하면 불러서 다시 고르게 하면 될테니까 내가 따로 챙겨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른 두 그릇의 자장면이 왔고, 아이들과 신나게 자장면을 먹었다. 먹을 때는 무척 조용했다. 마지막으로 교실청소를 깔끔하게 하고, 모두 교실 뒷편에 섰다. 그 때 내가 마지막으로 몇 마디 말을 했었는데,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이들도 그 순간에는 어떻게 느꼈는지 약간 분위기가 묵직했다. 나로서는 올해 이 아이들과 같이 수업을 하지 않는 게 좀 섭섭했던 것 같다.
지금이야 자장면도 감지덕지인 나이들이지만, 이 녀석들이 자장면이 얼마나 값싸고 평범한 음식인지를 알게 될 나이가 되면 담임인 내가 정말 자기들을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 그 녀석들이 앞으로 자장면을 먹게 될 때 혹 한 번 쯤은 '2004년 3월 1일의 자장면'을, 책상을 이리저리 붙여 놓고 옆에 앉았던 그 친구들을, 그 때 그 담임을 떠올리며 빙긋 웃을 때가 있을까?
오늘에서야 한 권 남은 책도 다 전해 주었고, 2003년 담임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는 끝이었다. 혹 나 혼자만 '이별이 힘들다'고 느끼는 건 아닌지 못내 억울한 생각도 들지만, 이게 내 운명이고 팔자려니 해야지 뭘 어쩌겠는가?
그래도 여전히, 나에게 이별은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