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0교시가 없는 날이다. (교육청에서 0교시 금지 공문이 내려왔지만, 우리 학교는 얍실하게 점검하기 전까지는 계속 밀고 가겠다고 한다.) 느긋하게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학교로 나갔다. 이제 어떻게든 시간은 흘러갈 것이고, 학교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의 열악한 상황도 조금은 나아지겠지!

   그러나 3교시 무렵에 들은 기막힌 소리! 작년에 그렇게 난리를 쳤던 사설 모의고사 문제가 또 불거져 나왔다. 어떤 학생-아니면 학부모? 음... 알 수 없는!-이 홈페이지에 체육대회가 미리 예정되어 있는 날, 사설 모의고사를 치자고 홈페이지에 올린 것이 발단이 되었다. 자기가 글을 올리고 자기가 리플을 몇 개 달았더니 아이들의 반대가 쏟아졌다. 그러자 학교장은 '아이들이 모의고사를 원한다', '학부모들이 시험치기를 원한다'는 말을 흘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오늘은 강압적으로 1,2학년 체육대회를 취소하고 모의고사를 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사실, 모의고사로 말하자면 할 말이 많다. 작년에 모의고사 문제로 교육청에서 지도가 나왔을 때 교장선생님은 '앞으로는 절대로 사설 모의고사를 치지 않겠다'고 선언했었다. 그런데 오늘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교장선생님은 지난 주 연수 시간에 조직의 경영 목표에 조직원이 모두 동의할 때 조직의 능률이 최고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일방적 학교 경영을 통해서, 구성원들에게 최소한의 신뢰를 보여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조직의 능률은 최악이다. 나는 아이들 때문에 조직의 능률과는 별로 상관 없지만, 일반 직장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조직의 능률을 떨어뜨릴려고 노력할 것이다. 나의 게으름이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응당 그렇게 할 것이다.

   오늘 또 보니 교육청 공문을 보며 어떻게든 빠져 나갈 궁리를 하는 모양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0교시가 폐지해서 정규수업(9시 10분에 시작) 전에는 어떠한 형태의 수업을 할 수 없다'라고 공문에는 설명되어 있는데, 그러면 학교에서는 '1교시를 8시로 당겨서 하도록 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지 않을까?

   오늘은 공부방 가는 날이다. 학교에서 있었던 모임의 회의에 참석했다가 조금 늦었다. 여기저기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주로 일해달라는 부탁ㅠㅠ- 지하철을 탔다. 그러나 내릴 때 쯤에야 지갑이 없나는 걸 알았다.-돈도 나로서는 아주 많았는데...- 일단 신용카드 분실신고부터 하고, 공부방에 가는 수 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차비만 달랑 남아서 겨우 집으로 왔다. 오늘 하루를 차분하게 생각해 봐도 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오늘 저녁을 먹으면서 '이렇게 살 바에야 공부를 계속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한심한 생각도 들었다. 오라는 곳이 있어야 공부도 하겠지만, 오늘처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그래서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다면- 차라리 이 꼴저 꼴 안 보고 그냥 내 공부만 계속 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공부하는 곳도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라고 하더라만... 나 같은 어중이떠중이야 굳이 자리에 연연해할 필요가 없으니...공부가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사실 나는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대학 때에도 겨우 학점만 따는 것에 만족했고, 학교에 나와서는 직장내의 '이상한 학벌주의'-남들 다 가는 대학원 정도는 빨리 가야지... 뭐 이런!-가 낯설었다. 공부는 내가 필요할 때 하는 것이라고, 나는 공부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오늘처럼 답답한 날에는 이것도 달콤한 유혹이 된다.

   내일부터는 또 새마음으로 살자! 참, 운수 좋은 날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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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연엉가 2004-05-19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티나무님 선생님이란 직업도 머리가 아프네요.^^^

nrim 2004-05-19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공.. 이런... 기운내셔요~~

느티나무 2004-05-19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대로 살려면 무엇보다도 어려운 직업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내 양심에 어긋나는 일 없이, 비겁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아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교사'가 되기란 세상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느티나무 2004-05-19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운수 좋은 날에... 하나의 사건이 빠졌더군요. 오늘 7교시에 도서실 화분이 깨진 걸 알았답니다. 누군가가 급하게 가다가 쓰러뜨리고 갔나 봅니다. 화분은 왕창 깨지고... 나무도 가지가 부러졌고... 속상했지요 ^^ 다른 화분으로 갈고, 흙을 주워 담고... 나무를 다시 심었는데, 잘 자랄수 있을 지 지금 무척 걱정입니다.

느티나무 2004-05-19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다보면 또 환히 웃음 짓는 날도 있겠죠! 늘 그런 건 아니니까, 조금만 걱정하셔도 됩니다.

프레이야 2004-05-19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티나무님, 고민하며 사는 모습이 좋습니다. 화분까지 깨지고 정말 운수 좋은 날이었네요.

푸른나무 2004-05-19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설마 파키라 화분이.. 제가 볼때는 괜찮았었는데... 그러잖아도 급식실 가는 길에 있는게 불안해 보이더니 햇볕쪽으로 내놓을까 했더니..그렇게 되었군요.
여러가지 일이 겹쳐 정말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었군요. 힘 내세요.

장김준호 2004-05-24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거 아닌 거 같고 뭐 그리 고민하노. 교육청이랑 교육부, 청와대 홈페이지에 느거 학교 불법 모의고사 친다고 신고해뿌라. 지갑은... 내가 담에 밥사께. 사상 콜?
 

느티나무

- 백무산

찬바람 닥치고 낙엽이 지면
저 산에 나무들 가운데 사철 푸른 나무들이
오래 그 푸르름을 뽐내겠지만
그 푸른 기상이 장하기도 하지만

푸르던 잎새들 다 발 아래 떨구고
앙상한 가지마저 거두지 못해
긴 겨울 찬바람에 다 내어주고
끝 모를 허공에 생을 다 놓아버리는
그 마음 깊이를 알 수 있을까

내가 있던 그 자리에 바람이 들어와 앉고
구름이 들어와 앉고 새들 날아와 앉고
내가 있던 그 자리에 눈보라 휘날리고
나 아닌 것들이 다 다녀가고
시간은 마침내 그 자리조차 지우고

어느 봄날에 흔적 없던 가지 끝 허공에서
나 아닌 모든 것들이
내가 되어 피어나고
저 푸른 천 개의 팔을 펼쳐
너를 안고 한 호흡으로 타오르는
눈부신 한철을
저들은 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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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通度寺를 다녀왔지요. 사실 통도사는 내려올 때 잠깐 들렀다고 해야겠네요. 통도사 주변 암자인 수도암, 안양암, 서축암, 자장암을 먼저 둘러 보았거든요. 수도암의 스님께서 비도 오는데 쉬었다 가라시며 툇마루를 내주셨고, 안양암 들어가는 짧은 진입로는 별천지 같았습니다. 서축암은 부잣집 아들 같은 절이고, 자장암은 계곡물이 환상적인 수행처더군요.

   그러나 사진 한 장 찍어오지 못 했습니다. 암자에 들어서서는 사진기에 손이 가지 않더라구요. 남들 다 하는 흔한 이야기지만 '그냥 눈에, 마음에 담아가지, 뭐!'하는 마음이 먼저 들었지요. 우산을 받쳐 들고 사진기를 챙겨 절(寺)로 들어선 내 모습이 조금은 우습게 느껴졌습니다. 비가 와서 그런가요? 암자를 도는 내내 비가 내렸습니다. 결국 사진 한 장 찍어오지 못 했습니다.

   통도사 경내에 들어서서야 약간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통도사 사진이라도 몇 장 남길 수 있을까 싶어 사진을 찍었습니다. 비가 오니 사진기를 내 놓고 다닐 수가 없어서 기껏 10장도 못 찍고 그만 두었습니다. 다음에 또 와서 잘 찍으면 되거든요.

   통도사는 큰 절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저는 잘 모릅니다만 통도사가 종단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그렇거니와 통도사의 건물 하나 하나의 종교적, 역사적, 건축학적, 예술적, 문화적 가치도 크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람이 불교적 교리를 바탕으로 배치되어 우리나라 가람 양식의  변화 발전을 종합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풍월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천 오백년의 시간이 한 곳에서 공존하고 있는 곳, 바로 경남 양산의 통도사입니다.

 


천왕문 앞 연등

 

 


경내 입구, 천왕문에서

   공간의 깊이감을 더하기 위해서 건물 배치를 다채롭게 하고 있습니다. 정면에 보이는 건물은 불이문이고, 오른편 앞에서부터 극락보전, 약사전입니다. 왼편은 범종각과 만세루이구요.

 


경내 진입. 불이문에서

   공간의 폭을 좁혀서 대웅전으로 진입하는 공간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하늘에 연등은 달리고... 저기, 저 아득히(?) 연등이 매달린 곳은 지붕인가요, 하늘인가요?

 


적멸보궁의 문살

   통도사 적멸보궁(대웅전의 서편 이름, 이 건물의 동편 이름은 대웅전이고, 남편 이름은 금강계단이지요.) 문살도 어느 절 못지 않게 장인의 정성과 미적 감각이 돋보이는 수작(秀作)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통도사는 아주 큰 절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도, 안 보이는 것으로도. 평소에야 늘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그래도 인적 뜸할 때 차분히 둘러보시면 대가람의 위용을 몸소 느끼실 수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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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

- 양정자

정권이 바뀔 때마다 몇번인가
있어졌다 없어졌다 또 있어진
옆구리 찔러 절 받기
참 낯간지러운 스승의 날
꽃 한송이 달아주고 아이들이 불러주는
스승의 노래
너무나 어색해서
죄인처럼 저절로 고개가 떨궈지네
삭막한 교무실에도 이 날만은 꽃이 넘쳐나
값비싼 카네이션꽃들
꽃 꽂을 꽃병도 컵도 더이상 없어
책상 위에 그대로 말라비틀리던가
플라스틱 쓰레기통을 비우고 물 담아
듬뿍듬뿍 꽂아두기도 하네

아이들이 코묻은 제 용돈을 모아 사오는
어른에게는 별로 소용 닿지도 않는
장난감 인형들, 거울, 지갑, 손수건 같은 눈곱 같은 선물들
살가운 계집애들이 예쁜 편지지에 적어 보낸
선생님 은혜 어쩌구 달콤한 몇마디에
잠깐 눈시울 붉히고 가슴까지 젖어드는 선생님들
고등학교 갓 입학한 애들이
떠들썩 떼지어 찾아오면
짜장면을 시켜주고
식성좋게 먹어대는 아이들
대견한 듯 물끄러미 바라보네
오늘 교내 식당에서 특별 점심으로 먹은
우리 봉급에서 제해야 하는 수입 소고기국
교장선생님이 자비로 내셨다는
500원짜리 바나나 한 개씩의 간식
온통 하루뿐인
한없이 허전하고 쓸쓸한 이 북새통

* 스승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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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샘 2004-05-15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승의 날이라고 마음이 허전하기만 한데 어쩌다 들어와 양정자님의 시를 읽으니 많은 위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 모둠일기에도 붙여줘야겠네요.
- 가끔씩 들어와 님의 글을 몰래 보곤 합니다. -
 

관련 마이페이퍼 링크 주소 : http://www.aladin.co.kr/foryou/mypaper/2737

   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편지 2통. 카드대금 청구서이거나 도서실 담당 교사 앞으로 온 안내서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심드렁하게 쳐다 보았다. 더구나 햐얀색 봉투에 보내는 이 자리에 인쇄글이 잔뜩 씌여 있었다. 그러나 두 통 중에서 한 통은 보내는 이를 확인하고는 마음이 탁, 풀렸다.

   봉투를 뜯고 보니 대학 홍보 팜플렛 한 장과 그 사이에 얇은 편지 한 장이 같이 있었다. 지금 대학 생활 열심히 하고 있다고, 앞으로도 더 치열하게 살고 싶다는 내용하며, 얼마 전에 경주에 갔을 때 예전에 나랑 같이 갔던-겨울 방학 때 여섯 명이랑 경주 답사를 떠난 기억이 나도 생각이 났다- 경주 생각이 많이 났다는 이야기며, 학교 다닐 때는 버릇 없이 군 것 같아 지금은 좀 부끄럽다는 이야기를 적어 보냈다.

   그러나 '사실 이번 해부터는 좋은 대학교 입학해서 떳떳하게 선생님 앞에 나타나고 싶었는데 아직 철이 덜 들었는지 부끄럽기만 하네요'라는 부분과 '조금 더 제가 당당해지는 날, 선생님 가슴에 카네이션 달아드리러 갈께요' 라는 구절에서는 숨이 턱 막혀 왔다.

   OO에게 편지 한 장 써야겠다. 모처럼 펜으로 꾹꾹 눌러 쓴 글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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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素心) 2004-05-22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의 지지난 해 그 반 학생들이 아닌지요...
암튼 숨이 턱 막혀왔다는 샘의 순간 심정이 전해져와 저까지 감전되는 느낌이랄까요...
행복한 순간이 힘든 순간보다 많든 적든간에, 샘, 힘내세요!
늘 샘께 감사를 느끼는 동지(?)였습니다...

느티나무 2004-05-22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계시지요? 한 번 뵙는다, 뵙는다 하면서도 제가 무엇이 그리 바쁜지..헤헤! 제가 해 드리는 게 아무 것도 없는데 감사라니요? 같이 근무했을 때 뵌 선생님이 저는 너무 부러웠는 걸요. 앞으로 더욱 힘내서 살아야겠습니다. 늘 지켜보시고 격려해 주시는 선생님이 계시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