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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노신 지음, 이욱연 옮김 / 창 / 1991년 3월
평점 :
절판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는 열심히 책 읽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으나, 막상 입학한 대학은 할 게 별로 없는 곳이었다. 아마 고등학교 다닐 때 귀동냥으로 들어서 꼭 읽어봐야겠다고 찍어둔 책도 몇 권 있었는데, 예를 들면, 이방인, 제3의 물결, 수호지 등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대학에 입학해서 대학도서관에서 가장 먼저 빌린 책은 루쉰의 '아Q정전'이었다. 이 책도 아마 그 귀동냥으로 들은 책 중에 한 권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루쉰은 대단한 작가라고 평한 것을 들은 기억이 어렴풋하게 난다.그러나 실제로 읽어본 '아Q정전'은 나에게 별다른 감흥이 남는 책이 아니었다. 읽고 나서도 '근데 이 책이 왜 그렇게 유명해?' '이 작가가 왜 그렇게 대단하지?' 하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살면서 루쉰은 대단한 작가라는 평을 몇 번이나 들었다. 그 때마다 나는 '잘 모르겠더라'고 대답하면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 구절!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만은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루쉰의 책은 세 번째이고, 이번에 만난 루쉰의 책은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이다. 이 책도 표지는 오래전부터 봤지만 어쩐 일인지 읽고 싶지는 않았는데, 학교 도서실에 꽂혀 있는 이 책에 우연히 눈길이 가게 되어 뽑아 들었다. 내가 이 책을 읽는 걸 본 내 친구는 '아직도 그런 책도 안 보고 뭘 했노?' 하는 표정과 함께 '철 지난 유행가'에 흠뻑 빠진 사람을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 책은 서술자의 목소리를 뒤집어 쓰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똑바로 전달할 수 있는 산문의 매력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좋다. 자신의 글이 곧 자신의 삶이 일부가 되는 것이다. 루쉰의 산문 한 편 한 편을 읽을 때마다 생각은 정리되지 않고,멍청하게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럴 경우는 보통 지금, 우리의 현실과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페어 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편을 보면, 우리는 우리를 물려다가 물에 빠진 개를 보면 불쌍해서 개의 과거를 잊고 물에서 건져내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개의 속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물에서 나오는 대로 다시 우리를 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물에 빠진 개를 건져내지 않으면 인정이 없다느니, 공정하지 못하다느니 하는 소리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쉰은 물에 빠진 개는 반드시 때려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장을 읽으면서 우리 사회에 아직도 굳건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냉전 수구세력들의 생존 방식이 떠올랐다. 냉전 수구세력들은 지난 역사를 볼 때 몇 차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러 우라나라 주류 세력에서 밀려날 뻔 했으나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는다는 '온정주의'나 '지역감정', '반공이데올로기'를 통해 꿋꿋하게 살아남아 있다. 이것도 우리 사회의 개혁세력이 아직도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고 관용을 베풀면 개의 본성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어쩌면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그런지도 모르겠다.)
루쉰도 말했지만, 관용을 모르는 자에게 관용을 베푼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조금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관용해야 할 대상과 관용이 필요 없는 대상을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리라고 본다.
삶과 글이 수레바퀴의 양날처럼 같은 곳으로 움직이는 사람의 글은 서늘하다. 늦게나마 이 여름, 사람의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루쉰의 글을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갑고 행복했다. 루쉰이 다시 우리의 현실을 살아간다면, 그가 예전에 살았던 그 때만큼 분노와 슬픔을 안고 살아가지 않았을까?하는 결코 유쾌하지 못한 상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