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범님의 동화 읽어보셨습니까? 저는 이렇게 재미있는 동화는 별로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생인 우리 학교 아이들에게도 권합니다. 녀석들 반응이요? 읽기 전에는 "에이, 샘! 내가 무슨 앱니까?" 읽고 나서는 "샘! 진짜 재밌고 좋던데요!"
어진이
박 기 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어진이다. 혼자 힘으로는 문을 열 줄 모르는 어진이가 문 안쪽에 바싹 서 있을 것이 분명하다. 어진이의 순한 눈망울은 닫힌 문의 손잡이만을 뚫어져라 보고 있을 것이다.
식사 시간마다 어진이는 문 닫힌 작은방에 남겨져 있다. 어진이의 문 두드리는 소리가 조금이라도 커지면 어김없이 아빠의 고함이 뒤따른다. 아빠의 고함은 길지도 않다. 딱 한마디다.
“조용히 하지 못해?”
아빠가 고함을 치면 어진이보다도 득철이가 더 많이 놀라는지도 모른다. 득철이는 밥숟가락을 뜨다가도 아빠의 고함에 놀라서 큰 몸짓으로 움찍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겁이 많은 건 득철이와 어진이의 닮은 점 중 한 가지다.
이제 득철이는 아빠가 소리를 지르기 전에 얼른 먼저 가서 어진이에게 신호를 준다. 일부러 젓가락을 미끄러뜨리며 반찬을 흘리고 나서는, 휴지를 가지러 가는 체 살그머니 일어나서 작은방 문 앞으로 가는 것이다. 방문을 톡톡 건드리면서 어진이에게만 들릴 수 있도록 속삭이다.
“어진아, 조금만 기다려. 이제 밥 다 먹었으니까 얌전히 있어.”
어진이는 득철이의 신호를 알아들을 때도 있지만, 때로는 기다리다가 가래 끓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 소리는 형이 제일 싫어하는 소리이다.
아빠, 엄마, 형 그리고 득철이까지 네 식구가 큰방에서 상을 펴고 식사를 마친 다음에야 어진이는 밥을 먹을 수 있다. 그 때까지 어진이는 얇은 미닫이문 하나를 사이에 둔 작은방에 남겨지는 것이다. 나중에야 엄마가 먹을 것을 챙겨 주면 득철이가 어진이에게 밥과 물을 가져다 준다.
한번은 득철이가 자기도 이따가 어진이랑 함께 밥을 먹겠다면서 작은방에서 건너오지 않은 적이 있다. 엄마가 어서 건너오라고 문 너머에서 몇 번이나 재촉했지만, 득철이는 단단한 결심으로 버티고 있었다. 아빠가 호통을 치더라도 건너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엄마의 재촉이 몇 번 이어졌을 뿐 큰방에서는 밥 먹는 소리만 들려 왔다. 짐작했던 아빠의 고함 소리는 들려 오지 않았다. 득철이는 어진이를 안고 있었다. 그 날 저녁 득철이는 그대로 굶어야 했다. 어진이도 굶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빠가 득철이에게 아예 아무것도 먹지 못하도록 벌을 준 것이다. 득철이는 배고픈 건 참을 수 있었지만 어진이가 너무 가여웠다. 둘은 다음날이 되도록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득철이는 어진이에게 미안했다.
어진이는 늘 침을 흘린다. 어진이의 아래턱은 늘 축축하게 젖어있다. 특히 뭘 먹을 때면 입가에 침을 더욱 많이 묻혀 놓는다. 어진이의 입 모양이 이상한 까닭이다. 어진이는 아랫니가 윗니보다 바깥쪽으로 나 있다. 그래서 어진이는 입을 꼭 다물지 못한다. 어진이의 입 주변과 턱 언저리는 자주자주 씻겨 주어야 한다.
어진이에게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버릇이 아니라 취미라고 말하는 게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어진이는 늘 양말을 입에 물고 있다. 다른 장난은 아무 것도 좋아하지 않으면서 양말만은 입에 물고 있으려고 한다. 그렇다고 양말을 질겅질겅 씹거나 입으로 빠는 것도 아니다. 그냥 물고만 있는다. 양말을 보기만 하면 입에 넣은 채 한쪽 구석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다. 어진이가 양말을 물고 있을 때만큼 만족스런 표정을 본 적이 없다. 반대로, 엄마나 형이 양말을 빼앗아 가려 할 때, 어진이는 가장 불안한 얼굴이 된다. 어진이가 입에 넣고 있던 양말 뭉치는 침으로 범벅이 되어 버린다. 물고 있던 자리에는 이빨 자국이 그대로 오목하게 만들어진다.
어진이의 이 버릇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엄마와 형이다. 어진이는 스타킹을 입에 물기도 하는데, 스타킹은 벌써 여러 개나 구멍이 나 버렸다. 엄마는 어진이 때문에 스타킹은 물론이고 양말들이 쉽게 해진다고 싫어한다. 형은 양말을 물고 있는 어진이를 볼 때마다 더럽다며 몸서리를 친다. 득철이는 형이 어진이에게서 양말을 빼앗을 때 뒷머리를 세게 때리는 것도 자주 보았다.
뭐든지 어진이 편이 되는 득철이인데도 어진이의 양말 무는 버릇만은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어진이에게 병이 생길까 봐 걱정이 들어서이다 .그래서 득철이는 모아 둔 용돈으로 입에 넣어도 된다는 인형을 사다 주기도 했다. 그랬지만 어진이는 여전히 양말에만 관심을 두었다. 엄마와 형이 아무리 야단을 쳐도 어진이는 어느새 빨래 대야를 뒤져서 양말을 찾아 입에 문다. 득철이는 엄마 몰래 양말 서랍에 있는 새 양말을 꺼내어 어진이에게 주기도 해보았다. 이왕이면 깨끗한 양말이어야 조금이라도 걱정을 줄일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어진이는 빨랫감이 된 양말만을 고집했다. 득철이는 궁금해졌다. 어쩌면 신고 난 양말에서 나는 고린내 속에는 어떤 구수한 냄새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았다. 득철이는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서 코에 대어 보았지만 숨이 콱 막힐 뿐이었다. 득철이는 어진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답답했다. 그저 걱정스러운 마음에 안쓰러울 뿐이었다.
어진이한테 그런 버릇이 생긴 다음부터 득철이도 조심스럽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모든 면에서 조심스러워진 것은 아니다. 양말이랑 관계된 일만 그렇다. 득철이네 모둠이 맡은 특별 구역 청소를 할 때에도, 득철이는 이제 양동이로 물을 퍼부으며 장난을 치지 않는다. 친구들이랑 선생님용 화장실로 청소를 하러 갈 때에는 아예 양말을 미리 벗기도 한다. 옆반과 축구 시합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벗은 양말을 둘둘 말아서 실내화 주머니에 넣어 두고는 맨발에 운동화만 신은 채 운동장을 뛰어다닌다. 물에 젖어서 땟물이 질펀하거나 흙먼지가 시커멓게 찌든 양말을 어진이가 입에 물게 될까 봐서이다.
어진이가 아팠다. 사실은 오래 전부터 아파 왔다. 하지만 누구도 어진이가 많이 아프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진이의 검은 눈동자에는 마치 개구리의 눈에 씌워진 투명한 막 같은 것이 조금씩 덮여 있곤 했다. 눈곱 같기도 하고, 투명한 고름 같기도 한 얇은 막은 끈적끈적했다. 엄마는 그냥 눈곱 같은 것이 생겼나 보다 했다. 득철이도 그런가 했다. 엄마는 화장할 때만 아껴서 뽑아 쓰는 보드라운 휴지로 어진이의 눈을 자주자주 닦아 주었다. 다만 득철이는 어진이의 눈을 보면서 엄마와는 다른 상상을 해보았을 뿐이다. 그건 아마 어진이의 눈동자에 계속 맺혀 있는 눈물 찌꺼기인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어느 날 득철이는 발견했다. 어진이의 검은 눈동자 가운데가 점점 오목해져 가는 것이었다. 탁구공을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렀을 때처럼 어진이의 눈동자는 좁쌀만한 크기로 움푹 패어 들어갔다.
“어진아―”
어진이는 한쪽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했다. 눈동자 위를 가리던 얇은 막은 누런 색깔이 되었다. 괜찮던 흰자 위에도 분홍색 실핏줄이 어지럽게 엉켜 있었다. 빨간 눈물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하루가 지나가 어진이는 한쪽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애꾸처럼 찡그리고만 있었다.
득철이는 어진이를 안고 병원에 데려갔다. 병원까지는 두 정거장도 더 걸어 나가야 한다. 어진이가 다니는 병원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어진이가 여러 가지 예방 주사를 맞아야 할 때마다 데리고 다녀 봐서 자주 가 본 병원이다.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수술을 해야 어진이의 눈을 고칠 수 있다고 말이다. 레이저를 쏘아서 치료하는 수술이라고 한다 수술비는 무척 비쌌다. 득철이도 엄마도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값이다. 의사 할아버지는 어진이에게 주사 한 대를 놓아 주고 나서는 득철이에게 작은 물약 한 통을 주었다. 아침 저녁으로 이 물약을 어진이의 아픈 눈에 한 방울씩 떨어뜨려 주어야 한다. 그러면 이미 상한 어진이의 눈동자를 원래처럼 되돌릴 수는 없지만 더 크게 패어 들어가지 않게는 할 수 있다. 엄마와 득철이는 아침 저녁으로 어진이의 눈에 약을 넣어 준다. 물약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득철이는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잘 안 보이지, 어진아? 많이 아파? 이제 더 아프지 않을 거야. 내가 까먹지 않고 약 넣어 줄게……’
월요일 오후였다. 준비물을 사러 문방구점에 잠시 다녀왔는데, 그사이에 형이 와 있었다. 책가방을 풀어 놓지도 않은 형은 화가 많이 나 있다. 잠깐 사이에 어진이가 작은 방에서 똥을 눈 것이다. 혹시라도 문방구점에 간 사이에 어진이가 문 밖으로 나갔다가 길을 잃을까 봐 문을 꼭 닫았는데, 그 동안 어진이는 배가 아팠던 모양이다.
“야, 쟤는 우리 방에 못 들어와 있게 하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아이 더러워, 정말……”
어진이가 없어졌다. 형이 화가 나서 문을 활짝 열고 씩씩거리는 사이에 어진이는 없어졌다. 잔뜩 겁에 질려서 바깥으로 나갔나 보다.
밤새도록 어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도, 형도, 득철이도 동네를 몇 바퀴나 찾아 다녔는지 모른다. 사람들이 가지 않는 골목길도 찾아 보았고, 세워져 있는 자동차 바퀴 밑도 들여다보았다. 아빠는 요란 떨지 말라고 큰 소리를 냈다. 득철이는 울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었는데도 식구들은 어젯밤 표정과 다르지 않았다. 아빠는 누구네 초상 났냐면서 식구들에게 짜증을 냈다. 아빠는 몇 술 만에 수저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나머지 식구들도 밥을 덜거나 남기거나 하면서 겨우 식사를 마쳤다. 득철이는 등교길에도, 공부 시간에도 종일 어진이 생각뿐이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다시 집 안을 살펴보고 나서는 해질 때까지 동네를 헤매고 다녔다. 큰길에도 나가보았고, 고개 너머 시장에도 가 보았다.
이틀이 지나갔다. 비가 내렸다. 엄마는 등을 돌리고 앉아서 어진이의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꺼진 텔레비전에는 엄마의 얼굴이 비추어졌다. 엄마는 눈물을 닦았다. 득철이도 울었다.
다음날이었다. 득철이는 학교에서 일찍 돌아왔는데도 어진이를 찾으러 나가지 않았다. 득철이는 포스터를 만들고 있다. 지난 달력들을 뜯어서 하얀 바닥 위에다 어진이의 사진을 붙였다. 그 옆에는 크레파스로 큼직한 글씨들을 정성껏 써 넣었다.
우리 어진이를 찾아주세요!
전화번호 : 57~6531
옥동초등학교 4학년 1반 마득철 |
달력이 모자라서 색도화지를 몇 장 더 사 왔다. 모두 열다섯 장이나 만들어 냈다. 벽에 대어 보니까 사진과 글씨만 있는 포스터는 조금 어색했다. 득철이는 색종이를 오려다가 포스터의 빈 자리를 꾸며 갔다. 꽃 모양도 넣었고, 해와 달 모양도 넣었다. 친구들이 생일에 선물로 주었던 스티커들도 붙여 가며 멋을 냈다. 득철이가 아끼던 것이다. 그러나 포스터를 더 멋지게 꾸밀수록 어진이가 더 잘 찾아질 거라는 생각에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엄마가 집에 왔다. 득철이는 엄마 앞에서 자기가 만든 포스터를 들어 보이며 뿌듯해했다.
“잘 만들었지?”
엄마는 씻고 나서 득철이 가까이로 와 앉았다. 엄마는 포스터를 보면서 이 말도 꼭 넣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진이는 매일 눈에 약을 넣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딱딱한 것은 잘 씹지 못해요. 그래도 주면 그냥 삼켜 버리니까 그런 음식을 주면 안 되요’
그건 득철이도 걱정한 것이었다. 며칠 동안 어진이의 한쪽 눈은 다시 심하게 아파졌는지도 모른다. 잘 못 먹는 바람에 계속 탈이 났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득철이는 학교 가는 길목과 큰길가, 시장 입구 곳곳에 포스터를 붙여 놓았다.
어진이를 보았다는 연락은 오지 않았다. 득철이는 힘이 빠졌다. 어쩌다 한 번씩 걸려 오는 장난 전화 때문에 아빠는 화를 더 냈다.
어진이가 없어진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득철이네 집에서는 빨래감이 어질러지지도 않았고, 밥 먹는 시간에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득철아, 오늘 저녁에 엄마하고 은행 옆에 있는 이불 가게에 가 봐라. 어진이가 아마 거기에 있을 게다.”
득철이는 엄마가 어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아침에 아빠가 해준 말이 하루 종일 귓가에 맴돌았다. 어진이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진아―”
득철이는 어진이를 꼭 끌어안았다. 엄마가 이불 가게 아줌마들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절을 했다. 가게를 나오려는데, 난데없는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이불 가게 아줌마네 딸이다. 보람이라고 했다. 득철이보다는 조금 어려 보였다. 보람이는 어진이를 데려가지 말라면서 계속 우는 것이다. 득철이는 보람이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불안해졌다. 득철이도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더 크게 울어야만 될 것 같았다. 울음소리에 밀리면 어진이를 데려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득철이네 집에는 오랜만에 활짝 핀 웃음꽃이 가득했다. 형은 어진이의 얼굴에 대고 이제부터는 아주 많이 예뻐해 주겠다고 얘기했다. 아빠는 뉴스를 보는 척 고개를 돌렸지만 웃음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며칠째 아빠는 식구들 모르게 어진이를 찾으러 다녔다고 했다. 누가 포스터를 보고 뒤늦게 전화를 했는데, 큰길 쪽에서 어진이를 본 것 같다는 연락이었다. 그 날부터 아빠는 큰길가의 상가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물어 보았다는 것이다.
어진이의 눈은 깨끗했다. 이불 가게 아줌마와 보람이가 어진이를 잘 보살펴 주었기 때문이다. 이불 가게 아줌마가 어진이를 발견한 것은 없어진 지 이틀째 되던 날 밤이었다. 비가 내리던 밤이다. 어진이는 큰길가에 혼자 서서 떨며 신음 소리도 내었다. 아줌마는 어진이를 데려가서 따뜻한 물로 목욕을 시키며 자상하게 보살펴 주었다. 아줌마보다 보람이가 더욱 정성이었다. 보람이는 어진이의 눈동자가 움푹 패어 들어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밥을 잘 먹지 못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아줌마는 어진이를 입원까지 시켜서 치료를 받게 해주었다. 보람이는 어진이를 간호하며 정이 깊게 들었다. 마침 병원에서 어진이를 퇴원시켜 오던 날 아빠의 눈에 띈 것이었다.
득철이는 너무나도 기분이 좋았다. 안아 주고, 볼을 비벼 주고, 코를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무언가 내내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보람이다. 보람이의 우는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득철이는 안다. 정든 마음으로 헤어지는 것이 얼마나 슬픈 것인지 말이다. 생각나고, 보고 싶고, 걱정되고, 그리고 마음이 아파지는 것이다.
“엄마, 우리 어진이가 새끼 낳으면 보람이한테 한 마리 갖다 주면 안 돼? 그 때까지는 내가 어진이 데리고 보람이네 가서 함께 놀아 줄게.”
“그래, 그 집에서 이렇게 어진이를 잘 돌봐 주었는데 아무런 보답도 못하고…… 모쪼록 이번에는 얘가 새끼를 많이 내야 할 텐데 걱정이구나. 요새는 아애므프(아이엠에프) 탓에 애견 센터에서 애기 값도 잘 쳐 주질 않는다는데. 니 아빠 약값은 자꾸만 오르는데 말이야. 어쨌든 우리 어진이가 보배지, 보배야.”
득철이는 엄마가 어진이를 처음 데려오던 3년 전이 생각났다. 엄마가 파출부 다니던 집에서는 애완견을 길렀다. 외국에서 온 비싼 강아지다. 한번은 새끼를 낳았는데, 그중 한 마리가 유독 이상했다. 털도 고르지 않았고 입 모양도 이상했다. 누구도 그 강아지를 데려가려 하지 않았다. 애견 센터에서마저도 달갑지 않아 한다기에 엄마가 얻어 온 것이다. 그 녀석이 어진이다. 형은 무슨 강아지가 이렇게 못생겼느냐면서 삐죽대었지만, 득철이는 처음부터 어진이가 마음에 들었다. 어진이는 착하고 순했다. 하지만 어진이는 비싼 사료도 먹어야 했고, 외제 샴푸로 목욕도 해야 했다. 그래서 형은 저까짓 게 우리보다 더 호강한다면서 싫어하기도 했다. 어진이는 데려온 다음해에 아주 예쁜 새끼들을 다섯 마리나 낳았다. 어진이처럼 털이 밉지도 않았고, 입이 어긋나지도 않았다. 애견 센터에서는 아주 고급 강아지라면서 많은 돈을 주고 데려갔다. 그 돈은 아빠의 일 년치 약값을 대고도 남을 정도였다.
어진이가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고 득철이를 본다. 득철이는 어진이를 가만히 안고서, 눈동자로 물약 한 방울을 떨어뜨려 주었다.
‘어진아, 아빠 병 다 나으면 그 다음에는 꼭 너 눈 수술시켜 달라고 할게, 알았지? 그리고 이젠 너 혼자 바깥에 나가지 마. 그 대신 내가 여기저기 많이 구경시켜 줄게.’
어진이는 득철이의 품 안에서 꼬리를 가볍게 흔들어 대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