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땅-제주!

   올해도 기어이 떠나왔습니다. 작년까지는 김의주선생님이 훌륭한 동행자가 되어 주었지만, 중요한 연극 공연을 앞둔 탓에 저 혼자만 달랑 떠나왔습니다. 아침 9시 제주도에 도착해서 저녁 7시에 숙소를 구했습니다. 여기는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입니다.

   저는 떠나기 전날에 꼭 잠을 설치는 징크스가 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 새벽에 깜빡 졸았습니다. 다행이 김의주선생님이 배웅해 주신다고 해서 아주 편하게 김해공항에 갔습니다. 의주샘이 약간 아쉬워하면서도 평소대로 담담하게 잘 다녀오라고 했답니다. 자기 일도 아닌데 새벽 같이 일어나 저를 챙기는 모습이 고마웠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갚아야겠죠?

   마침 제가 배정받은 비행기 좌석이 비상구 옆이라 승무원과 마주 앉게 되어 좀 어색했습니다. 어색함을 푸느라 평소에 비행기 승무원에 대해 궁금했던 것을 '인터뷰'식으로 꼼꼼하게 물었는데 대답을 무척 잘 해 줬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가니까 제주도에 금방 닿았습니다.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제주해안과 군데군데 구름에 가린 한라산을 사진기로 열심히 담았습니다.

   오늘은 이 두 가지 일로 출발이 무척 순조로운 느낌입니다. 역시 사람에게 받은 배려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가 봅니다. 기분이 무척 좋습니다. 이번 여행 끝까지 아무런 걱정없이 제주도와 잘 엉키다가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제주공항을 나서자마자 제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약간 멍해졌습니다. 날씨는 생각보다 훨씬 덮고, 도로에 차들은 너무 쌩쌩 달리고. 사람은 안 보이고... 겨우 근처 상점에서 나눠주는 부실한 지도 한 장을 얻어 방향만 잡아서 무작정 걸었습니다.

   갑자기 혼자 떠나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머리 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내가 왜 걷고 있지?', '내년에 같이 올 걸!', '날씨는 또 왜 이렇게 더울까?', '오늘은 어디서 잘까?', '다 돌아보는 데 며칠이나 걸릴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생각이 많아지다 보니 눈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나 봅니다. 길가에 핀 잡풀의 날카로운 가시에 손등 부분을 긁히고 말았습니다. 한눈 팔고 있거나, 제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꼭 이렇습니다. 긁힌 부분이 무척 쓰리고 따가운데 누구에게 하소연할 사람도 없고, 하소연한다고 제 아픔이 덜어지는 것도 아니고...  제가 지금 살고 있는 모습도 이런 일과 꼭 같지 싶습니다. 늘 정신을 딴 곳에다 쏟고, 그러다 상처 받고, 또 그 상처를 삭히느라 혼자서 끙끙대고..

   어느덧 제 발걸음은 제주도의 북서쪽 일주도로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제가 걷는 왼쪽은 아직도 구름에 가린 한라산이 계속 보이고, 오른쪽은 짙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습니다. 도로 옆에는 때 이르게 핀 코스모스 천지고, 최근에 예쁘장하게 지은 펜션도 바닷가 전망 좋은 곳에 듬성듬성 보입니다.

   3시간을 꼬박 걷고서야 식당을 찾았습니다. 아주머니와 이러저런 이야기를 해 가며 점심을 먹고 나서는 근처 초등학교에 자리를 잡고 낮잠을 잤답니다. 어제 밤에 잠을 못 잔 탓인지, 천성이 게으른 탓인지 모르겠으나 조금만 더 자고 싶은 그 유혹을 떨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오후부터는 머리 속에서 잡념이 없어지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직 오늘 가야할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 뿐!

    열심히 걸었습니다. 이제 왼쪽으로 까마득하게 보이던 한라산 정상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고, 한라산 너른 품에 기대서 살고 있는 이 땅 사람들의 삶터이자 일터인 밭들이  야트막한 돌담에 둘러싸여 드문드문 드러납니다. 제가 오늘 제주에서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이 바로 이 돌담이었습니다. 제주도에 많은 것 중의 하나라는 말은 익히 들었지만 이렇게 돌을 쌓아두고 사는 줄은 몰랐습니다. 집 둘레도 그렇고, 밭 주변에도 어김없이 주변에 흔하디 흔한 돌을 그냥 쌓아다가 돌담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돌담 너머, 돌담, 돌담......

   처음엔 '야~! 신기하네?'라고만 생각하다가 점차 '어? 저렇게 허술한데 어떻게 무너지지 않지?'하는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저렇게도 생각해 보다가, '아! 저 엉성한 돌틈 사이 구멍으로 바람을 통과시켜서 그렇구나!'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제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옛말에도 강하면 부러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시멘트로 꽉 막아둔 담장은 바람이 빠져나갈 틈이 없어 무너져도, 강한 바람이 불어올 때 듬성듬성 쌓아 놓은 돌틈으로 바람이 다 빠져나가니 아무리 센 바람이 불어도 돌담은 끄떡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세상사 거친 바람에 그냥 맥없이 무너져 내리는 시멘트 담장이 되지 않으려면, 허허롭게 비워두고 서 있는 저 돌담처럼 서 있어야겠다는 다짐도 해 봅니다. 정작 '담'의 역할을 제대로 해 내려면 현명하게 판단해서 행동해야 함을, 오늘 저 제주 돌담을 보고 느꼈습니다.

   오늘은 북제주군을 걸어왔습니다. 이곳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입니다. 이 곳 사람들은 옛날에는 콩, 보리를 주로 심었지만, 요즘은 주로 참깨, 마늘, 감귤 같은 특용 작물을 재배하며 살고 있습니다. 토질과 기후가 감귤의 당도를 그렇게 높이지 못한다고 하네요. 그래서 이 곳 사람들이 더 부지런한가 봅니다. 상대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도 없어 조용하고 한적한 농촌 마을들이 이어진 길을 걸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이런 모습이 일상이지만 제주도도 이렇다는 게 약간 이상합니다. 제주도 하면 온통 '관광'하는 사람들 뿐인 줄 알거든요. 덕분에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친절하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제주 사투리를 하는 염색을 예쁘게 한 청년들의 순박함이 더 돋보이는 곳입니다.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늘 행복하셔요.

  2003년 8월 21일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에서 느티나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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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3-12-02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3년 여름에는 제주도를 다녀왔습니다. 이번에는 혼자 떠난 여행이었지요. 내년에도 여행을 해 볼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살면서 아주 소중한 경험을 얻게 된 기간이었습니다. 아껴주신 분 모두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네요. 오랫동안 잊지 않고 갚아 나가겠습니다.
 

만남

   어젠 쪽방에서 늦게야 잠들었지만, 편하게 잘 잤습니다. 우리가 잠든 방은 어제 말씀드렸 듯이 씻을 곳이 없는 방이라 아침 세수를 복도 끝에 있는 싱크대에서 조심조심 합니다.(다른 사람이 깰까 봐서요.) 기분이 묘하더군요. 자꾸 주변을 살피게 되고-돈이 없다는 건 이렇게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인가?하는 생각도 잠깐 해 봅니다.-, 여행을 떠나 와 처음으로 제대로 씻지 못한 날이지 싶습니다. 오늘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숙소를 나오고 나서는 마음이 가볍습니다. 오늘 걸어야 할 거리가 평소보다 약간 짧고, 날씨도 해가 슬금슬금 고개를 내밀었다, 숨었다 하는 터라 걷기에 적당할 것 같아서 입니다. 숙소 근처에서 빵과 우유로 아침을 먹으며, 주문진 읍내를 돌아서 나옵니다. 일요일 아침, 밤새 들뜬 모습으로 북적대던 관광지가 푹 잠이 들어 있습니다.

   도로에 올라서니 어제처럼 차가 씽씽 달립니다. 차들이 무서워 갓길에 바짝 붙어서 조심스럽게 걸어갑니다. 상황이 어제와 꼭 같습니다. 저에게는 이제 차가 정말 공포스러운 '흉기'로 느껴집니다. 저도 돌아가면 운전하고 다니겠지만, 이전과는 느낌이 좀 달라져 있을 것 같습니다.

   도로 오른쪽으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바다입니다. 어제처럼 날이 흐리지 않아서 코발트빛 바다 색깔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사람의 마음을 서늘하게 하는 그 빛깔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건 오직 아득한 저 수평선과 그 선에서 밀려올수록 점점 선명해 지는 바닷물, 그리고 하얀색 파도...사진기로 찍어서 보내드려야 하는데, 걸어가는 동안 저는 아무 것도 하기가 싫습니다.

   도로 왼쪽은 야트막한 야산들이고, 저 아득히 먼 곳으로는 구름이 가득 퍼져 있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누가 보지 않아도 제 멋대로 만들어 내는 구름 모양을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초록색 들판이 이어지기도 하고, 한가로이 '왜가리'같은 새들이 논에서 쉽니다. (오직 차만 너무 바쁘게 씩씩거리네요!)

   걸어가다 보니 도로 공기가 이상합니다. 바다에서는 서늘하고 차가운 공기가 언덕쪽으로 퍼지고, 언덕 쪽에서는 후끈한 공기가 밀려와 딱 도로중간에서 만납니다. 몸의 반쪽은 차갑고, 반대쪽은 후끈거립니다. 걸어가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점심은 현남면에서 먹습니다. 값싸게 먹을 수 있고, 만만한 게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라서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아직 선뜻 고기를 먹고 싶다는 생각은 안 납니다-결국 된장찌개로 점심을 먹습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면사무소로 옮겨 짐을 풀고 앉습니다.

   일직하시는 분-두 아이의 어머니-이 두 아이를 데리고 면사무소를 지키고 있습니다. 의주샘은 바로 옆 건물인 '주민정보화교육장'으로 가고, 전 움직이는 게 성가셔서 그 두 아이랑 놉니다. 큰 녀석은 유치원에 다니는 여자아인데 너무 귀엽습니다. 저랑 같이 그림도 그리고, 숫자 놀이도 하고, 곰인형을 가지고 노는데 정말 재미있네요. 제 수준이 딱 맞는 거 있죠? 아마 며칠 동안은 오늘 놀았던 그 생각을 하면 흐뭇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재미있게 노는 동안 잠시 '강원일보'를 슬쩍 보니, 도교육청에서 '특기/적성교육과 자율학습'을 학교 자율로 시행하도록 했다는 기사가 크게 나오더군요. 얼마 전까지는 일정한 시간을 두어 제한했는데, 이번에 그 시간제한을 없앴답니다. 그게 학교 자율이라는군요. 정말 좀 제대로 잘 할 수는 없는지 답답합니다. 휴~! '해인(6살)'이와 '해찬(4살)'-같이 논 그 녀석들-이가 중학교에 갈 때쯤이면 좀 나아질까요?

   오후엔 휴게소에서 처음으로 도보여행자를 만나기도 합니다. 춘천에서 3일 동안 걸어서 양양까지 왔다는 대학생 3명이 너무 멋져 보입니다. 잠도 교회에서 얻어 자고, 돈도 거의 안 가지고 나왔답니다. 시커멓게 탄 온 몸을 보며,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어 아이스크림을 사서 내밉니다. 연신 고맙다며 수줍어하네요.

   다시 길을 나서 한참을 걷습니다. 처음엔 1km가 짧은 게 아주 크게 느껴졌는데, 25km나 30km가 별다른 차이가 없이 느껴집니다. 저녁쯤엔 다리 근육이 항상 뭉쳐집니다. 오늘은 중간에 적당하게 쉴만한 곳이 없어 계속 걷습니다. 한참을 걸어도 적당한 곳이 나오지 않아서, 도로 옆 인도에 짐을 풀고 잠깐 눕는다는 것이 아마 잠이 들었나 봅니다. 제법 시간이 많이 갔는지, 일어나니 다리 근육이 많이 풀려 있습니다. 이제 다시 힘차게 걸을 수 있겠습니다.

   7시 20분. 평소보다 약간 빠르게 양양에서 숙소를 구합니다. 값도 싸고, 괜찮은 곳입니다. 어제 못한 빨래를 다 하고, 맛있는 저녁을 먹습니다.

   지나온 날, 밤마다 지도를 펴놓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지도보다 왜 걷느냐에 대한 질문을 제 스스로에게 해야할 것 같습니다. 싱겁겠지만 '즐기기 위해서'라는 답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누구나 즐기는 자기만의 방법이 있겠지요?

2002년 8월 18일, 강원도 양양에서

느티나무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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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12월 초는 약간 바쁠 것 같다. 여러가지 일이 겹쳐서 부지런해야 할 듯! 정신 바짝 차리고, 바빠도 여유있게 즐겁게 살아 보자.

   마르코스의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를 읽다가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것 같아 접었다. 그 다음으로 잡은 책이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 음...편지의 내용으로만 본다면 서준식의 옥중서한이 훨씬 더 나았던 것 같다. 서준식의 옥중서한은 치열한 삶의 고민과 엄혹한 감옥의 현실, 가족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더 깊이 배어나는 편지글이다. 그람시의 글은 좀 밋밋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은 전지구적 변환을 읽고 있다. 이제 앞부분을 시작하지만 재미있는 책인 것 같다. 번역도 깔끔하고... 근데 세계화가 아니라 지구화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것이 좀 흥미롭다. 지구화에 대한 논의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라니까 열심히 읽어둬야지!

   11월 30일 오늘, 최옥선생님의 결혼식을 다녀왔다. 그냥 참석한 것이 아니라 어제 밤늦게까지 연습한 축가(신부에게)까지 부르고 왔다. 예식장에서 반가운 얼굴들 보고, 함께 점심 먹고 돌아왔더니 무척 피곤한데도 짬짬이 누워서 잤더니 지금 잠은 안 온다. 그래도 내일을 위해서 자야겠다. 너무 늦었다. 내일은 야자감독도 하니까.

   그리고 최현옥선생님의 결혼식을 기억하기 위해 한 마디 해 둔다.

   아! 최현옥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사실은 제가 축가 중간에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을 신부로 맞이한 신랑님께 먼저 축하를 드립니다. 그리고, 최현옥선생님! 지금까지 잘 살아 오신 것처럼 앞으로도 두 분이서 함께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가시리라고 믿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라고 말하려고 준비해 갔었는데, 제가 너무 긴장해서 말씀 못 드렸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축하드리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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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아드 2003-12-01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축가// 신부에게 ^ㅁ^// 멋있군요^^

느티나무 2003-12-01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습은 열심히 했는데, 정작 예식장에선 잘 못 불러서 미안했어요. 연습도 많이 안 했지만, 그래도 연습한 만큼도 못 부른 것 같아서 속상했지요, 뭐! 시험도 그런가요? 준비한 만큼 결과가 나와주지 않는 거? ㅋ

2015-11-10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풍경 1

   학교는 학급자치시간에 아이들을 강당에 모아 놓고 어떤 정신교육을 시키려는지, 또 두발검사, 복장검사, 손톱검사, 이름표검사, 양말검사, 뱃지검사를 하는가 보다. 지각하지 마라, 수업시간에 자지 마라, 비속어 쓰지 마라, 떠들지 마라는 소리를 학급별로 줄을 세워 놓고 했는가 보다. (올라가 보지는 않았고, 계획표를 보니 그랬을 것 같다.) 나도 물론 아이들에게 '하지 마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담임이긴 하지만, 모두가 학급자치 시간을 빼서 '정신교육'이라는 이름을 걸고 할 수 있는 일인지. 교육적으로 어떤 효과가 있을 것인지. 효과만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 의문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지 모를 때, 스스로가 이유를 알지 못할 때 선생으로서 괴롭다. 텅 빈 교무실에서 스스로에게 묻는다-너는 왜 강당으로 가지 않았냐고?

풍경 2

   학급에 자장면이 오기로 한 시간이 13시 20분. 예상보다 한 5분 정도 늦게 왔으나 아이들의 즐거움은 엄청났다. 자장면 40그릇과 서비스로 나온 요구르트와 귤을 앞에 두니 모두 신나는 얼굴들이다. 며칠 전에 학급 모두가 교과서 옮기기를 한 댓가로 연말에 지급될 교과서 분배 경비를 사비로 미리 써 자장면을 주문했다. 거짓말처럼 자장면을 비우는 녀석들이 무지 귀엽다. 단무지 하나를 두고 다투는 녀석들이니 덩치만 컸지 아직 어린애들이다.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자장면을 보고 있으니, 또 자장을 잔뜩 묻힌 입으로 나를 보며 씩 웃는 그 녀석들이 참 예쁘다. 애들은 내가 정색하고 질문을 하면 무섭다고 한다. 너희들이 내 마음을 어찌 아랴? 난 너희들에게 무서운 사람이고 싶지 않다. 너희들이 학교에서 행복했으면 하는 아주 단순한 희망 밖에 없는 사람이다.

풍경 3

   2교시가 끝나고 잠깐 내려간 교무실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김기수-육군 상병이다. 휴가를 나온 모양이다. 늘 휴가 때면 잊지 않고 나를 찾는 고마운 녀석인데, 오늘은 내가 수업이 많아서 쉬는 시간에 잠깐 얼굴만 보고 보내야했다. 돈도 없는 군인 녀석이 늘 음료수를 사들고 찾아온다. 다행스럽게도 아픈 곳 없이 건강한 얼굴을 보니 무척 반갑다. 이제 얼마남지 않은 군생활에 대해, 이제는 후임병들이 네 이름을 소원수리함에 써 넣는 것만 조심하면 된다고 후임병들에게 잘 하라고 농담처럼 이야기해 주었다. 후딱 왔다가 선걸음에 발길을 되돌리는 녀석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짠하다. 다음에 보면 꼭 더운 밥 한끼라도 먹여야겠다.

풍경 4

  오늘은 수능칠 때 우연히 만난 언아를 보기로 한 날이다. 약속은 저녁 6시. 동네에 도착하니 OO, 수진, 혜선이가 나왔다. 모두가 졸업하고 처음보는 얼굴들이다. 2년 동안 모두 씩씩하게 산 얼굴들이다. 모두가 예뻐진 것 같다. 

   OO는 이번이 삼수째. 올해는 성적이 기대만큼 안 나왔는데 교대든 사범대든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곳에는 어디든 가겠다는 생각이었다. 수진이는 전문대를 졸업하게 되는데 취직이 쉽지 않아 걱정이었다. 혜선이는 인테리어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는데, 학교다닐 때부터 얌전하고 성실한 녀석이었던지라 오늘도 새로 산 책을 한 보따리 들었다. 조용한 곳에서 함께 저녁을 먹으며 고등학교 때 이야기, 요즘 사는 이야기, 주변의 친구 이야기,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느라 늦게야 일어서게 되었다.

   중간에 군대가 있는 영선이한테서 전화가 왔었다. 어색한 군인 말투에 약간 당황했지만, 며칠 후면 휴가 나오는데 그 때 꼭 찾아오겠다고 해서 '아, 이놈이 내가 가르친 영선이가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너희들의 이야기 들어 주고, 술 한 잔 받아 주고, 힘들 때 왔다가 잠시 쉬어갈 여유를 마련해 주는 것이 내 몫이 아니더냐.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세상에 나왔지만 당당하게 제 몫을 해내고 있는 서부산공고 졸업생들! 힘내고 언제나 너희들에게 좋은 일들이 가득하기를 빈다. 건강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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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30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잡초의 힘!

   안동시내 한 복판의 여관에서 잠이 깨자 창 밖부터 봅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은-아니, 아직은- 비가 오지 않습니다. 서둘러 짐을 꾸려 아직 잠이 덜 깬 안동시내를 걸어나옵니다. 여전히 아침은 빵과 우유입니다.

   오늘 걷기로 한 길은 안동에서 북쪽으로 난 35번 국도를 따라 도산서원까지입니다. 오늘은 아마도 거대한 안동호가 우리와 함께 걸을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안동호는 흙탕물을 뒤집어 쓴 채로 숨을 고르고 있겠지요. 징그러울 수도 있고, 안쓰러울 수도 있을 겁니다. 그 게걸스러움에 돌을 던질까요? 그 넉넉함에 푸근히 잠겨볼까요?

   안동시내를 벗어나 서원으로 가는 길 입구는 참 예쁘게 나 있습니다. 안동 북쪽은 전형적인 시골길입니다. 예쁜 길 주변으로는 엄청난 비에도 꿋꿋하게 자라고 있는 벼와 포도, 호박, 고추, 수박들이 보입니다. 다들 이제는 비가 그만 와도 괜찮다는 표정들입니다.

   단조롭고, 긴장감이 별로 들지 않는 길을 걸으니 무엇이든 자세하게 보려는 버릇이 생기는 가 봅니다. 주의할 게 적은 길에서는 마음도 풀어져서 한눈도 팔게 되고, 콧노래도 부르고, 도로 주변을 왔다갔다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문득 오늘은 아스팔트 가장자리에 시선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눈은 아스팔트 주변으로 고정되고, 절로 감탄사가 나옵니다.  이야~! 정말 대단하다!  그곳에는 잡초들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습니다. 조금의 틈도 용납하지 않는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와서 말입니다. 땅을 숨막히게 덮고 있는 아스팔트 위로 올라와서는 참았던 숨을 내쉬듯 싱싱하게 잡초들이 자랍니다.

   아스팔트를 뚫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잡초 뿐인가 봅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온 다른 것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아스팔트를 뚫은 잡초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요? 정말 그 힘이 대단함과 신기함을 넘어 두려운 생각까지도 들게 합니다. 사실, 잡초는 제가 보는 풍경의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보는 식물의 대부분이 이름을 얻지 못한 잡초들입니다. 우리는 포도, 사과, 고추, 호박, 수박을 보고는 감탄하지만, 흔하디 흔한 잡초에게 눈길을 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잡초를 보며 '우리 모두'의 삶이 저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냥 이름을 얻지 못한 채 열심히 제 몫을 하며 사는 것! 누군가가 알아주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고 해야할 일을 하는 것! 자존감(自尊感)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서는 것! 잘난 사람들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세상의 허한 구석을 채워야 할 운명 같은 것!(도무지 잡초를 빼고 생각하면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

   한적한 시골길을 걷는 중간 중간에 일하시는 분들께 이것저것 여쭙습니다. 일하시는 분들께는 죄송한 마음도 들지만 이 분들의 말씀마다 수줍은 듯이 ‘했니껴’로 끝나는 이 지역 말투가 너무도 순박하고, 정겹게 느껴집니다. 그 말씀을 듣고 있으면 가야할 길을 잊은 것처럼 마냥 퍼질러 앉고 싶은 마음입니다.

   오늘 점심은 아주 특별합니다. 옛날에 살던 마을이 안동호가 만들어지면서 수몰되어 집단으로 이사온 마을에 들렀습니다. 우연히 들른 식당이  나그네식당 이랍니다. 이 식당에 들고 보니 하나하나가 다 신기합니다. 허름한 간판하며, 가격표하며, 해 주시는 음식하며...이렇게도 장사를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지역에서는 메밀묵을 '메물묵'이라고 하신 답니다. 그리고 노란색 조가 많이 섞인 밥을 내 주시면서 묵밥을 만들어 주십니다. 덤으로 할머니의 구수한 말씀이 곁들여져 아주 오래 기억에 남을 점심을 먹습니다.

   도산서원은 그냥 지나칩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요. 한참을 더 북쪽에 있는 토계면에 숙소를 정하기로 하고, 면사무소에 들러 쉬면서 잠 잘 곳을 여쭈니 이 마을엔 여관이 없다고 합니다. 좀 전에 일하시는 아주머니께 여쭈었을 땐 분명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말입니다. 다시 안동까지 돌아가서 자야할 것 같아서 난감합니다. 그래서 서둘러서 마을로 내려가다 보니, 바로 앞에 숙소가 보입니다. 황당해서 헛웃음만 나옵니다.

   바로 숙소에서 짐을 풀고, 다시 길을 걷습니다. 왜냐면 내일 걸어야 할 거리가 만만찮은 까닭에 오늘 조금이라도 더 걸어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6km를 더 걸어서 갔다가 옵니다.

   이 곳은 떠나와서 처음으로 pc방이 없는 조용한 시골 마을입니다. 오는 길 내내 그 흔한 '여관' 하나 없는 그런 곳입니다. (요즘 국도를 가시다가 큰집을 짓고 있으면 십중팔구는 '러브호텔'이더군요.)

   저번 편지에 안동의 힘! 말씀을 드렸지요? 안동의 힘은 곳곳에 자리잡은 고택이나 문화재가 아니라 아직은 저질 소비문화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선 논과 밭에서-아직은 러브호텔로 변하지 않은 논과 밭에서, 그리고 그 밭에서 정직하게 땀흘리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인가 봅니다. 바로 그것이 잡초의 힘이겠지요. 안동의 힘이기도 하구요.

   밤하늘에 별이 총총한 그 날이 왔으면 참 좋겠습니다. 건강 조심하시고, 늘 함께 해 주시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2002년 8월 11일

경북 안동시 토계면에서 느티나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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