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17-2023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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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유월은 오월과 칠월 사이에 숨어 지내는데 사람들은 잘 모르고 그냥 지나간다. 유월에는 보라색 칡꽃이 손톱만 하게 피고 은어들도 강물에 집을 짓는다. 허공은 하늘로 가득해서 더 올라가 구름은 치자꽃보다 희다. 물소리가 종일 심심해서 제 이름을 부르며 산을 내려오고 세상이 새 둥지인 양 오목하고 조용하니까 나는 또 빈집처럼 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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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안녕하세요?

 

정말로 유월은 오월과 칠월 사이에 숨어 지내는 거 같아서, 유월이 어떻게 지나갔나 되돌아 보면 유월이 금방 가버렸네, 하는 생각이 듭니다. 3,4,5월 개학하고 학년 초반의 여러 일정을 숨 가쁘게 소화하느라 헉헉거리다가 이제는 한숨 돌려야지 했더니, 벌써 기말고사가 코앞인 6월 마지막 주입니다.

 

처음 새학교에 적응하느라 어려움이 있었던 선생님, 새로 만난 아이들과 호흡을 맞추시느라 힘드셨던 선생님, 낯선 옆자리 동료가 어색하고 서먹서먹했던 선생님! 유월도 이제 한 주밖에 남지 않은 지금은 좀 어떠십니까? 여전히 쉽지만은 않으신가요?

 

그래도 숨어 지내며, 우리가 모르는 새 그냥 지나가는 유월 같아도 칡꽃이 피고, 은어도 집을 짓고, 흰 구름도 하늘로 올라가니 세상 만물이 슬그머니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는 순간이 또 유월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시간도 저마다의 빛깔이 있는 모양이겠지만, 어쨌든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쌓이는 어떤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함께 봄을 지냈고, 지금은 여름을 함께 맞이하고 있습니다. 참 좋은 시간이 쌓이고 있습니다.

 

자투리도 소중한 유월의 마지막 한 주, 모두 평안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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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16-2023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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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속에서 밤을 맞아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갇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주는지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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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안녕하세요?

 

지난주 출제의 지리산에서는 무사히 하산하셨습니까? 저도 겨우 기한에 맞춰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원래 출제를 다 하고 나면 혹시 문제에 문제가 있으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이 좀 드는 게 당연합니다만, 저는 이번에 출제하고 나서 조금 더 긴장감이 높은 상태입니다.

 

사실, 이번 기말고사는 이십몇 년만에 거의 처음으로 저 혼자서 온전히 출제를 한 상황이라 이런 긴장감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국어과는 보통 두 분 정도 공동 출제하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그래서 제가 낸 문제가 학생들에게 전달되기 전에 제 문제를 한 번이라도 더 보고 문제점을 검토해 주실 분들은 길 끝에 /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깊은 밤, 산속에서 비치는 먼 곳의 불빛처럼 출제하신 선생님들이 계속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게 해주시는 학년평가계선생님, 과정부장선생님, 교감선생님의 존재가 새삼 고맙고 든든하게 느껴집니다.

 

모든 선생님들께서 이번 한주도 모두 평안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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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15-2023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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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 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시라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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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의 일출, 노고단의 구름바다, 반야봉의 저녁노을, 피아골의 단풍,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 세석평전의 철쭉꽃길, 칠선계곡의 처녀림, 연하봉의 벼랑……

 

선생님께서도 한 번쯤은 저 어느 한 곳에 발을 디디신 적 있으신지요? 젊은 날, 어떤 누군가와 함께 멋모르고 오르느라 고생하신 기억도 있으시겠지요?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라니 언젠가 다시 지리산에 가시게 되는 날, 선생님께서 두고 온 오래 전 청춘의 기억을 그대로 되찾으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주는 기말고사 출제의 넓고 깊은 지리산을 오르셔야 할 때인가 봅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길게 이어진 오르막길도, 끝이 없을 것 같은 계단도, 몹시 험해 보이는 봉우리도, 아주 멀리 보이는 목적지도, 결국은 한 발 한 발 걸으면서 시간을 보내면 모두 지나가게 될 것이고 오롯이 추억만 남을 것입니다. 2023학년 1학기의 마무리를 위해서는 이 또한 지나가야 할 일입니다. 이번 한 주도 힘내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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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14-2023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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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에 피어도 꽃이고 들에 피어도 꽃이고

길가에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아무 데나 피어도 생긴 대로 피어도

이름 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봄에 피어도 꽃이고 여름에 피어도 꽃이고

몰래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아무 데나 피어도 생긴 대로 피어도

이름 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2. 산에 피어도 꽃이고 들에 피어도 꽃이고

길가에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아무 데나 피어도 생긴 대로 피어도

이름 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아무 데나 피어도 생긴 대로 피어도

이름 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아무 데나 피어도 생긴 대로 피어도

이름 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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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난주 금요일에는 개교기념식이 있었습니다.

사실, 며칠 전부터 개교기념식을 어떻게 할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기념식의 장소와 형태뿐만 아니라, 기념식에 담을 내용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봤었습니다.

개교기념일은 학교 생일인 거니까

재밌게 생일 축하 파티 형식으로 진행하자고 구상했다가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접게 되어서

자칫 밋밋한 기념식으로,

누구에게도 기억 한 조각 남지 않는 시간이 될까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금요일 오전에 방송으로 보셔서 아시겠지만,

교장선생님께서 저 노래가사를 읽으시면서

오래 기억에 남을 장면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저는 처음 들어보는 노래가사였는데,

궁금해서 찾아서 가사를 곱씹어 보고,

저 글을 읽을 때 울컥하는 마음의 움직임은

아이들에 대한 어떤 이해와 존중이 있어야 나오는 것인지 또 생각해 봅니다.

 

수요일부터 시작하는 짧은 한 주, 학교에서 모두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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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13-2023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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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번교사를 하던 날이었지

흰 종이 쓰레기 한 점

장맛비에 젖어

측백나무 울타리에 걸려 있었어

누군가 손에 쥐었다가

무심코 버렸으리라,

생각하며 허리를 굽히는데

세상에, 그게 흰 장미인 거야

이슬 같은 물기를 머금고

생글 웃고 있지 않겠어?

자세히 보니 제 몸에 가시를 박은

한 줄기 초록빛 가녀린 선이

측백나무 울타리 속을 비집고 올라와

흰장미 한 송이를 후끈 피워놓은 거야

나는 생각했지

처음에는 그 장미가

정말 흰 종이 쓰레기였을지도 모른다고

장맛비에 젖어 측백나무 울타리에 걸린

찢겨진 한 영혼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누군가 허리를 굽혀

다가가기 전까지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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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많이 오는 휴일이었습니다.

밤사이 선생님 댁에는 아무 일 없으셨는지요?

 

장미꽃 피는 5월의 끝자락에 소개하는 이 시는

주번 선생님(옛날에 학교 업무로 주번이 있었습니다.)

학교 울타리에 걸린 쓰레기를 주우러 갔다가

자세히 보니 쓰레기가 아니라 흰 장미였다는 거예요.

여기까지는 일상의 경험을 소개하는 범상한 이야기지요.

 

그런데, 시인의 마음은 역시 다른가 봅니다.

이 선생님처럼 누군가가 다가가

자세히 그 장미를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그 장미는 쓰레기,

찢겨진 한 영혼으로 남았을 거라는 말이지요.

멀리서 봤으면 대부분은 이 장미를 쓰레기로 봤을 것이니까요.

 

선생님께서 다가가서 봐 주지 않으면 흰 장미찢겨진 한 영혼으로 남는다……

시골 학교 30년 경력의 영어 선생님의 시가 범상하지 않습니다.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이 시를 보면서 저는 우리 학교 정원에 있는 장미 터널이 떠올랐습니다.

올해 이 장미 터널이라는 이름을 온전히 되찾을 수 있도록

우리 학교 행정실 선생님들에서

새 장미꽃을 사 와서 심고,

이미 있는 장미는 가지를 쳐 다듬고,

장미꽃이 제대로 활짝 필 수 있도록 받침대를 세우는 등 무척 노력을 많이 해 주셨습니다.

 

이 또한 허리 굽혀 장미꽃에 다가가서 자세히 들여다보았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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