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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튼
케이트 모튼 지음, 문희경 옮김 / 지니북스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책을 읽으면서 간혹 책 속의 이야기가 마치 영화처럼 떠오르곤 하는데요. 이번에 만난 <리버튼>도 그랬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웃고 울고 화내고 슬퍼하고 사랑하고 분노하며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의 모습과 그들의 일상이 머릿속에 영상이 되어 떠올랐습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화려한 영상이 저절로 떠오를 정도로 스릴과 서스펜스의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냐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20세기 초, 영국의 한 저택을 배경으로 거기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거라 한가하다 못해 어찌보면 지겨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니에요. 지극히 한정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사랑과 배신, 행복과 슬픔의 이야기는 저자 케이트 모튼을 통해 생명을 얻어 아름답게 그려집니다.
670여 쪽의 두툼한 책이지만 이야기는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1999년의 겨울, 아흔 여덟의 그레이스는 우슐라라는 영화감독의 편지를 받습니다. 그레이스가 하녀로 일했던 리버튼 저택에서 벌어진 일에 관한 영화를 찍는데 자문을 해달라는 거였는데요. 그 편지는 그레이스로 하여금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랫동안 잠궈두었던 지난 날의 일들을...
1924년 7월, 열 네 살의 그레이스는 리버튼의 하녀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그레이스는 매력적이고 활기찬 세 남매 데이비드와 해너, 에멀린을 만나는데요. 당시의 하녀는 주위에 있으면서도 있는 듯 없는 듯 일하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그레이스는 세 남매의 일상과 비밀 놀이를 지켜보면서 그들을 자신의 마음 속에 담게 됩니다. 그렇게 단조로우면서도 평화로운 날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듯 했지만 1차 대전이 터지고 영국이 참전을 발표하면서 리버튼은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리버튼 저택에서는 애시버리와 조나단, 데이비드가 참전하는데요. 이들이 모두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으면서 리버튼은 어두운 그늘이 잠겨버립니다. 그런 가운데 세 남매의 아버지인 프레더릭은 리버튼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 자동차 사업을 펼치고 해너는 마을의 비서양성학교에서 속기를 배우면서 직업을 가진 자유로운 현대여성을 꿈꾸는데요. 모든 것이 순탄하게 진행되질 않았습니다. 프레더릭의 사업이 난항을 거듭하고 해너는 아버지의 반대로 직업을 갖는 일이 무산되어 버립니다. 여자로서 제한된 역할에 안주할 수 없었던 해너는 은행가의 아들 테디와 결혼을 결심합니다. 그것이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리버튼에서 탈출하는 길인 동시에 정치가를 꿈꾸는 테디와 함께 자신의 이상도 펼칠 수 있을 거라고. 그것이 또 다른 불행을 불러오는 줄도 모르고 말이에요.
저자는 이 모든 이야기를 그레이스가 손자 마커스에게 남기는 형식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진 손자에게 할머니로서 자신의 지난날을 녹음테이프에 담아서 들려주는데요. 마지막 대목에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1924년 여름 리버튼의 호숫가에서 벌어진 사건의 전말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해너가 그레이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도...
이 책을 보면서 영화가 떠오른다고 했는데요. 그건 바로 <타이타닉>이었어요. 침몰한 타이타닉 호에 있을지도 모를 보물을 수색하던 이들에 의해 발견된 한 장의 그림. 그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됐지요. 그림 속에서 커다란 보석목걸이를 목에 건 여인이 바로 자신이라며 나타난 백발의 할머니, 그녀는 탐사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요. 십대 소녀였던 그녀가 마치 돈에 팔려가는 기분으로 타이타닉에 올랐다가 잭이란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국 죽음이 자신들을 갈라놓게 되던 이야기를. 전 그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마지막 대목, 할머니가 된 로즈가 손에 쥐고 있던 목걸이를 바다에 떨어뜨리자, 어느 순간 침몰하기 전으로 돌아간 타이타닉 호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잭과 로즈가 만나는 장면이었는데요.
<리버튼>도 그랬어요. 로즈가 탐사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그레이스는 손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줬지요. 로즈의 목걸이처럼 그레이스는 이야기를 통해 과거 자신의 삶과 만납니다. 그리고 평생 마음의 무거운 짐이 되었던 일들, 후회만 거듭하던 일을 이해하고 화해하는 순간을 가진 후 평화로운 순간을 맞는데요. 그 과정들을 지켜보면서 제 가슴에 묵직한 무언가가 남았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누구나 사소한 잘못이나 오해, 실수를 하기 마련인데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이 이렇게도 달라질 수 있구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갈림길로 들어서게 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답니다. 한 세기를 살아온 그레이스의 삶을 통해 우리 인생의 기나긴 여정을 실감할 수 있는 작품이었는데요. 한동안은 <리버튼>의 감동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 같은...예감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