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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의 선물 - 커피향보다 더 진한 사람의 향기를 담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이야기
히말라야 커피로드 제작진 지음 / 김영사 / 2010년 12월
평점 :
나에게 있어 커피는 ‘어른’의 상징이었다. 대입시험을 앞두고 밤잠 줄여가며 공부하는 내게 주어진 게 바로 커피 한 잔이었다. 커피를 마시면 잠을 쫓을 수 있다는 말에 눈꺼풀이 무거워질 때마다 몇 잔이고 마셨지만 커피는 잠을 이겨내지 못했다. 성인이 되어서 커피는 ‘만남’이었다. 친구와 함께, 혹은 연인과 함께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즐거운 순간, 추억들을 누릴 수 있었다. 지금의 내게 커피는 ‘여유’다. 가족이 모두 회사나 학교, 혹은 유치원으로 가고 나서 혼자 남아 집안일을 끝내고 마시는 커피 한 잔. 달콤한 믹스커피에서 쌉싸래한 블랙커피까지 커피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여유였고 즐거움이었다.
그러다 공정무역 커피를 알게 됐다. 공동육아를 하는 단체에서 벌이는 행사에 갔다가 공정무역 커피와 초콜릿 제품들을 만나게 됐다. ‘공정무역’이란 게 어떤 의미인지 내가 무심코 마시는 커피 한 잔, 초콜릿 하나에 누구의 땀과 눈물로 인해 재배되고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 그래서 공정무역 커피를 항간에선 ‘착한 커피’ ‘착한 초콜릿’으로 부르기도 한다고. 충격이었다.
습관처럼 무심코 마셨던 커피 한 잔에 담긴 사연이 궁금했다. 과연 이 커피는 어떤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키워지고 있을까. - 13쪽.
<히말라야의 선물>은 EBS의 [다큐프라임]이란 프로그램에서 ‘히말라야 커피 로드’란 제목으로 방송됐었다고 하는데 텔레비전을 안 보니 그것도 몰랐다. 어찌나 아쉬운지. 책날개를 보니 방송제작진 전원이 재능기부로 참여했다는 대목이 있다. 인상적이다. 인터넷으로라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그전에 너무나 궁금했다. 대체 어떤 내용일까.
세계의 지붕, 만년설로 뒤덮인 곳 히말라야. 그 히말라야 산맥에 자리잡은 네팔의 말레 마을.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커피가 재배되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그동안 커피 생산지라면 당연히 브라질이나 아프리카 대륙일거라 생각했는데 히말라야에서 커피가? 처음엔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커피 열매가 고지대일수록 단단하고 밀도도 높아지고 향도 더욱 풍부하다는 대목을 보고 그제야 이해가 됐다. 햇빛조차 넉넉하지 않아 ‘그늘 마을’로 통하는 말레 마을 사람들은 늘 가난에서 허덕였는데, 그런 기후조건이 커피 재배에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조건이라는 것. 말레마을 사람들에게 왜 커피가 ‘운명’이라고 하는지 알게 됐다.
책은 한마디로 해발 2,000미터에 자리한 네팔의 말레 마을과 그 곳에서 살아가는 열 한 가구의 사람들, 그들의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로 혼자 네 명의 아이를 키우는 스물다섯의 미나. 그녀의 고민은 언제나 네 명의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고 교육시키는 것이다. 말레마을에서 가장 꼭대기 집에는 훈남 형제 움나트와 수바커르, 미소가 예쁜 꺼밀라, 어머니 다니시라가 살고 있다. 움나트는 상급학교 진학도 포기한 채 커피농사에 전념했지만 폭우로 커피나무를 잃어버린 후 인도로 이주노동을 떠나버리자 그의 동생 수바커르가 커피농사를 이어간다. 또 직접 유기농 비료를 만드는 등 커피농사에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는 이쏘리, 말레 마을에 제일 처음으로 커피를 들여온 커피왕 브라더스, 자신의 나이는 물론 이름을 쓸 줄도 모르고 셈이나 시계조차 볼 줄 모르는 문맹이지만 막내 아들에게 글자를 배우는 로크나트, 돈을 벌기 위해 이주노동을 떠나 가족들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다슈람. 자급자족도 버거울만큼 힘겹고 고된 일상을 이어가는 그들의 이야기는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들의 얼굴에 가득한 웃음에 왠지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놀라운 것은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빨간 커피 열매가 총총 열려있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은 커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는 거였다. 커피를 마시는 음료라는 것도 만드는 법도 몰랐다. 프로그램 제작진들에 의해 커피를 처음으로 마시게 된 그들은 밝게 미소 지었다. 자신들이 만든 커피를 모두 공평하게 마시며 행복한 얼굴을 했다.
우리는 이제 더 알고 싶습니다. 우리가 정성스레 길러낸 이 커피 열매가 어떤 이들의 입 안을, 어떤 이들의 가슴을 향기롭게 해줄지 우리는 알고 싶습니다. 그들을 위해 우리는 오늘도 우리만의 아름다운 커피를 만들 테니까요.
히말라야 산맥에서도 깊숙한 곳에 자리한 그늘 마을, 말레마을에 희망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공정무역 단체인 ‘아름다운 커피’에서 말레마을에 커피묘목 3천 그루를 지원하겠다고 한 것이다. 다만 무농약, 유기농으로 커피를 재배한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그들에겐 희망이고 기적의 빛이 아니었을까.
이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통큰 커피’가 화제가 됐다. 밥 한 끼 가격에 맞먹는 커피 값의 원가는 얼마일지 원두 값을 들먹이며 계산해놓은 기사를 봤다. 처음엔 너무나 놀라운 기사에 눈이 번쩍 띄었지만 금세 마음이 불편해졌다. 한 잔의 커피가 내 앞에 놓이기까지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게 됐으니까. 일상의 여유이자 낙이었던 지인과의 ‘모닝커피 한 잔’을 할 때도 난 아마 그들을 떠올릴 것이다. 아스레와 말레! 착한 사람들의 착한 커피가 오래도록 이어질 수 있도록 현명한 선택을 하자.